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지망생은 아니지만 언론사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으로서 MBC의 이번 신입사원 기획은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화제다. 통계를 낼 만큼 지인들과 많이 얘기를 나눠 본 주제는 아니지만 관련 커뮤니티를 훑어보니 부정적 반응이 최소 과반 이상이다. 부정적 반응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구직자들의 간절함을 상품화하는 게 비인간적이다. 둘째, 아나운서가 예능을 통해 뽑혀도 되는 직업인가. 셋째, 둘째 이유와 비슷한 맥락으로 지원자 입장에서 리스크가 큰 전형 방식이다.

 


 

 


그깟 간절함 따위
누군가 읽어줘야만 의미가 생성되는 텍스트처럼 누군가 사주지 않으면 의미 없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인의 꿈이다. 도전 수퍼모델이나 아메리칸 아이돌, 슈퍼스타K 등의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사랑의 리퀘스트 식의 모금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부류의 간절함이던 그것이 상품화되는 일에 우리는 이미 익숙하다. '사고-팔기'는 시대 정신의 일면이며 꼭 언제나 천박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 역시 구직 활동 중인 사람이지만 구직의 간절함이라는 게 한점 생채기도 내서는 안 될만큼 소중하고 대단한 가치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내 꿈이 꼭 팔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는 은밀할 것도 없이 모두의 욕망이다. 그 과정에서 내 절실함, 인격적 요소라도 팔아서 꿈이든 구직이든 성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팔고 싶다. 제값은 아니라도 최소한의 대가라도 받고 노동과 인격을 팔지 못해 비참한 노동자들이 널린 세상이다. 그 앞에서 꿈이나 간절함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먹이는 건 어린애의 징징댐처럼 느껴지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이런 귀결이 바람직하지 않음은 알지만 세상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조차, 더 심각한 타인의 문제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선뜻 나서 옹호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나운서에게 이미지와 품위란?
"신입사원"에 지원했다가 얼굴만 팔리고 떨어지면, 타사에 입사지원할 때 불이익을 당할까봐 걱정하는 아나 지망생들이 많아 보인다. 현실이 그렇다니 그 처지는 안타깝지만 그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왜 어느 언론사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질 아나운서 지원자에 핸디캡을 줄만큼, 우리나라에서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구축하는 이미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품위는 중시되냐는 것이다. 비도덕적인 일도 아닐진대 조금 특수한 방식으로 구직활동을 한대서 품위가 손상되거나 진지함이 결여된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는 기존 아나운서 공채의 권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에 기대고 있었는지의 반증으로 보인다. 또 어떤 이들은 "신입사원"을 통해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예능적인 퍼포먼스에 강박을 갖고 지나친 관심에 노출됨으로써 그 권위가 무너질까봐 걱정한다.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될 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간에 아나운서를 엄숙한 방식으로만 뽑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아나운서에게 요구되는 품위, 권위, 이미지의 실체란 무엇인가? 그게 사람들이 "신입사원"이 훼손시킬까 걱정하는 아나운서의 본질이라는 '저널리즘의 전달자' 자격에 진정 필요한 자질인지 궁금하다.

실제로 아나운서의 '이미지'는 어떻게 소비되는가. 냉정한 말이지만 지망생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나운서에게서 진지한 소명을 바라는 시청자들은 드물다. 지상파 3사의 아나운서 입사자 뿐 아니라 기상캐스터, 케이블 방송의 리포터들까지 아나운서는 ㅡ보통 여성 아나운서에게 조금 더 무게가 실린ㅡ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직종이다. 아나운서에 대한 우리 시대의 관심이 머무르는 지점은 아나운서 누구의 치마가 얼마나 짧냐, 누구랑 결혼을 하는가, 어느 정신나간 전 국회의원 말처럼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 줘야 하는 것인가 정도라는 게 솔직한 스케치다. 이런 관심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닳은 예를 들자면 지상파 간판 뉴스 진행자는 언제나 중년 남성과 경륜 없는 젊은 여성 앵커 세트다. 적어도 현재 한국에서 여성 아나운서는 저널리즘의 전달자라기보다 사회의 젠더 구조와 욕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상품화된 성이다. 또 남성 아나운서 또한 그 지위가 사회적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다시, 이 관심은 어디서 기인하는지 톺아보자. 아나운서가 저널리즘의 전달자로서 언론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수호하기 때문인가?
 

내가 좋아하는 전현무 아나운서


 

 

연륜있는 중년 여성 아나운서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가?
아나 지망생 개개인이 모두 이같은 욕망을 가졌다는 건 아니지만, 시장이 생산하는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별 수 없이 수많은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성형을 고려하고 고가의 아카데미에 돈을 지불한다. 아나운서가 이미 성상품화되었으니 그것을 인정하자는 게 아니다. 미성년자를 반쯤 벗겨 무대에 세우고 하의실종이나 식스팩에 열광하면서, 그것을 프로페셔널 정신이나 순수 팬심으로 합리화하고 거기 투영되는 성적 욕망과 판타지를 슬쩍 포장하는 일은 얼마나 역겨운가. 아나운서도 마찬가지다. 아나운서에게 가장 중요한 게 저널리즘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순진한 소리며 아나운서를 향한 복합적 시선과 욕망을 비가시화시키는 정치적인 언사다. 게다가 이미 아나테이너들의 입지는 단단해져가고 있는데 그 아나운서들의 정체성은 잘못된 것인가. 아나운서 채용을 프로그램화하는 것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그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일임을 누구나 안다는 점이 아나운서의 특수한 위치를 반증한다. "신입사원"에 대한 일반의 우려는 이제껏 상품화되지 않았던 영역을 상품화시키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대놓고' 하는 방식에 대한 우려로 근원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는 '대놓고' 상품화를 해도 괜찮고 무엇은 은밀하게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은밀한 상품화가 더 상품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성매매 여성들의 성과 아이돌 가수&연예인들의 성과 아나운서의 성이 모두 상품화의 대상이라고 해서 다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속에도 권력 관계가 있고 아나운서의 성은 따지자면 그 중 상층부에 자리한 명품 정도 된다. 명품 소비자들도 명품 그 자신도, 명품이 로고 떼고 중저가 상품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는 일은 싫어한다. 혹여 "신입사원"에서 지원자들에 대해 외모와 재미 등의 요소를 주요하게 평가한대도 '특별히 더' 문제될 게 있는가? 그간 아나운서의 이미지는 소진될 만치 팔려왔고, 이제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미지와 역할로 팔리기를 요구받는 시기가 시작된 지도 이미 오래다. 팔 것 안 팔 것의 기준 따윈 이미 버린지 오래, 더 팔 게 뭐가 있나 혈안이 되어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광범위한 마수가 집요하게 뻗쳐 들어간 것이다. 이에 갈채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기존 체제와 권위에 흠집 나는 것만 싫어하지 내부의 만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다. 결국 내가 주저리주저리 늘여쓴 이 잡글의 문제의식은 한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중년 여성 아나운서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가? 왜 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매끈하고 아름다운 이들만 뉴스를 보도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성심어린 성찰과 답이 없다면, 아나운서가 성상품화의 대상이라는 지적이 당사자들로서는 매우 마음 상하는 일이겠지만 그런 말을 골백번 들어도 할 수 없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나운서들 스스로 해결하는 게 가장 빠른 문제기 때문이다.

 

네이키드 뉴스보다는 낫겠지
-시청률만 노려서는 시청률을 성취할 수 없다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프로라 예측하기 어렵지만, 가장 낙관적인 기대를 걸어본다면 오히려 이 "신입사원" 기획이 앞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느다란 돌파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 기대란 배반당하기 마련이더만은. 이제껏 사람들은 짜여진 자리에서 일하는 아나운서와 거기에 투영되는 자기 욕망만 보았지, 아나운서 지망생들과 그들을 심사할 진짜 아나운서들의 저널리스트 혹은 엔터테이너로서의 꿈과 소명, 문제의식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을 기회는 드물었다. 글의 처음에 예로 들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대중문화의 대상이기만 하던 몇 직업군들의 열정과 프로 의식을 알게 됐던 사람으로서 나는 이번 "신입사원"에 참가하는 아나운서 지망생들에게도 비슷한 감동을 바라고 있다. 또 카메라 테스트와 필기시험 등 판에 박힌 전형 외에 기발하고 신선한 평가 방식이 보여진다면, 기껏 네이키드 뉴스에나 갖다 붙여졌던 과감한 시도, 독창성 같은 언어들이 어울리는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새로운 시도와 접근에는 균열의 가능성이라도 내포돼 있다. 앞서 여러번 부정했던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신입사원"의 핵심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한 참가자들의 소명과 진정성을 어떻게 보여주거나 혹은 정 안 되면 꾸며내느냐에 있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산업의 상품화 대상인가 저널리즘의 충실한 전달자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 사이에 놓인 아나운서의 정체성에 대해 지원자들 스스로와 연출진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신입사원"은 예능프로그램이다. 아나운서에 대해 갖는 특별한 선망과 욕망을 잘 잡았고, 전례가 없는 아이템이라는 점에서 상업적으로 굉장히 좋은 기획이다. 모 케이블 채널에서 비슷한 기획을 한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지상파 TV 아나운서라는 엄청난 권력이 담보된 지위가 걸렸다는 점에서 "신입사원"은 질적으로 다른 프로다. 기획 자체에 예능적 요소가 다 갖춰져 있기에 그 구성과 진행은 진지함으로 승부해야 한다. 대중은 일반의 예능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나 지망생들을 보기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연과 캐릭터, 열정이 어느 정도 연출되든 간에 시청자들이 수긍할 만한 실력 없이 외모나 개성, 재미만을 위한 리그는 절대 화제가 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상업성과 시청률만 노려서는 결코 상업성을 성취할 수 없다는 명제를 제작진이 잊는 순간, "신입사원"은 크랭크인 전부터 들어먹은 욕과 반발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최악의 프로그램이 될 테다. 그러니 제작진이 최악으로 미련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신입사원"에 대한 온갖 소문은 그다지 신빙성 없는 기우에 불과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며,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관건은 제작진의 고민과 연출력이다.


사실 써놓고도 무서운 글이다. 나의 절친한 친구 한 명은 최근까지 아나운서 지망생이었다. 내게는 아는 선배나 동기, 같이 공부했던 후배 등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지인들이 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봐 무섭다. 또 나는 아나운서의 세계와 아무 관계없이 살아온 사람으로 경험없이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들을 모르고, 내 안에는 무지로 인한 편견이 많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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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1 13:23 2011/02/0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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