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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뇌(電腦)코일

다 봤으니 몇 자 적어 놓으련다. 


 하고 싶은 말은 칭찬, 칭찬, 칭찬 뿐이다. 정말 가진 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연출과 작화 모두 흠잡을 데 하나 없고-흠 잡기는 커녕 감탄하기 바빴다-, 학원 코메디, 미스테리, 사이버 펑크 등 다양한 장르적 특징을 잘 버무려 놓은 데다가, 셋 중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충실한 종합 선물 세트를 받는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모든 요소 가 '전뇌 안경'이란 소재와 딱 들어 맞게 연결 되어서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뇌 코일>>의 세계에선 정보 송수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일상 공간에 전뇌 공간을 덧 씌우고, '전뇌 안경'을 통해 그렇게 일상과 겹치게 전뇌 공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캡쳐한 화면에서 보이는 미사일은 안경을 쓴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설정). 내겐 이 설정이 상당히 재밌었는데, 내가 다른 작품들에서 본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구분돼 있는데 반해 <<전뇌 코일>>에서는 이 두 세계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뇌 코일>>은 이 독특한 설정을 마음껏 사용해서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는데, 학원 코메디의 성격을 갖는 전반부에선 주인공들의 모험을 '전뇌 안경'의 비주얼적 가능성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에선 미스테리 속에 소재가 던지는 인간학적인 질문을 잘 풀어내며 사이버 펑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분위기가 취향에는 훨씬 맞긴 하지만, 후반부의 구성에 높은 평가를 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인데, <<전뇌 코일>>은 소재에 함몰되지도, 그렇다고 진부한 인간학적 관점을 추상적으로 제시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가 저런 문제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 두 개의 세계가 두 개의 액션 스타일을 낳을 뿐인 <<매트릭스>>야 말할 것도 없고, 의체와 네트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논하는 <<공각기동대>>도 인용을 통해 17세기 유물론식 문제를 평면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두 영화에선 세계의 이원성은 그저 배경으로 놓여 있을 뿐 주인공들을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끌어 가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트리니티에 대한 네오의 사랑은 매트리스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 같고, <<공각기동대>>의 네트는 미지의 공간일 뿐이다. 반면에 <<전뇌 코일>>은 소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위에서 <<전뇌 코일>>에선 현실과 가상 공간의 애매함이 다뤄진다고 했는데, 이야기가가 전개됨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터일 뿐이었던 전뇌 공간은 놀이 이상의 진지한 체험, 타인과의 소통의 공간이자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가상 세계가 인물들이 심리적인 갈등을 겪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삶의 공간으로 그려짐으로써, 단순한 배경이나 설정이 아니라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상 세계란 소재도 전적으로 드라마 내적인 과정 속에서 마무리된다. 작품의 후반부, 부모들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라"며 안경을 뺏어갔을 때, 아이들은 "마음이 아픈 곳에 진실이 있다"면서 안경을 쓰고 다시 한 번 가상 세계로 들어가는데, 나는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기술의 진보란 인위성과 인간 영혼 또는 육체의 순수함이라는 대립적인 테마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한 주인공들의 감정이 전개의 구심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술 변화가 초래하는 변화를 받아 들이며 새로운 문제에 진지하게 마주하려는 감독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안경을 벗지도 쓰지도 않고, 이마 위에 걸치고 있는데 여기서도 감독의 낙관적인 생각이 엿보인다. 그 낙관이 대책 없는 긍정은 아니란 것은 애니메이션을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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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놓고 여성의 성에 대한 상품화가 확대되었다거나, 어린 소녀에 대한 로리타 컴플렉스가 인기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비판 또는 걱정어린 이야기들을 듣고는 한다. 현상을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다지 생산성 없는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멤버들이 나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대 소녀들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들이 나오기 전에도 노골적으로 섹시 컨셉으로 활동했던 그룹들도 있지 않은가? 로리타 컴플렉스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들의 십대 소녀들에 대한 욕망은 이미 원조교제가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건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의 guilty pleasure 에 그럴 듯한 이유를 하나 붙여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10대 소녀들의 성이 상품화되는 (우려할 만한) 사회 현상'이라는 틀로 바라 보면 성적 욕망과 그 실현의 문제를 도덕의 잣대를 통해서 바라 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보수적인 도덕적 훈계나 얄팍한 자기 변명 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남성들의 로리타 컴플렉스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욕망의 기호로 사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조교제는 불법이고 심각한 도덕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이들 그룹에 대한 욕망은 인정되고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억압되었던 욕망이 사회적인 인정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이란 말은 기존에 존재했지만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고, 비-의식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모호한 그 '무언가'가 최근에 와서야 의식적인 추구가 가능한 분명한 욕망으로 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조교제의 형태로 표출된 이 '무언가'는 당시에는 그저 심각한 사회적 일탈로 취급되었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서 비로소 이것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형상을 부여 받아, 그러니까 개념을 부여 받아, '욕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이 사실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되는데, 이 욕망이 그저 남성의 다양한 성적 욕망들 중 하나로서의 '로리타 컴플렉스'인 것 뿐만 아니라, 모종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난 이 욕망을 한국 사회의 남성 욕망 패러다임의 커다란 전환점이나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사례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와 군인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TV-Angels 라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반을 일본 여자 연예인으로 하여 일종의 국가 대항전 컨셉으로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친구의 반응은 "확실히 일본 여자애들이 '제대로' 할 줄 알더라"라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제대로'는 성적 욕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기호들을 잘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한국 여자 연예인들이 성적인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강한 행위를 연출하는 반면에 일본 여자 연예인들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적 의미를 부여 받은 기호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안경, 고양이 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 대상과의 유사성에 따라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구분했던 퍼스Peirce의 기호론에 적용해 보면 한국의 것은 도상에 가깝고, 일본의 것은 상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상과 지표가 대상과의 경험적 유사성 및 연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상징은 의미와 기호의 결합이 사회적 규범과 약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경험적이라는 사실은 또한 상징이 개념적인 것임을 의미하는데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적 다양성에 상관 없이 무언가를 '그 자체로' 논할 수 있다(의자라는 개념을 의자의 무한한 경험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퍼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그것이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이고, TV-Angels는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또는 일본 사회와는 달리 한국에는 남성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비근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조폭마누라2>>에는 기억을 잃은 전 조폭 보스인 신은경이 다방 종업원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다방 종업원이 신은경에게 가르친 것은, 가슴을 흔들며 끈적한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영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본 영화라면 결코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남자의 유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상징들의 사용법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한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프레 플레이'와 같은 일본에서 발달한 성매매 시스템도 이의 한 예로 보인다. 한국이나 유럽에서, 성매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반쯤 벗은 여성들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변태' 문화를 그저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게는 이게 욕망이라는, 극히 경험적이라 간주되는 그 무언가가, 경험의 구속을 벗어나 자립했음을 보여 주는 다양한 예들로 보인다. 그리고 내게는 개념화 또는 상징화를 통한 자립은 일반적으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 만세, 하악하악" 이러는 오타쿠들이나 성행위에 관련된 얘기를 하며 낄낄대는 사람들이나 음담패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같은 음담패설이라도 오타쿠의 그것이 더 큰 문화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적 욕망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는 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양상을 지켜 보며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이런 욕망의 상징화(개념화)가 대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윤곽이라도 그려 보는 것이다. 


 남성중심으로 짜여져 왔고, 짜여져 있는 이 사회에서 언제나 긍정되고, 장려되는 것이 남성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만한 것이다. 남성의 자위는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반면에 여성의 자위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이고(자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던, 구성애의 아우성도 여자의 자위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었다), 이성 연애에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먼저 하도록 기대되는 것은 주로 남자이다. 이런 식의 예는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남성의 이면은 주체적인 욕망을 전혀 갖지 않는, 단순히 욕망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욕망의 판타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로, 그러니까 그의 욕망을 추동해서 그를 일탈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들 중의 하나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판타지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의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혁명 의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관해 논의가 벌어졌을 때, 여성의 참정권 부여에 반대하는 주장의 근거로 나왔던 것 중에는,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라 국무에 방해된다는 것도 있었다(조앤 스콧Joan W. Scott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원제:Only Paradoxes to Offer)>>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지금 책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대충 맥락은 맞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팜므 파탈을 통해서 남성들은 여전히 그들이 머물고 싶어하고 갖고 싶어하는 이미지에 따라, 자기를 통제할 수 있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 원래 남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국가의 일 같은 공적인 일을 보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지만, 이 죄 많은 여성들이 간악한 유혹의 힘을 갖고 있어서 가끔 이성이 흔들리고 일탈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인 것이다. 이 논리대로 하면, 남성은 욕망에 있어서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성의 이끔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물론 이 논리는 남성이 쾌락 달성과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라는 이중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훌륭한 수단으로 기능하였지만, 나는 한편으로 모든 당위와 논리가 그렇듯이 이것도 순수한 위선으로 기능했다기 보다 실제로 남성들의 삶을 규율하는 어떤 규범으로 작동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성의 성적 욕망의 표현에 대한 어떤 강력한 규제적 틀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물론, 여성의 경우에는 성적 욕망의 표현이 아예 인정되지 않거나, 남성의 우월한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 모든 것을 하도록 허용되는 팜므 파탈이라는 틀을 만들어 냈지만).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세계를 포함하여 자기 자신의 강력한 통치자여야 하기 때문에 욕망도 그러한 남성적 주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자는 성적 관계에서 언제나 주도적이어야 하고, 성행위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악기의 비유처럼 여자의 몸을 잘 '연주'할 수 있어야 하며, 마치 학문을 하고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처럼 그쪽 방면의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역시나 유명한, "좋았어?"라는 멘트를 상기하자). 한국에서 이것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데, 수많은 남자들이 연하의 여자와의 연애에 집착하는 것에는 관계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 보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역시나 유명한 "오빠만 믿어"를 상기하자). 남성들은 점잖게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 주거나, 능수능란하게 여자를 '정복'하거나 해야 하는 것이지, 촐싹거리면서 여자를 뒤쫓아서는 안 된며,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아이돌에 대한 팬덤은 주로 여성들의 것이었다. 소년팬들의 열광을 받는 여자 가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팬덤 문화는 여성들의 것이었고, 공개방송에서 비명을 지르고 오빠를 연호하고, 숙소 앞에 장사진을 이루며 연예인을 기다리는 것은 경박한,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었고, 남자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남성의 욕망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그 논리에 따라, 욕망은 추구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확고한 규범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시 일본과 비교해 보자. 모닝구 무스메의 콘서트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내 귀에 들리는 연호하는 관중들의 음성은 거의가 남자들의 것이었다. 몇 만 명이나 되는 남자 관객들이 여자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보러 가서, 그들 노래의 온갖 세부적인 디테일에 맞춰서 구호를 넣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정말 낯선 광경이었고, 동시에 약간은 낯이 뜨거워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남자들이 저런 부끄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 부끄러운가? 우리는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들이 그들의 콘서트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을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하면 부끄러운 일이 된다. 이것이 남성의 성적 표현의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등장은 이런 구도에 아주 미미한,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표현되지 않아야 할, 또는 근엄한 지배자의 형상으로 표현되어야 할 성욕이 아니라 아이돌에게 환호하는 '퇴행적'인 욕망의 표출로서의 성욕 또한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다는. 이것을 욕망의 패러다임의 변화, 그러니까 예전에는 권위적이고 은밀하게 작동했던 남성의 성욕이 지금은 덜-권위적이고,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성욕(하지만 그렇다고 덜-폭력적일까?)으로 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논리적 모순에 따라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것으로 막연하게 존재하던 그 '무언가'가 자기 개념을 획득하여 비로소 구체적인 욕망이 되었다고(성 상품 구매의 옵션이 증가?), 따라서 이성적인 남성에게 드디어 욕망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후자가 좀 더 재밌을 것 같다. 약간은 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것도 같고.

 물론 내가 인터넷에서 접한 이들에 대한 열광은 아이돌에 대한 순수한 열광이 아니라 키치적인 감수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는 마치 대선에서 허경영이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 유행 중의 하나가 될 것인가? 한국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원더걸스나 소녀시대가 아니더라도, 박진영은 확실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할 수 있고, 일단 남성의 성욕이 구체적이고, (그러나)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채널이 열린 이상 앞으로 이와 비슷한 상품들이 계속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미 무시할 수 없게 확장되어 버린 한국의 오타쿠 문화를 이러한 경향과 분리시킬 수도 없을 것 같고, 오히려 하위 문화로서의 오타쿠적 감수성이 주류 문화 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적은 '욕망의 개념화'라는 이해가 옳다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기존의 개념 체계 전체의 의미를 새롭게 짜는 것이기 때문에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한국 사회에 남기는 문화적 영향력은 막강할 것이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엄숙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한국의 남성 성 문화에 다양성과 발랄함이 도입되는 긍정적인 징후로 보아야 할 것인가, 또다른 남성 중심주의의 표현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더 강력한 지배로 읽어야 할 것인가? 사실 전자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에 대한 남성팬들의 시선에서 "오빠가 다 해 줄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두 그룹의 등장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더라도, 아직 시작일 뿐이고, 아이돌 팬인 남자는 분명 여전히 '남성성을 결여한' 사회적 소수자일텐데 그들에게서 소수자로서의 자기 방어와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경우보다는 여전히 주류 남성의 감수성을 느끼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 활동을 하는 성인 여성들은 대개 부끄러워 하면서도 즐겁다며 자신의 감정을 소박하게 표현하고는 하는데,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남성 팬들이 이러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을 팬덤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남성적 논리와 감수성의 한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키치적인 문화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것인지는, 좀 더 지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덧. 졸려서 비몽사몽하며 써서 글이 무척 엉성하다. 기호니 상징이니 하는 건 완전 다 엉터리로, 개념들을 '개념없이-_-' 마음대로 써 먹은 것이다. 개념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게 되거나,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내 사고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법을 깨우쳐야 할텐데. 한 동안 이 주제가 머리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앞으로 며칠간 글을 쓸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급하게 두드렸다. 사실 나는 농담으로라도 "소녀시대짱!" "원더걸스쵝오!" 라는 말은 못할 만큼 저 두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덧2. 이글루의 방송&연예 밸리에서 어떤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씁쓸해졌다. 블로그 프로필에 아이돌 팬 활동과 동인 활동에 거부감이 있을 사람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나는 별로 법을 중요하게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라고 다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한테 미리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인터넷 공간에서 그만큼 많은 혐오와 조롱에 노출되었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이너리티들의 마이너리티로서의 자각과 약간의 겸손함과 수줍음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이돌 팬인 남자가 많아지면 좀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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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에 반대하는 독일 학생들의 데모


 
 헤센 주의 일년 등록금은 최대 1,000 유로.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2005년에 보수 세력이 등록금 징수 금지에 반대하는 소송을 걸어 승리를 했고, 기독민주당원인 헤센 주지사도 이에 참여하여, 헤센 주에 올해부터 등록금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헌법에 등록금 금지 조항이 있는 탓에, 등록금(Studiengebühren)이 아니라, 학업기여금(Studienbeiträge)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학생들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징수하는 것이니 실제로는 등록금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고세훈 교수가 복지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에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복지 수준이 높은 국가일 수록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서 복지 정책이 추진되기가 더 쉬운 반면, 복지 수준이 낮은 국가일 수록 국민들이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 자체가 워낙 낮다 보니, 복지가 더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복지 정책이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이 내용을 무척 신선한 분석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내가 이 당연한 사실을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복지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네, 한국 경제 구조에선 서유럽 식의 복지는 시기상조네. 하는 주장들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 경제 수준에서 복지가 가능한지를 증명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정치의 논리를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라는 주제만을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놓쳤던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은 결코 정책적 합리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이었다. 빼어나고 우수한 관료가 뛰어난 정책으로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독재를 긍정할 가능성이 다분한 위험한 사고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이라는 점에서 비합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 어떤 관료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어떤 정책이 모든 이해관계를 넘어서 투명하게 작동할 수 있겠는가? 중우정치의 위험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사람의 관계에는 불투명성과 불합리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나라 안팎 사정을 손금 보듯 꿰뚫어 보는 관료 도사들이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 모두가 마치 자신이 그 도사 자리에라도 앉은 양 생각하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자신의 필요를 근거로 해서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 말고, 어디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는가? 

 12월 14일 토요일에는 데모와는 도통 인연이 없어 보였던 인구 10 만의 소도시 다름슈타트를 포함해서 독일 곳곳에서 등록금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등록금에 반대하는 것이고, 교육이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낯 뜨거운 이상을 말짱한 정신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낳는 것이 2만불과 3만불이라는, 한국과 독일의 국민소득 차이는 아닐 것이다.



시내 광장에 사람들이 200명 정도 모여 있다. 현수막에는 등록금에 반대하는 부모들이라고 적혀 있다. 

 
 슬슬 움직이기 시작. 방송차는 산타 모자를 배포 중.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동네 아이들이 신나서 받으러 다녔다. 한국처럼 방송차가 선두에 서지 않고, 시위대와 섞여 느슨하게 움직인다. 노래는 역시 트는데, 민가나 저항음악을 트는 게 아니라, 적당히 신나는 음악을 튼다. 킬빌 OST 라던가..
           

경찰은 이런 느낌으로 선두와 후미에서 같이 움직인다. 손에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찍어대는 경찰들이 많은데, 신기하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데모대는 뛴다. 뛴다고 불평들은 하지만, 여기서도 뛸 때는 사실 다들 헤벌쭉 웃고 있다. 앞에서 못 찍어서 아쉽다. 
잠시 멈춰서 발언을 듣는 시간. 2008년 지방선거를 향해 분투 중인 Die Linke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 발언자가 발언을 마무리하며 외친 구호는, "투표 하러 가지 말고 정부를 무너뜨리자, 코뮤니즘을 위해!!"였다. 아, 저렇게 노골적인 구호를 외칠 수 있다니...조금 감동 받았다.                  
                                                                                   퍼포먼스

                                                                       교양(Bildung)은 죽었다!

                                                                             왜 이러고 있냐면...   

                               반대편에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독일이나 경찰하곤 사이가 안 좋다.

 
                                                   너희들의 정책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저항이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야!
 

 

 


                               아나키스트 그룹, 우리는 더 큰 파이 조각이 아니라, 요리법을 바꾸기를 원한다! 

 

 


 광장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찰이 길을 안 내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놀고 있다. 아까 퍼포먼스를 했던 친구와 일행이 북을 치면서 놀고 있다. 차에서도 마침 꽤 클럽에나 어울릴 법한 음악을 틀어 줘서 꽤 그루브한 분위기를 연출, 여기서 꽤 오래 머물렀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춤을 추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물론 마임은 아니고..
 
 
 오늘 집회를 나가 보고 확실해진게 있는데, 나한테는 아무래도 겨울 집회 징크스가 있나 보다. 왜, 겨울에 집회에 나가는 날은 평소보다 훨씬 추워지는 걸까? 오늘도 평소보다 5도는 더 낮을 것 같은 맹추위 속에서 달달 떨고 있다가, 마지막 사진을 찍은 곳에서 몸도 녹이고 장도 볼 겸 잠시 앞에 있는 마트에 들어 갔다 나오니, 대오가 사라지고 없었다(......) 해산하기 전에 인터내셔널가라도 부르지 않을까 싶어 끝까지 있으려 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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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폭풍Sommersturm>>, Marco Kreuzpaintner

                              주인공 Tobi 와 그의 친구 Achim. 누운 자세를 보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독일은 동성애에 대한 차별의식이 한국보다 현저하게 낮다. 유럽이 그렇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저녁시간의 공중파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침대에서 포옹하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에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선거 유세에서 자신의 동성 파트너를 소개한 후 오히려 지지율이 올라가기도 하는 곳이니 공적 영역에서는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테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걷다가 실제로 동성 커플을 마주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는데, 아직은 사적 영역에서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은가 보다. 한국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정치적 계산에 밀려, 어이없게도 법이 동성애 차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꼴같잖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제도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로 잡는 것보다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든 편견에 맞서는 게 더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더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법, 이런 독일의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는 영화가 한 편 있어서 소개해 본다. 


 영화 <<여름폭풍Sommersturm>>의 미덕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동성애가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는 양상을, 사춘기 소년의 경험을 통해 섬세하게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남자 조정부 주장을 하던 남자 아이가, 여름 합숙 캠프에서 자기 단짝 친구의 여자친구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기분이 대체 어떻겠는가? 한국에서라면 어쩐지 집단 린치 신이라도 들어가야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지만, 독일 영화인지라 옆 캠프에는 베를린에서 온 퀴어 조정팀이 합숙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게이들이 다른 남자 캐릭터들 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개성있게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당당하다. 티셔츠에는 큼지막하게 Queer Team 이라고 박아 넣었고, 몸짱도 하나 있는 데다가, 자신들이 게이임을 알고 움찔거리는 '일반 남자' 들에게 윙크를 날려 주는 센스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수자이자 약자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주눅드는 것은 '일반 남자' 들인데,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네가 게이든 뭐든 상관 없어'라고 선심 쓰듯 말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여자 꼬시겠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해 하며 온 놈들이 도리어 꼬심을 당하는 위치에 서게 됐으니 얼마나 무섭고 당혹스럽겠는가? 이 영화는 게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가득찬 '일반 남자'들이 게이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과 공포를 역으로 이용해서 유쾌한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가장 호모 포비아가 심한 녀석이 심부름 하러 캠프에 찾아 올 때 일부러 그의 망상적인 공포에 맞춘 상황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디를 통해 편견을 전복적으로 조롱하는 한 편으로 게이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편견을 유감 없이 깨뜨리는 실제 게이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당혹스럽다. 편견과 다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부정하기가 더욱 어려워 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비극적 피해자가 아니라 주체로써 당당히 그려진 덕분에 주인공의 고민은, 동성애 정체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폭력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란 맥락에서 다뤄진다. 동성애 배제적인 세계 속에서 살던 한 소년이 어떻게 소수자 정체성을 수용하고,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가?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편견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말은 그럴 듯하게 해도 막상 동성애자를 실제로 만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패션 소품처럼 여기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이성애 정체성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도 그러한 편견의 소산일 것이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배제라고 표현될 수 있을텐데, 법적, 제도적 접근으로는 해결되기는 커녕 포착될 수 조차 것이지만, 분명히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수용하는데 있어 장애로 작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정 코치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혐오 발화를 억제하는 일이 전부일 뿐, 학생들의 고민에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 주는데, 이와 동일한 무능함이 제도적 차원의 사고를 바탕으로 한 동성애 담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그 선택의 과정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의 틀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차별과 심리적 압박을 경험할 것이다. <<여름폭풍>>은 무능한 교사와는 대조적으로, 편견에 휘둘리던 아이들이 조금씩-결코, 유토피아적인 하나됨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 변화하는 모습을 살피며, 미세한 차별들이 얽혀 있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섬세하게 형상화 해 내고 있다. 이렇게 제도 담론이 그 구조적 한계로 인해 포착해 내지 못하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의미화해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 동성애를 주제로, 그리고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에 대해 <<여름폭풍>>이 갖는 한 가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한국에는 <<썸머스톰>>이란 이름으로 개봉했다. 끄응, 나는 <<타인의 삶>>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도 흥행에 실패했나 보다. 이런 영화가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서 단체 관람되면 얼마나 좋을까. 성교육도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지..

+ 사실 퀴어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는데, 앞으로 찾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좀 살펴 보고 싶다. 난 그 유명한 <<브로크백 마운틴>>도 안 봤는데, 여전히 그다지 보고 싶단 생각은 안 들고... 괜찮은 거 추천 좀..

+ 3개월이나 전에 본 영화를 갑자기 포스팅한 이유는... 오늘 Tobi 와 꼭 닮았다고 생각되는 애를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집에 와서 확인을 해 보니 역시 아니긴 했다. 그래, 어쨌든 연예인인데 그렇게 쉽게 만날리 없겠지. 하여간 내가 참 사람 보는 눈이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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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6


 며칠 전 눈을 맞으며 걷고 있는데, 뜬금없이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추운 날씨에 볼이 얼얼한 느낌이, 왠지 눈을 맞고 있는 나카야마 미호의 발간 볼을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어 열풍을 불러 일으킨지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에 잠시 망연해 졌다가, 곧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 잡혀 정신없이 영화를 구하러 다녔다. 꼬꼬마 시절에는 그저 눈을 맞는 나카야마 미호의 모습과 눈 덮인 오타루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겼을 뿐이어서인지,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추억을 딛고 나아가려는 사람과 마들렌 과자처럼 갑자기 찾아 온 흘러가 버린 시간에 애잔함을 느끼는 사람 모두 무척 사랑스러웠다(그러니까, 같은 나카야마 미호지만). 영화의 마지막, 후배들이 가져다 준 옛 추억은, 사랑이나 슬픔, 증오 같은 것과는 커다란 감정과는 관계가 전혀 없는, 대단할 것 없는 과거의 조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추억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커다란 사건이 없더라도, 미화된 과거가 아니더라도, 흘러간 시간의 덩어리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큰 무게를 갖는 것이다. 아무런 과장도 없는 설득력 있는 감정과 그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화면, 이와이 슌지의 감수성은 딱 이 영화까지만 좋았던 것 같다. 

 눈 덮인 오타루의 모습과 나카야마 미호가 너무 아름다워, 영화를 보는 동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와이 슌지는 사춘기, 추억 같은 테마에 집착하고, 이것이 그의 아름다운 화면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멤버로 추억을 되집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섬세하게 다루는 <<설국>>을 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굉장히 멋진 영화가 됐을 것이다. 아, 글을 쓰고 있자니 이번에는 <<설국>>이 무척 읽고 싶어진다. 나는 이와이 슌지보다도 훨씬 과거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이고, 영화고, 음악이고, 만화고,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것들만을 늘 되돌아 보고, 또 되돌아 보고는 한다. 



 사실 오늘은 영화를 두 편 연이어 보았는데, 다른 하나는 켄 로치의 <<달콤한 열여섯>>이었다. 스코틀랜드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삶 대신 아름다운 설국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택한 것은, 순전히 공감의 문제였다. 일상의 말랑말랑한 감정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고통에 공감하기란 정말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한 편으로 족해도, 켄 로치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도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달콤한 열여섯>>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영어라고 할 수도 없을 영어를 구사하는 스코틀랜드 하층계급의 모습이다. 이들은 영국England로 일하러 가기 위해 심지어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United Kingdom 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계급과 지역을 경계로 삶의 양상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영국 사회의 은폐된 진실이다. 이런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셰인 메도우즈Shane Meadows감독의 <<이것이 영국이다This is England>>를 놓을 수 있을 듯 싶다. 이 영화는, 대처의 집권과 포클랜드 전쟁을 배경으로, 영국의 하층계급 속으로 스며드는 파시즘을 날카롭게 보여 준다. 여기서는 반대로, 하층계급들의 좌절감이 England라는 민족적 환상에 지배 당하는 스킨헤드들을 만들어 낸다. 켄 로치와 셰인 메도우즈 감독은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 똑같이 어두운 내용이지만 <<이것이 영국이다>>가 더 생기발랄한 연출을 보여 준다. 음악이나 영상이 더 감각적이기도 하지만, 80년대 영국 하위문화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나 유머가 많아서 꽤 잔재미가 있다(영화에 등장하는 귀여운 패션 스킨헤드족, Woody 는 루팡3세를 쏙 빼닮았다ㅎㅎ). 사실, 두 영화 중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것이 영국이다>>를 고를 것이다^^

 사진은 존경하옵는 켄 로치 감독과 <<달콤한 열여섯>>의 주인공 Liam 역을 연기한 Martin Compston 군이다. 사진은 Kino 1997년 9월호에 수록되었던 것인듯. 다시금 추억 한 토막이 떠오르는데, 역시나 꼬꼬마 시절에, '뭐야 이건, 재미없어'하면서 들춰봤던 것들 중 하나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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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 대한 단상들

1. 이회창이 대선에 출마한단다. 한 동안 정신을 빼 놓고 살다가, 정신 좀 차려야겠다 싶어 들여다 본 뉴스에서는 이회창이 좌파 정권에게 잃어버린 십년 운운하고 있었다. 진짜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이번 대선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봤다. 이명박이 승승장구하는 꼴에 베알이 꼴려서라도 투표는 하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회창의 출마 소식을 듣고나니,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의 출마는 대선을 챔피언 벨트를 앞에 두고 벌이는 타이틀 매치로 바꿔 버렸다. 나름의 위치에서 이명박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 모든 정당들을 우습게 만들며, 이회창은 경쟁이라는 선거의 원초적 속성을 스펙터클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경기의 결과는 당사자들과 그들 각각에게 베팅한 사람들에게나 중요할 것이다. 유권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흥을 돋궈 주는 들러리일 뿐이다.  

2. 이명박 독주 체제를 가능하게 한 대립구도는 경제 대 이데올로기였다. 이명박은 경제를 살리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인 반면, 그 외의 모든 집단들은 공허한 소리만 되뇌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는 널리 퍼진 인식이 이명박의 독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각종 추문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그의 지지율이 떨어질 줄을 몰랐던 것은, 사람들이 가치 판단에 냉소를 보내며 경제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본 표현처럼 "섭생하는 존재가 밥하고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언제나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관점 아래서 작동한다.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있다는 저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맞서 진보 정당들(물론 범여권은 제외)은 성장 대 분배를 내세우며, 경제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고 하였지만 조금도 먹혀 들지 않았다. 여기에는 소위 범여권의 영향이 지대한데, 그들은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이명박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면서 경제 영역 바깥에서의 차이를 통해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을 설정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경제와 이데올로기를 외적인 관계에 맺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제로 이명박 지지자들과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이명박이나 이회창에 대한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민노당이나 사회당 같이,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강고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하나의 경제에 다른 경제를 대립시키려는 노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김규향은 강준만 같은 사람이 조갑제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나도 내심 이번에 범여권 일당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에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20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우려 먹으며, 518 기념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고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짜증났는데, 이제는 한술 더떠 이명박과 이회창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꿈쩍도 않던 이명박의 지지율이 이회창의 등장 이후에야 요동을 치고 있다. 이회창은 도덕성과 대북 정책을 내세우며 이명박과 선을 가른다. 이것이 대선의 명분을 얻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유권자를 가르는 지표로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구도 속에서 이명박에 대한 지지가 경제를 불가침의 대상으로 설정한 후 일종의 판단 없는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이회창의 등장으로 지지자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자의식에 의거해 누가 진짜 보수인지를 판단할 것을 요구받는다. 둘의 지지율이 6할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글프게도 이 분열은 공히 한국 사회 최대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어디가 다른지, 실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차이와 분열은 작동한다. 그래서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이회창과 이명박의 싸움이,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 사이의 각축일 뿐인 그들 정치의 진실을 은폐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구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구도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난 십여년 동안 작동했던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는 비록 허울 뿐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규제적 성격은 있었다. 하지만 이회창과 이명박이 만들어 낼 그 무엇에도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4. 뉴스에서 이회창의 사진을 보면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5년 전의 모습과 너무 똑같아 보여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 여행을 온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진을 볼 때 졸려서 비몽사몽이었던 탓이었겠지만, 마치 다른 시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 기묘한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회창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무덤에서 걸어 나온 유령이기 때문이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그가 이미 죽었음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되도록. 물론 이회창에 맞서 이명박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낳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한 번은 희극으로. 이회창은 보수 대 진보의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등장한 희극 배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그의 손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손에서 시작되기를.
 
5. 찾아 보니 해외 거주자는 부재자 투표가 안 되는 것 같다. 순식간에 쑈가 되어 버린 대선을 바라 보며, 무엇을 해야 하나 착잡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아무 고민도 할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지 싶다. 대선을 맞이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러니까 스포츠 중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맛있는 맥주와 주전부리를 사다 놓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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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에 즈음해서

                                                                         

+ 이제 개강이다. 한 달도 넘는 지루한 휴가가 이제야 끝이 났다. 물론 지루했어도 휴가는 휴가였으니, 끝난다니 아쉽기만 하다. 언제 또 이렇게 막장으로 퍼져 보리. 게임과 만화와 영화가 함께 했던 그 수많은 낮과(!) 밤들. 아직 수업을 듣기에는 독일어가 형편없이 부족해서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기서는 어학 코스도 학점을 인정해 준다고 한다. 독일어 강좌를 세 개 듣고, 강의는 두 개만 들을 작정이다.

 

 이곳의 대학 강의는 크게 세 가지, Vorlesung, Pro Seminar, Seminar 로 나뉘어 있는데, Seminar 가 들어간 것은 강의와 학생들의 발표, 토론이 병행되는 것이고, Vorlesung 은 말 그대로 (fore+reading) 강사가 강의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Vorlesung 이 더 쉽고, 취득할 수 있는 학점도 더 적다. 물론 나는 발표는 커녕 당장 강의 듣는 것도 큰 일이기 때문에 Vorlesung 밖에 선택지가 없다.

 

 지금 있는 대학은 다름슈타트 공과 대학으로, 공과 중심의 종합 대학이긴 하지만 강의 커리큘럼을 살펴 보니 인문학 강의들도 썩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이곳이 이 정도인데, 인문학으로 유명한 대학의 강의들은 어떨까 생각하면 좀 속이 타기도 하지만...어차피 지금이야 들어도 못 알아들을테니..

 

 하여간 이번 학기에 선택한 것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강독과, <서술의 학Das Wissen der Darstellung>이라는, 이름을 봐서는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강의이다. <<파르메니데스>> 를 강의하는 사람은 Hassan Givsan 인데, 지지난 학기와 지난 학기에 연이어 <헤겔의 형이상학> 과 <마르크스의 형이상학>을 강의해서 눈여겨 보았던 사람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에서 플라톤으로의 전환이 좀 쌩뚱맞지만(전공은 하이데거인 것 같고), 나름 재미있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까 알아 들으면ㅠ.ㅠ

 <서술의 학>은 Gerhard Gamm 이 강의하는 것인데, 철학적 지와 그 서술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파르메니데스>> 한 권만 문헌 목록에 있던 Givsan 의 강의와는 달리, 헤겔은 물론이고, 노발리스나 비트겐슈타인까지 포함한 목록이 겁을 잔뜩 집어 먹게 하고 있다. 한국 대학의 스타일처럼 목록은 그저 목록일 뿐이라면 좋으련만, 유럽 대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한다는 풍문을 들어 온 터라...

 

 

 

+ 개강과 더불어 지역 주민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스포츠 강좌들도 시작했다. 독일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생활 스포츠의 탄탄한 기반인데(두 번째로 놀란 건, 여기서 나한테 장학금을 준다는 사실이다-_-;  덕분에 아르바이트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졌다. 이런 게 바로 '복지병'이란 걸까ㄷㄷㄷ), 5-60 개에 달하는 다양한 스포츠 프로그램이, 거의 대부분 무료로,  유로 더라도 한 학기 비용이 한국 한달 헬쓰클럽 보다도 싸게 제공되고 있었다. 신청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 시간과 의지만 있으면 일주일 내내 각종 스포츠를 경험할 수 있다. ...운동하고는 애저녁에 담을 쌓은 나도, 호기심에 함기도라는 일본 무술을 하러 가 봤는데(한국에 들어와 있는 그거랑은 다르다, 그건 중국건가?), 덕분에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근육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운동이라곤 걸어서 마트가기 밖에 하질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  이것이 고수가 되기 위한 시련이리.

 

 

 

 + 며칠 전부터 라면이, 속이 얼얼해질 만큼 매운 칼칼한 라면이 먹고 싶었다. 평소 한국 음식이 딱히 그리웠던 적은 없는데, 이놈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깊숙히 들어와서 심지어  꿈에까지 등장해 버렸다. 게다가 요즘 날씨가 부쩍 차가워져 얼큰한 라면 국물 생각이 또 어찌나 간절하던지.. 그래서 처음으로 아시아 푸드 마켓에 가 봤다. 라면 하나에 무려 0.89유로 orz 그래도 밀려 오는 유혹과 향수를 참을 수 없어서 신라면과 짜파게티를 두 봉씩 사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날듯이 집으로 돌아 왔다. 결과는 뭐... '이게 아니야!' 였다(사실 라면이 욕망의 기표가 된 데는, 다른, 더 그럴 듯 하고, 더 재밌는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한국에서 자취할 때는 주식 삼아 먹던 것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어떻게 저런 걸 먹고 살았나 싶다. 어쩌면 스스로의 요리에 대한 자신감의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든 것들을 별로 맛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먹질 않았는데, 요즘 학교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그렇고, 라면과 짜파게티도 그렇고, 비교를 해 보니 내가 만든 음식이 훨씬 낫더라. 후후.  

 

 

 

 + 심심한가 보다. ..공부하기가 너무 싫어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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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를 구분하는 방법

둘을 애써 구분하는 것은, 대체복무제라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긴 하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명칭에 대한 개념적 분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 따라- 병역거부자는 종교 또는 그 외의 신념에 따라 군사 훈련을 거부한 이들이고, 자신이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그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 역시 감수할 각오를 가진 이들이다. 반면에 병역기피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병역을 피하려 하는 이들이지만,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편법을 사용하여 법의 그물을 피해 나간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분은 사실은 매우 취약하고, 불명료한 것이다. 종교, 다른 신념과 이기적인 이익 추구를 구분할 수 있는 선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익에 대한 추구는 신념으로, 그리고 신념이나 종교 역시 이익에 대한 추구로 언제나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신념'이라면 그 만큼의 '각오'를 보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이 그러한 각오를 보여 왔다. 지금은 1년 6개월의 형기로, 그리고 예전 군사정권 시절에는 회유를 위한 모진 폭력에 굴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이제야 법의 영역에서 그 각오는 작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처럼 종교에 따른 병역거부-지금 도입된 법은 종교를 이유로 하는 병역거부 만을 인정하고 있다-가 법적으로 인정될 때 발생한다. 병역기피자들과 병역거부자들을 구분할 방법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병역거부자들과 병역기피자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안은, 법에 의한 처벌,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이라는 리트머스지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없으면 병역기피자들과 병역거부자를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내밀한 양심을 판별해 낼 수 있는 존재, 신 뿐이다. 그러니 '대체복무제는 수많은 병역기피자들에게 악용될 것이다.'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현재 발표된 대체복무제는 병역기피자들을 걸러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으니 더 고된 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예전처럼 '각오'를 볼 수 있게끔 해 보자는 것이며, 또 다시 '처벌'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과도한 대체복무제라고 하더라도,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떄문에 엄밀히 말하면 처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일신의 편안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군복무를 택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징벌적 성격을 갖는 제도이다. 제도적 인정을 초과하는 그 여분의 '징벌'이 신념의 순수성을 입증해 줄 것이다.

인간의 은밀한 내적 욕망을 국가의 폭력을 통해 검증해 내고자 하는 이런 생각은 그 논리에서 고문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결코 증거를 찾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 진짜 속내를 밝혀 내기 위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고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문은 다음과 같은 사고를 통해 정당화 된다. 한국은 군대를 필요로 하는데, 병역기피자는 군대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국가의 안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인 사고에 따라 병역거부자를 병역기피자로부터 걸러 내기 위한 '폭력'이 정당화 된다. 하지만 같은 논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다. 병역기피자 뿐만 아니라 병역거부자도 국가 안위에 대한 위협이며, 나아가 이들을 만들어 내는 종교나 사상 역시 안보에 위협이 되므로 이를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이것이 국가의 안전이라는 당위의 논리적 귀결이다(그리고 이것이 한국에 국가보안법이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것을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어젯밤도 술 마시며 한탄했을 해병대 전우회 여러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 자신의 논리의 '순수성'을 밀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선에선가 민주주의의 논리적이고 윤리적인 장벽에 부딪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병역거부자(그리고 기피자)들에게 하는 순수성에 대한 가혹한 입증 요구를, '정책적 합리성'에 의거해서 정당화 한다. 기실 자신들의 합리성 역시 민주주의의 한계 속에서 그 순수성이 좌절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타협에 대한 망각은 자신의 합리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신의 윤리적 위치를 안전한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를 만들어 낸다는 이유로 특정 종교나 사상에 벌을 가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것을 넘어선다고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병역거부자와 병역기피자를 구분하기 위해 요구되는 징벌 역시 민주주의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여분의 징벌은 그 논리에서 고문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할 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을 고문하는 자와 같은 위치에 서게 만들 수도 있는 그 말에 윤리적인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서슬퍼렇게 병역거부자의 각오를 시험하려고 들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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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9.04~07

며칠 도쿄에 머물렀다.
도쿄는 서울보다 거리의 폭도 좁고, 건물의 높이도 낮아서 약간 아기자기한 느낌이 묻어나는 귀여운 도시였고,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많아서(일본 남자들은 다들 신기할 정도로 날씬해서 하나 같이 스키니를 입고 있었고, 소문으로만 듣던 코갸루가 아직도 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척 신기했다-_-;)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그리 심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서울과 비슷한 또 하나의 대도시였고, 안타깝게도 대도시의 문화를 향유할 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는 나에게는 더욱이 그다지 좋을리는 없는 곳이었다.




9월 초인데도 끔찍하게 덥고, 게다가 하루 종일 소나기가 오락가락 하고, 급기야는 태풍까지 찾아온 도쿄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던 곳은 도쿄대학의 캠퍼스 뿐이었다. 오래된 역사를 보여 주는 듯, 곳곳에 아름드리 나무가 솟아 있는 캠퍼스는 울창하다는 느낌마저 주었고(아쉽게도 배터리가 없어서 사진은 찍지 못했다ㅠ.ㅠ), 게다가 개강 전인지 무척 한산했다. 그리고 캠퍼스 특유의 싼 커피와 샌드위치! 

 

굳이 도쿄대학을 찾은 것은 일본의 옛 학생운동이 지금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캠퍼스 안의 게시판에는 어떤 흥미로운 게시물도 붙어 있지 않았고-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기업의 홍보물도 붙어 있지 않아서 한결 보기 좋았다-, 야스다 강당도 굳게 문이 닫힌 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그 무언가는 뜻 밖의 장소에서 마주칠 수 있었는데, 바로 캠퍼스의 서점이었다. 일본에서는 책이 더러워지지 않게-아니면 책 제목을 읽히지 않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종이를 접어 커버를 만들어 씌우는데, 서점에는 여러 종류의 책 싸는 종이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연히 점원이 내 손에 쥐어 준 종이가 바로 위의 사진. 한글어로 씌여진 문장을 읽었다면 짐작하겠지만, 저 위의 문자들은 모두 일본 헌법 제9조를 번역한 것이다(모두 13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평화를 진심으로 희망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권(國權)의 발동(發動)에 의한 전쟁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포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리고 그 외의 어떠한 전력(戰力)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북 커버를 만든 곳은 도쿄대학생협 평화프로젝트로 이들은 다음과 같이 발행의 이유를 적어 놓았다. 

<전후의 식량난, 물자난을 협동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만들어진 대학생협에는, 안심하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하다는 이념이 지금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금지한 일본국 헌법 제9조는, 대학생협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찾아오는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이 헌법 제9조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바탕으로 이 북 커버가 만들어졌습니다. 13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헌법 제9조 북 커버를, 활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간절한 마음이 전해 오는 듯 하여 마음이 움직였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평화 헌법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학생들도 있는 것이다. 고작 며칠, 그리고 몇 시간 머물 거면서 제법 큰 기대를 품었던 탓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마주침이었다. 

 

 

일본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도쿄 대학의 캠퍼스와 북 커버와 아사히 맥주였다. 정말로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밋밋한 나날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독일행 비행기의 경유 시간이 안 맞아 들어온 것이니 괜찮지 않나 싶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이미 늦은 거 며칠 더 늦으면 어떠냐는 생각을 뒤로 물리고, 어린 시절 일본게임이나 만화를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지금껏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일본에 간다는 생각에 부풀어 떠난 것인데 이건 좀 너무했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억지로 몸을 일으켜도 밖에서 몇 시간 못 버티고 다시 들어와 버렸던 것을 보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관광객으로서 도쿄를 헤매고 다니는데, 내가 관광객임이 왜 그리 낯설고, 또 타지에서 관광객으로 머문다는 것은 어찌나 재미없게 느껴지는지, 내가 도쿄 대학에서 옛 흔적을 찾아 헤매거나 길에서 일본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사본 것은 어떻게든 관광객과는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기대해도 결국 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내가 관광객일 수밖에 없다면 내게는 여행이라는 게 별로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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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피랍 자기책임론: 일본의 경우

2004년 4월, 일본이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했을 때 이라크에서 5명의 일본인 자원봉사자가 납치당했다. 일본 정부는 이 납치에 대해서, 철군할 의사가 없다는 강경한 방침을 내세웠으나 다행히 이들은 이라크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납치와 관련한 일본 여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인질들 중에 좌파 활동가가 있었고, 이들이 모두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던 탓에 납치 초기부터 자작극이라는 설이 돌았던 것이다. 특히 산케이와 같은 보수적인 신문이 이와 같은 소문을 묘하게 조장하는 기사를 실어댔다. 사건이 발생하고부터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다녔던 가족들은 온갖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납치된 이들이 돌아오자 자작설은 '자기책임론'으로 바뀌었고, 피랍자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귀환한 인질들은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 재건활동을 돕고 싶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부가 유감표명을 한 것은 물론이요 비난 여론이 들끓었음도 말할 것도 없다.

'자기책임론'을 이와나미 서점에서 발행하는 시사잡지 [세계]를 통해 처음 접했을 땐, 보수화 하는 일본사회의 극단적인 면모를 봤다는 생각에 아연했었다. 3년이 지난 후 한국에서 똑같은 논쟁을 보게 될 줄은 정말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자기책임론'과 관련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그와 관련된 책까지 출판된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살펴 보는 것은 지금 한국의 논쟁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옮길 글은 일본의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의 '이라크 인질문제를 둘러싼 긴급발언'(http://dw.diamond.ne.jp/yukoku_hodan/20040416/index.html)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글에서 아사다 아키라는 일본이 미국을 쫓아 파병을 감행한 것을 비판하고, 이를 위해 국민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국가 최대의 목적을 내팽개치는 것이라고 한 후, 자기책임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 자기책임론의 분출에 대해서, 
일본 사회의 전근대성이나 전체주의의 출현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자기책임론을 흥미롭게 다뤘던 서방언론도 이 일을 일본사회의 '집단주의'와 연결시킨 바 있다. 일본의 경우, 피랍자들의 가족들이 한 사과나 사회로부터의 차가운 시선은 어느 정도 '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느냐?'는 식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한 논쟁에서 사회계약론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자기책임론은 한 편으로 근대 군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연결시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위험한 줄 알면서 아프간에 가지 않았느냐는 말은 비정규직인 줄 알면서 취직하지 않았느냐는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는데 이는 결국 국가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고립된 개인의 총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자기책임이라는 용어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수입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라는 점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일본에서는 피랍 사건보다 앞서 노숙자 자기책임론이 제기된 바 있다. 자기책임론 논의의 신자유주의적 맥락과 관련한 상세한 논의는 http://www1.odn.ne.jp/~cex38710/jikosekinin.htm 에서 읽을 수 있다). 자기책임론이 신자유주의적 사회관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아사다 아키라의 논의에서도 등장하는데,  그는 피랍자들에게 구출비용을 징수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국가가 '민간경비회사'냐며 반문하고 있다. 자기책임론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대한 사고와 맞닿아 있다. 한국에서도 자기책임론이 이렇게까지 여론의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점점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영향일 것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봉사와 선교라는 목적의 차이가 존재한다. 콜린 파월의 인터뷰(원문의 일부를 여기서 읽어볼 수 있다: http://www.janjan.jp/government/0404/0404173329/1.php)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민간 차원의 봉사활동은 현지에서 봉사자들이 온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하기 때문에, 현지의 군사활동에도 도움을 주니 정부차원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일(이들이 한 것인지 다른 선교단체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은 현지에서의 선교일행마저 위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보다 양심적이라고 자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한국군이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초기에, 파병에 반대해 열성적인 활동을 해 왔던 사람이 납치되었다면 여론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국익을 논하며 피랍자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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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다치고, 이 일주일간, 2ch 을 중심으로 고통을 당한 3명의 인질과 가족에 대한 공격(Bashing)은 추악 그 자체였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미디어가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치쿠시 테쯔야가 인터넷의 게시판은 ‘화장실 낙서’라고 말했을 때도, ‘화장실 낙서’가 뭐가 나쁘냐, 오히려 져널리즘이란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 발생해 온 것이 아니냐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장소에서는 어디까지나 마이너리티로서, 이른바 마이너리티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발언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기는커녕, 자신들이 흡사 정부고관이라도 된 것처럼 과대망상에 빠져서, 마구 ‘국익’ 따위를 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피권고가 나와 있는 이라크에 자기책임으로 갔으니까 살해당해도 어쩔 수 없다, 이만큼 국익에 손해를 입혀서 폐를 끼쳤으니까 대처비용도 부담해야만 한다, 그러기는커녕 가족이 인질해방을 위해 자위대철수를 요구하는 것은 웃기는 일에도 정도가 있다 라며, 그런 식으로 ‘자기책임’을 휘두르는 녀석이, 자신이ㅡ 발언에 ‘자기책임’을 지느냐 하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안전지대에서 익명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물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10번 이상 대피권고를 내렸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가는 민간인까지 돌봐줘야 한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철수권고가 나와 있어도, 현지의 사람들이 지켜주는 형태로 착실하게 부흥지원을 진행하는 NGO 도 있고, 귀중한 정보를 보내주는 프리 져널리스트도 있다. 이번 3명은 경솔한 판단으로 위험한 지역에 무심코 들어가 버렸지만, 나이브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선의’에서 행동한 것이니,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애초에 국가가 시민을 보호할 때, 그것이 어떤 인간이냐는 관계없이, 모든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구출비용을 청구하다니, 정부가 민간경비회사인가? 해방된 인질이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 것에 대해, 고이즈미는 ‘이만큼 많이 정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출을 위해 침식을 잊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까요.’라며 불쾌함을 표현했었다. 마치 이라크지원은 자위대에서 한다는 것이 국가의 의지이기 때문에, 국가의 대피권고를 무시해서 이라크에 간 민간인이 국가에 폐를 끼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듯이. 하지만, 그들의 일부는 자위대 파견 전부터 이라크에서 활동을 해 왔었고, 미국이 이라크를 무정부사태에 떨어뜨려, 일본이 미국의 뒤를 쫓아 자위대를 파견했을 때야말로, 그들에게 큰 폐를 끼쳤던 셈이다. ‘그래도 이라크인이 싫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라크에서의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라며 그들이 알 자지라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은, 그 지역에서 일본인이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에 자위대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조차, 일본이나 이탈리아가 자위대나 군에 대한 철수요구에 굴하지 않았던 것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자신이 감수할 위험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하지만,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으면 세계는 전진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은 자위대가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알면서 좋은 목적을 위해 이라크에 들어간 시민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만약 인질이 되었을 때도 위험을 감수한 당신들의 잘못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물며 가족이 처음부터 ‘우선 저희 가족이 폐를 끼친 것을 사과 하고 싶다’ 라며, 오히려 지나치게 ‘일본적’이라고 할 만큼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쓴 발언이 눈에 띄어, 익명으로 비방의 메일이나 편지를 받게 된 것은 정말로 최악의 사태이다. 결국, 사죄나 감사로 계속 머리를 숙이고 다닌 만큼 인질과 가족을 몰아붙이니까, 마치 전근대의 무라(村)사회이다. 아니, 인질과 가족을 일본으로 이송하는 비행기에서, 기장을 설득해서 그들이 있는 구역을 출입금지로 하고, 보도진이 드나드는 것을 금하다니, 무라(村)사회의 실내감옥(座敷牢: 미친 사람을 감금해 두기 위해 집 안에 마련해 놓은 감옥)이 아니라면, 한 세기 전 구 사회주의권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인질에게 트라우마를 만드는 것은, 유괴범 이상으로 이런 일본정부나 일본사회의 이상한 대응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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