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누구인가, 이 질문에 사람들은 보통 명확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첫사랑에 특별히 과한 의미부여를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첫사랑이 누구인가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가끔 있는데, 나는 네 사람이 떠오른다. 첫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이가 네 명이면 좀 많은가. 대부분의 경우 연애를 했다거나 마음을 표현했던 것도 아니고, 이제와 돌아보니 그때 좋아했었나 싶은 스무 살 이전의 수줍던 이야기다. 가끔 계속 생각해봐도 그 중 누구를 첫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헛갈린다. 그 중 최초의 인물은 초등학교 때의 한 아이다.

나는 마흔 명 가량이 육년 내 같이 지냈던 작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치곤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친구들 말을 들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 아이에 대해서도 내가 그 애를 좋아했거나 설렜던 기억은 없다. 나는 엄마한테 학교에서 있던 일을 종종거리며 말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걔가 너무 심하게 놀려서 엄마 앞에서 엉엉 울었다가, 학교 일에 관여하는 편이 아니었던 엄마도 그 일 때문에 처음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썼던 기억? 또 시험 보면서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공부를 잘했던 그 아이의 답을 보고 싶어서 애썼던 적이 있다는 거. 친하게 지냈던 것도 아니고 이 정도가 거의 전부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거나, 첫사랑이 누구인가 생각할 때면 다른 누가 아니라 꼭 그 아이의 이름자와 열 살 남짓한 남자애의 앳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5학년 때 전학간 이후 들은 소식이 없던 그 애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종종 궁금했고 한번 만나고도 싶었다. 내가 그 애를 좋아했다는 걸 증명할 추억은 없지만 꼭 그렇게 생각이 났던 건 분명 뭔가 있어서였을 테다. 그 시절에 나는 그 애에게 어떤 느낌을 갖고 있었던 걸까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서 답답하다.

이번 설에 초등학교 동창생들 몇을 만났다. 그 애도 있다는 얘기에 기분이 묘했다. 거의 십오 년 만에 본 그 애는 멋지게 자라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공부를 하게 됐다는 친구에게, 나름 서울살이를 해온 나는 동창생의 친절 외에 아무 뜻도 없다는 듯 방 구하는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반나절 간 함께 발품 판 내게 녀석은 고마워했다. '너니까 괜찮은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못 뱉었다 하하. 말마따나 길치에 어리버리인 내가 사실 별 도움이 된 건 없지만...

 

그 날 나는 휴대폰을 집에 놓고 나와서 그 애와 엇갈렸다가 운명적으로 만났는데 하하. 그 애는 너 같은 애한테 건망증이 있다는 게 상상이 안 된달 정도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빈틈없이 철저하고 새침한 애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게 하루 같이 다니는 동안 쉽게 간파당해서 계속 허당이라 놀리기에 좀 발끈했지만 실은 그런 놀림도 듣기 좋았다.

 

동생에겐 이 얘기했다가 욕 많이 먹었다. 작년에 고시촌에 들어갈 생각이었던 동생은 신림동에 방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는 방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냐고 바빠서 그럴 시간 없으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딱 잘라 말했던 거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동생이 나랑 함께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무튼 어떻게 동생한텐 그랬으면서 십몇 년 만에 만난 남한텐 그렇게 하느냐, 걔가 잘생겨서 그러는 거냐, 이 못된 년 나쁜 년, 별 소리를 다 들었는데 뭐 욕 먹어도 싸다 싶다.

그 애가 꺼내는 소소한 옛날 이야기에 젖었다가 설렜다가, 각자 그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주고받는 시간이 참 즐거웠다. 그 애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던가도 기억에 없었는데 놀렸던 거나 이러저러했던 일도 어째서였다고 슬쩍 흘리는 녀석의 말을 듣는 기분에는 보통의 연애감정보다 더 큰 범주의 따뜻함, 맑음 그런 게 있었다. 너 역시 내게 특별한 친구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없는 기억을 만들어서 관심이 있었다거나 좋아했다고 할 수도 없고, 많이 보고 싶었었다는 이야기만 겨우 했다.

 

내가 일전에 썼던 소설의 한 대목 중에,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동상들이 밤이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떠드는 아이들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친구가 내가 소설에 썼던 대목과 똑같은 말을 꺼내서 굉장히 신기했다. 내가 창작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근원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든든하기도 했다. 의식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경험은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게 내 인생에 관여해왔으리라.

녀석은 건강하고 좋은 사람으로 잘 자란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안목이 뛰어났던 건가 하하. 답을 내릴 생각도 없는 문제지만 누가 첫사랑이건 간에 그 넷 중 누구를 만나도 이만큼 좋은 기분을 느낄 리 없다는 건 확실하다. 딱히 좋은 마음으로 다시 보고 싶은 사람도 없다. 모두 결국엔 삭제하고 싶거나 아픈 게 더 많거나 후에 실망했던 이들인데 이 친구만은 좋게 남아줘서 고맙다. 이미 어른인 그 애가 앞으로도 선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뭔가 기억 나더라도 사랑이라고 할만한 건 못되는 풋감정이겠지만 그냥 녀석을 편리하게 첫사랑이라고 정해버릴까 싶기도 하네 하하. 첫사랑을 다시 만난 설렘, 너그럽고 따뜻하고 편한 거구나. 기분이 참 청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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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7 23:40 2011/02/07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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