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전은 이기기 힘든 싸움이었음에 틀림없다. 메시(R. Messi), 테베즈(C. Tevez), 이과인(G. Higuain), 마스체라노(J. Mascherano), 아게로(S. Aguero) 등 최고의 기량을 갖춘 공격-미드필드진은 그 이름만으로도 위압감을 준다. 객관적 측면에서 기량만 두고 보았을 때, 아르헨티나는 우승후보로도 거론되는 강력한 팀이기에 한국의 패배 자체를 의아해 하는 사람 역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 문제들은 한국의 패배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패배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대결에서 한국이 비참한 패배를 경험한 것은 전술의 안일함이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한국의 전략은 2-3 명이 공격의 핵인 메시와 테베즈를 압박으로 묶어 무력화 시키고 전원이 빠른 공격전환을 가져가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런 전술 자체가 오류다. 한국은 공격이나 수비 둘 중 하나가 극단적으로 강한 팀이 아니다. 한국의 가장 큰 장기는 집중력과 체력에 기반 하는 전체압박이다. 이것은 2002년의 성과가 증명한다. 반면에 아르헨티나의 중원과 공격진은 모두 팀 공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메시와 테베즈에게만 치우친 수비는 디마리아와 이과인, 그리고 후에 교체된 아게로 같은 파괴적인 선수들을 자유롭게 풀어 두었다. 전술의 실패로 드러난 명백한 결과는 이과인의 헷트릭(hat trick)이다. 그가 넣은 모든 골 장면에서 수비수의 몸은 이과인과 몇 발치나 떨어져 있었다. 이는 브라질을 상대해서 아쉽게 패한 북한에 비하자면 너무 초보적인 전술이었다.

 

 

지난 브라질 전에서 북한이 보여준 전술은 수비전의 모범이었다. 북한은 공격력이 강한 브라질을 맞아 정대세 1명을 제외하고 패널티 에리어와 중거리 슛이 나올법한 위치에서 지역방어에 가까운 전술을 펼쳤다. 그리고 공을 가진 선수에 대해서 거의 균일하게 2인 커버를 했다. 즉 모든 상대편 공격에 관여하는 모든 선수를 수비한 것이며 비록 개인 수비는 실패하더라도 공격이 성립되는 공간 자체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비록 패배 했는데 그것은 그다지 껄끄럽지 않다. 사실 브라질의 2골이 거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국과 아르헨티나전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포메이션은 4-4-1-1 혹은 4-5-1로 보이는데 박주영을 최전방 공격수로 염기훈을 처진 공격수로 하지만 왼쪽 상단에 위치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역습을 염두하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기 보다는 수비에 가담했다. 이러한 공격수들의 성급한 움직임은 최초의 화근이 되었다. 또한 차두리를 대신해 출전한 오범석은 경기 자체에 아직 적응이 덜 되어 보였다. 위협적인 오버래핑은 커녕 디마리아에게 위험한 돌파를 몇 번이나 허용했다. 박지성은 혼자 너무 분주해 보였으며 공격적인 플레이 메이커인 이청용에게는 몇 번의 기회가 가지 못했다.

 

 

아르헨티나가 아무리 뛰어난 팀이라도 정상적으로 경기를 치른다면 오늘 날 한국은 아르헨티나에게 4점이나 허용할 팀이 아니다. 이 같은 아르헨티나의 큰 성공의 요인은 전술이다. 한 팀의 완전한 전술적 실패는 상대 전술의 완전한 승리를 보증한다. 마라도나는 경기에 앞서 기자회견에서 "메시가 우리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할 수 밖에 없다"라는 식의 언급을 했는데 이것은 보도를 이용한 책략이자 은유다. 메시는 현존하는 선수들 중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 받는다. 나도 동의 한다. 따라서 아르헨티나를 상대하는 팀들이 메시를 강하게 수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반대로 메시나 테베즈에게 수비수들이 몰려들수록 레알 마드리드의 골잡이 이과인은 자유로워진다. 레알 마드리드 같은 팀은 아무 선수에게나 대충 주전 골잡이 자리를 주는 팀이 아니다. 이과인은 빠르고 강하며 훌륭한 기술을 가진 피니셔다. 사실 지난 경기에서 메시와 테베즈의 플레이를 유심히 살피면 골을 넣을 의도가 거의 없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종종 위협적인 슈팅을 날리긴 했지만 그들의 주된 역할은 공을 최대한 오랫동안 빼앗기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자신들에게 수비를 집중시키고 그로인해 수비진형 자체를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마라도나는 이런 전술이 성공하리라는 것을 나이지리아 전을 통해 확인했고 한국전에서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다음 경기는 나이지리아 전이다. 한국에게는 운이 좋게도 나이지리아는 정상적인 팀 상태가 아니다. 볼의 운반책이었던 카이타(S. Kaita)는 지난 그리스 전에서 장난스러운 행동을 했는데 운이 나쁘게도 그 행동은 퇴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또한 그 퇴장은 1경기 출장정지를 의미한다. 또한 전체적으로 누적된 옐로우 카드도 많고 연패로 인해 팀의 사기는 최악인 상태다. 나이지리아는 아르헨티나 전에서는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한국에 비해 효과적으로 선전했으며 그리스 전에서는 카이타의 퇴장 전까지 경기를 완전하게 리드하고 있었다. 즉 준비된 팀이라는 얘기다. 나이지리아도 지금까지의 패배를 만회하고 한국에게 승리할 경우 경우의 수를 노려봄직 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그들도 한국처럼 절박하다. 따라서 한국의 다음 경기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상대의 강점. 혹은 상대의 약점. 승부에서 상대를 연구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자신의 강점. 자신의 약점. 자기를 알고 계획을 짜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자신을 망각하거나, 부정하거나, 버리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 누구나 승리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을 버리고 단순히 상대의 약점과 주어진 상황에만 집중해서는 상대가 스스로 패배해 주기를 바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승부는 상대와 나의 상호작용이다. 축구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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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20:42 2010/06/2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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