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자퇴보단 그 문제의식 오래 품길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학교의 부조리에 입 다물고 공부만 해야 하는 현실 답답해요
 
 
한겨레  
 
 
» 학교의 부조리에 입 다물고 공부만 해야 하는 현실 답답해요.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Q 저는 고3입니다. 그런데 공부하기 싫어서, 등급이 안 올라서, 수능이 점점 다가옴에 대한 답답함보다 눈에 들어오는 현실에 입 닥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답답합니다. 얼마 전, 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개그랍시고 장애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다른 선생님은 이른바 지잡대(지방 잡대학이라는 뜻)에 다니는 학생들을 개그 소재로 씁니다. 그러고는 교원평가 시즌이 되니 나쁜 말 쓰지 말라고들 합니다. 제가 이 답답함 속에서 하는 일은 신문을 보면서 혼자 울화통 터트리고, 교원평가에 소심하게나마 말을 써내고, 학교 측 비리에 반대하는 단체 홈피에 가서 교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따금 알리는 것뿐입니다.

학교에선 성적도 괜찮고, 선생님들하고도 친하고 그냥 평범한 애여서 그런지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다들 놀랍니다. 그렇지만 다들 “뭐 어쩌겠냐”는 말뿐입니다. 열아홉밖에 안 된 애들이 이 모든 것에 체념하고 있어야 되는, 또 이런 현실에 순응하고 앉아 있는 저 자신도 짜증납니다.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생각해오던 자퇴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도 무척 큽니다. 누군가는 고3이어서 세상에 불만이 많을 때라 하더군요. 잘못된 것에 대해 불만인 게 문제인가요? 일단 입 닥치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다음에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게 과연 맞는 건지 전 정말 답답하고 모르겠습니다.

 

A 근 삼십년 전의 일입니다. 외국에서 살다 귀국한 저는 당시로는 ‘국민학교’ 3학년에 전학해왔죠. 담임은 무슨 이유에선지 반장 남자아이를 내 짝꿍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다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어요. 반장은 교묘한 방법으로 한국말이 서툴던 나를 ‘이지메’하기 시작했고 권력이 두려운 다른 아이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지요. 담임은 알았지만 못 본 척을 했습니다. 하루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수업 중 책상을 뒤집어엎고(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극적인 항거)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이건 좀 아니었지만). 담임은 그제야 짝꿍을 바꿔주는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담임은 반장을 따로 혼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나를 따로 불러 넌지시 부탁했지요. 내가 그 반장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그 반장의 엄마 역시 뻔질나게 학교를 드나들었지만 그녀는 나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남자아이보다 그 선생과 엄마가 더 미웠습니다. 아니, 지금도 밉습니다.

뜬금없이 옛날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뭘까요?

1. 불가항력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은 어느 시절, 어느 조직에나 있다.

2. 그 상처를 준 가해자를 묵인하며 보호해주는 시스템도 있다.

3. 항거해도 효과는 내 행동만큼 극적인 효과를 못 가져온다.

 





4. 그러니 걍 못 본 척하고 실속 있게 내 일이나 열심히 하자?

음, 마지막 4번은 아니고요. 잘못된 일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건 건강한 거죠. 다만 부조리한 상황에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이겠죠.

제 경우엔 내 코 석자가 달린 문제였으니 꽥 하며 극적인 쇼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허나 당신은 공부도 선생님과 교우관계도 문제가 없는 평범한 학생. 그런 학생이 신문 읽으며 혼자 울화통 터트리고 홈피 들어가 고발하고 교원평가 솔직히 써내고 친구들과 문제의식 공유하며 ‘나름의’ 항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상 할 수 있는 게 실질적으로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자퇴를 안 한 건, 자퇴까지 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서 안 했던 것뿐이고요. 그러면서 솔직하지 못하게 ‘자퇴’가 최선의 정의증명이라 믿으며 그것을 못해낸 자신의 나약함을 탓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건 부당한 세금부과.

무엇보다 체제순응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고교 자퇴면 참 곤란하지요. 어느 경우에도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이 스스로를 통째로 삼킬 수 있는 것을 이데올로기 삼아선 안 됩니다. 왜? 일단은 고교생 하나 열받고 자퇴할 때마다 선생 하나 안 잘리니까. 그리고 내 공부와 불의를 못 참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대학 거부? 어른들이 제시한 ‘이래서 공부하고 대학 가야 한다’는 이유를 묵묵히 따르거나 반발하는 대신 열아홉, 어리지 않은 나이면 나 자신의 이유가 있어야 하겠지요. 없다고요? 그럼 대학 가서 더 공부하고 생각해보길.

또한 극단적 선택은 열정을 쉽게 소진시킵니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향한 개인적 레벨의 항거는 비효율적이기 십상입니다. 그 비효율의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정직했다’는 합리화로 자위하는데, 한 번의 고양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난 뒤의 뒷감당적 소모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외롭습니다. 게다가 에너지 한번 고갈되면 그다음엔 포기하고 잊고 타협하는 것에 스스로 얼마나 관대해지는지요. 인간은 심리적 밸런스를 찾으려는 동물이니깐요. 그런데 그러기엔 그간 품었던 그 문제의식들이 아깝지 않나요?

 
»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의식이 있다면 그것을 소중히 오래도록 품고 어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고민하고 생각하는 데 적절한 타이밍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생각을 토대로 최적의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선 최적의 타이밍이 있고 거기에는 기다림이라는 더더욱 답답해 뵈는 숙제가 있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너무 실리주의적이라고요? 예, 전 너무 실리적이라 초딩 때 그 트라우마로 빈정상해 급기야는 한국말로 먹고사는 직업을 끝끝내 성취했답니다. 열아홉에 느꼈던 감촉에 비해 인생은 생각보다 길더라고요.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상담은 gomin@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