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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프로그램

연구실 20대를 대상으로 하는 강도 높은 프로그램

-역사, 철학, 미학, 문학과 관련한 커리를 짜고 세미나+강좌가 진행

-연구실 일상과 결합은 필수

-자신의 두발로 공부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것.

-강좌나 책출판과 결부시켜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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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신편에 대하여

고사신편을 이해하는 키워드

 

첫째 범속 혹은 일상

신화를 범속의 영역으로 끌어오다

 

둘째 주체화의 새로운 형식들.

고전에서 끌어낸 새로운 주체들.

 

>>>혁명과 존재의 변신. 루쉰이 구성해낸 새로운 주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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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진중권과 김규항의 논쟁을 보다

나는 이런 문제에 꽤나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무능력하다는 말이 맞다.

진보신당의 방향, 가령 정책의 향방이라든가

심상정이나 노회찬의 현실 대응방식이라든가에 꽤나 무지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닥 관심이 많지 않다.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떻게 자율적인 공간과 삶을 만들어갈 것인가? 그리고 이 자율성을 어떻게 확산해 나갈 수 있을까가 고민이다.

정치적 자율성은 삶을 위한 기술일 뿐이라고도 생각한다. 삶과 정치는 별개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삶에 더 무게 중심이 놓인다. 어떤 거창한 변화도 삶과 유리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어떻 주체로 구성될 것인가의 문제다. 나를 변화의 공간 안에 정박하게 하는 것, 그리고 다시 새로운 바다를 향해 나가는게 일차적인 관심이다. 우리의 삶에 편재되어 있는 미시적 권력에 민감해지는 것이라고 할까? 이때 권력은 우리를 무명의 공간에 머무르게 하는 조건이다. 나를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하게 하는 삶의 조건들,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며 친구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이 나의 일차적인 관심이다.  

내 몸 밖에 있는 대의에는 시선이 쏠리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해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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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러브

공정한 사랑?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시청역, 그러다가 다시 숙대앞으로,

왜 그랬을까? 그 친구에게 회를 사주고 싶었다. 그런데 시청 근처는 뭐가 있는지 잘 모르고

내가 익숙한 공간에서 만나서 음식점에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친구 왈. "형하고 통화할 때 뭔가 답답했어. 그냥 만나서 먹으면 그만인데

굳이 숙대 근처까지 올 필요가 있는가 해서. 숙대로 가는 건 상관없는데 뭐라고 할까.

형이 뭔가 벽갇은 것을 만들어 놓고 판단한다고 할까."

 

만남에 조건을 건다.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판단할 때도.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등등.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해야만 하는 것 때문에 늘 비틀 거린다.

 

페어러브는

연애 영화다. 50대와 20대의 사랑이 아니라

그냥 연애 영화다.

만남이 있고, 교감이 있다.

그리고 소통하기 위한 삐그덕거림이 있다.

그것도 무겁지 않게.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전제들을 내려 놓는 것.

~때문에를 말하지 않는 것,

내 한계를 넘는 것은 아픔과 기쁨을 함께 동반한다고 말한다.

내가 몸을 낮춘만큼, 발을 한 발 앞으로 내 미는 만큼

우리는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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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1장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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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폭력

다른 길을 가게 된다는 것.

나란히 걷던 사람들이 점점 옆으로 멀어져

다른 길로 가는 경우가 요즘 부쩍 많아졌다.

그것은 아주 소소한 일에서도 감지된다.

전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을

이제는 말로 모두 이야기해줘야 할 때 그렇다.

 

물론 우리가 언제 각자의 길을 가지 않은 적이 있던가?

그러나 옆에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로 걸어가고 있다.

지금은 조금 옆으로 난 길이지만

어쩌면 갈 수록 멀어져 버릴 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높인 길이 어디로 향해갈까?

알 수 없다.

 

그,런데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말로야 이해한다고 하지만

몸에 새겨진 기억이 이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와 유난히 다툼이 많아진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친구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변한 관게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자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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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놀 5권-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맞닥트리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판다하는 것이 사유하는 것인가? 우리는 접하는 사건에 대해 기계적으로 판단하고 사유한다. 우리는 주어진 방식에 따라 평가하고 생각한다. 생각에도 습관이 있다. 우리가 생각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기계적 반복이다. 일종의 업의 지속이다. 니체가 맞닥트린 거대한 침묵도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애써 회피하는 공간. 우리는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한다. 왜냐? 보지 않고 듣지 않은 것이 편하니까. 사유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들(習)을 깨트리고 한 발 나가는 것, 미지의 지대로 몸을 쑥 밀어 넣는 것이다.


니체는 이 경악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 점점 더 조용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가슴은 부푼다. 그것은 새로운 진리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내 가슴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입이 이 아름다움 속으로 무엇인가를 외칠 때 내 가슴은 함께 비웃고 스스로 침묵의 달콤한 악의를 즐긴다. 말하는 것뿐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 내게는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나는 모든 말의 배후에서 오류와 상상, 광기가 웃는 것을 듣지 않는가? ……오, 바다여! 오, 저녁이여! 그대들은 나쁜 교사들이다! 그대들은 인간에게 인간이기를 그칠 것을 가르친다. 인간이 그 자신을 그대들에게 바쳐야 하는가? 인간이, 그대들 자신이 지금 그런 것처럼 창백하고 빛을 발하며 말이 없고 거대하며 자기 자신 위에서 쉬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 숭고해져야 하는가?”


인간의 말과 사유가 끝나는 지점. 그 공간은 조용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유할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지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발 더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진화’란 말이 가능하다면 이것이 인간의 진화다. 그 순간, 거대한 침묵에 직면하고, 그 침묵을 맞닥트려 그 것에 대결하고 벗어나려는 찰라, 우리는 ‘오류와 상상, 광기’가 웃는 것들 듣게 되고 ‘경악’하게 된다. 지나온 나를 비웃는 그 소리에. 벗어버린 허물의 형체에 대해. 이때의 정서. 니체는 이 정서를 ‘숭고’라는 감정과는 구별한다. 외부에 대한 경외감은 존재하지만 그 경외감 때문에 우리는 사유를 중단해 버린다. 가령 거대한 자연, 악의에 찬 자연을 숭고한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나와 자연이 연결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숭고해질 필요는 없다. 이 감정을 냉정하고 메마르게 바라봐야 한다.


이 도약의 순간은 선택의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자서 무소의 뿔처럼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선택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만들어온 ‘도덕’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 자신을 ‘너무 선하고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기에 이 세상에 머물러야 할 것처럼 느끼는 존재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구원할 수 없는 ‘최후의 인간’일지 모른다. 삶을 거부하는 이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쇼펜하우어는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다. 그는 칸트보다도 인간들의 증오, 욕망, 허영심, 불신을 그 사유 안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발전’이 결여되어 있다. 그의 사상은 어떠한 ‘역사’도 갖지 않는다. 즉 이 최후의 인간은 역사의 종말이다. 그는 자신의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그는 진화의 사다리를 끊어버렸다. 아니, 애써 그 사다리를 회색으로 물들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비약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비약을 ‘인생 한방’과 구별하자. 우리는 니체가 얼마나 성실한 인간인지를 알고 있다. 그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달라붙어 그것들을 철저하게 회의한 바 있다. 그는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거나 지나온 바만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유 역시 마찬가지다.


“[병에 걸린 몸을]가능한 한 깊숙이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약을 극소량으로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 어떤 위대한 일이 단번에 성취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길들이 있는 도덕의 상태를 성급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가치 평가와 바꾸지 않도록 주의하려 한다.”


“모든 치료는 서서히 그리고 미세하게 행해진다. 자신의 여혼을 치유하려는 사람조차 가장 사소한 습관드를 고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열 번씩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악의에 가득 찬 차가운 말을 퍼부으면서도 거의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특히 몇 년 후에 그는 자신이 매일 열 번 주위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도록 그를 강제하는 습관의 법칙 하나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생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주위 사람들을 매일 열 번씩 기분 좋게 만드는 습관을 들일 수도 있다.”


오히려 ‘비약’은 초월적인 것과 쉽게 혼동될 수 있다. 뭔가 다른 것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른 것에 대한 지나친 열망은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고 이 오지 않음인, 내 몸에 강신하지 않음이 사람을 초조하고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 함정을 조심하자. 비약의 순간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비약은 내가 닦아온 일상적 수행의 결과물이지 신이 내리는 은총이 아니다. 인생 한 방 노리다 우리 인생이 한 방에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소박한 사물들을 대변하면서 시작하자.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것들, 가령 자연의 법칙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대상을 어떤 법칙에 따라 설명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습속일 뿐이다. 습속을 벗어나는 것은 현재에서 낯선 것을 발명해내는 것이다. 니체는 과학의 질서 정연한 언어가 아니라 ‘야생적이고 추한’부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우리는 코와 눈을 예민하게 해두자. 사실 어떤 것을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해서 그것을 곧바로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습속의 힘은 이렇게 강하다.


삶과 행위의 법칙을 새롭게 건설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생리학, 의학, 사회학 그리고 고독학을 새롭게 익혀야 한다. 우리의 신체의 반응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우리의 신체가 어떻게 병들 수 있으며 또 치유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우리를 둘러싼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맺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지, 고독을 견뎌내야 하는지, 파멸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인식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자기자신에게 재능을 부여하게 된다.” 문제는 배움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극복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며 단지 선한 의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시기심, 혹은 낯선 것을 느낄 때 곧 자신의 가시를 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우려는 자세 대신 방어 자세를 취하게 하는 자존심이 그러한 배움에 저항한다.”(540절)


예술가뿐이겠는가? 우리의 자기 보존의 욕구는 낯선 것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면 이에 저항한다. 이런 태도는 그나마 낫다. 아무 것도, 왜 문제인지도 인식하지 못할 때도 비일비재하다. 습은 이렇게 무섭다. 우리는 위대한 학습자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화석화된다. 아무리 우리가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에 집착하고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의 모든 공덕은 한 줌의 모래처럼 사라져 버린다. 나는 배우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쉰 식으로 말하면 사유하지 않는 것은 늙은 것이다. 스스로 늙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늙은 사람은 없다. 스스로 늙었다고 자인하면서 안락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사상의 타락이다. 니체는 붇는다. ‘사유할 것이냐 아니면 타락할 것이냐.’ 둘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버전으로 말하면 ‘사유할 것이나 윤회할 것이냐’.

사실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는 것, 변화의 바다에 몸을 던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신 속에 최상의 것을 담은 것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오히려 이것이 내 몸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절실한 문제다. 이 절실한 문제, 미지의 것, 신비한 것 앞에서 우리는 일종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낯선 것에 대한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낯선 설레임을 느낀다. 그것을 공포의 감정으로 치환하지 말자. 공포는 미지의 만남을 가로 막곤 한다. 우리의 여행이 끝나는 지점에는 항상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의 무수한 친구들은 지나쳐 갔다. 우리는 그 공포 때문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 공포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지나온 것은 문제가 아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자.

������아침놀������의 니체는 ‘환멸’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 이것은 우리를 환멸에 직면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다. 인류의 모든 열정은 이러한 무를 향한 열정이다. 물론 무를 직면하는 순간 여행을 끝마치는 위험이 있지만.

그렇지만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의 공간 속으로 진입하게 위해 ‘결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멸한다.


“방황하고 실험할 수 있는 용기와 어떤 사실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다시 획득했다. 모든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개인과 세대는 이전 시대에는 광기로,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상대로 한 놀이로 나타났을 위대한 과제를 주시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험해도 된다! 가장 큰 희생이 아직 인식에 바쳐지지 않았다. 아니 예전에는 지금 우리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과 같은 사상을 단지 예감하는 것만으로도 신성 모독이자 구원의 영원한 포기였을 것이다.”


영원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사멸하는 영혼이다. 사멸하기에 우리는 다시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용기의 원천이다. 니체에 의하면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성에 대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나는 영혼하고 싶다. 지금 영혼의 무대로 오르기 위해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고.’ 이 지속의 사고 속에서 우리는 해체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니체는 사멸에 대한 사유 속에서 다시 한 번 더 몸을 던진다. 이것은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허물을 벗지 않으면 뱀이 파멸하듯 우리 역시 파멸할 것이다. 정확하게는 영원한 반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사유는 사유이기를 그친다. 허물을 벗자. 그리고 이런 ‘무’의 축제를 즐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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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4권- 권력의지의 등장.

 

힘, 권력에 대한 사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나폴레옹을 고대적 인간형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충동을 끝까지 사유했으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에 대해서 냉정하면서도 자랑스럽게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힘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결점을 넘어서, 자신의 약점에 스스로 복수할 수 있었다. 힘을 인식하는 사람은 삶의 입법자가 될 수 있다. 감정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천둥과 번개를 활용해 이 감정에 복수하고 활용한다. 자신의 힘을 조절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여하며 지배자로서의 자신을 즐긴다.


이러한 힘은 사실 인류 진화의 동력이다. 인간의 삶은 힘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에게 건강, 음식, 주택과 같은 것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는 불행하고 불만스러울 것이다. 마력, 삶을 잡아끄는 마력, 힘의 마력이 채워지지 않는 한 그는 늘 공허하다. 니체에게 ‘힘’이 인간 욕망을 규정하는 키포인트다. 인간의 욕망은 그 사람이 갖고 힘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떤 욕망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인가가 그 사람의 어떤 힘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힘의 감정을 통해서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인간에 정통한 자의 오락은 무엇인가?


“그가 나와 이런저런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품위 있고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내가 그에게 우월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가 지금 내게 호의를 갖고 있는데, 내가 그를 실망시키게 되면 나는 그것을 보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는 내가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 때문에 자신이 비천해졌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차갑고 분명하지 않게 행동하며 그 자신에 대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자 함으로써 나에 대한 우월을 확보하고자 한다.”


두 부류의 사람. 한 사람은 순진하다. 그러나 순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판단 능력이 없음. 혹은 지혜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나? 그는 사유하지 않기에 쉽게 다른 사람의 욕망의 포로가 된다. 사유하는 자, 지혜로운 자, 그리고 무수한 가면을 자유롭게 쓰는 자는 관계의 게임을 즐긴다. 그에게 타자와의 만남은 오락이다. 그는 이 오락을 즐기고 유쾌해진다.


그렇다면 이 순진한 자는 어떻게 지혜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니체는 일단 절대 의사 없이 살아갈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병자가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돌볼 경우에 그는 저 지시가 목표로하는 건강을 의사의 권유에 따라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주시하고 훨씬 더 주의하며 훨씬 더 많은 것을 자신에게 명령하고 금”하기 때문이다. 의사의 처방은 사람을 더 경솔하게 만든다.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이런 사람만이 힘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즉 힘의 감정을 소유하고 싶은 자는 “모든 수단을 호소하며 그 감정을 길러줄 수 있는 어떤 것도 경멸하지 않는다.” 물론 힘의 감정을 획득하는 순간 그 자신이 매우 까다롭게 되어 이런 것에 만족하지 않을 테지만.


사실 힘의 감정은 행복감의 표현이다. 힘의 감정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상에 대해서든 상상의 존재에 대해서든 이러한 힘의 감정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니체에 의하면 힘의 표현은 “선물을 주는 것, 조롱하는 것, 파괴하는 것”이다. 힘을 의식하는 자는 자신의 힘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대의 사상에 반대될 수 있는 그 어떤 생각이든 억누르지 말고 그대 자신에게 침묵하지 말라! 이것을 맹세하라! 그것은 사유의 첫 번째 정직성에 속한다. 그대는 매일 그대 자신에 대한 투쟁을 감행해야 한다. 승리와 진지를 정복하는 것은 더 이상 그대의 일이 아니다. 오리혀 진리의 일이다. 그러나 그대의 패배 역시 더 이상 그대의 일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투쟁, 사유를 억제하지 않는 것. 사냥은 포획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우리에게 투쟁에서 승리와 패배는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다. 계속하는 자는 승패에 떠나 있는 자이다. 단지 피곤하고 힘들 때는 그저 많이 자면 될 뿐이다. 그대로의 의미이든 비유적인 의미이든. 그러면 다시 아침을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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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중에서

"아직 어떠한 사상가도 사회와 개인의 건강을, 그것이 얼만큼 많은 기생동물들을 견딜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하려는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쟁기의 날을 저 관대하고 부드러운 연설 속에서 담긴 정신으로 이끌었던 국가 건립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건강한가?  흔히 우리는 우리 신체에 다른 존재들, 가령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없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신체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들. 수 많은 기생동물이 우리 신체들 채우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신체의 균형이 무너진 것, 기생동물들과 우리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들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으로 표현되는 것은 건강함이 무너진 것이다.  건강은 어떠한 상태가 아니라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안의 존재들을 얼마나 잘 포용할 수 있는지 말이다.

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란? 다른 것들, 심지어 기생하는 존재들이 그 공간에서 얼마나 즐겁게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상류 사회 사람 중 4분의 3이 합법적인 사기에 몰두하고 주식 거래와 투기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 때, 그들을 부추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그들이 실제로 궁핍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심하게 형편이 나쁘지 않으며 아마 음식에 대한 걱정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추키는 것은 돈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초조함과 축적된 돈에 대한 끔찍한 욕망과 애정이 밤이든 낮이든 그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조감과 애정 속에서의 힘에 대한 저 열광적인 욕망이 다시 나타난다. 힘에 대한 이러한 열광적인 욕망은 옛날에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불붙었고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자신을 가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떳떳한 양심으로 비인간적인 일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힘에 대한 욕망. 초조함과 집착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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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부여잡은 투창

 

삶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

니체는 <아침놀> 3권에서 투키디데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인간에 대한 사색가인 투키디데스에게서

가장 편견 없는 세계 인식의 문화가 화려하게 개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시대의 건축은 아주 적은 양으로 숭고한 것을 표현할 수 있으며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반면 우리는 삶을 아주 복잡하고 미로처럼 만들어 버린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 단순한 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니체의 말처럼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사실 삶은 복잡하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삶이 복잡하다고해서 판단과 사유를 미궁 속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판단은 명료하고 행위는 간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잘못된 관념 속에서, 적합하지 않은 식으로 문제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혼란스러울 때가 우리가 문제를 제대로 던지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할 때이다. 즉 이 순간이 문제를 새롭게 고안해야할 순간이다.

 

그런데 삶의 고안해야 할 순간에 우리는 매일 사용되어 닳아간다.

우리들에게는 인격도, 재능도, 근면함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에게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방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노동’하는 자로서 우리는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도록 교육받고 있다.

니체는 노동에 대한 찬민 속에서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삶을 방기한다. 우리는 고민하고 사유하고 살아가는 대신에,

답을 암기하고,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 공간에 들러붙기 위해서 우리의 욕망, 삶에 대한 고민을 거세한다. 즉 우리는 자신을 거세하는 방식으로 노동한다.

그 경우 노동은 ‘최고의 경찰’이 된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우리는 ‘삶’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에서 안전한 공간에서 좋은 행위란 타인에 대한 ‘동정’으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는 질문.

‘왜 정해진 직장도, 가족도, 집도 절도 없이 살아가니?’

그러나 이 동정의 말 속에서 우리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볼 수 있다.

‘안전’에 위협적인 것을 제거하기.

이때의 “공공의 안전과 사회의 안정감을 목표로 하는 행위들만 ‘선한’ 행위로 평가된다.”

라이히 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시선은 타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이자 억압의 욕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유는 ‘수요와 공급’ 이라는 평가기준과 결부되어 있다.

즉 우리는 화폐가 순환하는 규칙에 맞도록 삶을 조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노동하는 사람’ 속에서 하나의 ‘위험’을 발견한다.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가공할 일이다.

바로 ‘노동자’가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이다! ‘위험한 개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후에는 위험 중의 위험, 즉 개인이 있다.”

자본이나 권력에 기가 질리거나 압도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숨이 막히지 않은 삶의 가능성.

자기 본위의 삶. 예외적인 시간과 불복종의 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우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삶의 양식들을 넘어 우리 자신을 고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고양은 어디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니체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들이 지금 이 ‘비루한 일상’에 느끼는 소소한 불만족에. 바로 지금 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하고 반관습적인 행위’들. 그러나 사실  ‘소소’한 행위가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習을 깨트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집합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니체는 권력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저항한다. 그가 잠언처럼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것도 구체적인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니체에게 삶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 것, 삶의 전환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모두 망상이 아닐까. 그리고 니체가 부여잡은 투창은 이런 망상을 향해 던져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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