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미디어는 ‘새로운 정치’의 장소가 될 수 있는가?

[짧은글]

노동자 미디어는 ‘새로운 정치’의 장소가 될 수 있는가?*

문화연구 시월,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천권의 책, 2008

 

“이 책은 신자유주의 시기 노동자들의 일상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일상이 노동자 정치의 장소로 조직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과 국가의 장소인 공장으로 단일화되고 있음에 논의의 초점을 둘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기 우리 사회의 노동자 운동은 그 빛나는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극도로 비참한 위기의 상태에 처해있다. 현 시기 노동자 운동은 여성,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같은 당대의 노동자 형상에 준거한 노동자 정치와는 무관하게, 87년 민주화 체제와 엘리트 중심 ‘민주’ 노조운동의 지체된 영향 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무기력하고 혼란한 모습을 모이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의 비참한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대면하고 그 정체를 구체화함으로써, 현 상황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새로운 노동자 정치를 사고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p.4-5)

 

     이 책은 2005년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문화연구 시월’이 공동으로 수행했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문화정책 방향연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현장조사를 통해서 만들어내고 규명하고자 했던 질문은, ‘오늘날 노동과 삶의 ‘현장’을 지배하는 논리는 무엇인가?’였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문화연구 시월, 김원, 신병현, 심성보, 이황현아, 이희랑 저, 2008)은 ‘민주’노조의 논리를 소멸시킨 이러한 논리를 공장, 지역, 가족, 파업, 매체에서 찾고자 하였다. 노동자들의 ‘내재적인’ 사고를 따라갈 때, 안타깝게도 ‘민주’노조는 이제 더 이상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을 함의하지 못하고, 고용안정과 실리를 위한 협상도구를 의미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민주’노조운동에서 형성되었던 문화적 실천들도 경제적 협상을 위한 세과시용 의례가 되었다. 설사 ‘민주’노조운동의 가치와 경험이 비판적 준거로 기능하더라도, 활동가 상층의 엘리트적 실천으로 환원되거나, 그나마 진보성은 공장 내부로 갇혀버린다. 게다가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연대의 주체가 아닌 고용의 안전판으로 인식하고, 여성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실천에 종속된다. 작업장은 위와 같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활동가와 대중, 공장과 지역 등 수많은 분단선들로 쪼개진 군도(群島)인 것이다. 오직 고용불안에서 비롯된 실리적 논리만이 군도를 하나의 영토, 즉 공장으로 묶어준다.

      이처럼 현장은 1987년 뜨거운 여름, 노동자 대투쟁이 만들어 냈던 고유한 ‘투쟁’의 논리가 소멸되고, 이제 신자유주의의 ‘통치’의 논리가 작동하는 장소로 변했다. 하지만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은 구호가 아닌 실체로서 신자유주의를 파악할 인식의 틀을 결여 한 채, 여전히 과거의 도식으로 형식적인 동원의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통치 논리가 노동자들의 사고와 삶을 지배하기 시작할 때, 오히려 민주노조의 전성기에 형성된 실천으로 현장을 읽고 조형하려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일상에서 후퇴해버렸다.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사고에서 발명되는 ‘정치’의 기구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변형된 ‘통치’를 떠받히는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최소한 현장에서 과거 민주노조식의 정치는 소멸되었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노동자 정치의 장소에서 신자유주의 통치의 장소로 변화한 현장을 새롭게 읽어낼 인식의 틀을 탐색할 필요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현장’ 지향적인 노동자들과 연구자들이 오늘날 현장의 사고논리를 내재적인 입장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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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미디액트, 미디어운동저널 ACT, 51호(2008년 5월 12일)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이 번에 출간된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에 관한 소개 목적으로 쓰여졌다. ACT를 가만해서, 주로 노동자 매체 부분을 중심으로 했으며, 지면상 지나치게 논쟁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 가지를 많이 쳐서, 또 이미 온라인 상에서 여러 번 논쟁이 있어던 탓에 상투적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책 작업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 소개도 할 겸 이 공간에 올린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속에 실린 글들에는 보다 많은 내용과 쟁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감히 일독을 권한다. 자세한 내용은 위의 책 사진과 제목의 링크를 클릭 하시기 바란다.



위와 같은 관점을 탐색하고 만들어 가면서, 우리는 오늘날 ‘민주’ 노조운동에서 노동자 미디어의 역할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변했다면, 실제로 노동자 미디어라는 저울추가 얼마나 통치 쪽으로 기울었는지, 무엇보다 노동자 미디어가 ‘새로운 투쟁’의 가능성을 가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곧 언론이자 권력’이라는 표현이 집약하듯이 노동자 미디어가 민주노조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담론지형의 형성에 있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의 6장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주의 재현양식에 관한 시론」은 이러한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작업장에서 생산, 유통, 소비되는 다양한 노동자 미디어 생산물을 분석하였다. 단순한 기호분석을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자 미디어(특히, 노동조합 방송)의 생산관행과 소비관행, 또한 노동자들 자신의 의미부여 방식을 검토를 하였다. 물론 무엇보다도 민주노조운동의 변화와 현장의 실리논리를 분석에 반영했는데, 노동자 미디어 생산물이란 결국 현장의 맥락, 즉 사회적 실천 속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노동자 미디어에서 지배적인 재현체계들을 범주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재현체계들이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과 실천이며, 이데올로기란 특정 조건에서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층결정되기 때문에, 이 책은 재현체계를 통해서 작업장의 현 상태와 실천에 접근할 수 있고, 나아가 노동자 미디어 자체에 개입을 시도할 수 있다.

      논의를 지나치게 축소한 감은 있지만, 최소한 1985년 {서노련신문} 이후에 등장했던 수많은 노동자 미디어들은 노동자 대중의 자생적 의식이 표출되는 장이었고, ‘선전선동’을 통한 정치적 의식화 및 조직화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불행하게도, 노동자 미디어는 작업장 안팎의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단지 대중 미디어와 형식적인 차이가 존재 한다면, 노동자 미디어는 ‘민주’ 노조운동에서 정형화된 재현체계들을 사용하여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를 굴절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의 가설은 ‘민주’ 노조운동의 문화형식들, 또는 재현실천들이 전혀 무가치했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1990년대 중반 이후 그 재현실천들이 저항적 의미작용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노동 현장의 사고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지배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특히 노동자 미디어는 대중의 일상과 사고를 ‘지체된’ 문화형식으로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포착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날 노동자 미디어의 재현양식에 ‘조합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노동자 미디어가 의존하는 재현들이 경제적 실리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중의 자생성에 영합한다는 ‘탈정치적’ 조합주의를 의미한다. 둘째, 노동조합(의 상징과 활동가)이 노동자들의 유일한 대표임을 주장하고 현장의 다양한 사고들을 알지 못할 뿐더러, 여성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다양한 노동자 형상 및 실천을 스스로 배제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합주의 재현양식’을 구성하는 지배적인 재현체계들(혹은 약호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대표적으로 엘리트주의, 군사주의, 남성가부장주의 등을 범주화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약호들은 완전히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중첩되는 것이며, 한가지만으로도 나머지를 환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불러들인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 재현체계가 아닌 체계들의 집합, 곧 양식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 기술적인 내용은 제외하고, 간략히 각 재현체계들을 살펴보자.

 

      둘째, 군사주의의 재현은 실제 현실 투쟁의 양상과 관계없이 노동자들을 ‘과잉된’ 정규군의 전투 모델, 곧 군사적 모티브에 따라 선동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현장(투쟁)의 모습 중에서 군사적 모티브에 해당하는, 무엇보다 청장년 남성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이나 전투경찰의 폭행에 초점을 맞춘 재현을 말한다. 노동자 미디어가 활용하는 ‘대중적인’ 논증방식은, ‘노동자의 전투는 전투경찰로 상징되는 부당한 자본과 국가에 맞서는 방어적인 성격’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선량한 피해자’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불성실하고 비윤리적인 억압자, 탈(범)법자, 살인자, 착취자, 하수인 등에 맞서는 정당한 방어이며, 만약 노동자들이 ‘우리’의 분노를 담아내어 하나로 뭉쳐 연대하고 투쟁한다면 승리를 쟁취하여 희망찬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2>에 인용된 현장조직 신문의 사진에서 전형적인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데, 특히 “공격적인 투쟁만이 필요하다”는 표제는 사진이 내포한 전투적 의미를 고정할 뿐만 아니라 강화한다. 게다가, ‘쇠파이프’는 ‘투쟁, 전투, 군대식, 저항, 공격무기, 흥분’ 등을 의미하고, ‘전경방패’는 ‘전투, 적, 백골단, 열 받음’ 등을 뜻한다. 보다시피 여기서 노동자들은 항상 ‘투사’, 그것도 ‘군인’이 되어야 하며, ‘투쟁’은 ‘전투’가 되고 노동자의 ‘연대’는 ‘대오’로 뭉쳐야 한다.

     문제는 현실 투쟁이 이러한 특수한 투쟁 형태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들여다본 현대자동차는 적어도 정규직의 경우 2,000년 이후 이런 전투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나마 진행되는 파업과 집회는 ‘왜소하고’ ‘의례적’인 행사에 불과했다. 무대를 확장해서 살펴보더라도, 오늘날 투쟁을 청장년 남성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현장은 많지가 않다. 그 현장에서 ‘투쟁’은 전투에 필요한 대오를 구성하지도 못하고 한 번의 요구와 구호를 외치기도 힘든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그러한 현장이 결코 전투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전투성’ 자체는 기각할 수 없으며 상황과 조건에 따라 쇠파이프로 상징되는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잉된 군사주의’로 현실을 구성함으로써 무엇이 배제되고 있는지, 실제 조건에서 가능한 실천에는 시선을 외면하는 것이다. 노동자 미디어에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울컥’하고 ‘흥분’하고 ‘분노’하는지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남성 가부장주의 재현은 1990년대 말 이래 온오프라인에서 몇 차례 논쟁이 일었다. <그림3>과 <그림4>는 각각 1999년과 2005년에 논쟁의 촉매가 되었던 포스트들이다. 일련의 ‘노동계 포스터 논쟁’은 민주노조운동에서 재현의 위기를 상징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운동과 노동자 문화에서 일상적으로 실천되고 제도화된 남성 가부장주의와 여성 및 소수자 관점의 결여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한편, 이러한 논쟁이 벌어질 때 마다 ‘현실정치’를 옹호하는 입장은 ‘대중’과 ‘국민’의 자생적 이데올로기, 즉 남성가부장 의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진정으로 진보적인 의성주의 의제를 실무적인 차원으로 축소해서 덮어버렸다.

  

   

      우리가 노동자 미디어를 노동자 문화와 노동운동의 남성 가부장주의가 재생산되는 주요 장치로 본다면, 비록 논쟁과정에서 <그림3>, <그림4>의 포스터들이 폐기가 되었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재현방식은 다양한 노동자 미디어에서 반복된다. 특히 남성 가부장주의 재현은 이중적 역할을 하는데,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엘리트주의와 군사주의를 보완하고, 두 번째는 남성중심성으로 비판받는 두 약호들을 가족주의로 대체한다. 예컨대, 투박하게 치켜든 ‘팔뚝=남성’을 보여주던 방식은 <그림3>에서 투쟁을 나서는 남편, 아이를 안고 배웅하는 아내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그림3>을 잘 뜯어보면, ‘주먹, 남성, 빨간 조끼, 활동가, 희망, 고용안정’이 여전히 핵심적인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한편 논쟁에 대응하는 남성 중심적 실천은 위의 <그림1>처럼 아예 남성종속적인 여성의 형상을 제거해버리고, 엘리트주의와 군사주의와 중첩된 남성 중심적 재현방식으로 회귀한다. 이렇게 볼 때, ‘노동계 포스터 논쟁’은 노동운동과 노동자 문화에 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였다. 특히, 남성 가부장주의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노동운동이 이데올로기적 동요 속에서, 즉 남성 아니면 정상가족, 혹은 엘리트주의 아니면 군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함정에 걸려 있음을 노출시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동요에서 벗어나 ‘민주’노조운동이나 노동조합, 무엇보다 노동자 미디어가 새로운 정치를 접합할 가능성이 있는가?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부정적인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현장 노동자들은 서로서로 분열되어 있으며, 노동조합은 회사와의 협상에서 최대한의 실리를 얻어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려고 한다. 한 때 성공적이었던 민주노조의 실천들은 분배를 위해 형식적으로 동원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은 ‘사람들은 사고한다’는 명제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문화적 실천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현 상황에 고정되어 있는 의미들(또는 재현체계들)을 유동시키려는 사고와 시도는 보기 힘들었다. 설사 그러한 생각을 하더라도 ‘현실론’ 때문에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았다. 현장에 겪은 일화를 들자면, 활동가들은 ‘빨간 조끼’가 함축한 ‘권위주의’, ‘부패 집단’, ‘빨갱이’ 등 부정적 의미를 다른 색상을 선택함으로써 변화시키려 해도, 당장 현장에서 대중추수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을 우려했다. 또한, 당시 미디어 활동가들은 노조방송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방송제작의 전문적인 기술과 형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방송=영상’이라는 생각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음성 방송의 제작과 활용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했다. 다시 말해, 미디어를 통해 일상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의미투쟁보다는 전문기술주의가 주도하는 듯 했다.

     노동자 미디어는 ‘조합주의 재현양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재현실천을 시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엘리트주의, 군사주의, 남성가부장주의(또한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민족주의) 재현체계들은 노동자 스스로 신자유주의 아래 새롭게 구획되는 삶의 조건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구체적인 투쟁을 재조직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재현들은 오늘날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고민들을 조합주의적인 실천으로 가상화할 뿐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 미디어의 주류는 현장의 일반적인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를 은폐할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존재하면서도 실질적인 몫을 결여한 비정규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구체적인 형상을 배제한다. 분명 위와 같은 재현체계들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을 의미하던 노동자 정치의 시기가 있었지만, 그 시대의 순환은 저물어 간다. 그렇다면, 노동자 미디어는 자신의 원칙, 곧 사회를 변혁하고 자신을 변혁하는 운동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은 현실에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사고에 내재적으로 접근하는 실천 속에서, 고용, 젠더, 인종, 민족을 넘어서는 ‘평등한 사람’으로서의 목소리가 노동자들에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그리고 노동자 미디어 속에서 의미투쟁이 벌어질 때, 새로운 노동자 정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덧붙이자면, 비록 우리가 현대자동차라는 대공장 남성 중심 사업장을 대상으로 논의를 시작했지만, 현대자동차가 민주노조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이 잠정적으로 끌어낸 함의들은 적지 않다고 본다. 또한 이 책은 개별 작업장 사례를 넘어서는 많은 연구와 현상을 통합하였다. 이 책이 찬란했던 노동자의 역사가 가능했던 장소에서 오늘날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생성되고’ 있는지를 사고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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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2 17:09 2008/05/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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