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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약 _ 서른하나

 

알약

 

- 서른하나

 

 

서른하나,

그녀는 날마다

책상 서랍을 열고 약병 마개를 비튼다.

오랫동안 그녀는 혼자 살아왔고

이제는 그 옛날 어머니 뱃속에서 배웠던 스스로 잠드는 법을

잊어버릴 때가 되었음으로. 저녁마다

그녀의 손가락은

약병 속으로 스며들어 나이만큼 숫자를 세어

유리잔 옆에 놓는다.정말, 삶은 지겹게 그녀를 붙잡았고

그녀 또한 그 밧줄 끝에 매달린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기 두려워했으므로,

서른하나, 잔주름이

이마에 약간씩 잡히기 시작하는 그녀는 자신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린 잠이 하얀 분말의 안내를 받으며

텅 빈 뇌수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알약들을 삼킨다.

더러, 어떤 날은 온 밤내 눈을 치켜뜬 채

기억의 당의정에 싸인, 쓰디쓴 내용물들을 핥으며

지새기도 했다. 그런 날은

탄력이 사라지지 않은 혈관을 타고 여러 가지 추억들이

전신을 돌아다니며 그녀 자신을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 남자를 그녀는 사랑했고

그녀가 문득 자신을 거울에 비추었을 때,

떠났다. 바보 같은 사내......

서른하나, 그녀는

세포 하나하나에 퍼지는 약효 따라, 악마의 유란 같던 어둠이

용해됨을 바라보며 머리 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긴다.

잠은 이제 그녀를 끌고 다니면, 많은 것들을

보여주리라. 낮 동안 시큰거리는 통증을 손가락 마디에 풀어 놓던

타이프 라이터의 문자판과 사육된 돼지처럼

수다만 디룩디룩 붙어, 한 남자의 수족이 되어 버린 여고 동창들.

그리고 꿈속에서조차, 그녀를 비명 속으로 몰아넣는 풍경.

밤 사이 스며든 연탄가스에 취해, 잠옷 바람으로

방안에 누운 그녀를

살갗이 푸르죽죽할 때까지 그 누구도 발견해 내지 못하는 일.

그러나, 그녀는 서른하나.

이제 삶은 힘겹게 살아온, 스스로 무게의 의해서도 내리막만 남은

끝을 향해 굴러갈 것이고. 그녀는 그 끝에

칠흙같이 어두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좁고 긴 동굴 속을 들어가

지겨울 정도로 오랜 시간

누워 있는 법을 날마다 조금씩 연습해야 하므로,

서른하나, 그녀는 저녁이면 여러가지

잡동사니들이 뒹굴고 있는 책상서랍을 열고

약병마개를 튼다.

박기영

1959년 충남 홍성 출생, 대구 달성고등학교 중퇴.

시집으로 2인 시집 "성.아침", "숨은 사내"등이 있음.

설운 서른 _ 버티고

김종길 외 49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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