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을 잤고 꿈을 꿨다. 스릴러 영화에서 감춰져 있던 범인이 밝혀질 때의 긴박한 카메라 워크처럼, 마지막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깼다. 한 아주머니의 얼굴이었다. 쌍꺼풀 짙은 눈가의 주름까지 자세히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더 살이 붙은 것도 같고... 초등학교 때 친구의 어머니였다. 꿈이 내가 만들어낸 영화라면, 카메라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전부터 멀찍이서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았다. 피하려고 했지만 꿈은 정직했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여자애들 사이가 그렇듯 오 년의 시간은 뭉뚱그려져 뿌옇지만, 우리 사이가 틀어지고 그 애가 전학을 가기 전까지 우리는 제일 친했다. 5학년 때는 주산학원에를 같이 다녔다. 학원 원장이 애들을 들들 볶고 많이 때리지만, 수학 실력을 높이는데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지역에 쫙 퍼져 있었다. 원장은 나를 유별나게 예뻐했다. 우리는 항상 학원에 같이 갔는데, 어느 날부터 그 애가 나랑 같이 가지 않으려고 했다. 나한테 뭐라고 말했었는데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고, 무튼 나랑 비교되는 게 싫어서였다. 우스운 얘기가 되겠지만 어린 시절에 나는 친구들처럼 공부를 잘 못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많이 바랐었다. 그 날 학원에 가지 않고 화장실에 숨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엄마한테 들켜서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그 애가 나랑 다니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을 겨우 뱉었다.

그 친구는 곧 왕따를 당했다. 작은 시골 학교에도 우두머리 역할하는 아이들은 있었고, 말하자면 그 친구는 그런 역할에 어울리는 타입의 여자애였다. 그런 애들이 왕따의 대상이 되기 쉽듯 그 친구는 예전에도 가볍게 왕따를 당한 적이 있었고 그땐 나는 의리를 지켰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애들은 좀 더 머리가 컸고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 사이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이 더 있었고, 나는 그 애와 이전 같지 않은 관계였고, 그 애의 라이벌 격으로 그 애를 미워하던 친구는 나를 달콤하게 꼬드겼다. 나는 외면만 한 게 아니라, 그 애의 어떤 게 싫었는지 자질구레한 점들을 다 풀어놓으면서 그 애를 험담했다. 그 애가 나한테 상처를 줬으니 나도 정말 그 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랬다. 왕따 문제로 선생님한테 불려가 혼날 때, 너는 OO이랑 친하지 않았냐고, 나랑 그 애 둘을 데려다 놓고 뭐라고 말해 보길 요구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왕따 때문만은 아니라 집안 상황과도 얽혀서 그 애는 곧 전학을 갔다.

그 애 집에 자주 들락날락했었다. 그 애 남동생이랑, 막둥이 아기 여동생이랑도 많이 놀았다. 그녀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도 많이 먹고, 잘 따랐다. 우리 엄마도 그녀 어머니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친구와 어색해진 후, 길 가다 그녀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인사를 제대로 못 하고 눈을 피했다. 어려서, 어떻게 할 줄 몰라서 그랬다. 나중에 그 친구 왕따 문제로 담임 선생님을 만나러 온 그녀 어머니가 나를 두고, 아무리 우리 애랑 틀어졌어도, 집에 놀러오면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그렇게 예뻐했는데, 어떻게 나한테까지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서운함과 화가 섞여 말했었다고 전해 들었다.

중학교 때였나, 집으로 전화가 한번 걸려온 일이 있다. 그 애가 전학간 지역의 중학교 친구라고 했는데, 그 애가 나랑 연락하고 싶어한다고, 잘 지내느냐, 이런 식의 전화였다. 나는 살갑게 받지 못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서투르고 어색해서 그랬다. 그 후로는 모른다.

그 애가 떠나고 새로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생겼다. 네 명이서 몰려다녔는데, 한 명이 또 결국 따돌림을 당했다. 나머지 셋이서 모여서 그 친구 험담을 많이 했다. 소위 은따를 시키다가, 결정적인 통보의 날, 막상 그 애 앞에서 입이 닫힌 친구들 대신 쓸데없이 뻔뻔한 내가 나서 할 말을 다 했다. 그 애가 사과의 편지를 적어 주었던 걸 나는 읽어보고 싶었는데, 다른 친구가 읽을 것도 없다고 찢어버렸다.
그 애랑 같은 중학교를 갔다. 한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었는데, 어느 날 길에서 마주쳤다. 뻔히 방향이 같은 걸 아는 처지에 돌아갈 데도 없고 아무도 없는 길을 둘이 말없이 걸었다. 자기 집 근처까지 다 온 그 애는, 내게 잘 가라는 말 한 마디를 건네고 갔다.

중학교 때부터 수련회에서 촛불의식같은 걸 할 때면, 항상 저 두 아이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런 것조차 해본 지가 오래 돼서, 오래 잊고 살았다. 그 애를 만나고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려 기를 쓰다가 생각이 난 게 이런 이야기다... 언젠가 그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면 눈물이 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차근히 다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사과하고 용서받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 애들에게나 내게나 필요한 과정일 것 같다. 아니, 솔직해지자면 비열한 짓을 한 기억이 너무 괴로워서 그 애들의 용서를 확인받고 싶은 이기심도 있다. 나만큼 자란 그 애들은 잘 지내고 있을 텐데, 미안해하는 게 더 우습기도 할 테다. 언젠가부터 미안하다는 말만큼 듣기 싫고 어이없는 말도 없음을 깨달은 나는, 애초에 사과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곧잘 하고 살았다. 그렇게 당당히 말할 자격이 없구나. 어릴 때 일이라고 배신이 어떤 건지 몰랐던 것도 아니다. 잘못을 하고서 적당히 정직하고 괴로워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사는 시간이 쌓이니 아는 것은 늘어가고 스스로가 현명해지는 마냥 착각하게 되지만, 지금도 실제의 나는 그저 속 좁고 비겁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다. 잘못을 어떻게 안 하겠냐마는, 그래도 노력은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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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21:19 2011/02/20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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