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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을 가두지 말라

오르한 파묵을 가두지 말라

터키의 쿠르드·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비판한 뒤 기소되자 세계적 작가들 구명운동…유럽연합 가입 위해 헌법 개정했지만 독소조항 추가돼 표현의 자유는 제자리걸음

▣ 아테네=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지난 12월16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오르한 파묵의 재판은 전세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특히 유럽연합에서는 네 명의 의원단을 비롯해 수많은 유럽의 문인들이 그를 지지하기 위해 재판정의 방청석을 채웠다. 하지만 재판부는 터키 정부가 재판 진행 문제에 대해 결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재판을 내년 2월6일로 연기했다.

전세계 문인들이 분노한다

지난 2월6일 스위스의 일간지 <타게스 안차이거>와의 인터뷰에서 오르한 파묵은 “3만 명의 쿠르드인과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기사가 나오자마자 터키 정부는 즉각 그를 기소했다. 담당검사 펙메지는 “파묵은 터키의 정체성과 터키 군대, 나아가 터키 전체를 적대시하는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렸다”고 기소 사유를 밝혔다. 터키의 전신인 오토만제국이 1915~23년에 저지른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쿠르드 민족에 대한 박해를 비판하는 건 터키 사회에서 금기시된 사항이다.

오르한 파묵의 재판 연기가 결정된 뒤, 그리스 최대의 문학조직인 그리스문인협회의 발티모스 회장이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먼저 “터키가 유럽에 가입하기를 희망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밝히면서 오르한 파묵 사건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차분하게 얘기를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치가 떨리는 듯한 강경한 목소리가 전화상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그는 흥분해 있었다.

“세상에, 유럽연합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유럽은 오래전부터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작가의 표현에 대한 자유는 더욱 존중돼왔다.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절대적인 자유이다. 이런 일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분노했다.

그리스문인협회는 오르한 파묵의 기소에 대한 항의서한을 지난 11월 터키 정부에 전달했다. 이와 더불어 오르한 파묵에 대한 기소가 취하될 때까지 유럽연합의 문인조직들과 연대해 터키 정부를 압박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티모스 회장은 밝혔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문인들도 오르한 파묵의 기소에 분노했다. 특히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인 주제 사라마구, 가브리엘 마르케스, 귄터 그라스는 오르한 파묵을 지지하는 서한을 터키 정부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움베르토 에코, 카를로스 푸엔테스, 후안 고이티솔로, 존 업다이크, 마리오 리오사 등도 오르한 파묵의 기소를 철회하기를 요구하는 편지를 터키 정부에 전달했다.


△ 오르한 파묵의 재판이 시작되기 전 유럽연합 감시단의 의장인 카미엘 외를링스(가운데)가 기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재판은 내년 2월로 연기되었다. (사진/ EPA)

재판이 연기된 직후 국제펜클럽은 즉각 성명을 내어 재판 연기가 오르한 파묵이나 다른 작가들에게 또 다른 억압으로 작용한다고 밝히고 기소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재판 연기 결정은 파묵의 사건과 같은 유형에 자주 등장한다. 보통 몇 달에서 몇 년까지 재판을 연기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작가가 패소하면 감옥에 가고 승소하더라도 유야무야 끝나게 된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작가는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집필 활동에 상당한 위축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다른 작가들에게도 심리적인 위협이 된다.

터키의 정체성, 형법 301조의 비극

오르한 파묵에 대한 재판이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는 단연 그의 유명세에 있다. 그는 올해의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고 그동안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문학상들을 모두 휩쓸어왔다. <침묵의 집>은 프랑스에서 유럽문학상을 받았고 <하얀 성>은 영어로 번역된 뒤 국제적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됐다. 1994년에 출판된 소설 <새로운 인생>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터키에서는 독보적인 인기작가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그리고 최근 발표된 두 소설 <눈>과 <내 이름은 빨강>은 터키어로 쓰인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전세계 40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출판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오르한 파묵이 기소되고 나서야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터키의 상황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이라는 정치 일정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표현의 자유 문제에 부딪혀 갈 길을 잃고 말았다. 유럽연합 가입을 위해 그동안 협상을 벌여온 터키 정부는 각 부문에서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한 개혁을 추진해왔다. 특히 인권 문제의 개선에서 유럽연합의 끈질긴 압력을 받아온 터키 정부는 지난 6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법률을 개혁했다. 하지만 유럽의 인권단체들은 터키 정부가 유럽연합 가입을 위해 이전의 법률을 전시용으로 형식적인 개정만 했을 뿐, 다른 독소조항을 추가하면서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오르한 파묵을 전격적으로 재판에 회부시킨 법률은 개정된 형법 301조로 인권단체에 의해 독소조항이라는 강력한 비판과 더불어 폐지의 압력을 받아왔다. 301조는 터키의 정체성과 터키 의회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은 6개월 내지 3년의 징역형에 처하고, 터키 정부와 사법부, 군부와 보안조직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행위는 6개월 내지 2년, 이 밖에도 터키 국민이 외국에서 이를 행했을 때는 1년이 추가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의 표현이 비판을 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범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모호한 규정을 마지막에 넣어두었다. 이 규정을 해석하는 주체는 검사나 판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비극이다. 301조에 의해 기소된 오르한 파묵은 재판을 거쳐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될 처지에 있다.             
 


△ 파묵(왼쪽)의 기소 사실은 터키의 인권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파묵은 터키와 유럽의 화해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독일출판산업조합으로부터 '평화상'을 받았다. (사진/ EPA)

오르한 파묵만이 아니라 지난 10월7일에는 흐란트 딘크가 형법 301조를 어겼다는 이유로 6개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흐란트 딘크는 아르메니아어 주간지인 <아고스>의 편집자이자 기자로 터키의 국가 정체성을 모욕한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기소당했다. 지난 3월에는 터키의 한 대규모 일간신문의 시사만화가인 무사 카트가 에르도간 터키 총리를 실로 만든 공 안에 갇힌 고양이로 비유한 만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총리에게 고소를 당해 350만원 상당의 벌금을 문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에도 한 시사만화가가 에르도간 총리를 자문위원들에 의해 끌려다니는 말로 그렸다가 고소를 당한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이런 필화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사들은 이를 정부의 경고장으로 받아들여 알아서 자체 검열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살 인정은 유럽연합 가입 조건

오르한 파묵의 인터뷰 사건은 터키 언론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했다. 오르한 파묵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미 정권에 길들여진 터키의 대언론사들은 오르한 파묵을 연일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비이성적 테러행위를 부추겼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오르한 파묵의 재판정에 몰려와서는 폭력적인 추태를 보이는 사태를 연출했다.

터키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유는 과거사를 부정하고 덮어두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사가 터키의 의도대로 덮이거나 부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르한 파묵을 구속해 그의 입을 막는다 해도 과거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이미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승인한 바 있다. 이 국가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인정을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

        

 


예술가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

2005년 들어서만 50여명의 언론인과 작가들이 기소당한 터키

표현의 자유에 대한 터키 정부의 탄압은 그동안 터키와의 군사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미국과 영국의 의도적인 외면으로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안이었다. 특히 언론인들에 대한 터키 정부의 검열과 탄압은 잔인하게 자행돼왔다. 국제펜클럽은 터키에서 2005년 들어서만 50여 명의 언론인과 작가, 출판인들이 기소당했고 지금도 오르한 파묵 외에도 13명의 작가들이 재판 중에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터키에서는 수많은 언론인과 작가들이 장기수로 투옥되거나 암살당하는 사건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예술가들에게 가장 위험한 국가로 악명을 떨쳐왔다.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론인과 작가들이 터키 정부의 공격 목표가 돼왔다.

터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는 나짐 히크메트는 공산당의 비밀당원으로 구속돼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의 출판물 또한 금서로 지정됐는데 그가 죽고 난 2년 뒤인 1965년까지 금서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터키의 저명한 작가 오르한 케말도 1939년에 그의 정치적 의견 때문에 5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나짐 히크메트를 감옥에서 만나 그를 사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1993년 7월1일에 일어난 사건은 터키 국민들과 세계를 경악시켰다. 당시 터키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 조직된 한 무리는 좌파적 성향을 지닌 콩트작가인 아지즈 네신을 공격하기 위해 그가 참가한 축제 장소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36명의 예술가가 죽고 24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지즈 네신은 탈출하지 못하고 경찰관과 소방관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

어릴 때부터 장님으로서 극작가이자 시인, 변호사로 명성을 떨친 에스베르 약무르데렐리의 사례는 터키의 표현의 자유 억압을 잘 드러내준다. 터키 정부의 쿠르드 민족 탄압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1978년부터 1991년까지 13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석방된 뒤 반정부적 저작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98년에 다시 투옥됐지만 국제사면위원회의 지속적인 항의로 2001년에 석방됐다. 그가 감옥에서 보낸 햇수를 모두 합하면 17년이 된다.

최근 들어서는 출판인인 파티 타스가 1990년대 쿠르드 활동가들을 겨냥한 터키 정보부원들의 불법적인 살인행각이 포함된 책을 발행했다는 이유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 라집 자라쿨루는 2005년에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다룬 도라 사카얀의 <아르메니아 의사의 경험>을 터키어로 번역한 책을 발행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재판이 내년 2월15일로 미뤄졌지만 여전히 6년 징역형에 처해질 운명에 처해 있다. 작가이자 출판인인 자라콜루는 이미 1971년 반정부적인 저작활동으로 3년 징역형을 겪었던 전력이 있고, 1995년에는 그의 출판사 건물이 이슬람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완전히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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