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첫눈오다.

2006/11/30 11:01

11월 30일. 제대로 된 건, 이것이 올해 첫눈인 듯.

 

아침에 라디오를 듣다가 눈온다는 얘기에 고개를 드니, 창밖에 함박눈이 오고 있었다. 지금은 싸락눈으로 변해서 계속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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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30 11:01 2006/11/30 11:01

[영화] 가족의 탄생

2006/11/29 21:22

※ 사진은 역시 네이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른 바 '콩가루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다. '관계의 가벼움', 또한 '가벼움의 무거움'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 아닐까.

 

흔히 가족사라고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토록 말하기 힘든 주제가 된 건, 아마 공중파 드라마에 나오는 표준적인 가족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인자한 할아버지, 힘들지만 내색 않는 아버지, 집단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느라 바쁜 어머니, 말 안듣지만 언젠간 부모님을 닮아갈 것이 예정된 아들과 딸, 이런 것이 갖춰진 가족을 현실에서 찾기 힘들다는 것은 굳이 표준과 현실에 관한 미셸 푸코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식적인 사실일 것 같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머니라는 분들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으로부터 나온 컴플렉스를 자식에게 마구 퍼부어 대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사인 것이다.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떡볶이집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문소리), 군대 갔다가 제대를 했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동생(엄태웅), 그 동생이 5년만에 들어올때 '달고 온' 20살 연상의 여성(고두심), 그 여성의 전 남편이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은 딸(이름 미확인), 가정이 있는 남성을 애인으로 둔 시한부 인생인 어머니(미확인), 그런 어머니를 거부하고 혼자 사는 딸(공효진)...(이게 다가 아니다.) 이런 캐릭터들이 비정상인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런 캐릭터가 가진 그런 자리에서, 영화는 시작하고 전개된다.

 

뜨개질한 털옷처럼, 잠시 그럴싸한 옷이되었다가, 다시 풀려 실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 인간의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하고 많은 실의 인생에서, 옷이라는 형태만을 우리가 의미 있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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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모든 것들의 혼합에서

  한 영국인(Englishman)이라는 이질적인 것이 시작되었다.

  갈망하는 강간들에서, 격렬한 욕정에서,

  허식적인 브리튼인(Briton)과 스코트인(Scot)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낳은 자손은 곧 고개 숙이고 그들의 암염소 새끼를

  로마의 쟁기에 끌어매는 것을 배웠다.

  거기에서부터 이름도, 민족도, 언어도, 명성도 없는,

  잡다한 혼혈인종이 나왔다.

  색슨인(Saxon)과 덴마크인(Dane) 사이에 주입된

  그들의 뜨거운 정맥에서는 새로 섞인 피가 흘렀다.

  그들의 음탕한 딸들은 부모들처럼

  모든 민족을 무차별한 욕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구역질나는 종족은

  영국인이라는 추출된 혈통을 직접 담고 있었다.

                

              - 다니엘 데포우(Daniel Defoe), <진짜 영국인>(The True-Born Englishman)

(윤형숙이 번역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2002, 나남출판) 첫머리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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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감독 / 문소리, 고두심 등 출연 / 2006년 5월 18일 개봉 / 113분 /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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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21:22 2006/11/29 21:22

[유머]깨똥치우는개

2006/11/17 09:15

출처: 한겨레 유머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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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7 09:15 2006/11/17 09:15


<<만들어진 고대: 근대 국민 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삼인, 2001

 

베네딕트 앤더슨 이후로 이런 담론들은 비판적인 역사학의 주류가 된 듯하다. 다시 말해서, 근대 국민국가에 의한 역사 '창조'라는 주제들이다. 여기서는 앤더슨의 '민족'에 대해, 동아시아의 '고대사'가 창조의 대상이 된다. 별로 새로울 건 없지만, 사례를 들어서 치밀하게 분석해 내고 있다. 가령, 한일간 고대사 해석의 차이를 낳는 결증적 사료일 광개토대왕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속민이어서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倭가 辛卯년에 바다를 건너왔다. ...□...백제와 ...□□...新羅... 격파하여 신하로 삼았다.)

 

단파 라디오 방송의 지직거리는 멘트처럼 툭툭 끊긴 이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倭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 바 "임라일본부"설이 성립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건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 당시 광개토대왕비를 설립한 목적 자체가 오늘날 근대 국민국가들의 상호 경쟁체제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왕릉을 둘러싼 여러 제도가 소멸함과 동시에 비문의 독자를 잃은 비석은 원래의 기능을 멈추었다. 그로부터 약 1,200년 후 비문은 새로운 독자를 얻게 되었다. 즉 근대 일본인은 비문을 베낀 묵본을 입수하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앞서 재빨리 자기의 문화적 컨텍스트에 끌어들여 비문을 해독하고 거기에서 근대와 아주 비슷한 국제 정세를 읽어 내었다. 그 위에 인쇄물로 만들어 낸 비문은 새로운 형태의 텍스트로서 광범위한 독자를 획득하게 되었다. 어느새 비문의 '왜'는 아무런 의문 없이 일본으로 읽혀져 고구려의 텍스트는 근대 일본의 텍스트로 커다란 전환을 하게 되었다.> p.77

 

사실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주제이긴 한데, 실증적 치밀함과 논리의 기발함 사이의 간극을 연결짓는 글쓰기의 기교가 정말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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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1 22:05 2006/11/11 22:05

어두컴컴한 실내에 흐르는 은은한 음악. 그것은 수천만원짜리 오디오 시스템과 그것을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는 조르바 같은 주인장이 빚어낸 리얼 오디오일 수도 있었으리라. 손님들은 모두 캐주얼한 느낌을 주는 정장을 하고 한쪽 팔을 탁자에 의지한채 머리를 괴고 음악에 몰두하며, 이순간 자신이 인류가 만든 문명의 최고 정점에서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들에게 주어진 한뼘의 자유를 침해하는 낯선 술꾼-취한 그는 거기가 선술집인줄 알고 있었다-의 고성에 클래식 음악 애호가 주인은 포르테 부분을 진행하는 음악의 볼룸을 최대로 키우는 것으로 응징했던 것일수도 있다. 얼마나 문명적인, 고상한 응징인가? 술꾼이 빚어내는 거친 숨소리와 고함소리와는 판이하게 자신을 구별할 수 있을 그러한 태도.

 

이때 술꾼이 손을 들고 주인에게 말했다. 음악 소리를 좀 줄여 달라고. 주인이 음악을 낮추는 듯 볼륨에 손을 갖다 대었으나, 음악은 오히려 더 커진 듯 변함없는 웅장함을 만들어 냈다.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웅장함. 귀먹은 만년의 베토벤조차 두 손 들 수 밖에 없었을 위대한 사운드.

 

주인이 그 제스쳐를 취한 후 뭐라고 말을 했는지 술꾼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당시에도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이해했는지 알수 없으되, 주인의 말을 들은 술꾼은 곧,

 

"음악이 아무리 좋아도 그건 손님을 위해 있는 것이니, 손님이 원하는대로 해 주시오"

 

라고 말했다. 스스로 속물로 규정한 대상에 대해 자기가 응징할 권한이 있는 문화부 장관이라도 되는 줄로, 술꾼은 착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순간, 조르바를 닮은 주인이 또 뭐라고 했는지 술꾼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마지막 말을 제외하고. 즉,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나가 주세요."

 

그런데, 동시에 뒤쪽에서 어떤 또다른 고상한 손님들이 술꾼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여성이었다.)

 

"우리는 볼룸 큰 게 좋은대요?"

 

그런데 그 말은 술꾼에게 이렇게 들렸다. 즉, "네가 뭔데 손님을 대표한다고 난리냐?"

 

술꾼은 그 순간 근엄한, '스나브'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자칭의 '역사적 사명'에 도취되어, 저 버르장머리 없는 주인장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주인 앞으로 나가 소리쳤다.

 

"이곳은 당신의 가게이기도 하지만, 손님의 가게이기도 한 겁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음악에 묻혔고, 주인은 "삼만원입니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듯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숙인채 나가는 술꾼의 등 뒤에서 그 고상한 음악애호가들은 어떤 경멸을 마음 속으로 토로했을까. 문명대 야만, 과학과 자연, 현대와 전통, 세련된 것과 투박한 것,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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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1 21:39 2006/11/11 21:39


 <<눈>>,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05

 

소멸직전의 알라딘 포인트로 급히 산 이 소설을 오가면서 보고 있다. 급히 산 것이 하필 이것인 이유는? 물론,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거니까.(작가가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세계지도에서 터키의 위치를 찾아보시라. 터키는 현재 EU에 가입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기존 유럽 연합 가입국들은 시큰둥 하다고 한다. 별볼 것 없고, 더우기 터키를 유럽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으므로.

 

터키가 유럽이 아니라면 어디인가? 아, 중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슬람 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란,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등과 친구인가? 그러나 케말 파샤의 초대 정부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헌법 조항을 삭제해 버리고 과격한 서구화를 추진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받은 혼란과 고통의 무게는?

 

읽는 동안 내내 황석영의 <<손님>>이 생각났다. 옛날에 마마, 사회주의, 기독교 같은 손님들때문에 홍역을 치룬 우리 역사를 다룬 소설이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이 소설이 한 수 위인 것 같다. 이건 단순히 역사나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또 아닌 것같다. 모든 '정치적인 것' 속에 놓인 '순박한 삶'의 이야기, 모든 '순박한 삶'을 싸고 있는 '정치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 모든 '순박하고 정치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신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이야기.(여기에는 세속적인 사랑도 들어간다.)

 

작가는 이것을 추상어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터키인의 일상이라는 이 소설의 줄거리 속에, 정확하게 말하건대, '녹여내고' 있다. 어떻게 이런 마술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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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0 00:59 2006/11/10 00:59

폐차

2006/11/10 00:20

5년간 내 여행의 충실한 발이 되어 주었던 자가용(씨에로, 1994년 모델, 2002년 초 중고로 구입)을 폐차시키고 나서, 나는 생태주의자의 삶을 지향하기로 했다. 과거 내 행적에 얼치기 생태주의자로서의 자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번엔 적극적인 습관의 '전향'이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남양주에서 신림동 오는 길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니까 2시간 30분 여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간 동안 적어도 1시간 이상은 가벼운 독서를 할 수 있고, 1시간 이상은 잠을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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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0 00:20 2006/11/10 00:20

김광석_서른즈음에

2006/10/31 01:07

도대체 왜 김광석이냐?

라고 물을 수 있을까? 그만큼 김광석이 이슈화되었을까?

 

우리는 왜 김광석을 좋아하는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만큼, 김광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된걸까?

 

이런 것들은 잘 모르겠다.

다만, 김광석은 80년대가 가고, 90년대가 가기 전에 유행했던 가수.

80년대식으로 살아보려는 것이 정말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가수.

90년대로 탈출하는 것도 녹록치 않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가수.

하여, 80년대와 90년대의 사이, 아니, 영웅적 세기와 비극적 희극의 세기 사이에서 내 마음을 달래주는 가수. 그런 가수여도 좋으리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희망이라는 비젼이 있다면,

나에게 불합리하게 장애가 되는 것들에 대해 그 비젼의 이름으로 자신감을 갖게 해줄 그 비젼...

내가 가진 것만으로 승부하라고 끝없이 나를 차분하도록 누르는 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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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31 01:07 2006/10/31 01:07

"일리치는 학교나 병원 그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이 어느 정도 특정한 단계에서 제도화되면, 학교는 사람들을 더 우둔하게 만들고, 병원은 더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다."

 

라고, 어떤 논자들이 일리치를 빌어 말했다. 일리치가 한때 카톨릭 신부였고, 유명한 <<탈학교 사회>>라는 책의 저자이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라는 점은, 모두 어떤 특정 "제도"에 대한 이야기이니, 더 아이로니컬 하다.

 

로마 바티칸으로부터 위험 인물로 낙인 찍혀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이후 그의 저작들은 보수파들로부터 희화적인 것으로, 진보주의자들로부터 복지국가 이념에 반하는 반동적 사상으로 낙인찍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게 된다. 죽기 직전 20년 동안은 거의 공적으로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잊혀졌어도 글을 쓰는 용기가 진정한 인텔리겐치아의 자세일 것이다. 잊혀진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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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2 00:46 2006/10/22 00:46

황혼의 호로비츠

2006/10/18 12:03

우리 서당 동네 슈퍼 앞에 피아노 가르쳐주는데가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져서 슈퍼 아주머니에게 여쭤봤더니 이사갔다고 했다. 덧붙이길,

 

"그 할머니요? 70 넘은 노친네한테 누가 피아노 배우겠어. 정신도 좀 이상하고.

옛날 사람치곤 참 똑똑했는데...

할머니가 남편한테 충격을 좀 받았나봐. 남편이 어린 여자한테 가서..."

 

이렇게 하여, 나의 피아노 교습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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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8 12:03 2006/10/18 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