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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피랍 자기책임론: 일본의 경우

2004년 4월, 일본이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했을 때 이라크에서 5명의 일본인 자원봉사자가 납치당했다. 일본 정부는 이 납치에 대해서, 철군할 의사가 없다는 강경한 방침을 내세웠으나 다행히 이들은 이라크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납치와 관련한 일본 여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인질들 중에 좌파 활동가가 있었고, 이들이 모두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던 탓에 납치 초기부터 자작극이라는 설이 돌았던 것이다. 특히 산케이와 같은 보수적인 신문이 이와 같은 소문을 묘하게 조장하는 기사를 실어댔다. 사건이 발생하고부터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다녔던 가족들은 온갖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납치된 이들이 돌아오자 자작설은 '자기책임론'으로 바뀌었고, 피랍자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귀환한 인질들은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 재건활동을 돕고 싶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부가 유감표명을 한 것은 물론이요 비난 여론이 들끓었음도 말할 것도 없다.

'자기책임론'을 이와나미 서점에서 발행하는 시사잡지 [세계]를 통해 처음 접했을 땐, 보수화 하는 일본사회의 극단적인 면모를 봤다는 생각에 아연했었다. 3년이 지난 후 한국에서 똑같은 논쟁을 보게 될 줄은 정말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자기책임론'과 관련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그와 관련된 책까지 출판된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살펴 보는 것은 지금 한국의 논쟁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옮길 글은 일본의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의 '이라크 인질문제를 둘러싼 긴급발언'(http://dw.diamond.ne.jp/yukoku_hodan/20040416/index.html)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글에서 아사다 아키라는 일본이 미국을 쫓아 파병을 감행한 것을 비판하고, 이를 위해 국민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국가 최대의 목적을 내팽개치는 것이라고 한 후, 자기책임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 자기책임론의 분출에 대해서, 
일본 사회의 전근대성이나 전체주의의 출현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자기책임론을 흥미롭게 다뤘던 서방언론도 이 일을 일본사회의 '집단주의'와 연결시킨 바 있다. 일본의 경우, 피랍자들의 가족들이 한 사과나 사회로부터의 차가운 시선은 어느 정도 '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느냐?'는 식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한 논쟁에서 사회계약론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자기책임론은 한 편으로 근대 군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연결시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위험한 줄 알면서 아프간에 가지 않았느냐는 말은 비정규직인 줄 알면서 취직하지 않았느냐는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는데 이는 결국 국가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고립된 개인의 총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자기책임이라는 용어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수입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는 점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일본에서는 피랍 사건보다 앞서 노숙자 자기책임론이 제기된 바 있다. 자기책임론 논의의 신자유주의적 맥락과 관련한 상세한 논의는 http://www1.odn.ne.jp/~cex38710/jikosekinin.htm 에서 읽을 수 있다). 자기책임론이 신자유주의적 사회관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아사다 아키라의 논의에서도 등장하는데,  그는 피랍자들에게 구출비용을 징수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국가가 '민간경비회사'냐며 반문하고 있다. 자기책임론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대한 사고와 맞닿아 있다. 한국에서도 자기책임론이 이렇게까지 여론의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점점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영향일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봉사와 선교라는 목적의 차이가 존재한다. 콜린 파월의 인터뷰(원문의 일부를 여기서 읽어볼 수 있다: http://www.janjan.jp/government/0404/0404173329/1.php)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민간 차원의 봉사활동은 현지에서 봉사자들이 온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하기 때문에, 현지의 군사활동에도 도움을 주니 정부차원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일(이들이 한 것인지 다른 선교단체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은 현지에서의 선교일행마저 위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보다 양심적이라고 자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한국군이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초기에, 파병에 반대해 열성적인 활동을 해 왔던 사람이 납치되었다면 여론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국익을 논하며 피랍자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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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다치고, 이 일주일간, 2ch 을 중심으로 고통을 당한 3명의 인질과 가족에 대한 공격(Bashing)은 추악 그 자체였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미디어가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치쿠시 테쯔야가 인터넷의 게시판은 ‘화장실 낙서’라고 말했을 때도, ‘화장실 낙서’가 뭐가 나쁘냐, 오히려 져널리즘이란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 발생해 온 것이 아니냐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장소에서는 어디까지나 마이너리티로서, 이른바 마이너리티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발언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기는커녕, 자신들이 흡사 정부고관이라도 된 것처럼 과대망상에 빠져서, 마구 ‘국익’ 따위를 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피권고가 나와 있는 이라크에 자기책임으로 갔으니까 살해당해도 어쩔 수 없다, 이만큼 국익에 손해를 입혀서 폐를 끼쳤으니까 대처비용도 부담해야만 한다, 그러기는커녕 가족이 인질해방을 위해 자위대철수를 요구하는 것은 웃기는 일에도 정도가 있다 라며, 그런 식으로 ‘자기책임’을 휘두르는 녀석이, 자신이ㅡ 발언에 ‘자기책임’을 지느냐 하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안전지대에서 익명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물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10번 이상 대피권고를 내렸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가는 민간인까지 돌봐줘야 한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철수권고가 나와 있어도, 현지의 사람들이 지켜주는 형태로 착실하게 부흥지원을 진행하는 NGO 도 있고, 귀중한 정보를 보내주는 프리 져널리스트도 있다. 이번 3명은 경솔한 판단으로 위험한 지역에 무심코 들어가 버렸지만, 나이브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선의’에서 행동한 것이니,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애초에 국가가 시민을 보호할 때, 그것이 어떤 인간이냐는 관계없이, 모든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구출비용을 청구하다니, 정부가 민간경비회사인가? 해방된 인질이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 것에 대해, 고이즈미는 ‘이만큼 많이 정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출을 위해 침식을 잊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까요.’라며 불쾌함을 표현했었다. 마치 이라크지원은 자위대에서 한다는 것이 국가의 의지이기 때문에, 국가의 대피권고를 무시해서 이라크에 간 민간인이 국가에 폐를 끼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듯이. 하지만, 그들의 일부는 자위대 파견 전부터 이라크에서 활동을 해 왔었고, 미국이 이라크를 무정부사태에 떨어뜨려, 일본이 미국의 뒤를 쫓아 자위대를 파견했을 때야말로, 그들에게 큰 폐를 끼쳤던 셈이다. ‘그래도 이라크인이 싫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라크에서의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라며 그들이 알 자지라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은, 그 지역에서 일본인이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에 자위대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조차, 일본이나 이탈리아가 자위대나 군에 대한 철수요구에 굴하지 않았던 것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자신이 감수할 위험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하지만,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으면 세계는 전진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은 자위대가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알면서 좋은 목적을 위해 이라크에 들어간 시민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만약 인질이 되었을 때도 위험을 감수한 당신들의 잘못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물며 가족이 처음부터 ‘우선 저희 가족이 폐를 끼친 것을 사과 하고 싶다’ 라며, 오히려 지나치게 ‘일본적’이라고 할 만큼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쓴 발언이 눈에 띄어, 익명으로 비방의 메일이나 편지를 받게 된 것은 정말로 최악의 사태이다. 결국, 사죄나 감사로 계속 머리를 숙이고 다닌 만큼 인질과 가족을 몰아붙이니까, 마치 전근대의 무라(村)사회이다. 아니, 인질과 가족을 일본으로 이송하는 비행기에서, 기장을 설득해서 그들이 있는 구역을 출입금지로 하고, 보도진이 드나드는 것을 금하다니, 무라(村)사회의 실내감옥(座敷牢: 미친 사람을 감금해 두기 위해 집 안에 마련해 놓은 감옥)이 아니라면, 한 세기 전 구 사회주의권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인질에게 트라우마를 만드는 것은, 유괴범 이상으로 이런 일본정부나 일본사회의 이상한 대응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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