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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 - 한국의 브레히트 수용에 대한 씁쓸한 소고

 

 브레히트 사후 50 주년을 맞이 했던 작년에 몇 개의 브레히트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베를린 앙상블에서 온 연출가에 의해 예술의 전당에 올려졌던 '서푼짜리 오페라'는 이 기념할 만한 극작가의 사후 50 주년에 걸맞은 '성대한' 잔치 였다고 할 수 있을 테고, 이보다 조금 앞서 이윤택의 연출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공연되어 흥행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탓인지 올해에도 브레히트의 작품의 공연은 이어지고 있다. 대학로의 극단 아리랑이 브레히트의 <아르투어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을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이라는 이름으로 번안한 것이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일단 길이 면에서, 그리고 주제면에서 다루기가 만만치가 않은 만큼,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문제의식이 반세기라는 시간의 장벽과 더불어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로 인해 자칫 낡고 고루한 문제의식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만큼 이렇게 브레히트의 작품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일단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공연에서 맛본 실망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대를 품고 극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달수>는 정확히 <억척어멈>이 보여줬던 바로 그 실망을 안겨주었다. 역설적이게도 <달수>의 연극 팜플렛에 실려 있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말처럼, <달수>나 <억척어멈>은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Verfremdungseffekt)’가 그 본래의 비판적 맥락을 상실한 채 일종의 재치 코너로 전락해 버린 추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달수>에서는 브레히트적인 비판의 맥락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연극적으로 훌륭히 형상화 해 낸 진부한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은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의 성공 신화와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여진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주인공에게 달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배경을 한국의 60년대를 연상시키는 시공간으로 설정했다. 폭력배 달수는 자본가들이 정치인과 결탁해 자신들의 부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모든 것이 탄로날 위기에 처한 이들을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지켜준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을 이용하여 정치인과 자본가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까지 손에 쥐고 주무르는 지배자가 된다. 플롯이 보여주는 것처럼, 원작은 파시즘이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비열한 결탁이 만들어 낸 틈새에서 출현하였음을 풍자하고 있다. 제목에 들어간 '저지 가능한'이라는 표현은,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저지 가능한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공연은 독재자가 된 달수의 외로운 모습과 더불어 이 사실을 강변하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문제는, 극의 마지막에 부각시킨 이 주제가 한 없이 어색하다는 데에 있다. 이 공연에서는 부하들 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따르던 부하를 배신해야 만 하는 집권의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면서 한국 조폭영화의 상투어를 충실히 묘사되고 있다. 조폭영화에서 갓 튀어 나온 듯한 외모의 배우들과 이들의 건들건들한 몸동작, 그리고 각 지방의 사투리가 섞인 '양아치'들의 대화들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장면들이 관객의 눈 앞에 펼쳐 지고, 이는 당연히 연극을 무척 '재미나게' 만든다. 이미 익숙한 장면들이 연극투의 과장된 연기를 통해 눈 앞에서 박력 넘치게 펼쳐지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폭영화에 대한 참조는 후반에 가서는 그저 행동이나 대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도 이루어 진다. 초반에는 희극적이었던 극의 분위기가

충직하지만 거친 부하들과 교활하고 유들유들한 부하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는 지배자의 고뇌, 충직했던 '아우'를 배신해야만 하는 갈등을 묘사하면서, 조폭영화의 그 익숙한 비극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달수의 상승이 저지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야기되는 가운데 무대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 있는 달수의 모습은 비판적 의식이 아니라 비극적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비열한 거리>나 <하류인생>에 등장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


 이렇게 해서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특정한 정치체제가 만들어 낸 역사적 결과물로서의 파시즘 비판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나가는 한 '인간'에 대한 성찰로 옮아 간 것이다. 사회의 구조와 그 구조가 갖는 역사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이 들어섰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말하려는 바의 정확히 반대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의 변화는 연출의 변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는데, 연출가 김수진은 푸코의 '모든 인간은 크고 작은 권력 관계로 엮여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권력욕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쓰고 있다. 연출가는 정반대로 해석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구조에 선행하여 구조를 결정짓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테마는 푸코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고, 브레히트에 있어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의 문제를,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인간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 오히려 그 반대를 설명하는 것, 브레히트에게 있서는 악의 존재는 본성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파시즘이 광기일 따름이라는 상투적인 설명에 맞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브레히트의 목적이며, 후자 또한 상투적인 지금에 와서 우리가 간취해 내야 할 주제의식은 연출가가 의도한 것의 정확히 반대, 즉 주체의 우위에 서는 역사적 구조의 존재이다.  


 <억척어멈> 역시 브레히트의 작품을 <달수>와 꼭 같은 정도로 손상시켜 놓았다. 공연을 보고 난 후 연출가 이윤택과 잠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억척어멈은 한국에서 더 잘 표현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몽골리안 여성에게는 한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택은 사회주의자 브레히트와 초월적 실체로서의 한민족을 성공적으로-정말로 성공적이었다. 공연은 정말로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결합시킨 것이 퍽이나 자랑스러운 듯 했다. 그에게는 억척어멈이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구현하는 인물이며, 그녀에게 일어나는 비극은 자본주의의 욕망에 대한 그녀의 순응에서 기인하는 것이란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처럼 지금 한국의 브레히트 수용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을 정치 속에서 사유하는 것에 대한 무능, 국회에서 벌어지고, 그 이름으로 신문의 카테고리가 꾸려지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등가적인 무능이다. 이러한 무능 속에서 브레히트가 말하고자 한 것, 현재의 정치 체제 속에서의 인간의 결정과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구, 그리고 그것을 위해 현재를 '낯설게' 만드는 것, 사회관계를 바라보는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방식, 즉 인간의 권력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라는 테마를 '낯설게'하는 것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문제는 이러한 무능이 단지 연출가들 개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지금 사회의 총체적인 무기력의 증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소위 '포스트 모던'을 소비하는 방식들 역시 이와 유사한 무기력의 표출이 아닐까?-


 물론 우리가 파시즘을 철폐하고, 따라서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길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라는 브레히트의 공식적인 주제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제시했던 대안 뿐만 아니라 그를 움직였던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에 있어서 진정으로 혁명적이었으며, 정치에 있어서 혁명적 사유의 유산을 이어받은 이 작가로부터, 그 모든 혁명성을 박탈하는 지금과 같은 해석을 인정할 수는 없다. 브레히트가 아니라면 좋다. 하지만 브레히트라면,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의 몇몇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최소한 그의 진정한 혁명성, 따라서 영원히 낯 설 그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의는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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