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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사진글, 현문서가, 2004
인간의 진실, 현실, 그리고 사진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에 대한 짧은 서평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언어로 되살리며 독일 시인인 파울 첼란은 <진실로 말하는 자는/어둠을 본다>(『죽음의 푸가』 중)고 했다. 인간 카니발리즘의 정점에 선 시인의 감수성은 고통을 통해 지옥이 도래했음을 단박에 깨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의 집정관들이 현실을 냉혹하게 집행하고, 또 다른 방관자들이 피해자들로부터 등을 돌릴 때, 예술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모양으로 그 당사자들을 불러 세우는 법이다. 현실은, 따라서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고통과 가난과 죽음의 현실일 때는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누구보다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란한 자본의 거리에서, 또는 시시각각의 정보들 속에서, 바쁘게 뛰어가는 일상 속에서 말이다. 우리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데 너무 익숙하다.
최민식은 그런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주의에 직설적으로 말을 건다. 아니 다가와 단숨에 목을 잡아챈다. 이럴 경우 완곡하게 에둘러 충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안다. 사진이 곧 그렇기 때문이다. <사진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거짓’은 하루에도 수 천 수 만 장이 소비되는 광고 전단지 속의 예쁜 배우들의 몸매와 얼굴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하긴, 사진 자체가 리얼리티는 아니다. 그러나, 사진은 리얼리티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리얼리티는 어디 있을까? 최민식은 그것이 주로 얼굴에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환하게 웃는 어린애들로부터 일에 찌든 노동자들의 피로한 얼굴과 세월의 강이 흐르는 노인들의 주름살에 이르기까지, 얼굴은 인간적 개별성이 첨예하게 표현되는 리얼리티의 장소다. 그리고, 최민식은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표정의 사건들 중에서 가장 환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포착한다. <빛과 인물과 풍경이 하나가 되는> 그 지점. 최민식이 사진을 통해 기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따라서,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흔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그가 올곶게 추구한 것은 삶을 치장하는 기술이 절대 아닐 것이다. 삶의 본성은 ‘벌거벗은 것’이다. 완전한 ‘날것’으로서의 삶, 그 순간이 바로 삶의 절정이며 사진의 리얼리즘이 담아야할 최고의 순간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난한 사람들, 불구인 자들, 고아와 노숙자들. 최민식의 사진이 놀라운 것은 이들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가? 철학자 레비나스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타자의 시선이며, 우리는 그 시선을 똑바로 대할 때 신성하고 초월적인 윤리적 경험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참한 자들의 시선을 피해간다. 그들이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짐짓 경원시한다. 위선인 것이다. 사진은 위선을 참아낼 수 없다. 그들, 민중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의 시선은 최민식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여기에 최민식의 현실인식과 사진에 대한 역사적 책무라는 것이 놓인다. 이쁘고, 보기 좋은 것을 담아내는 사진은 사진의 본령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참 무던히도 흑백의 이미지만을 찍는다. 색깔이 아닌 명암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민중들의 의식을 표정으로 포착하는 데 긴요하다. 만약, 사진이 이 본래의 책무를 망각한다면 사진은 죽는다. 아무리 색감이 뛰어나고, 보기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은 이미지만의 잔치일 뿐이다. 역사의식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사려가 담기지 않은 것은 최민식에게 ‘상업사진’일 뿐이다. 그리고, 화려한 기교와 초현실적인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류에 따라 작가의식에 옷을 바꿔 입히는 짓을 마뜩찮아 하는 이 혈기왕성한 고령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기교도 색감도 아니고, 그 철학의 깊이일 뿐일 것이다.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에 실린 80여장의 사진과 그의 글들은 이와 같은 철학으로 보여지고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지 않고, 다만 ‘도발’하는 철학. 우리는 그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나 책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예술의 진정한 급진성(radicality)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파괴하지 않고 파괴하는 법을 최민식은 알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궁륭을 날아다니는 예술은 숭고하지만, 삶의 모순에 도발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창을 헤매는 예술은 어둠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도발’한다. 그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민식 사진의 고귀한 ‘권능’이다. - NomadIa
2005. 2.20 인터넷 신문
<대자보>에 게재됨
Vol.041225b |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사람 담은 최민식의 사진 이야기 |
△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최민식 글·사진 현문서가 펴냄·1만1000원 |
||
△ 1975년 부산. 최민식씨의 사진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가난한 한국사회의 서민들이다. |
왼쪽 팔이 없다. 왼쪽 다리도 없다. 그러나 힘차게 뛰고 있다. 오른손에는 팔기 위한 몇부의 신문이 들려있다. 해맑은 눈을 가진 젊은 청년이다.사진을 보고 있으면 “신문 사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이 깊은 감동으로 세밑 인터넷을 따뜻하게 했다.
네이버와 야후!코리아 등 주요 포털 사이트와 각종 카페 및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이 흑백사진을 접한 많은 네티즌들은 절망 속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는 생의 의지를 발견했다. 수많은 리플에는 감동과 반성,박수와 다짐의 마음들이 담겨 있었다.
이 사진을 찍은 이는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76)씨. 평생 신산(辛酸)한 삶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온 우리시대의 거장 리얼리즘 사진 작가다. 최씨는 지난해 12월 24일 사진과 글을 모은 사진에세이집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현민서가)을 새롭게 내놨다. 지난 96년판에서 80여점의 사진을 바꾸고 10여편의 글을 더한 책이다.
황해도 연안 출생인 최씨는 50년대 중반 일본에서 독학으로 사진기술을 습득했다. 부산에서 활동중인 그와 전화를 통해 새해 맞이 인터뷰를 했다.
-신문 파는 청년의 사진이 네티즌들을 감통케 했습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가요?
“1985년 부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당시 한 잡지에 실렸을 때도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어요. 사진속의 청년의 지금 소식은 잘 모르겠습니다. 2년간 신문을 판 돈을 모아 모친과 조그만 구멍가게를 냈다는 애기는 들었는데... 한 팔과 한 다리가 없는데도 신문을 팔 때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빨리 뛰어다니곤 하던 그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원론적인 질문입니다만 오랜 동안 사진을 찍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 저 스스로도 지난 50년 동안 가난 속에서 사진을 찍어 왔어요. 지금도 대학 강단에서 강의하는 것이 사진을 찍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 사진 저널리즘에 대해 한마디 하신다면.
“아직도 한국에서는 ‘장사가 안 된다’는 이유로 사진 저널리즘 매체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가식적으로 미화된 사진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사진이 많이 만들어져야죠.”
최씨는 지금도 일주일에 3~4번은 촬영을 나가고 대학 강의도 열성적인 ‘철인’이다.
“50년간 오직 걸어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왔어요. 나는 인터넷을 모릅니다. 편한 것도 모릅니다. 다만 진실한 사진 한 장은 몸으로 체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고생을 모르고 자신의 꿈을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 아닌가요.”
최씨는 요 몇해 인도 네팔 등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한다.
“그 곳의 사람들은 가난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요. 마음만은 풍족한 이들입니다.”
노작가는 내년 여름께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새 사진집 ‘우먼’을 내놓을 예정이다.
[사진 맨 위부터]
1.1985년 서울.
2.사진작가 최민식씨
3. 이번에 출간된 책<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
4.1950년대 부산 5.1957년 서울.
사진은 모두 최민식씨 홈페이지 '휴먼 포토'(http://human-photo.com)에서.]
(이은우 기자 zo@mydaily.co.kr)
사진을 보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일에 속한다. 말과 사진은 똑같이 대상을 표현하고 똑같이 분위기를 갖지만,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은 예외없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써야 한 말의 숫자는 갑자기 늘어난다. 최민식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과 지금도 겪고 있는 일, 그리고 그것이 크고 깊어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최민식은 1957년에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 단위의 수난과 상처를 더듬어 볼 때 나는 자꾸 좀더 먼 과거, 한 세기 전으로 올라갈 필요를 느끼고는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영상으로 기록된 재난들이다. 물론 우리 민족이 피사체가 되어 처음으로 사진이 앞에 섰던 해는 1871년이다. 정확히 말해 백열여섯 해 전에 있었던 일로서, 미국의 극동함대가 강화(江華) 해협을 침입한 그 해의 사건을 우리는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배웠다. 살색이 흰 저들은 총칼로 무장을 한 병사와 철제 대포에다 옛날 사람들이 처음 보는 또 한가지를 전함에 싣고 왔었다. 그것은 사진기였다. 우리 땅에서는. 무명에 솜을 넣어 지은 바지와 저고리를 방탄용 군복으로 입고 눈 파란 군대와 목숨 건 싸움을 하다 포로로 잡혔던 강화 수비대의 병사들이 처음 보는 기계 앞에 참을성 있게 서서 사진 찍힌 첫 번째 조선인이 되었다. 그 전쟁에서 조선군은 삼백오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내침군 가운데서 죽은 자는 단 세 명밖에 안 되었다.
사진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첫 모습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그때 역사를 보면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이른바 백인 문명국들은 세계 도처로 나가 참 많은 것을 저희 본국으로 끌어갔다. 군대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역시 일정 기간 훈련을 받은 선교사들도 이교도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으로 가 큰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군대와 경찰처럼 총기나 진압 무기로 무엇을 파괴하든가 억압하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을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런데, 현지 주민들이 바꾼 것은 신(神)뿐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성경과 십자가에다 문물이라는 것을 끼어 갖고 황색인, 흑색인의 나라로 파견되어 가 개종자들이 그들 자신의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종의 문화적 세례까지 아울러 주었던 것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 군대와 선교사의 도착 시기에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어디서나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간 것은 백인 자본가 단체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그대로, 식민지와 식민지 영유국 사이에는 각기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나 경제학 관계의 책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영토로부터 달콤한 것들을 끌어가게 된 이 시기의 일을 표현한 매우 간략한 문장 하나, 즉 "세계는 비로소 분할을 끝냈다"를 대하게 된다. 이 제국주의 체제가 단단한 자리를 굳힌 착취의 전시기를 통해 큰 발전을 보인 것 중의 하나가 사진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놀라운 힘을 갖고 세계 곳곳의 일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군대가 찍었든, 아니면 선교사나 다국적 기업이 찍었든, 또는 세계 재분할기에 등장해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힌 일본이 찍었든, 그들이 남겨 놓은 사진 속의 우리 모습은 모두 1871년의 그것을 닮았다.
나는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심한 통증을 느낀다. "보라." 사진이 하는 말이다. "이때만 해도 너희는 한 민족으로 서 있었다." 그 끔찍한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단일 민족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와 전통이 다른 종족, 부족까지 또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유색의 소수 민족으로 숱한 고통을 당해 온 다른 땅 구성원들이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며 서둘러 민족을 형성해 새 국민국가로 설 때, 우리는 그들과 반대되는 길을 걸었다.
우리는 부서지고, 깨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에서 또 고통받는 불쌍한 '반쪽'으로 서서 불쌍한 또 다른 반쪽을 정말 눈물나게도 서로 뿔 달린 마귀로 몰고, 그것도 모자라 남이 주는 총으로 서로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쏘고, 결국은 반신불수에 반쪽은 사람이고 나머지 반쪽은 마귀인 흉측한 괴물로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지금 세계에 이런 민족은 우리말고 또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최민식을 만나게 된다. 유럽인이 만든 작은 사진기에 미국 이스트만 코닥사의 흑백 필름을 넣어 들고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조국을 찍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작가의 모습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사진기라는 도구를 들어 눈에 댔을 때, 그의 망막을 아프게 찌른 것은 상처 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이었다. 민족주의는 박살이 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통과 억압이 아주 넓게 퍼져 있는 땅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희생자들이 직면한 악몽과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재난 겹쳐지는 땅의 제2세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강의 첫 모습을 기억하는 제 1세대는 장기간 계속된 식민 치하에서도 내내 언어에만 매달려 있었다. 누구나 보기만 하면 알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서의 사진을 그들을 잘 몰랐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이 누구보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이고, 또 누구보다 사회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쳐진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떠올릴 그러한 미의 추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거리 모퉁이에서 호옥 숨 한 번 쉬고 국수발을 빨아올리는 어린 여자아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중 삼중 뼈 휘는 노동을 해야 하는 여인, 조국의 번영을 말하는 선거 벽보 밑에서 이제 막 잠이 든 가난뱅이,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당장 먹을 것도 없어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 그대로 죽고 싶을 뿐인 가장, 하루 종일 일 나간 부모를 기다리다 해질녘에 기어코 슬픔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자선을 바라는 눈 먼 걸인, 거리에 던져진 아버지와 아들, 더러운 집, 물 안 나오는 동네, 부족한 일자리, 조악한 식사, 굵은 주름이 이마를 덮은 지친 노동자―이러한 사진을 보는 것은 우리가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악몽을 다시 꾸는 것과 같다.
최민식은 바로 이 악몽과 같은 우리 땅 현실과 맞서며 사진가가 된 사람이다. 물론 이것이 아주 특수한 경우는 아니다. 개인이 자기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러 억압과 그것에 대한 자기 몫의 책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여 말 그대로 '고집 불통의' 작업을 계속한 작가들의 예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파푸아뉴기니아인의 표현을 빌면, 장기간에 걸친 압제와 고통이 이 예술가들을 태어나게 했다. 어느 곳에서나 조국의 현실을 깨닫고 민족을 재발견하는 지점이 그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이 주는 고통을 언제까지 가만히 앉아 받을 생각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들은 대륙과 대양, 또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거기다 종교·언어·피부·전통 등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요소를 잔뜩 갖고 있었지만 어디서나 민중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고 그 현실에 저항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따라서 그들의 작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바로 알도록 하는 수단이 되었는데, 우리 땅에서는 최민식의 외롭게 이 작업을 해 왔다. 불같은 아프리카의 한 흑인이 "모두 똑같은 몸짓으로 신음하며 달라붙은 뱃가죽으로 빈곤의 지도를 그렸다"고 표현한 이른바 어두운 제 3세계쪽 예술가나 그들에 관한 자료를 구해 보기 어려웠던 때에, 빛이 가득한 세계만 찍기를 바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자와 사진은 무엇보다도 예술적이기 때문에 먼저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미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이 어려운 작업을, 그것도 삼십 년 동안이나 계속해 온 유일한 작가로 나는 최민식을 이해해 왔다.
문학·미술·음악·연극 등의 분야와는 달리 민족적 현실 인식 또는 민중적 내용-형식과 연결지어 말할 작업이나 운동이 우리 사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쓰는 내가 사진에 관심을 가지며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이지만, 내가 취재를 나가기 위해 사진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이는 우리가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도덕적인 것들을 끌어내기 위해 사진의 힘을 빌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표현을 달리했을 뿐이지, 없는 도덕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사진이라는 지나친 믿음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진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시대의 텔레비전이나 신문, 그리고 대중 인쇄매체들을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사진들을 찍어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리고는 했다. 정부는 어디 있나? 우리 정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이 물음은 해방된 조국,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학교에서 점령국의 언어가 아닌 훌륭한 우리 국어로 조국의 교사에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야 나는 사진이 갖는 기능 가운데서 우리가 힘 빌어야 할 한 가지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기본 과제 해결에 그렇게 열등할 수 없는 민족인 우리가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 것, 학대하는 것, 막 두드려 버리는 것, 그리고 지난 시절의 불행이 떠올라 몸서리치며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즉 재소유시키는 기능이었다. 이 문맥에서 볼 때, 장기간에 걸친 최민식의 작업을 쉽사리 뛰어넘을 것은 없다. 그의 사진은 보다 '예술적'인 작업을 꿈꾸는 사람, 또는 사진을 회화처럼 '미학적으로 소비'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사진의 사회성을 높이 사려는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고 또 더없이 값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무엇에 점령당하지 않은, 이 말이 모호하다면 남의 사진에 휘말리지 않은, 그리고 출발이 늦었던 후진 세계에 도착해 힘이 센 괴물처럼 행패를 부린 서양 사진에게도 결코 유린당하지 않은 모습을 최민식의 작업에서 보고는 했다.
물론 초기의 그는 몇몇 미국 사진가들의 작업과 그것이 거둔 성과에 주목했을 수도 있다. 저희 사진의 역사를 말하는 미국인들은 흔히 사회 개혁 의지가 강했던 사진가로 도로디어랭을 필두로 한 경제 공황기의 다큐멘터리 작가들을 꼽고 이들의 사진이 훌륭한 것은 '사실을 보도하는 힘'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움직이는 힘'에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뷰먼트 뉴홀 같은 이는 랭의 사진을 '정확한 기록인 동시에 감동적인 해설'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랭은 그들, 즉 그녀가 찍은, 경제적으로 핍박받는 인물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과 동정심'을 가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에 '미'는 해로운 존재가 된다 굳게 믿었던 이 시기의 이른바 미국식 휴머니스트들은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진 작업을 계속했다. 누구보다 반 심미적이고, 그것이 사회가 되든 정치가 되든 제도가 되든, 자기가 사는 세상에 이바지 할 것을 생각하며 작업한다는 점만 따지면 최민식은 '이미 끝나버린 주제에 매달리는 이해할 수 없는 작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끝나버렸다니! 최민식의 현실이 그의 동시대 작가들에게 과거가 되는 것은 그들이 남의 땅 작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저쪽을 기준 삼았다. 최민식이 현대 사진 문법과는 이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암흑기의 다큐멘터리 작가들을 아는 데 비해 자기들은 우아한 에드워드 웨스턴도 알고, 세계 사진가를 무릎 꿇게 한 앙리 까르띠에-브레쏭도 알고, 리차드 아베든도 알고, 젊은 로버트 프랭크―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늙었는가―와 이상한 듀안 마이클, 섬뜩한 다이안 아버스, 최근에는 집시들을 따라다닌 요제프 쿠델카에다, 사진에 관한 고상한 에세이를 쓴 롤랑 바르트, 수전 손타그 그리고 발터 벤야민까지, 그들은 정말 아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서양 사진에 대한 잡다한 상식, 기술, 재료들로 자신을 무장한, 그리고 현대 미술 사진에 마약처럼 묻어 있는 향락의 정신까지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바로 그들 "자신의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예술'만 생각하고, 민족이 당하는 고통에는 등을 돌렸다. 그러나 최민식은 달랐다.
초기의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랭의 고전적 작품에 <하얀 천사의 행렬>이라는 것이었다. 뉴홀에 의하면 랭은 '그녀가 깊이 느꼈던 동정심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도록 '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는 빈민들을 사진 찍었다.그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사진가가 기계에다 필름과 동정심을 함께 넣어 들고 다가간 바로 그 현장 소식을 접하고 「임시 야간 숙소」라는 시를 썼다. 그는 사진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진이 갖는 비판적인 힘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잠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쪽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사명감을 갖고 따라다녔던 일터 잃은 노동자, 처량한 농민, 더러운 골목안 빈민, 거리를 배회하던 무숙자들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그들은 흡사 몸집 큰 자선가가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장으로 들어가 화력 막강한 무기를 만들며 지겨운 가난과 작별했다. 인류에게 전쟁처럼 나쁜 것은 없다. 도처에 흘러 넘쳤던 표적이 사라지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그 예술가들의 얼마는 기계를 놓았고, 얼마는 전쟁을 치르며 공룡처럼 더욱 거대해진 저희 조국을 선전하는 사진을 찍었다. 최민식의 사진을 볼 때마다 이것이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끝이 있었지만 최민식에게는 끝이 없었다. 이것이 최민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최민식의 사진을 동정심 발라놓은 랭의 사진이 아니라 깡마른 브레히트의 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했다. 이상하게도 이 백인의 시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상자로 하여금 조용히 감상만 하도록 놓아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최민식의 사진이 우리에게 시간과 상관없이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다.
최민식은 1957년에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집 「인간」여섯 권에서 뽑아본 작품 대부분은 1961년부터 작업한 것들이었다.
1961년이라면 우리가 잊을 수 없는 해이다. 그 해에 군부가 등장했다.
이번에 그의 작품을 가려 보며 그 동안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우리와 같은 민족은 또 없다. 바로 이 생각 때문이었는지, 신채호가 우리 역사를 읽다 떠올렸다는 가슴 아픈 시 네 구가 최민식의 사진을 보는 지금의 나에게도 떠올랐다. 그 시는 이러하다.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가마솥 속에서 우는구나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서로 지짐은 어찌 이리 각박한가!
이야기로 풀어 쓴' 사진철학'
최민식 사진에세이집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단어들을 차례로 읽어 나간다. 다른 단어가 오는 것을 보고 숨을 돌릴 여유가 있다. 하지만 사진,너는 단번에 모두가 거기 있다. 뒤로 물러나서 가면을 쓸 시간의 여유가 없다. 너는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다.'
단 한장의 사진만큼 이 세상을,이 사회의 모든 것을 거짓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게 있을까. 사진에 미치고 사람에 미친 부산출신 사진작가 최민식이 사진에세이집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을 냈다. 1996년 첫 출간한 책의 개정판인데 열두편의 글이 새로 실렸고 사진도 80여장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사진과 함께 그의 글이 나란히 실렸다는 데 있다. 예술의 존재 이유를 시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이라고 믿는 그의 삶에 대한 통찰,사진철학,인생유전 고백록이 한데 녹아 있는 글들은 말 그대로 '날것'이다. 1부 어린 시절 및 작가의 삶 이야기,2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사진작가 이야기,3부 요즘 젊은이들에게 새롭게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4부 작가가 뽑은 작품과 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작가는 일흔 일곱의 나이가 무색하다. 올해 여성을 주제로 한 사진집과 사진미학에 관한 책의 출간을 예정하고 있고,시원의 대륙 아프리카를 찾아 여전히 힘차게 셔터를 누를 것이기 때문이다.
김건수기자 kswoo333@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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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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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안보이네요:) 엑박으로 나와요.부가 정보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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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잘보이는데...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