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순간의 두려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나는 판타지나 무협물 같은 것들, 주인공이 끊임없이 위기에 빠지고 극복하는 따위의 이야기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액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총 쏘는 장면은 매번 끔찍하게 섬뜩하다. 사실 그럴 필요 없는 것들까지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 어쩌냔 말이야. 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되었을 때, 존재로서의 어떤 권리라도 그 앞에선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그 초라함에의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인 건 확실하다. 이미 오래전이고 거창한 말마큼이나 큰 일은 아니었지만, 아니 큰 일과 작은 일을 어떻게 구분하겠어.

 

   나는 한 나라, 혹은 한 마을의 왕자이다. 어둠의 세력(-_- )에 맞서 나를 지키기 위해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내 동생이 커다란 흰 뱀 무리를 물리치느라 꽤나 고생했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명확한 정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꽤나 고생했다는 말은 너무 가볍지. 죽음으로부터 미친듯이 달아나고 싶은 공포와 나 때문에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아팠다.

  어쨌든 결국 승리하고 나서, 온이를 찾았는데 온이의 등과 엉덩이께에 큰 상처가 나 있었다. 등의 상처가 배에 작은 구멍이 뚫릴 만큼이나 깊게 패여 있었다. 왕자였던 나는 어느 새 다시 나였다. 온아, 미안해, 내가 싸우느라고 널 이렇게 내버려두었어, 너무 미안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는데, 이건 꿈이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 꿈이구나, 이제 깬 거네 그럼. 깨어났는데 온이의 몸에는 아까와 같은 상처가 그대로였다. 꿈이 아니라는 데 놀라서 또 울었다. 온아, 잘못했어, 죽으면 안돼. 녀석을 껴안고 얼굴을 부비면서 몇 십번을 외쳤을까.

 

  꺽꺽 대다가 기침이 나서 눈을 뜨니 온이는 책장 위에서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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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4 12:05 2008/06/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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