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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생각해보면 전공이라는 것도 자신의 공부에 따라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시절 필자는 교육학을 전공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현행 한국의 입시체제에서 교육학과는 내신이 아주 높아야 갈 수 있었고, 본인은 교육학과에 갈 수 있을지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7년 초 청소년 학술대회에서 퍼실리테이터에게 이런 의문을 이야기 했더니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생의 공부가 전공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책을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라는 답을 하였다.

대학을 온 결과 그 말이 맞는것 같다. 필자가 대학교에서 가장 많이 배운것은 역사학도, 교육학도, 역사교육학도 아닌 정치경제학이었으니 말이다. 1학년 1학기부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고, 다양한 써클을 횡행하다 결국 한 써클을 정해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써클이 가진 견해의 한계성을 깨닫고, 동시에 관계와 다양한 압박으로 인해 결국 운동권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에도 혁명적 사상의 학습만은 지속하고 싶었으나 '혁명의 길로 나아간다'는 부담은 일단 학습모임마저도 중지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스스로 '자칭-트로츠키주의자'라고 칭한다. 과거 트로츠키주의자였을지 몰라도 혁명적 실천을 중단한 이제, '존재가 의식을 좌우한다'는 명제에 따라 의식은 점점 존재에 맞출 수밖에 없다. 물론 혁명적 사상학습을 지속하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의식과 자신을 같이한다면 다를 수 있겠으나, 현실의 일에 더 힘을 쏟느라 사상은 '취미'로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바로 이런 이유로, 소위 그 ‘진보사상’을 그 궁극으로까지 밀고나가는 지식인들은 또한 드뭅니다. 처음엔 자본주의의 추함에 역겨움과 혐오를 느끼며 물러서서 거리를 둡니다. 맑스주의 혁명사상에 접근합니다.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삶의 각종 관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막강한 힘을 체험하면서, 위축되고 움찔움찔 물러서기 시작합니다. 생존의 공포, 가난에 대한 공포, 관계 단절에 대한 공포, 고립에 대한 공포, 낙오에 대한 공포, 또는 직접적으로, 징역이나 신체적 고통에 대한 공포를 절감하며 이제 거꾸로 맑스주의 혁명사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1cm씩 자본주의와 타협해 갑니다. 때로는 야금야금 때로는 성큼성큼 속물이 되어갑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은 혁명사상을 결코 그 궁극으로까지 진전시키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단지 자본주의를 결코 ‘완전히’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지로서만 주워섬깁니다. 혁명사상은 장식이 되고 패션이 됩니다. 혁명사상은, 속물이 ‘완전’ 속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쓰입니다. 모멸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혁명사상은, 단지 지적 총기가 있다고 해서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끝내 지켜내겠다는 기개와 의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을 지니는 순간 닥쳐올 압력에 맞설 용기와 체력이 있어야 혁명사상과 하나가 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며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http://bolky.jinbo.net/index.php?mid=board_FKwQ53&document_srl=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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