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이산移山의 꿈 2012/05/19 04:33

 

 

 

 

입소 후 첨 면회 가 보고서는 벌써 해를 넘겼구나. 그새 한 번이라도 더 가보련 맘은 들었다만, 요즘 내 신변이 좀 어수선하달까, 본의 아니게 자꾸 휘청대는 탓에 막상 그러진 못했네. 그나마 짬이 나는구나 싶어 언제 갈 수 있나 까페에 들어가 봐도, 낄 자리가 그리 마땅치 않은 것 같고 말야. 한마디로 뻘쭘하더라구. 근데 마침, 이미 지났다만, 니 생일이 23일이라 그랬나? 뭐 암튼 그렇다 보니, 그럼 편지를 보내는 게 더 낫겠네 싶어 이렇게 피씨 앞에 앉았구먼.

 

<위클리 수유+너머>에 보내는 연재글은 잘 보구 있어. 니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생각의 결을 근거로 니가 ‘잘 지내고 있더라’고 판단하기엔 무척 섣부른 걸지 모르겠다. 그래도 너의 생각이랄까, 몸뚱아리가 소심하게나마 니가 속한 장소와 씨름중인 모종의 되먹임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외려 이렇게 무언가 조심스러워하는 내가 너를 편리하게 대상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지대. 어쨌거나, 외줄타다 떨어질 듯 휘청댈 수밖에 없는 순간과 맞닥뜨리곤 하겠다만, 적어도 이제껏 니가 꾸준히 보내오는 글줄로 판단하기론 그다지 걱정이 안 되니 어쩌면 좋다냐.^^: 나로선 그만큼 글로써 마주하는 니한테서 마치 얌체공과도 같은 탄성을 느끼게 되니, 그 탄성이 언젠가 좀더 일반화된 생의 지평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발하길 바랄 뿐이네그랴.

 

요즘 내가 사는 동네에서 젤 이슈가 됐던 건, 누군가의 재치있는 언어유희에 따르면 “인간을 널리 일없게 하려는” 학교 본부의 무대뽀에 맞서 노조를 결성하고 사무처 점거농성에 들어간 홍익대학교 청소·경비·관리 용역노동자 분들의 얘기여. (대학 다닐 때 빈민운동에 관여했다던) 김여진씨가 트위터를 활용해 ‘날라리 외부세력’이란 이름으로 여러 경로의 대중적 연대를 이끌어낸 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됐더랬지. 홍대 총학생회에선 청소 일을 하시는 “아버님과 어머님”들의 싸움은 지지하지만, 이들과 결합한 공공노조 등 지역 안팎의 연대 단위들은 상황을 왜곡·변질시킬지 모를 외부세력으로서 상종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더라구. 홍대 총학의 이런 자해적 뻘타를 놓고서 홍대 총학 성원에 대한 도덕적 성토들이 빗발쳤으나, 뭐 이게 어디 걔들만 족친다고 될 일이라야지 말야. 더군다나 총학 활동 자체가 이미 취업용 “스펙”으로 요긴하게 쓰이게 된 지 오래인 상황에서 말이지.

 

이런 와중에 노동자분들은 새로 선정된 용역업체하고 고용승계와 알량한 임금인상에 대해 합의하면서 다시 일을 하기로 한 상황이여. 하지만 홍대 당국은 자기넨 원청이 아니라며 노조 지부장에 대한 고소와 벌금 물리기로 교섭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지라, 앞으로 또 어찌 될진 모르는 상황이기도 해. 그래도 평생을 이런 상황에 대해 남의 일인 양 여겨오다 이번에 일방적 계약해지 겪으면서 알게 된 전후맥락을 잘 잡아내시는 조합원분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말야, “체계화된 무지”와 어찌 싸우느냐가 소위 먹물들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화두겠다 싶기도 하고. 이런 무지가 어째서 이제껏 더 공고해졌는지 서로 이야기해 가면서 공론화하는 일이겠다고 할까. 한윤형이란 친구는 이런 얘기가 진보좌파 특유의 음모론적 판타지로 보인다는 (뻘)소릴 하고 있던데.. 뭐, 나로선 아무래도 ‘계급 형성’을 겨냥하는 좌파정치적 입지에선 ‘잠재적인 것’이 지닌 연합의 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로 한 얘긴데, 이 얘기가 그 친구한테는 뜬끔없이 낭만화된 민중주의적 판타지를 유포·조장하는 것으로 읽혔던 모양이여. 나부터도 ‘민중/대중’이란 표상과 연루된 메시아주의적 판타지 따위로 제 풀에 제가 넘어지는 건 참 탐탁치 않아하는 쪽인데, 그래서 그런지 나야말로 뜬금없고 어이도 좀 없더라고.ㅋ

 

간간이 소식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올 초부터 북아프리카 권역의 친미 위성형 국가들에선 ‘반미’를 표방해온 아랍권 전체로 번지고 있는 민중봉기의 물결 앞에서 그야말로 전전긍긍하고 있거든. 통치자들 중엔 엄포를 놓고 얼르려 들다 사우디로 도망치는 경우에서부터, 도무지 깜이라곤 없이 무려 “명예로운 사퇴”를 요구하다 정치적 몰락을 스스로 재촉하고 마는 경우, 5.18 광주항쟁 때처럼 총이나 수류탄 같은 무력으로 찍어누르려는 경우가 있는데, 어쨌거나 한동안 그러다 말겠거니 할 상황은 결코 아닌 것 같네. 한국산 파워엘리트 계급의 비공식 기관지들을 보면 이 흐름이 어여 북조선으로도 전염·확산됐으면 하던데, 참 야무져 보이지 않냐? 설사 그리 된들, 그게 어떻게 한국은 쏙 피해갈 수 있다고 여기는지, 그 (몰)감각이 더 우습고 찌질해 보이더라마는. 한국산 부르주아지들한테 ‘통치술’이라 할 만한 걸 기대하는 건 무리다 싶은 정도랄까.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지정학상, 그네들 사이에 의례화된 통치는 어쩌면 통치능력의 ‘외부화’ 덕에 비로소 가능했던 게 아닌가도 싶고. 가령 그 외부에서 일정한 동요만 일어나도, 한국의 지배블록에선 그야말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고 할까. 한 10년 동안, 한국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도 싶다 나는 어째. 물론 적어도 ‘우리’가 여기에 애꿎게 휩쓸리지 않을 방도는 뭘지, 그래서 찾아야겠지만 말여.

 

근데, 이보다 더 껄끄러운 게 있어. 이렇게 국경을 가로질러 들끓고 있는 북아프리카 권역의 봉기 움직임을 “시민혁명”이라 명명하려는 민주개혁 언론들의 시각이랄까, 프레임이지. 그거야 물론 “어게인 1980/87”을 바라는 탓일 텐데, 이런 기시감 따위는 없다고 하려는 건 아녀. 오히려 더 중요한 건, 구미권 열강의 간섭·주도 하에 거기서도 이뤄져왔을 자본주의적 ‘발전’이 지리적·지정학적 차이를 떠나 보이는 반복 속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차이들을 드러내고 있는지 분석·설명하고, 이로써 작금의 상황 국면이 저쪽 북아프리카에서든 이쪽, 근까 한반도-동아시아에서든 이른바 “민주화”(내지는 “통치의 정상화”) 테제로 앞으로 수습가능한 것이겠는지 짚어보는 일 아니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문이얼씨라고, 에너지전략연구소 소장이란 분이 다른 매체에선 접하기 힘든 곱씹을 만한 분석글을 <레디앙>에 연속기고하긴 했지(이 분의 분석으로는 지금 북아프리카권역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안팎을 둘러싼 지정학적 추이는, 얼추 1980년대 중후반 소련이 비실대면서 그 자장 안에 있던 위성국가들도 줄줄이 나자빠지던 때와 엇비슷하다고 그러더만. 헌팅턴 류의 문명충돌론을 뻘쭘케 하고도 남을 정치적 징후들도 이 참에 표면화되면서, 냉전 이후를 ‘역사의 종언’스럽게 설명해오던 서방 중심의 자유민주화 담론들은 사실상 넝마처럼 씹쭈그리해질 것으로 보는 것 같던데..).

 

헌데 이런 드문 경우를 빼곤, 대체로 “시민혁명”이라는 모호한 명명법으로 ‘기시감’만 부각하면서 기껏해야 지금의 꼰대풍 민주정부하고 뭔가 다르긴 다른 민주개혁적 민주주의로의 귀환만 겨냥하는 것 같아, 그게 참 거북하더라구. 그런 노선으로 묶일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목소리(혹은 ‘서발턴’)들이 분명 잠재해 있을 텐데 말야. 작년 여름쯤 나온 <1987년 6월 항쟁>이란 책에서 김원씨가 밝혔다시피, 심지어 귀환하자는 그 한국산 “민주화”조차 그 국면 이후 은폐·누락된 채 이중으로 주변화돼온 목소리를 새삼 불러내야 하는 것일 테고. 그렇건만, 아랍권에서 진행중인 혁명적 민중 봉기들을 저런 빤한 프레임으로 ‘관리·제어’해야 하나 싶더라구. 이거야 물론, 다르게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소위 자유시장(혹은 “자유화”)의 미덕을 민주개혁적 통합 노선으로 어떻게든 살리는 쪽이 합리적이라 보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의 발로일 테니, 중요한 건 이런 지루한 반복의 레토릭과 맞서 씨름할 좌파적 의제설정은 어떻게 짜일 수 있겠냐는 거겠다만.. 아무튼 뭐 이런 저런 생각이 들더라구.

‘바깥’에서 최근 내가 눈여겨보게 됐던 상황은 뭐 대충 이렇네. 사실, 당장 내 목구멍이 갈수록 포도청인 상황인 터라 그런지, 맘으론 이런 상황을 좀 꼼꼼히 정리해놓고 싶다만 심리적 압박 탓인지 생각처럼 그리 잘 되진 않아. 낭인편집자로 지내며 어떻게든 밥벌이를 해볼까 했는데, 그참, 생산수단이라곤 몸뚱아리밖에 없는 임노동자라 그런지 좀체 녹록치가 않네. 내 입만 챙기면 되는 상황도 아닌지라, 그냥 소박하게 결혼 구상을 해볼래도, 뭐 이건 견적 자체가 빠지질 않으니.. 쩝. 노동자로 살아야 할 이들한테 불리하고 또 불합리한 사회적 관계 탓만 하기엔, 좀체 빠릿하지 못한 내 몸뚱아리도 마냥 잘 한 건 없겠지만 말여..^^;

뭐 일단 이 정도로 줄이고, 어수선한 신변이 좀 정리되는 대로 다시 소식 전하도록 할게.

그럼, 여러 가지로 ‘건투’하길!



2011년 2월 20일
합정동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5/19 04:33 2012/05/19 04:33

 

 
 
언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환각제를 20밀리그램 복용한 효과가 나타난 상태에서 한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당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사실, 때때로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마술을 부릴 능력이 없음을 깨닫자마자 슬픔에 압도되어 이겨내길 못하는 듯하다.
 
우리가 우리의 장점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 오로지 마술만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어린아이 같은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 점을 간파했다. 요제프 불링거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마술과 행복의 비밀스런 연대를 명확하게 지적한 바 있다. “잘 산다는 것과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정말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마술 없이는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행복하게 살려면 진정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야만 할 텐데.” 
 
... [마술의 본질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호출하는 것이라는 카프카의 정의에 따르면] 마술은 본질적으로 비밀스런 이름에 관한 앎이다. 각 사물, 각 존재에게는 겉으로 드러난 이름 말고도,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감춰진 이름이 있다. 마술사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근원적-이름을 알고 불러낼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령술사들은 (악마나 천사의) 이름에 관한 끊이지 않는 목록을 통해 영적인 힘을 확실히 지배하려고 한다. 마술사에게 이 비밀스런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피조물을 살리고 죽이는 힘이 자기에게 있다는 징표일 뿐이다.
 
하지만 또 다른 더 계몽적인 전통에 따르면, 비밀스런 이름은 마술사의 말에 사물이 복종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암호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물이 언어활동으로부터 해방됨을 가리키는 모노그램(두 개나 그 이상의 문자를 결합해 하나의 상징처럼 만든 것)이다. 비밀스런 이름은 피조물이 에덴동산에 불렸을 때의 이름이었다. 일단 그 이름이 발음되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이름(이름들의 바벨탑 전체)은 산산조각난다. 이 교설에 따르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마술은 행복에의 외침이다.
 
비밀스런 이름은 피조물을 아직 표현되지 않은 것[존재]으로 되돌려주는 몸짓이다. 최종심급에서 마술은 이름에 관한 앎이 아니라 일종의 몸짓, 이름과의 단절이다. 어린아이가 자신만의 비밀 언어를 발명해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만족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아이의 슬픔은 마술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부과된 이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이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데 성공하자마자, 새로운 이름을 발명하자마자,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행복을 선사할 통행허가증을 손에 넣게 된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죄이다. 그리고 마술이 그렇듯이 정의正義에도 이름이 없다. 행복하게, 그리고 이름 없이 행복하게 피조물은 몸짓으로만 말하는 마술나라의 문을 두드린다.
 
_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세속화 예찬>(난장) 2장 ‘마술과 행복’ 중에서
 
 
 
이제 소파 방정환과 어린이날의 관계에 대해선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으로나마 다루지 않게 됐는갑다. 1920년대 당시의 민족주의 노선/서사로도, 코민테른판 공산주의 노선으로도 환원이 안 되는 '좌파적 지향' 속에서 어린이(성) 혹은 동심에 주목했다는 그의 문제틀을 다시 보는 일은, 어쩌면 아감벤이 위에서 말한 '어린아이-같아지는 몸짓'의 미덕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 아닐까도 싶고마는.
 
(좀 딴 얘길지 모르나, 극장용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를 거듭 보면서 행복해졌던 이유도 어쩌면, 전형적 성장담의 소재로도 읽힐 키키의 우여곡절 자체가 아니라, 그럼에도 '마술'을 잃지 않은 키키의 삶, 그리고 그런 키키를 암치도 않게들 여기는 이웃과의 일상을 그 작품에서 봤기 때문 아녔나 싶고..ㅋ)  
 
듣자니, 당시 "동심의 계급성"을 앞세워 자신을 '동심천사주의자'라 규정, 비판했다는 좌파 계통 사람들에 대해 방정환이 저어하고 우려했던 건 계급적 접근을 중시한 그들의 좌파적 입지 자체는 아녔던 듯싶다. 다만, 그들의 계급주의가 실천적으로는 되려 아동-소년 주체를 대상화하거나 소외시킬 위험 내지 역설을 경계했다고 할까.
 
어쨌거나 소파로선 그때도 그때지만, 어린이날을 기념한다며 2012년인 지금 여기서 치러지는 ‘소문난 잔치’들에 관해서도 할 말이 꽤 많을 듯허다. 각종 볼거리로 더 없이 가득하고 왁자하긴 하나, 막상 "비밀스런 이름"의 몸짓에 행복해하긴 커녕 허기진 소외에 시달리지나 않음 그마나 다행인 요즘 풍경을 보다 보면, 아마 더더욱 그렇잖으까. 아이든 부모든 어느 쪽이 더하다 할것없어 뵌다면서 말이다.
 
 
죽은 소파야 설사 할 말이 많은들 말이 없다 치고, 그의 죽음과 별개로 그와 어떻게든 맺어진 인연 속에서 살아 가는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좋을까나. 지금 여길 사는 우리에게 나날이, 아이 어른 할것없이 (되)살려야 할 비밀스런 이름의 몸짓들이란 과연 어떤 것일는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5/06 23:56 2012/05/06 2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