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왠만한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선생님이 한 명 있다. 내가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의 강사인데 내가 여기저기서 많이 욕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가 키가 더 크고 머리가 벗겨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싫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외모는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똑같이 키 작고 머리 벗겨지고 더 나이 들었지만 킹왕짱 멋진 모 선생님도 있단 말이지..

 

  오늘 그 수업이 있었고 뭐 언제나처럼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들어갔다. 오늘부터는 각자 작성한 소논문을 발표하는 시간인데, 대체 왜 수업 시간에 그걸 줄줄이 읽게 하는 건지... 보아하니 오늘 들어야 할 레포트는 쓴 사람도 잘 설명을 못하는 게 최소한 3~4년 전에 썼거나 어디서 긁은 게 뻔해 보이고, 요약 정리일 뿐 소논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였다. 짜증이 나서 소설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때웠지만, 또 언제나처럼 질문을 하라는 데도 조용하기만 한 강의실의 공기가 무겁고 답답해서 더 짜증나고... 질문이 없으면 이딴 식으로 수업 마칠 분위긴데 그것도 또 짜증나서 논문이라면 필자의 주장이나 새로 밝히는 사실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발표자는 어이없게도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너무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진짜 하려는 얘기는 선생님이 그에 덧붙인 자신의 이야기다. 아, 그 전에- 수업도 너무 좋았고 선생님도 재밌어서 좋아했던 선생님 한 분을 어제 뵈었는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이 수업 강사 이야기가 나왔다. 같은 대학원이었으니 선생님도 그 강사를 알았다. 그 사람은 연구도 영 아니고 능력없고 열정없고,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이 똑같고  내용도 이상하고 뭐 그렇다면서, 나더러 하필이면 그 사람 수업에 걸려서 참 안되었다고 하셨다.

 

   다시 강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마 강의 중에 자주 하는 이야기인지 여기서는 이야기한 적이 없느냐며 꺼낸 그의 이야기란 이런 거였다. 어떤 논문 심사받을 때, 내가 오늘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단다. 이렇게 쓸 거면 아예 논문을 쓰지 말라면서, 전혀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에둘러서 내포하는 나이가 몇이냐는 말을 들었단다. 또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석사 논문 중 일부를 박사 논문에 인용했는데, 박사 논문 심사하는 날에 그게 표절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난감한 질문을 던진 이는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공부한 열 살 어린 후배였고, 그 순간에 저 놈이 나를 엿먹일려고 그러는 건가, 생각했단다.   

  그렇지만 결국 그런 일이 자신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며.. 뭐 결론은 어떤 질문이라도 막 하라는 거였다. 그런 이야기를 학생들에게까지 하는 마음 상태를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무튼 기분이 좀 이상했다. 거기다 수업이 끝나고서는 나에게 웃으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람사르 총회 일정 때문에 지난 수업에 결석하겠다는 메일을 보내뒀었는데 잘 다녀왔느냐는 거였다. 일정이 바뀌어 계획보다 서울에 일찍 돌아왔기 때문에 수업에 갈 수 있었지만 가기 싫어서 안 갔던 건데, 따지고 보면 내가 거짓말한 꼴이 된 게 찔려서 그랬던지 그의 웃음 때문이었던지 기분이 더 이상해져 버렸다.

 

  내가 이번 학기에 소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소모임까지 만들어서 아직까진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의 단초는 이 선생님이다. 수업 시간마다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머릿속에서 저절로 이야기가 막 만들어졌다. 못나고 능력없고 열정도 없고 늙고 꾀죄죄한 강사를 온갖 비참한 처지에 몰아넣는 상상을 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트였다. 그렇지만 결국 지금 쓰는 글의 주인공이 그가 아닌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실제 그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수업시간마다 열심히 관찰하며 생각한만큼 너무 궁금한데도 뭐랄까 감이 안 온다. 그렇게 수업하기 싫어하는 게 뻔히 보이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공부에 열정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듣기로도 그렇다는 사람이 이 나이까지 학교에 붙어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단순하게 열정이 없이 대강대강 살아가는 그런 사람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건지, 나름의 비전이 있지만 아무런 재능이 없어서 남들이 몰라주는 것인지, 자신의 무능력을 스스로 알아서 비참과 어느 정도의 자포자기가 자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인지, 대체 어떤 심리인 거고 삶에 대한 태도는 어떤지, 가족 안에서는 어떤 아버지일지, 부인은 그가 남자로 보이기나 할지 무튼... 수업 시간에 보는 모습 만으로는 결론을 내리기 불충분했다. 수업에 임하는 불성실한 태도만은 확실하지만. 그런데 오늘 들은 이야기 때문에 더 애매모호해졌다. 이 가을, 나는 이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더 모를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 수업과 강사의 태도가 너무너무 싫다. 재수강반 수업이라 재미있으리라 많이 기대했는데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 것도 짜증나고, 이미 늦춘 수업 시간에서 15분씩 더 늦게 오거나 예고 없이 휴강을 하고서도 미안하단 말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어이없고, 이제껏 하릴 쓸데없는 짓거리- 수업 시간에 앉아서 그냥 각자 책읽기, 교과서 그냥 줄줄이 읽는 걸로 수업 때우기, 쓴 글 앞에 나와서 그냥 읽기 등으로 버려진 수업 시간과 내 등록금을 생각하면 천불이 나고, 교수자가 그 모양이니 학생들 분위기도 다운 되어 있는 것도 싫고, 차라리 교과서 따라 글이라도 많이 쓰게 하던가 것도 아니고...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에는 100% 재활용된 게 뻔한 레포트들-내 것도 포함해서- 발표나 듣고 앉아 있어야 한다니 희망도 없다.  

 

  하, 그치만 누군가를 온전히 순수하게 싫어하는 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다. 착한 마음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고 나이 먹는 게 원래 그런 걸까. 그치만 사람의 여러 면을 보더라도, 그걸 다 이해하고 보듬을 만큼 넓지 못하면서 이러는 건 나만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라.. 이런 느낌은 불편하고 싫어. 

  나는 선생님을 보면 활짝 웃으면서 인사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 수업 들을 때마다 갈등하는 거지만 강의 평가를 솔직하게 날세워서 할 수는 있을까? 그를 심하게 대하기에는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다. 이런 표현을 삼갈 정도의 예의까지는 못 지키겠고. 별로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아는데 흐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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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22:32 2008/11/0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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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횬종
    2008/11/08 04:25 Delete Reply Permalink

    1. 잘 다녀왔는지 궁금했삼
    2. 글을 쓴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아. 호기심이 생겨ㅋ
    3. 등록금 내고 학교 다닐 땐, 정말 수업도 엉망이고 내가 뭐 도서관 가는 사람도 아니고 해서 말이지....내가 300만원짜리 화장실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학교에서 맘껏 만족스럽게 쓰는 건 화장실 뿐이더라고ㅋ

  2. 어느바람
    2008/11/09 20:36 Delete Reply Permalink

    1.안 가도 됐었을 것 같다는?
    2.그 선생님, 따로 만나서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해 볼까 고민중이야. 근데 그럼 내가 자기 수업을 꽤 마음에 들어하는 줄 생각할까봐..
    3.등록금은 정말 답이 없는 건가.. 너무 비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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