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장 - 2009/08/29 19:45

예전에 경찰서에 집회신고하러 갔다가 우연히 보았던

'보고서 작성요령'이란 책자는 참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책자에서 제시한 내용중 하나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운동권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

자신도 모르게 경찰조직내에 운동권의 사상을 전파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예를들어 '국토순례대행진'의 경우 규모가 커보일수 있으니 '국토순례행진'으로 쓸 것이며,

이런 식으로 '순화'하기가 정 힘든 경우엔 '이른바' 혹은 '소위'를 붙여서 표현하라는 것이다.

 

99년도에 민주노총이 '이른바' 합법화하고 난뒤

노둥부에서 민주노총을 담당하던 직원이 '축하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던 적이 있다.

당시 민주노총의 '소위' 합법화과정등에 마음이 심히 불편했던 나는

"개코나 무슨 축하냐"고 심드렁하게 답했는데

그 직원은 "이제 우리도 보고서에 '민주노총'이라고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스레 얘기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전까지는 '민주노총'이라고 표현하지 못하고 '민노총'으로만 표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제 합법적 조직이 되었으니 '민주노총'이라고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답했다.

그 이야기르 들으면서도 나는 치가 떨렸다.

단어 하나에도 저들은 그렇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계급적 입장을 분명히 각인하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이 그저 감탄스러웠고 우리의 말살이가 하염없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활동가는 농담속에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순수성을 잃지 않는다"던 기개는 사라지고

아무 생각도 없이, 때로는 이른바 '대중성'이란 미명하에

저들이 강요하는 노예의 언어를 쓰는데 이제 조금의 불편도 없어 보인다.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부터 저들의 찌꺼기를 뱉어내고

올바른 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한 노력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걸 요즘 새삼 깨닫는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른 표현이다.

'다르다'라고 써야할때 '틀리다'고 쓰는 것은 틀린 용법이다.

"너와 나의 생각은 틀리다"가 아니고 "너와 다의 생각은 다르다"가 맞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틀리다'에 익숙해진 주둥이의 버릇은 쉬이 고쳐지지가 않는다.

나빼고 다른 이들의 생각은 모두 '틀린' 세상에서 사는건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코스콤투쟁을 거치면서 '우리'라는 표현이 얼마나 야만적일수 있는지를 느꼈었다.

'우리'라는 표현이 가진 철옹성같은 테두리가 얼마나 날카롭게 '우리 아닌 자들'을 베어내는지를 생생히 경험하면서 '우리'라는 말이 함부로 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외치면서도 틈만나면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우리나라'라는 말이나

이 사회의 지긋지긋한 학벌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슬그머니 새어나오는 '우리학교'...

 

고약한 말습관은 사상을 갉아먹는다. 조금씩 조금씩.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8/29 19:45 2009/08/29 19:45
TAG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soist/trackback/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