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탔는데 퇴근 시간이라 6호선 답지 않게 사람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래도 내 발붙일 자리는 찾아, 주위 사람들과 닿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꼿꼿이 서서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더랬다. 기차가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내리고 탔다. 어떤 남자도 기차에 올라 내 눈 바로 앞에 어깨를 들이밀고 섰다. 그의 풀색 면점퍼에서인지, 목덜미에서인지, 단단해 보이는 짦은 머리칼에서인지, 내가 볼 수 없는 코와 입 안에서인지, 혹은 그 모든 곳에서- 발산되는 텁텁하면서도 알싸한 공기가 들숨에 섞여 들어왔다. 여태껏 나를 감싸던 시공간은 어느 찰나에 멀어졌는지 아득하게 느껴졌고,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새로운 곳에 막 떨어진 것 같이 아찔했다. 남자의 뒤통수에 눈을 딱 붙인 채 가슴께에 손을 가져가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있음을 확인하고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칼칼하고 묵직한 향- 같은 담배 냄새라도 왠지 남자 냄새라고 생각되는 게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삼십 초나 지났을까, 빡빡하고 답답한 지하철 안에서 냄새는 어느 새 역해져서 아, 나는 그 남자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만 떼어도 잊어버릴 관능의 순간은 일상에 산재해있다. 그러한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 때, 에로티즘은 가장 온전하게 남을 수 있다. 에로티즘이 발견되고 생각되는 동시에 그 본래의 가치는 날아가버리겠지만 이 역시 좋지 아니한가.

  사람과 사람 사이든 사람과 동물 사이든(사람과 식물 사이까지는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모든 관계는 관능에 지배당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것을 정말 단지 가능성만으로만 남겨 두려는 사람들의 우스운 노력 사이의 줄다리기이기도 하다. 물론 일상의 외피는 사람들의 그 우스운 노력에 의해 지배당한다. 노력이 실제로 우습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소한 것이든 터부야말로 관능의 근원이고, 관능은 그 모습을 슬쩍, 아주 잠깐 비출 때나 터부에 덮여 드러나 보이지 않을 때 약동한다. 그래서 다시 우리를 살찌우는 생명의 에너지가 되는 것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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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9 00:51 2008/10/09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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