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

2006/08/14 11:08

고등학교때와 재수할 때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표였고, 대학에 들어가면, 내 주위의 문과반 친구들이 대개 그랬듯이,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만난 첫번째 지적 충격은, 물론 '계급'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론적 기여를 했다고 하고, 마르크스까지 관여시킬 것도 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사는 것. 그만큼 흔한 주제였기 때문에 나에게도 쉽게 찾아온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련의 지식 체계를 흡수하고, 또 뱉어내는 것이 그 시절의 나의 지적 일상이었다고 기억된다.

 

이 개념으로부터, 나의 가치지향이 투쟁, 특히 정치투쟁이라는 방식을 용인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미 낡은 것이 되어가던 방식이었지만, 시골에서 갓 올라온 어린 사람에게 다른 선택의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는 '다른 방식의 삶'이라고 하는, '방식' 자체의 문제를 많이 생각했다.

 

이로부터 대안적 삶의 형태를 고민하는 일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군대에 갔다와서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고려한 주제가 '대안학교'에 대한 것이 되었다. 물론, 이 고민을 사회학적 주제로 용해시키기에 내 역량이 부족했던지, 이 주제는 나에게서 쉽게 잊혀졌다.

 

학부를 졸업할 무렵 두번째 충격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식민성'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신입생 시절의 고민은 그 자체로 전 세계 모든 장소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매력적이었지만, 보편성에 대한 추구는 그만큼 많은 허술함을 노정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때의 내가 느끼기에 구체적인 '바로 이 장소'에 대한 고민을 결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첫번째 충격이 통시적인 문제, 곧 자본주의의 역사라고 하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는데, 두번째 충격이 더해져서 공시적인 문제, 즉 비동시성에 관한 주제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사실, 이것은 학부때 사회학과에서 제시하는 커리큘럼만 잘 따라갔어도 일찌감치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었을 지식들이었을지 모른다. 가령, 발전사회학(사회발전론)을 3학년때 열심히 들었다면, 세계체제론에서 제시하는 비동시성의 문제들에 대한 인식을 조금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대학원에서 한국사회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편성에 대한 특수성의 문제설정은 식민지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일제시대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대안적 삶의 방식이라는 문제는 교육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석사논문, "일제의 대한(對韓) 식민지 교육체계의 구상과 실행"은, 물론 여러 사건과 요소들을 포함하여, 나의 이러한 관심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들어간(온) <태동고전연구소>는 동양학 전공자들을 위해 한문지식을 전수하는 기관이다. 동양학이란 말에 이미 포함되어 있듯이, 한학이라고 하는 전통적 지식이  아니라 '동양학'이라고 하는, 근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성립된 현대적 학문범주를 위한 기초지식의 습득이 이 기관의 목표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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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4 11:08 2006/08/14 11:08

정은임 아나운서

2006/08/07 06:53

 

정은임 아나운서.

내가 대학 다닐때, 어쩌면 그 이전부터 MBC 라디오 방송에서《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

 

혁명이 일이 아니라 로망인 것처럼 보인 사람들에게, 아니 어쩌면 진짜 혁명가들에게도, 밤은 찾아왔을 것이고, 그들은 그들이 낮동안 부르짖던 무거운 구호와는 전혀 다른 조용한 이 아나운서의 음성에 끌렸을 것이다. 분위기 있는 용모에, 착한(듯한) 마음씨에, 아나운서로는 드물게(아니, 전국의 아나운서 분들께 죄송합니다만,) 사회성 있는 행보 - (그는 MBC 노동조합의 열렬 조합원이었다.)

 

아직 서슬퍼른 레드컴플렉스가 이 사회의 저류를 흐러던 때에, 어느 고별 방송에서였다던가, <인터내셔널>가를, <철의 노동자>를, 영화음악이랍시고, (영화음악인건 분명하지) 공중파 방송에서 틀어주었다던 사람.(물론 피디가 더 대단하다.) 이때문에(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TV는 꿈도 못꾸고 라디오만 나오고, 또 그나마 여러번 종영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사람.

 

미인은 박명이라던가, 2004년 7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결국 8월 4일날 저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2년이 지난 지금, 물론,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 사실이 포털사이트 다음에 올라와 있길래, 나도 여기서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간다.

 

이 사람, 그런데, 이름난 4년제 대학 나온, 아마도, 집도 잘산다던 사람. 대학 다닐때 자기 집 가정부 아주머니랑 계급의식에 대해 얘길 나눴다던가?(이건 풍문으로만 듣던 얘기라 확실치 않음.)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사람이 보인 첨예한 사회성도, 이 사람의 그런 유한계급의 풍모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나도 그렇게 많이 생각했고.

 

이런 경우 사람들은, 십중 팔구 세계관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뭐 고민할 것 있겠는가. 이 사람이 '진짜'이든, '사이비'이든, 그건 이 사람의 진심만이 아는 문제인걸.

 

아래, 어느날 방송의 오프닝 멘트라고 하는군.(daum에 난 기사에서 퍼왔음. 사진도 거기서 퍼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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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22일 고공 크레인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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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7 06:53 2006/08/07 06:53

【 堯임금이 말씀하시길, 「누가 이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겠는가?」 하니,

放齊가 말하길, 「임금님의 아드님인 丹朱가 깨여 있고 또한 명석합니다.」 하니,

堯임금이 말하길, 「아! 고집스럽고 흉악하다. 안된다.」

堯임금이 또 말하길, 「누가 마땅한 者인가?」 하니,

驩兜가 말하길 「共工이 두루 백성을 모아서 공을 펴고 있습니다. 쓸만합니다.」 하니,

堯임금께서 말씀하시길,  「共工은 말은 잘하는데, 일하는 건 편벽되어 있다. 공손한 것 같으면서도 하늘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안된다.」

堯임금이 또 말하길, 「아, 四嶽아! 엄청난 洪水가 하늘에 넘치고, 콸콸 넘쳐 산을 둘러싸고 언덕에 넘실댄다. 백성들이 근심할 것이니, 이를 다스릴 수 있는 者가 있는가?」

모두들 鯤이 可하다고 하니,

堯임금이 말하길, 「鯤은 命을 어기고 동료들을 어지럽혔다. 안된다.」 하니,

嶽이 말하길, 「그래도 말입니다. 한 번 시켜보고 못하면 그때 그만두게 하십시오.」 하니,

堯임금이 이에 嶽의 말을 듣고, 鯀을 등용했다. 그런데 9년이나 했는데도 功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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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堯임금의 일화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일이란, 물론 치수사업이다. 관심을 끄는 점은 堯임금의 조직 장악능력이다. 신하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더 많이 물어본다. 그러면서도, 여기서는 안나오지만, 결국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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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2 14:39 2006/08/02 14:39

[시] 閣夜

2006/07/10 14:21

閣夜

                         두보

 

歲暮陰陽催短景 동지섣달, 시간이 짧은 볕을 재촉하고,

天涯霜雪霽寒宵 하늘 끝 눈서리 갠 차가운 밤.

 

五更鼓角聲悲壯 5경의 고각소리 비장하며,

三峽星河影動搖 3협의 은하수 그림자 떨고 있네.

 

野哭千家聞戰伐 들에 곡하는 소리, 온 집에 전쟁 소리 들리고,

夷歌幾處起漁樵 오랑캐 노래가 몇 곳에서 어부와 나뭇꾼을 깨우네.

 

臥龍躍馬終黃土 제갈량처럼 똑똑한 이도, 공손술처럼 멍청한 이도 결국 누런 흙이 되었는데

人事音書漫寂寥 사람살이 소식담은 편지 한장, 오래도록 적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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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0 14:21 2006/07/10 14:21

비겁은...

2006/07/08 00:16

"비겁은 비겁한 자의 통행증, 고귀함은 고귀한 자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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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8 00:16 2006/07/08 00:16

<서울, 1945> 드라마의 시간대가 한국전쟁으로 접어들고 있다. 다시말해서 3·1운동 무렵 태어난 사람들이 그 생의 절정기에서 한국전쟁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전쟁, 곧 '6·25' 문제를 다룬 서사극들이 흔히 중심에 놓고 다루던 문제인 소위 '인민재판'이란 것을, 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다룰지 벌써 궁금해진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개전초기 인민군 진주와 더불어 남한 정부차원에서 자행한 정치범 사살 문제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매개인 것 같다. 왜냐하면 주인공 4명 중 1명인 <혜경>이가 정치범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를 안보시는 분들을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혜경이는 사회주의자인 옛 애인 <운혁>이를 북한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당국에 붙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이다. 미군정 군사고문단 보좌관인 현재의 약혼자 <동우>는 간밤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난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서대문 형무소로 달려간다. 정부의 철수 뒤에는 정치범의 사살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

 

한편 그 시각, 혜경이의 도움으로 북한으로 탈출했다가 인민군 중좌가 되어 남한으로 진주하는 인민군과 함께 의정부까지 내려와 있던 운혁이의 머리속도 학살이 자행되기 전에 혜경이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차있었다. 인민군이 아직 서울에 진주하기 전, 남한 정부는 철수를 시작한 시점. 끝내 동지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아직은 국군의 방어 아래에 있던 서울로 잠입한다.

 

혈혈단신이지만 아국의 실력자인 현재의 애인, 그리고 승승장구 진주하는 적국의 실력자인 과거의 애인. 두 애인이 사살 직전의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로 긴박하게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이야기는 내일 이시간으로...

 

실상, 일제시대와 한국전 당시를 통틀어 사상범이 많이 갖혀 있던 서대문 형무소의 성격때문에, (지금은, 그래서 형무소가 기념물로 지정되었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이 드라마의 묘사가 리얼리티를 얻게 되는 것 같다. 혜경이가 끌려나온 형무소의 한 뜰에, 남로당 조직책 거물간첩 김삼룡을 비롯한 다수 사회주의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운혁이가 무모하게 서울로 잠입한 것도 혜경이라는 '연인'으로 상징되는, 2000여 '동지'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정치의 야속한 본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연인을 구하러 달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격렬했던 역사 속에 잘 안착되어 겹쳐지자 나름대로 재미가 느껴진다. '대표성의 문제'를 그럭저럭 잘 해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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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1 23:28 2006/07/01 23:28

            …

언젠가 내 시의 한 줄이
그들의 귀에 다다를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소박한 눈동자는 눈을 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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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9 01:43 2006/06/19 01:43

특히 끝부분을 유심히 보시기 바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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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동향_'개화기 자유주의' 연구 비판적 검토
하나의 틀에 다양한 사상유파 가둬…모순된 개념, 공동연구의 한계

2006년 05월 29일   이승환 고려대 이메일 보내기

한국 자유주의의 현실은 매우 기형적이다. 냉전체제 아래서 한국의 자유주의는 반공독재나 부국강병을 위한 중상주의적 계획경제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중핵인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수호’라는 이름으로 탄압당했고, 오직 정권과 결탁한 재벌들의 경제적 자유만이 자유주의가 지향해야할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호도됐다.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화 시대가 되어도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양심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 같은 핵심가치는 외면한 채 국가보안법 같은 반자유주의적 악법을 옹호하며 ‘시장의 자유’와 ‘소유의 자유’만을 강조하고 있다. 현실의 자유주의가 기형적이라 해서, 우리가 본받을만한 자유주의의 원형이 지구 어느 곳에 표본으로 전시돼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는 오직 다양한 자유주의의 변종들만 존재할 뿐, 얼마나 ‘더 건강한’ 자유주의를 만들어내는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 합의와 실천적 노력에 달려있다고 본다.


2000년을 전후해 국내 학계에서는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히 진행됐다. 구한말의 위청척사운동, 동학운동, 개화운동을 자유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조명하는 것에서부터 일제시기의 애국계몽운동과 자강운동에 내재된 자유주의적 성격과 그 한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제헌과정과 제헌헌법에 나타난 자유주의의 이념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까지 한구 자유주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짧은 기간에 비교적 풍성한 결실을 거뒀다. 그 가운데 특히 구한말의 개화파와 일제시기 계몽운동가들이 지녔던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은 현대 한국의 기형적 자유주의와 모종의 가족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흥미를 유발한다. 


개화파가 지녔던 자유주의 사상과 관련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개화파 사상가들이 수용했던 자유주의가 매우 선택적이고 제한적이었다는데 동의한다. 가령, 개화파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평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종국에는 ‘通義’ 또는 ‘天地之理’와 같은 공동체의 도덕원리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 태도를 과연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와 전통 문화(유교)의 절충적 융합으로 볼 것인가”. 이와 관련해 연구자들은 평가를 달리한다. 김주성(‘김옥균·박영효의 자유주의정신’(정치사상연구 2집))은 개화파들에게는 자유주의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결여돼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정통자유주의에서 일탈한 ‘비자유주의적’인 것이라고 평가한다. 자유주의의 기본원리에 의하면 타인에게 危害를 가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으므로, ‘통의’와 같은 도덕원리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비자유주의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 안외순·장동진·정용화(‘애국계몽운동과 준식민지에서의 자유주의’·‘초기개화파의 자유주의 관념형성의 특질’(한국사상과문화 21집), ‘근대적 개인의 형성과 민족’(한국정치학회보 40집1호)) 등은 개화파의 이중적인 모습을 ‘자유주의와 유교적 가치의 절충적 융합’이라고 평가한다. 즉 자유주의와 유교윤리의 장점을 상보적으로 융합해 보다 나은 사회체제를 모색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더욱이 제국열강의 압박 속에서 새로운 근대국가를 모색해야했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자유는 무제한으로 허용돼야 하는 종국적 가치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존립을 위해 선택적으로 허용돼야 하는 수단적 가치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고 동정적 이해를 보내는 것이다.


개화파에 대한 이런 엇갈린 평가는 연구자들의 전공과 학문방법의 차이에서 일정부분 기인한다고 본다. 김주성은 철학전공자로서, ‘불침해의 원리’라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틀’로 개화파를 분석한다. 반면, 안외순·장동진·정용화 등은 정치사상전공자로서 19세기후반이라는 역사적 현실 안에서 개화파의 제도개혁 프로그램에 나타난 자유주의적 요소를 재구성하려 한다. ‘철학적 분석’과 ‘사상사적 이해’로 구분되는 양자의 접근방식엔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방식의 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개인의 가치보다 부국강병을 더 우위에 두고, 도덕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던 이 시기의 개혁 프로그램은 김주성이 지적한 것처럼 과연 진정한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합방을 전후로 전개됐던 계몽운동과 자강운동에 나타난 자유주의의 성격과 그 한계에 대해서는 안외순·전재호·장동진·강정민 등의 연구자가 착실히 연구성과를 쌓아왔다. 특히 안외순의 연구는 애국계몽운동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는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이들의 노선이 진정 ‘애국적’이었는지 묻는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다. 즉 박은식과 같은 계몽운동가들은 원칙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듯 했지만, 결국은 개인의 자유를 현존하는 국법질서 아래 구속함으로써 그 한계를 노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명백하게 주권을 침해당하며, 문명개화를 명분으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에 편승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적극 옹호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노선을 택하는 편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안외순은 술회한다. 안외순의 이런 판단은 당시 계몽운동가들이 지녔던 문명개화론이 그다지 자유주의의 이념에 투철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전재호의 연구(‘동학과 자유주의’(한국사상과문화 21집))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 시기에 실력양성론을 뒷받침했던 사회이념을 ‘국가중심주의적 자유주의’와 ‘사회진화론’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이 시기 지식인들이 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국가와 사회를 위한 개인의 책무를 강조하고 민족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조했던 이유를 식민지적 조선의 현실에서 찾는다. 그러나 과연 ‘국가중심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을까. 국가의 간섭에 대항해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것이 자유주의의 목표라면, ‘국가중심’이라는 개념과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서로 상치되지 않는가. 왜 연구자들은 ‘국가중심적 자유주의’나 ‘반자유주의적 자유주의’라는 모순된 개념을 쓰면서까지 이 시기의 사상을 자유주의의 틀 안에 귀속시키고자 하는가. 


개화기와 식민지 시기의 자유주의에 관한 논문 중 상당히 많은 편수가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연구비지원에 의해 작성됐다”고 밝히는 것으로 봐, 이 작업들은 공동연구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공동연구는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때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시기의 다양한 사상의 유파들을 자유주의라는 한 틀로 조명하려다 보니, 때로 자유주의와 별 관련이 없는 유파마저도 무리하게 자유주의의 한 유형(또는 변형)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가령, 동학과 자유주의의 관련성을 다룬 한 연구에서는, 동학 경전에서 자유주의에 관한 명시적인 전거를 찾을 수 없었던 탓인지,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식으로 모호하기 그지없는 서술을 한다. 공동연구의 기획의도에 맞추려다보니 ‘반자유주의적 자유주의’와 같은 모순된 개념이 등장할 뿐 아니라, 인민주권이나 보통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자유주의와 구분하지 않은 채 자유주의의 특징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이런 오류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연구자 개인에게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볼 땐 연구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공동연구가 지닌 한계에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이런 주제를 기획한 공동연구 입안자들에게도 약간의 책임이 있겠지만, 공동작업에 참여해 한시적으로나마 생계를 보장받지 않으면 안되는 신진 연구인력의 실존적 조건과 더 큰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향후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지원은 공동작업이 절실히 요청되는 토대연구가 아닌 바에는 개별 연구자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승환 / 고려대·동양철학


©2006 Kyosu.net
Updated: 2006-05-29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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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30 23:58 2006/05/30 23:58

진보넷 어느 블로그에서 펀 글임. 글 참 잘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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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좌 뒷풀이에서....

 
글쓰기 강좌 7강.

기획글쓰기.

한겨레의 이제훈기자가 샘이다.

한시간동안 구라만 풀어놓더니....

한시간은 기획안 써온것 검토.

난 안써가서 그냥 듣기만 하다가, 뒷풀이를 한다는 말에 꾹 참았다.

뒷풀이가서 이사람의 경력에서 묻어나오는 뭔가를 빼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꾹꾹 참았다.

 

이 샘, 한때 운동좀 했다.

기자가 꿈도 아니었다.

군대갔다와서 단체에서 활동할 용기는 없고, 취직할 마음도 없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기자가 되었다는....

 

생각은 쬐까 트여있는듯 하다.

뒷풀이 자리에서 2시간 동안 멀뚱멀뚱 앉아 홀짝홀짝 맥주를 들이키다가....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자신의 고민을 풀어놓는다.

올해 졸업했는데, 백수.

기자셤을 준비한단다.

고민이 많은듯. 대추리, FTA등의 기사들을 읽으며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그냥 신문만 보고는 관점을 못갖겠다는.... 그러한 고민....

 

나는 그녀에게 달랑 한마디했다. "직접 대추리에 가서 보세요"

 

이제훈 샘, 이런저런 야그하다가....

조선일보가 어떻구.... 수미일관하지 않다는 비판.

난 속으로 생각한다. 한겨레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대추리에 관한 보도는 더더욱 그렇지 않았던가....?

 

이 샘, 내가 노힘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눈치를 보는듯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왜 그러지?

 

역시나 대추리와 관련해서 한겨레 내에서도 논쟁이 붙었단다.

그중에서 자신은 보수에 속한다고....

역시나....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 "보수라고 해서 모두 나쁜건 아니잖아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목구멍까지 차오는 말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냥 꾹 참았다.

 

이 강좌의 대부분은 대학생인데, 것도 기자가 되고파하는 이들이다.

그렇다 보니 뒷풀이 자리에서 이 샘에게 묻는 질문들은 '면접을 어케 봐야해요?', '관점은 어떻게 가져야죠?'. '셤은 주로 뭐가 나오나요?'

 

그 속에서 3시간이 넘게 나는 외부인인양 앉아 있었다.

때마침, 그리고 다행히 KTX가 낼 단식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자리를 떠 농성장으로 향했다. 이 해방감....

 

그시간에 차라리 집에가서 잠이나 잘껄.....

아님 할말 다하면서 논쟁이라도 붙어볼껄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드네....

 

에휴....

KTX는 지도부 단식에 들어간단다. 배고파하는 지선동지를 달래고, 농담도 주고 받으며, 긴장을 풀어주고, 삼실에 들어왔다.

단식.... 참 갑갑하면서도 힘든 투쟁방식인데....

어쨋든 하기로 결정했으니, 잘 견뎌내는수 밖에....

 

글은 생각만 갖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 있어야 생생한 글이 나온다.

그걸 오늘 다시 확인한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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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03:54 2006/05/24 03:54

행복

2006/05/22 09:20

말, 글을 안 후부터 줄곧 들려오던 행복론, 모두 요지는 "가까운데서 찾으라"는 것이었지. 그렇지만 내 가까운 곳에 행복이라 할만한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가끔 식구들이 참 좋게 느껴지고, 우리집도 따지고 보면 참 행복한 집이야, 이렇게 생각되긴 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가깝다'는 말을 나는 가족으로 한정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긍정하는 것이 곧 행복의 조건 아닐까.

 

오늘 아침, 흐리고 이슬비, 좀 서늘함. Beatles, , 시험공부(하기 싫음), 아침밥, , 다방커피 한 모금...그리고 이 곁에 한 사내가 있다...아, 담배 대신 맛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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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2 09:20 2006/05/22 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