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의 특성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몇 개 있다. 수세기동안 사회에 변화가 없었다고도 하고,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에 또...
뭐 여하튼, 공사 구분이 불분명하다는 얘기도 이런 '근거'들 중에서 한자리 차지 하는 것 같다. 더 정확히, 아니 솔직히 말해보자. 이건 한마디로 동양의 공, 사에 관한 윤리가 '전근대적', 곧 '후진적'이란 얘기다.
때문에 저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이것을 하나의 편견으로 보고, 자신은 이런 편견에 맞서기 위해 중국을 연구소재로 삼았다고, 한국어판 서문에서, 얘기하는 것은 신선한 클리셰로 다가온다. 사이드 이래 서구중심주의 비판이라는 테마는 이제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정통 '동양학' 분야에서 '동양주의'(오리엔탈리즘)를 비판하는, 따라서 말 그대로 정면돌파의 치밀한 실증적 연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신선하게 느끼도록 하였던 것 같다. 기대는 일정부분 충족되었다고 본다. 저자가 수행하는 분석은 칼 만하임 식의 '관념 분석'이다. 이 애매모호한 대상에 대해 적어도 분석이라는, 똑똑 끊고 좍좍 자르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비교라는 시야가 요청되는데, 저자가 중국 관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물론, 서양 관념과, 일본 관념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공[오오야케] 관념은 '큰 집(大宅)'이라고 하는 조정, 군주, 공가(公家)만을 의미했는데 반해, 중국의 공관념에는 여기에 도가적 천(天) 관념이 침투한 결과, 평분, 균등, 연통 등의, 다소 (우위) 가치를 가지는 의미들도 포함되게 되었다는 발견(!) - 이 발견은 꼭 저자만의 것은 아닌 듯하다 - 이나, 같은 천(天)이라 하더라도, 서양 기독교의 천(天)이 인간에게 완전히 외재하며, 불가항력적이었던 나머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자연'의 질서를 지향하는 반역을 꿈꾸도록 하였던 것과 달리 중국의 천(天), 곧 리(理) - 저자의 연구대상은 기본적으로 송학(宋學) 이후이다 - 는 인간자연에 내재하고, 또 비자립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인간자연이 이것과 대항할 필요가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 분석 등은 초학자를 전율에 빠뜨린다.(너무 오버인가?)
아무튼, 여기까지만 보자면, 특히 서양의 것과 비교할 때 중국의 관념이 역시, 그 '결정적인' 분기점이 없이 정체되어 온 것이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중국의 천(天), 곧 리(理), 다시말해서 천리자연(天理自然)" - 이는 유가의 관념에 도가의 관념이 침투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 은 "어느 시대에나 인간자연이 이것과 대항할 필요가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 분석에서도 느껴지는 바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진가는 여기서 부터인데, 실상 저자의 본격적인 분석은 중국 관념 내 자기 비교에 대부분이 할애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저자의 박학의 진가가 나타난다. 문제의 제기를 위해 선진시대 문헌을 인용한 부분들은 보면 조금 중복된 감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송대 이후, 명대, 청대의 관념을 보여줄 대표적인 문헌을 인용하고, 또 그것들 간의 질적 차이 매우 그럴 싸하게 분석해 낸 대목에 이르면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아무튼 간에, 이 책에 등장하는 바 중국식 공 관념의 핵심은 천(天)을 매개로 한 확장, 하지만 여전히 인간자연 내부에 침투하는 확장인 것인데, 이 천(天) 관념이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자연 내부에 침투하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자연의 역사적 변화에 맞추어 변화하기까지 한다.
가령, 송학의 창시자 정이천이 부자간의 정(情)이라 하더라도 사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 자체 공적일 수 있다고 말했을 때의 공 관념은 - 당연히 부자간의 정(情)도 천륜이므로 공이 될 수 있다 - 인간관계의 윤리에 한정된 것으로, "통치자의 마음씀씀이가 천륜에 비추어 '공적이어야' 한다"는 류의 주장을 함축한 것이지만, 명대 말이 되면 똑같은 논리가 확장되어 군주의 정(情;욕망!)도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되는 진전을 보이게 되고, 청대 말이 되면, 드디어 공사 구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서 군주의 욕망(통치욕, 덕욕 등이겠지)보다 민의 욕망(치부욕, 잇속 등)이 '양적으로!' 더 우월하므로 이것이 공이라는 식의 담론이 등장하게 된다는 점 등이 분석되고 있다.
이 천(天) 관념의 (자기)변화! - 여기에, 정체하지 않는, 중국식 관념의 특수성이 있다. 그러니까 서구중심주의를 훌륭하게 비판한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책의 주장을 애써 따라가기만 할 수 있을 뿐, 건설적으로 비판하기엔 역부족이다. 얼핏 얼핏 너무 과감한 주장은 아닌지, 의심가는 부분도 보인다. 또한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분석은 시대별로 중심 관념만을 분석한 것이고, 기층민중('生民')의 현실 분석에 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 책이 일본 학계에서는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만한, 아니, 이런 류의 과감하고도 '재밌는' 분석을 왜 한국 논문에서는 못발견하는걸까.
(미조구치 유조, 중국의 공과 사, 정태섭, 김용천 옮김, 신서원, 2004 ; 원서는 1995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