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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6


 며칠 전 눈을 맞으며 걷고 있는데, 뜬금없이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추운 날씨에 볼이 얼얼한 느낌이, 왠지 눈을 맞고 있는 나카야마 미호의 발간 볼을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어 열풍을 불러 일으킨지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에 잠시 망연해 졌다가, 곧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 잡혀 정신없이 영화를 구하러 다녔다. 꼬꼬마 시절에는 그저 눈을 맞는 나카야마 미호의 모습과 눈 덮인 오타루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겼을 뿐이어서인지,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추억을 딛고 나아가려는 사람과 마들렌 과자처럼 갑자기 찾아 온 흘러가 버린 시간에 애잔함을 느끼는 사람 모두 무척 사랑스러웠다(그러니까, 같은 나카야마 미호지만). 영화의 마지막, 후배들이 가져다 준 옛 추억은, 사랑이나 슬픔, 증오 같은 것과는 커다란 감정과는 관계가 전혀 없는, 대단할 것 없는 과거의 조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추억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커다란 사건이 없더라도, 미화된 과거가 아니더라도, 흘러간 시간의 덩어리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큰 무게를 갖는 것이다. 아무런 과장도 없는 설득력 있는 감정과 그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화면, 이와이 슌지의 감수성은 딱 이 영화까지만 좋았던 것 같다. 

 눈 덮인 오타루의 모습과 나카야마 미호가 너무 아름다워, 영화를 보는 동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와이 슌지는 사춘기, 추억 같은 테마에 집착하고, 이것이 그의 아름다운 화면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멤버로 추억을 되집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섬세하게 다루는 <<설국>>을 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굉장히 멋진 영화가 됐을 것이다. 아, 글을 쓰고 있자니 이번에는 <<설국>>이 무척 읽고 싶어진다. 나는 이와이 슌지보다도 훨씬 과거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이고, 영화고, 음악이고, 만화고,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것들만을 늘 되돌아 보고, 또 되돌아 보고는 한다. 



 사실 오늘은 영화를 두 편 연이어 보았는데, 다른 하나는 켄 로치의 <<달콤한 열여섯>>이었다. 스코틀랜드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삶 대신 아름다운 설국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택한 것은, 순전히 공감의 문제였다. 일상의 말랑말랑한 감정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고통에 공감하기란 정말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한 편으로 족해도, 켄 로치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도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달콤한 열여섯>>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영어라고 할 수도 없을 영어를 구사하는 스코틀랜드 하층계급의 모습이다. 이들은 영국England로 일하러 가기 위해 심지어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United Kingdom 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계급과 지역을 경계로 삶의 양상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영국 사회의 은폐된 진실이다. 이런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셰인 메도우즈Shane Meadows감독의 <<이것이 영국이다This is England>>를 놓을 수 있을 듯 싶다. 이 영화는, 대처의 집권과 포클랜드 전쟁을 배경으로, 영국의 하층계급 속으로 스며드는 파시즘을 날카롭게 보여 준다. 여기서는 반대로, 하층계급들의 좌절감이 England라는 민족적 환상에 지배 당하는 스킨헤드들을 만들어 낸다. 켄 로치와 셰인 메도우즈 감독은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 똑같이 어두운 내용이지만 <<이것이 영국이다>>가 더 생기발랄한 연출을 보여 준다. 음악이나 영상이 더 감각적이기도 하지만, 80년대 영국 하위문화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나 유머가 많아서 꽤 잔재미가 있다(영화에 등장하는 귀여운 패션 스킨헤드족, Woody 는 루팡3세를 쏙 빼닮았다ㅎㅎ). 사실, 두 영화 중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것이 영국이다>>를 고를 것이다^^

 사진은 존경하옵는 켄 로치 감독과 <<달콤한 열여섯>>의 주인공 Liam 역을 연기한 Martin Compston 군이다. 사진은 Kino 1997년 9월호에 수록되었던 것인듯. 다시금 추억 한 토막이 떠오르는데, 역시나 꼬꼬마 시절에, '뭐야 이건, 재미없어'하면서 들춰봤던 것들 중 하나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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