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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2)

2부. 변증법과 그 불만들

 


 1부에서 지젝은, 보편성이란 자기 자신과의 모순에 다름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이러한 보편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세계(상징적 측면과 상상적 측면을 갖는)로부터 도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있다. 2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을 경유한 보충적 설명을 통해 반복된다. 하지만, 1부가 여럿으로부터 하나를 도출시키는 이야기라면, 2부에서는 강조점이 하나에서 여럿으로 옮겨 간다. 1부를 정리하며 적었듯이 지젝의 라캉과 헤겔 독해는 보편성을 해체하는 것, 그리고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으로서의 보편과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에서 세계로의 이런 무게중심의 이동은 보편에서 특수로의, 즉 타자로의 이동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지젝의 타자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타자의 개념(보편에 외재하는 특수, 그를 위한 발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주체, 성소주자들과 슬럼의 주민들 등)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4장의 제목은 <타자에 대해서>인데, 여기서 그는 라캉의 상징계 만을 다룬다. 상징계의 외부가 타자가 아니라 상징계 그 자체가 (대)타자인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일반적인 타자 개념을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타자라는 통속적인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보편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1부 기표의 논리에서 등장한, 기표들의 장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기표, 즉 주인기표에 대립하는 것은 다른 여러 기표들이 아니라 주인기표 그 자신이다. 순수차이라는 공백無이 어떤 형식으로 표지된다는 이 모순이 보편(일자)에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의 타자는 다른 타자일 뿐이다. 이것이 라캉주의자들의 근본적인 논리적 에토스이며, 들뢰즈주의자들과 그토록 불화를 빚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의, 지젝의 타자란 무엇인가?

 지젝은 칸트적 사유에서 헤겔적 사유로의 이행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오성이 구성해 낸 것 외부에, 우리의 오성이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체인 ‘물자체’를 상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로의 이행은 아주 단순한 절차, 즉 이 ‘물자체’에 대한 믿음을 빼 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자체의 초월적 외관, 주체가 자신과 물자체를 가르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은 주체의 시각적 환영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환영은 그가 바라보는 화면 속에 주체의 응시(행위)가 반영되어 있음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왕이 왕인 것은 신하들이 그들을 왕으로 대해 주고 있기 때문이지, 왕 자신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다. 신비하고 카리스마적인 왕의 모습은 이러한 관계를 망각할 때 발생한다.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렇게 보이는 것은 오직 주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서 투쟁하고 있을 때뿐이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 주는 것은 객관적인 외적 대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환영 속에서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체에게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사회 속에서 그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는 상징계, 대타자 역시 이러한 환영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환영은 근본적으로 1부에서 전개된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회피에 복무한다. 대타자의 진실은 이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의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월적 실체(의미의 보증자인 대타자)의 외관이 필요한 것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는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논리가 있다. 상징계에 의해 거세된 인간은 거세당하기 전 자신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었다고 상정된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은 거세 자체가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 낸 것이며,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상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기 위한 환영일 뿐이다. 내적 불가능성을 외적 한계로 전치하는 것을 통해 보편자의 내적 모순, 욕망의 불가능성을 은폐한다. 주인기표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주인기표가 기표의 불가능성을 떠맡음으로써, 다른 모든 기표들이 안정적으로 의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영은 소급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공백, 불가능성은 환영이 성립하는 순간, 소급적으로 사라진다(즉, 일관된 의미로 누벼진다). 이를테면,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혁명의 과정은 그때그때 주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우연성의 소용돌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에는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일관된 의미 속에서 정립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타자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전도를 포함하고 있다. 데리다적인 타자는 보편성의 (불)가능성의 조건, 그 구성적 외부를 의미한다. 하지만 지젝에게는 보편성에 외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특수자는 보편성 내부의 자기모순을 감추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실재적”이다. [...] 특수자가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가로 막는 한계로서 말이다.”(287)

 이러한 전도는 지젝의 정치적 지평을 특징 짓는다. 보편성의 자기 모순에 대한 이와 같은 치열한 강조는, 보편성에 대한 끝없는 해체의 몸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보편성의 수립을 향한 행위에의 요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말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루어진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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