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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학/의학 연구에서 오래된 질문 중 하나는 “태아기의 경험이 사람의 일생에 얼마만큼,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입니다. 임신했을 때,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태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 효과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같은 사람을 태아기 시절부터 청·장년기를 거쳐 노년기까지 수십 년 동안 추적 관찰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도 태아기 시절의 환경을 조작하는 실험이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작위로 임산부를 골라서 영양 결핍에 빠트리는 연구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1990년대 이후, 질병의 원인을 탐구하는 역학(Epidemiology) 연구들이 하나 둘 답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비극과 재해가 만들어낸 사건들이 임산부들을 대상으로 한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굶주림 시대 이후에 늘어난 청장년기 질병
» 식량이 넉넉한 건기와 그렇지 못한 우기에 태어난 사람들의 수명에 관한 비교 연구. 출처/ Nature (1997) 그 대표적인 연구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감비아(Gambia)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한 감비아는 매년 건기과 우기를 겪습니다. 열대 사바나 기후에 속하는 감비아에서 시골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우기(7월~10월)는 과거 한국의 보릿고개처럼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입니다. 수확해놓은 곡식은 모두 소진되고, 어른들은 굶주린 채 다음 농작물 수확을 위해 계속 일해야하고 또 아이들은 계속해서 내리는 비로 인해 설사병과 말라리아에 시달려야 하니까요.
충분한 자원이 있는 나라라면 식량을 비축하고 보존해서 우기에 대비하겠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00 달러도 되지 않는 감비아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기에는 어쩔 수 없이 영양 부족에 시달리는 것이지요. 몇몇 학자들이 이 점에 착안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1]
지난 50여 년 간 식량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건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우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비해 얼마나 더 오래 살아남는지 계산해 본 것이지요. 사춘기 시절까지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이후로는 생존할 가능성이 건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월등히 높게 나타났습니다. 40세가 넘어가면 생존율이 2배가 넘게 차이가 났구요.[2] 우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40살에 살아 있을 확률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이지요.
이런 연구들이 감비아처럼 자연적 기후 변화에 대응할 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연구자들은 또 다른 자연실험의 기회를 찾아냈지요. 임산부들에게 하루 한 끼조차 공급하지 않는 잔혹한 ‘실험’이 행해졌던 때는 바로 세계 2차대전입니다.
세계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네덜란드 남부지역을 막 점령한 뒤의 이야기입니다. 독일군으로부터 라인강을 되찾기 위한 공수부대 투입작전이 실패하게 되자, 런던에 있던 네덜란드 임시정부는 독일군의 증강을 막고자 네덜란드 철도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요청합니다. 철도 파업으로 인해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겪게 된 독일 나치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네덜란드 서부지역을 둘러싸고 그 지역으로 향하는 모든 식량과 연료 배급을 통제하기 시작하구요.
그리고 유달리 추웠던 그해 겨울, 사방이 고립되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2만 명의 네덜란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도 하루 평균 1800 킬로칼로리(Kcal)를 섭취하던 이들이, 역사에 ‘네덜란드 기근(Dutch Famine)으로 기록된 1944년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6개월 동안 하루 800 킬로칼로리 미만으로 살아가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짐작할 수 있듯이, 임산부들조차도 이러한 기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이 역사적 비극이 인간의 건강에 장기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탐구하는 연구를 진행합니다.[3][4][5] 1945년 초 ‘네덜란드 기근’ 시기에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태아가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다양한 성인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됩니다.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3배가 높아지고,[6] 조현증(정신분열병)에 걸릴 위험이 2.7배가 높아진다는,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유의하게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7] 발표된 것이지요.
몸에 새겨진 사회환경 - ‘절약형질 가설’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가 질병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임신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했던 경험이 우리의 건강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50년 전 내 의지와 무관하게 겪어야 했던 그 경험으로 인해 당뇨병에, 심장병에, 고혈압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니까요. 비슷한 연구결과들이 1940년대 독일 나치군에 의해 포위되어 6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아사한 레닌그라드 지역 주민들이나,[8]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마오쩌둥의 잘못된 개발정책으로 인해 4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죽은 대약진운동 시기에 태어난 중국인들[9]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에서도 나타나면서, 태아 시기의 환경을 성인기 질병의 원인으로 고려하는 관점들은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은 연구들을 검증하고 있는 내용, 즉 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성인 만성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절약 형질(Thrifty Phenotype) 가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이 분야에 학문적으로 큰 기여를 한 데이비드 바커(David Barker) 박사의 이름을 따 ‘바커 가설(Barker’s Hypothesi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10][11] 이 가설에 따르면, 태아기의 영양 결핍이 성인기 당뇨병 발생의 원인이 되는 것은 태아 입장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임산부인 어머니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는 환경에서, 부족한 영양분만이 공급될 때 태아는 생명체로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한정된 영양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살아남는 데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해 답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태아는 뇌와 같이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기관에 먼저 영양분을 사용하고, 당장 내 생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췌장과 같은 기관을 발달시키는 데에는 영양분을 적게 사용합니다. 설사 그 선택이 먼 훗날 당뇨병을 유발해 수명을 단축시킨다 할지라도, 지금의 생존을 위해 먼 훗날 발생할 수 있는 성인병을 감수하는 것입니다.[12]
이런 연구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몸에 새겨진 사회적 경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생애 초기의 경험일수록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막 태어난 아이가 굶게 되는 것은 성인이 같은 기간 굶주리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일테니까요.
우리가 인간의 몸과 질병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그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노애락의 다양한 경험을 하지요. 그 경험들은 태아기의 굶주림처럼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몸에 새겨져, 때로는 당뇨병의 원인이 때로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는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은 사회가 인간의 몸에 남긴 그런 상처들을 해독하는 학문입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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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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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약형질가설.. 잼있고 아주 쉽게 잘 읽었습니다.잘 못먹으면 언제 굶을지 모르니 살을 비축하게 되는? 것도 그런거 같네요. 물만 먹어도 살찌는...
앞으로도 많은 얘기 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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