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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대한 짧은 문답

“고시원? 여긴 고시공부 하는 데잖아?...그러나 우리가 미쳐 몰랐던 중요한 사실은 이미 그 무렵부터 세상의 고시원들이 여인숙의 대용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민규, <갑을 고시원 체류기> 중에서)

 

 아마도 몇 달 전, 고시원에서 불이 나 인명피해가 꽤 발생했을 때였다. 언론에서는 안전의 사각지대라며 고시원 성토에 나섰을 뿐 새로운 주거형태로 자리잡은 고시원에 대해 심오하게 다룬 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지마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걸 보면 이 땅에 사람 하나 누을 수 있는 곳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고시원은 날로 늘어난다.

 학교 주변에 늘어 선 고시원을 보면서 저기엔 대체 누가 살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름대로라면 각종 국가고시생들이 모여 젊음을 불태울 테지만, 어쩐지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고시원에는 고시생이 없단다. 대신 대학가 고시원에는 자취방을 못 얻은 대학생들이, 노량진 학원가에는 수험생들이, 도심 주변에는 실업자 노숙인 이주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들이 고시원을 채우고 있다. 

 학교 앞 고시원에서 매 학기 숙식을 해결하는 친구 하나를 꼬셔서 다짜고짜 고시원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 녀석이 건축학을 3년 째 공부하니,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고시원에 대한 이 친구의 생각은 나로선 ‘의외’였다. 얘기를 마칠 때쯤엔 나름대로 고시원을 겪어 보고 싶었는데, 철없는 생각인 걸까.

 

건축학과는 원래 그렇게 바쁜거야?

학기 시작하면 정신없어. 스튜디오에서 밤도 많이 새고. 하여튼 개강총회도 못할 정도로 정신없어.


밤새 과제하면서 통학하려면 정말 힘들겠네. 자취하는 애들 많겠네.

그래서 고시원 사는 거지. 근데 뭐 지금은 적응 돼서 아무렇지도 않아. 엄마는 고시원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2시간을 통학하면서는 내가 견딜수가 없으니까.


고시원 사는 거 어때?

살만해. 나도 말로만 듣다가 1학년때 처음 고시원 가봤어. 같은 과 언니와 친구들이 학교 근처 고시원에 살아서 공강 때 잠깐 그 언니 방에서 쉬어가고 그랬지. 방은 1평 조금 넘을 만큼 좁았는데 그래도 왕복 4시간씩 지하철로 통학을 했던 때라 부러웠어. 그래서 고시원을 친구랑 들어왔지.


“그것은 방이라고 하기 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사이즈의 공간이다. 도저히 다리를 뻗을 수 없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한다. 그러다 졸음이 온다. 자야겠다. 그러면 의자를 빼서 책상 위에 올린다. 그 속으로 다리를 뻗고 눕는다. 잔다.”


1평 남짓한 데서 친구랑 같이 살아? 힘들 것 같은데.

 처음부터 고시원에서 아주 살려고 했던 게 아니니까. 돈도 아낄 겸 해서 1인실에서 둘이 함께 사는 거야. 처음엔 창문 없는 방에서 살았었는데 꼭 새집을 장만 한 것처럼 방 꾸미고 정리하고 했어. 창문이 없어서 아침이 와도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안가니까 일어나기가 힘들고 그 좁은 침대에서 둘이 잠을 자니까 똑바로 누운 그 자세 그대로 뒤척이지 않고 자야되고, 밥도 일일이 챙겨먹어야 하고, 가끔 옆방의 여자 우는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니까. 불편한 건 둘째치고, 완벽한 독립은 아니었지만 괜히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책임감도 들더라. 그러다가 얼마 후에 운 좋게 창문 있는 방으로 옮겼어. 그 방으로 옮긴 후 첫 아침에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데, ‘빛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더라. 몇 달만에 아침햇살 맞으며 눈을 뜨고 나서 친구랑 너무 좋다고 오랫동안 누워서 뒹굴고.


창문 하나에 기분이 정말 달라지지.

맞아. 창문 하나에 살아있는 걸 느끼는 것 같고. 창문 있는 방이 왜 더 비싼지 이해가 되더라.


“시간이 흐르자 고시원의 사람들과도 꽤나 안면을 트게 되었다. 하지만 마주친다 해도 대개가 가벼운 눈인사에 불과했고 대화를 하거나 따위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의외로 씩씩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세면장 겸 화장실에서 마주쳐도 여자들은 언제나 당당했고 자신의 볼일을 척척 다 보고 서로의 방을 오가며 소곤소곤 환담을 나누기도 하고, 함께 장을 보러 가는가 하면 그 좁은 옥탑방에서 몇몇이 어울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니, 웃었다! 그곳에서 웃는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었다.”


 박민규 단편 소설 중에 <갑을 고시원 체류기>를 보면 고시원 살면서 옆방 사람이랑 잘 말도 안하고, 굉장히 서로 모른 척 하면서 사는 걸로 묘사되던데. 넌 어땠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근데 난 나름대로 재미있고 좋았어. 1학년 때보다 더 힘들고 바빴는데 일찍 과제가 끝나면 고시원 사람들하고 모여서 족발이나 보쌈을 시켜먹고 그러면서 꽤 친해졌어. 다른 과 친구랑 외국인 친구도 친해지고. 같이 쇼핑도 하고 시험기간이나 과제를 할 때 깨워주고.


의외인데? 처음부터 고시원이 너한테 맞았어?

처음에, 고시원을 들어가서 여기가 내 집으로 잘 살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엄청 답답해 보이고, 합판 같은 걸로 칸만 나눠놓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파트 사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지. 어떻게 보면 마지막 선택으로 고시원 온 거니까. 그런데, 사람에 따라 다른 거라 그런지 여기다 정을 붙이고 내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되겠지 싶었어.


그래도 몇 년을 살지 모르는 곳인데, 고를 때 어떤 기준 같은게 있진 않았고?

 내가 가진 철학이나 기준이라기 보다, 주거 공간이라는 게 원래는 설계할 때 기본적으로 각 부분이 독립되면서도 자유로워야 되거든. 예를 들어서 거실은 독립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서 거실을 통과해서 다른 방으로 가게 되면 안되고, 주방의 경우엔 전처럼 창문을 작게 하거나 구석에 몰아넣지 않아야 해. 요즘은 주방도 하나의 방처럼, 거실처럼 입지가 독립적이어야 해. 주방 살림을 하는 사람만의 공간으로 독립성도 확보되어야 하고. 그렇다고 또 너무 열려있거나 닫혀있으면 안 돼. 그리고 이용이 편하고 실용적 이여야지.

 근데 생각해 보면 독립성이니 실용성이니 하는 게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 예전에는 집을 짓고 거기 들어가 살라는 식으로 사람이 맞추는 공간이었는데, 요즘은 설계할 때부터 사람에 맞게 집을 맞춘다. 요즘 아파트가 많아서 안 그런 거 같지만, 아파트도 입주자에 맞게 변하고 있고 제한적이긴 해도 선택할 수가 있잖아. 어떤 집은 화장실에 문이 없어. 너나 나나 구닥다리 아파트에 오래 살아서 그렇지 집이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아. 틀을 깨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설계를 한정할 수가 없어. ‘사람에 맞춘다’는 것이 전체적으로 주거공간을 아우르는 틀이라고 봐야지.


그런데 고시원은?

 고시원은 사람에 맞춘다는 게 없지. 지어놓고 칸막이 해놓고 들어가 살아라, 그 안에서 어떻게 생활하든지 그건 네 마음이다 다만 공공생활은 지켜라 이거야. 죄다 똑같은 구조에 창문이 있냐 없냐에 따라 혹은 화장실 시설에 따라 나뉠 뿐이지. 그리고 고시원이 살아보니까 굉장히 남성중심의 공간이야. 여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최근이라 화장실을 나중에 추가로 붙여서 지은 곳도 많아.

  

그렇게 사람 중심적이지도 않고 남성 중심적인 공간인데 주거공간으로서 안 좋은 거잖아. 

 고시원이 안 좋은 점은 독립성이랑 자유로운 게 조화롭지가 않다는 거야. 아침부터 화장실 쓰는 거 기다리느라 난리치고 같은 곳에 살면서도, 칸막이 그 이상은 내 공간이 아니야. 그 박민규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고시원 사는 사람들이 같은 데 사는 사람일 뿐 같이 사는 사람은 아닌 거지. 그렇지만 나는 한 칸의 고시원 쪽방 이었어도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리면서 함께 사는 공간이라고 느꼈던 거 같아.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잖아. 사람이 없으면 집이 아니지.


그렇다면 꼭 내 공간이 내가 사는 집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내 공간이어도 내 집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공간의 처음이 뭐일 것 같아? 보통은 사람들은 움집이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가장 처음은 모닥불이야. 불을 땜으로써 불 주위에 사람이 모이지. 따로 벽이 생기진 않지만 불 주변은 밝고 바깥은 어두우니까 그 사이에 경계가 생기고, 돌을 쌓아서 ‘여긴 내 거’ 라고 하지도 않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지. 아무리 벽을 쌓아서 막아도 내 공간이 아닐 수도 있고, 그냥 나무 밑도 사람이 있다면 공간이 될 수 있어. 공간의 의미가 넓지.


모닥불 하나로 이미 의미 있는 공간이 정의된다는 게 신기한데.

 왜, ‘데드 스페이스’ 라는 죽은 공간이라는 말이 있거든. 말은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데드스페이스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어. 설계자가 집을 만들 때 큰방, 작은방, 거실로 해놓는 건 설계자 마음이지만 거기 설계자가 사는 건 아니잖아. 임의로 정해주는 것, 형태만 잡는 것일 뿐이지. 공간을 만드는 건 사는 사람이 자기 걸 만들어 나가는 거에 달린 거야. 아무리 설계를 잘해도 어떻게든 나중에 보면 데드 스페이스가 생기기 마련인데 거기에다 의자를 놔서 휴식공간을 만들 수도 있고 책을 놔서 조그만 서재를 만들 수도 있겠지.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콘크리트를 바르고 철근을 세운다고 다 집이 아니라는 건데, 좀 원론적으로 들리는데?

<희망을 짓는 건축가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미국 건축가 사무엘 막비랑 루럴스튜디오의 이야기가 나와. 이 건축가와 스튜디오에서는 앨라배마 헤일카운티에 집을 무료로 지어주는 활동을 하거든. 이 동네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이고 소외된 흑인들의 거주지역이야. 사무엘 막비 교수는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가장 최소한의 돈으로 집을 만들어 주는데,  집을 만들 때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고 집을 만들어 줘. 어떤 노부부가 옥상에서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런 공간을 만드는 거지. 그것도 최소한의 비용으로 폐타이어를 이용할 수도 있고, 방법은 여러 가지야.

 그렇게 만들어 주고 사진을 찍어 놓고 몇 년 후에 찾아가면 처음이랑 다르게 아주 지저분하게 되어있어. 처음 만들어 놓은 대로 깨끗하거나 만든 사람이 생각했던 대로 되어있기를 기대할 수도 있는데, 전혀 달라. 그런데 그걸 꼭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 기대는 설계자의 욕심일 뿐이지, 그 공간이 사람들에 의해 지저분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창고가 될 수 도 있다는 거야. 처음 찍어놓은 사진은 마치 합성사진처럼 ‘집 따로 사람 따로’인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나중에 찍은 사진은 자연스러워 보여. 그들만의 공간이 되었다는 증거지. 혹 설계자가 지저분하고 망가졌으니까 부수고 새로 짓자고 해도, 거기 사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하고 이 집만큼 편한 집이 없다고 해. 절대 무너뜨리지 않겠다고.


 네가 말한 그 빈민촌도 도시 빈민이나 딱히 갈곳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 시작한 거잖아. 고시원이랑 비슷한 것도 같은데, 생각해 보면 고시원 같은 곳이 더 소외된 곳이고, 부자연스러운 곳인 것 같아.

 고시원은 좁고 답답하고 인위적이야. ‘거기서 어떻게 살아, 이것도 집이냐?’ 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봐도 그래. 그래서 처음엔 못살 것 같고 답답했다니까. 그런데 막상 거기 들어가 살게 되면 처음엔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던 곳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생겨. 남들이 보기엔 위험하고 협소한 고시원일 뿐이지만 그곳에서 쉬어 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는 거거든.

 당연히, 고시원이 마냥 항상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내 몸이 힘들 때, 씻고 눈 붙일 곳이 필요할 때, 어쨌든 내 공간이 있으니까 좋은 거야. 거기에 내 짐과 물건을 놓고 하는 게 내 방을 나름대로 꾸미는 거 같아. 치장을 한다는 게 아니라, 물건 놓고 정리하고 활동이 이뤄지고 하면서 정이 들어. 그리고 좀 웃기지만 거기 살다 보면 그렇게 좁은 줄을 몰라. 활용하느냐에 따라 넓어 보이기도 한다니까.

 

고시원 살다보면 오히려 프라이버시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내공간이다 싶으려면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호되어야 할텐데 고시원에서는 안 그런 일도 많지 않아?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하는데, 그게 벽을 만들어서 차단한다고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게 아닌 것 같아. 반대로 벽이 없다고 프라이버시가 안 지켜 지는 것도 아니겠지. 예를 들어서 서구 문화에서는 문이 열려있어도 노크를 하잖아. 이건 그 공간을 네 공간으로 인정해준다는 거다. 문 열려있지만 프라이버시 지켜주는 거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구석에 칸막이 쳐서 몰아넣고, 문 잠그고, 그렇게 벽을 쌓고 나서도 정작 문 쾅쾅 두드리면서 문열라고 하는데, 그게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게 아니야. 프라이버시도 일종의 문화야. 프라이버시를 위해 문을 막는다고 해서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건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두는 거야.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동시에 열어주고, 모이거나 오가는 것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지켜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 그 선을 지키면서 산다면 반드시 고시원이라고 특별히 나쁠 건 없어.

만약에 고시원 이외의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더 넓고 시설 좋은 데 얻어서 들어가겠지. 만약에 처음부터 고시원에 안 살았다면  고시원 안갔을 것 같아. 그런데 나도 좀 이상한게 엄마가 ‘학교 앞으로 이사 갈까?’ 라고 물어보시면 좋다는 말이 선뜻 안나와. 여기 정들어서 그런 거 같아. 여기서 친구들 사귀고 학교도 다니고... 내 생활이 다 있으니까 섭섭해서 못 가. 서울로 이사가는 것 보다 조건이나 주거 환경이 안 좋지만 당장 쉽게 이사가자고 못하겠더라.


그럼 결과적으로 환경에 맞춰진 것 아닌가? 물론 현실적으로 사람이 원하는 공간에 살긴 힘들겠지. 특히 학교 앞이라는 데서는. 그렇긴 하지만 고시원에서 나름 만족했다는 것 자체가 그 공간이 꼭 좋아서가 아니라 살아야 하니까 적응하고 정붙이고 산 거 잖아.

 근데 그게 나쁜가? 그게 나쁜지 모르겠는데.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고시원을 거의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하지. 첨부터 고시원을 원한 건 아닐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잖아. 사람이 있다고 꼭 고시원이 생길 수도 없고, 고시원만 있다고 고시원 족이 생길 수는 없어. 고시원이 있어도 사람들이 들어가 살지 않으면 고시원족이 생기지 않으니까. 그만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아. 상황이 어찌됐건 건축이 돈과 뗄 수가 없는 것처럼 주거 생활도 항상 돈이 개입되니까. 그리고 살다 보니까 솔직히 좁고 불편하기 때문에 생기는 애정이 있어. 지하철도 그렇고.


지하철에는 정이 가? 1호선은 특히 힘들고 피곤하잖아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 1호선은 술 주정뱅이부터 시작해서 정말 화려하게 최악인데, 그런 게 있어서 사람 냄새가 나잖아. 좁은 공간에 다양한 직업,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서 각자의 목적지로 간다는 게 재밌어. 지하철도 뭐 어떻게 보면 차선의 차선인 수단이지만 싫지 않아. 지하철 나름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차가 생겨도 지하철을 버리지 못하겠지.


맞아. 1호선이 가진 희한한 정서가 있어.

 물론 고시원을 단순히 지하철이랑 비교하면서 둘 다 낭만적으로만 기억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요즘 아파트 광고들에서 나오는 집에 비하면 고시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집이 정말 ‘쉼’ 하나로 나한테 고시원 쪽방은 그만한 가치를 가진다고 봐. 새벽에 늦게까지 스튜디오에서 맘놓고 과제하고, 학교에 조금이라도 더 정을 붙이고 한 게 고시원 도움이 컸거든. 그 작은 방 안에서 각자의 삶이 이뤄지고 또 나름대로의 꿈을 키우잖아. 너무 거창한가?


“나는 그 고시원의 작은 밀실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니까 어제처럼, 이제 그것은 먼 옛날의 일이고 나는 비교적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밀실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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