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중)

 

잊고 사는 게 많은 것 같다. 막연하고 희미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내 행복에 집중해도 괜찮은 건지, 내가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게 아닌지, 친절하고 세련된 세상 몸놀림에 속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마음으로 책을 뒤적거려보고 있었지만 애초에 책에서 뭘 배워야겠다 작정한 것부터가 어리석은 일이었음을 깨닫던 중이었다. 다만 저 한 문장은 내가 바랐던 거였다. 그리고 한 학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어린 학생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얘기해 줬다.

 

민우가 생각났다. 이렇게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니다. 재작년 10월 하순, 경찰서에서 잠깐 마주쳤다. 피자 배달 알바를 하다가 차와 접촉사고가 나서 온 아이였다. 돈에 겁먹은 눈을 하고 있던 기억이 난다. 사고가 업주의 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을지 등에 대해 내게 물었던 것 같다. 고1이었을까, 체구가 덜 자란 듯 앳돼 보였고 미남이었다. 곁을 기웃대며 내가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이 조금 연기도 했다. 돕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 거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필요 때문에 의식적으로 약간 거짓되게 행동했다. 사고는 얘기될 게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야간 보고 거리가 없었다. 한참 배달 알바생들의 처우가 문제시되던 때라 좀 더 자세한 인적사항, 배경 이야기 등을 덧붙이면 그나마 면피로 보고할 만하다고 여겼다.

 

경찰에게 쫓겨난 뒤 진술서에서 몰래 본 전화번호로 민우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아이는 자기 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 묻지도 않고, 민우라는 이름,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 몇 가지를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해줬다. 할머니랑 둘이 산다고 했나.. 확실치 않다. 내 볼일은 다 보고, 보험이나 수리비 문제에 관해 간단히 아는 만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뒷날이었나 민우가 전화를 두어번 더 걸어 왔다. 바로 든 생각은 '어쩔 수 없었지만 번호를 괜히 남겼구나' 였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지 민우는 내게 뭘 물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아이답게 무지하고 다소 절박했다는 인상만 남아 있다. 원래 알았다시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대신 나서 일을 도맡아 줄 게 아니라면. 법적으론 아이가 보상할 게 없는 거니까, 법적으로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다시 간단히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처음 민우에게 말을 걸면서부터 내가 이 애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서에 온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건 매일같이 하는 일이었는데, 희한하게 유독 그때 나는 지금 속에 다른 목적을 숨기고 겉으로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먹은 무구한 눈 때문에, 너무 약한 짐승같아서 뭐 그래서였을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아이들, 그런 인생들이 너무 많았다. 웃자랐던 어린 머릿속에서는 박애주의자 되기가 쉬웠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의 삶은 영화에서 보고 슬프면 그뿐이었는데, 사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현실이라는 게 그런 건데, 내가 그애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한번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 처음 민우를 떠올렸다. 그저 기억한 게 전부고 별다른 일을 할 건 없다. 다만 그동안 나는 껴안고 가야 할 것들에서 무의식적으로 도피해 왔던 걸까 새삼 생각이 든다. 한때 너무 많은 것들이 짧은 시간에 밀려 들어왔고 이후로 공감능력과 죄책감이 확 줄었다고, 나를 돌이켜 분석해 보는데. 그게 꼭 나쁜 영향만 끼쳤던 건 아녔다. 다만 값싼 동정에 취해 자위하는 꼴이 될까봐 두려웠던 것도 결국 내가 우스워지긴 싫다는 허영이구나 싶다.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몰랐던 막연한 상실감의 기원을 이제 조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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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21:03 2013/06/1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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