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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를 구분하는 방법

둘을 애써 구분하는 것은, 대체복무제라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긴 하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명칭에 대한 개념적 분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 따라- 병역거부자는 종교 또는 그 외의 신념에 따라 군사 훈련을 거부한 이들이고, 자신이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그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 역시 감수할 각오를 가진 이들이다. 반면에 병역기피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병역을 피하려 하는 이들이지만,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편법을 사용하여 법의 그물을 피해 나간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분은 사실은 매우 취약하고, 불명료한 것이다. 종교, 다른 신념과 이기적인 이익 추구를 구분할 수 있는 선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익에 대한 추구는 신념으로, 그리고 신념이나 종교 역시 이익에 대한 추구로 언제나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신념'이라면 그 만큼의 '각오'를 보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이 그러한 각오를 보여 왔다. 지금은 1년 6개월의 형기로, 그리고 예전 군사정권 시절에는 회유를 위한 모진 폭력에 굴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이제야 법의 영역에서 그 각오는 작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처럼 종교에 따른 병역거부-지금 도입된 법은 종교를 이유로 하는 병역거부 만을 인정하고 있다-가 법적으로 인정될 때 발생한다. 병역기피자들과 병역거부자들을 구분할 방법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병역거부자들과 병역기피자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안은, 법에 의한 처벌,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이라는 리트머스지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없으면 병역기피자들과 병역거부자를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내밀한 양심을 판별해 낼 수 있는 존재, 신 뿐이다. 그러니 '대체복무제는 수많은 병역기피자들에게 악용될 것이다.'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현재 발표된 대체복무제는 병역기피자들을 걸러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으니 더 고된 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예전처럼 '각오'를 볼 수 있게끔 해 보자는 것이며, 또 다시 '처벌'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과도한 대체복무제라고 하더라도,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떄문에 엄밀히 말하면 처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일신의 편안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군복무를 택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징벌적 성격을 갖는 제도이다. 제도적 인정을 초과하는 그 여분의 '징벌'이 신념의 순수성을 입증해 줄 것이다.

인간의 은밀한 내적 욕망을 국가의 폭력을 통해 검증해 내고자 하는 이런 생각은 그 논리에서 고문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결코 증거를 찾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 진짜 속내를 밝혀 내기 위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고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문은 다음과 같은 사고를 통해 정당화 된다. 한국은 군대를 필요로 하는데, 병역기피자는 군대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국가의 안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인 사고에 따라 병역거부자를 병역기피자로부터 걸러 내기 위한 '폭력'이 정당화 된다. 하지만 같은 논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다. 병역기피자 뿐만 아니라 병역거부자도 국가 안위에 대한 위협이며, 나아가 이들을 만들어 내는 종교나 사상 역시 안보에 위협이 되므로 이를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이것이 국가의 안전이라는 당위의 논리적 귀결이다(그리고 이것이 한국에 국가보안법이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것을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어젯밤도 술 마시며 한탄했을 해병대 전우회 여러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 자신의 논리의 '순수성'을 밀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선에선가 민주주의의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장벽에 부딪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병역거부자(그리고 기피자)들에게 하는 순수성에 대한 가혹한 입증 요구를, '정책적 합리성'에 의거해서 정당화 한다. 기실 자신들의 합리성 역시 민주주의의 한계 속에서 그 순수성이 좌절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타협에 대한 망각은 자신의 합리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신의 윤리적 위치를 안전한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로 특정 종교나 사상에 벌을 가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것을 넘어선다고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를 구분하기 위해 요구되는 징벌 역시 민주주의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여분의 징벌은 그 논리에서 고문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할 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을 고문하는 자와 같은 위치에 서게 만들 수도 있는 그 말에 윤리적인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서슬퍼렇게 병역거부자의 각오를 시험하려고 들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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