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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에서

 

 

왜 임박함에 대하여, 긴급함과 명령에 대하여, 이것들 속에서 기다리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강조하는가? 이는 오늘 우리가 말해 보려는 것을, 오늘날 마르크스의 저작에, 곧 또한 마르크스의 명령에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우리는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이상의 징표를 가지고 있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을,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와 대립시킴으로써 정치적 명령을, 분류된 저작에 대한 차분한 주석으로 중립화하려는 시도, 어쨌든 약화하려는 시도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우리는 문하 속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에서 어떤 유행 내지 멋 부리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낀다. [중략] 이러한 최근의 상투적 경향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마르크스주의 문헌에 대한 참고를 근본적으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기껏해야 관용의 탈을 쓰고서 우선 [마르크스의-옮긴이] 저작/신체를 무력화하고, 여기에 깃든 반역성을 침묵하게 만듦으로써 잠재적인 힘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사람들은, 무엇보다 반란, 분개, 봉기, 혁명적 도약을 고취할지도 모를 반역성이 복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가운데서야 비로소 귀환을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귀환 또는 마르크스로의 회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테지만, 단 이는 단지 해독할 뿐만 아니라 행위하도록, 또는 (해석에 대한) 해독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변혁으로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지령을 침묵으로 지나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중략] 귀를 기울이면 이미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시오, 마르크스는 어쨌든 다른 이들처럼 한 사람의 철학자였고, 그 많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제 침묵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교수자격시험 목록에서 배제되어 왔는데 이제 그만한 자격을 갖춘 위대한 철학자로 이름을 올릴 때가 된 것 같소. 그는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당들에 속하지 않고, 우리 서양 정치철학의 위대한 고전 속에서모습을 드러내야 하오. 마르크스로 돌아갑시다. 이제 마침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읽어 봅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고 또 앞으로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로 향하는 또는 돌아가는 이 순간 여기서 시도해 보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오늘날 새로운 이론주의가 중립화하는 마취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르크스에 대한 철학적, 문헌학적 회귀가 군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라는 명령을 강조하게 될 만큼, 이는 "다른 어떤 것"이다. 

                                           자크 데리다,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77-79쪽



 이 문장을 옮겨 적고 있으려니 얼마 전 은퇴한 맑스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가 생각난다. 그의 은퇴 소식이 이런저런 언론에서 보도된 것을 보면, 서울대 경제학부의 유일한 맑스 경제학자라는 타이틀이 꽤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긴 한가 보다. 그런데 정작 서울대 경제학부에선 후임 맑스 경제학자를 임용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하고 이에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이 임용을 촉구하는 연서를 쓰기도 했다는데, 결국 김수행 교수에 대한 조중동 같은 언론의 관심은(조선은 인터뷰도 했다) 이제 유령이 조용히 자기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영하는 자축 파티인 셈이다. 아직 맑스를 체제 내로 받아 들일 만큼 '세련'되지 못한 학계에 맞서 학문의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면서 한 자리 만이라도 맑스를 위해 내어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상황에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박사 과정에서 9 명이나 공부하고 있다니 한 자리가 아니라 그 몇 배쯤 늘어나 줬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여담인데 석사 과정의 전공자는 3명 뿐이라고 한다. 이런 급감에 세태 변화도 한 몫 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몇해 전인가 대학원 입학 학점이 높아져서 학부 때 운동하느라 학점 관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예비 맑스 경제학자들이 그 문턱을넘기가 만만치 않아졌기 때문이란다. 대학에서 맑스를 몰아내려는 고도의 음모는 이미 몇해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거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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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사정이 있어서 2부 2장까지만(3장도 조금;), 그것도 헐거운 독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방대한 내용을 담은 저작인데다 지금의 나로서는 다시 정독한다고 해도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를 충실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해의 부족과는 별개로 내가 읽었던 고진의 다른 책, <<윤리21>>과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품게된 의문들을 해소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은 실망스러운 글이기도 했다. 고진의 칸트론과 그 칸트론의 필연적인 결론은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실존주의에 대한 참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지만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음과 같은 소박한 의심들만을 피력하면서 넘어가야겠다.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이란 이름으로 끊임없는 시점의 이동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글을 추동하는 진짜 모티브는 '종합'인 것이 아닐까? <<윤리21>>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괄호론'은 너무나 안일한 태도라 여겨진다. 실천적 영역과 이론적 영역의 '보편성'은 각각 다른 영역을 '괄호'쳐야지만-칸트에게서 미적 무관심성이 그러하듯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결론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정확히 '괄호'란 무엇인가, 주체는 괄호를 어떻게 닫고 열 수 있는가, 주체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등 궁금한 것이 무척 많은데도 고진이 이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가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철학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심이 드는데,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수많은 철학자들을 자신의 문제틀 속에 마치 사례를 수집하듯이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독해를 거슬러 고진이 칸트에게서 읽어낸 '타자론' 역시 미흡하게 느껴진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타자를 고려함으로써만 구성되는 보편성에 대해서, 보편성에 대한 타자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지 타자성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에게서 타자에 대한 관점을 읽어낸 시도는 찬반 여부를 떠나서 평가할 만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가 제기한 타자론이 타자에 대한 사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예컨대 고진은 자신의 칸트론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괄호론'과 그의 '타자론'의 관계-양자 모두 '보편성'의 구성에 핵심적인 요소들인데-에 대해 이렇다 할 조명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무책임한 의심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 약간 더 많은 말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은 고진의 <<자본>>해석이다. 여기서 고진 논의의 핵심은 노동이, 정확히 말하면 '추상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교환에서 가치의 원천을 본다는 데 있다. 가치에 대한 전통적 맑스주의 해석의 특징은 가치를 일종의 실체-동질적이고 수량화가능한 인간의 '추상노동'-로 보는 것과 가치가 노동과 같은 것이기에 가치의 원천을 생산과정에서 찾는 것이다. 고진은 '교환'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 쟁점을 새롭게 다루고 있는데, 우선 그는 노동가치설, 즉 가치를 실체로 보는 사고에 대해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를 상품들이 교환되는 비율에 불과한 것, 따라서 가격으로 환원해 버리지도 않는다. 가치란 분명히 실체는 아니지만, 마치 실체와도 같은 가상성을 갖는 것이자 인간이 가상성을 인지한다고 해서 떨쳐버릴 수도 없는 것으로써, 고진은 이를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칸트가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그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그칠 수 없는 것이라고 설정한 신, 영혼 등의 개념들-에 비교하고 있다. 맑스주의 가치론이 철학적으로는 유명론과 실제론이라는 쟁점과 연결돼 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 경제정책과 운동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으로 연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고진의 재해석은 분명히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진은 '소비자 운동'-그는 소비자 운동의 범주에 페미니즘이나 환경운동도 포함시키고 있다-의 중요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가치의 원천이 생산 과정에 있다는 사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얻고 있으므로 자본주의의 지양은 이를 종결시키는 데 있다는 사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운동과 소비자 운동-또는 협동조합 운동-의 관계에서 고진이 더 비중을 두는 것은 후자이다. 이는 단지 정세적 이유, 즉 고진의 글이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전통적 맑스주의 운동이 여러 방향에서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에 있어서 이를 충분히 극복해 내지 못한 시대를 향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는 고진의 논리에 따른 자연스런 결론인데, 그는 현대 사회 자체를 교환 원리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항구조인데, 이 구조는 각각 세 가지 교환 양식, 네이션은 공동체의 호혜적 교환에, 스테이트는 폭력적 수탈의 형태를 갖는 교환에, 그리고 자본은 상품 교환에 근거한다. 다시 맑스주의 전통과 비교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사회 구조의 근간을 자본에 두고 스테이트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기구로, 네이션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즉 속임수로 파악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를 통한 자본주의의 폐기에 있었다. 하지만 맑스주의 역사에서 국가의 폐지인가, 국가 권력의 장악인가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 왔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폐기되기는 커녕 오히려 통치의 도구로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자본을 중심에 둔 전통 맑스주의의 사회 구조 인식에 대한 고진의 비판은 수용할 만 하다. 현대 사회 구조는 이 세 가지 교환 양식이 얽혀 있는 구조이므로, 하나만을 어떻게 해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키메이라적인 삼항 구조에 대한 제시가 절망적이기만은 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세 가지 교환 원리 이외에 다른 교환 원리를 생각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모델이고, 따라서 고진에게서 운동의 중심은 자본주의를 침식해 들어갈 수 있는 이 외부적 교환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소비자 운동'에 놓여 있다.-물론 고진은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는 노동자 운동이 협동 조합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그 반대의 상황, 협동 조합이 노동자 운동과 맺을 수 밖에 없는 관계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나는 위에서 자본주의의 '지양'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확히 말해 고진의 논리에서 자본주의는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니라 대체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지양'인가 자본주의의 '외부'에 의한 '대체'인가는 복잡한 문제일테고, 나는 전자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이런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를 근거로 고진의 주장을 물리쳐 버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자본>>의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는 의문이 드는데, 나는 자본주의 '대체'에 대한 고진의 입장이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 상당 부분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문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가치형태절은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왜 고진은 처음의 단 한 부분만을 다루고 있는가? 가치형태절은 단순한 가치형태,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등가형태, 화폐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2부 2장에서- 고진은 단순한 가치형태-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될 때 전자가 후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대적 가치형태에 놓이며 후자는 자신의 '사용가치'를 통해 전자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등가형태에 놓인다-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고진이 이끌어 내는 결론은 '가치'라는 것은 추상 노동이 응집된 실체도 아니며 단순히 하나의 상품과 다른 하나의 상품 사이의 교환을 매개하는 것도 아닌, '상품 교환'이라는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가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의 타당성과 결론을 도출하기까지의 논증의 적합성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와 화폐의 비밀을 보려 하고 있고, 단순한 가치형태가 드러내는 비밀이 그에게 너무나 명료해서 다른 가치형태를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치형태에 대한 고진의 분석을 읽으면서 그가 맑스의 가치형태를 마치 칸트의 오성 범주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그가 책 어딘가에서 실제로 둘 사이에 유비를 설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갖고 있질 않아서 확인해 볼 수가 없다- 그가 상품이 교환되는 '위치'를 강조하면서 이 고정된 위치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의 현상이 구성된다고, 따라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진에게 자본주의의 복잡한 현상들이 이 '고정된' 구조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말한 대로 이 구조가 여러 가지 구조들 중 하나에 불과한 이상-그에게 교환 자체는 전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교환은 신비로운 가상을 생산하지만, 그 꺼풀을 벗겨낸 기저에 놓인 교환에 신비는 없다-, 다른 구조에 의한 '대체'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에서 가치형태를 결코 정태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현란할 정도의 운동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을 단순히 헤겔을 본 딴 수사학적 유희로 치부하지 않으려면-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할텐데, 맑스 자신이 가치형태 절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고, 또 엥엘스에게 그 난해성을 지적 받고 쉽게 고쳐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서술의 논리, 또는 운동의 논리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가치형태 절을 읽다 보면 받게 되는 기묘한 느낌 중 하나는 네 단계로 운동하는 이 형태들이 무한한 순환의 논리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고진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화폐가 단순한 교환의 매개체가 아니라 그 성립으로 인해 시장 관계가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되는 최초의 형태 자체가 이미 화폐의 논리를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맑스가 비유한 것처럼 화폐가 사자, 공, 여우 같은 여러 가지 동물들 옆에 서 있는 '동물'이라는 동물이라면, X량의 상품 '화폐'와 Y량의 상품 B의 교환은 단순한 가치 형태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가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또는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고진이 말하듯이 가치가 교환 과정 이후에 전미래 시제로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면, 이것은 또한 교환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사회 원리로써 교환을 바라 보는 고진의 시점 역시 가치라는 가상에 의해 오염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을 경유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지젝은 화폐를 주인기표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주인기표에 의해 기표 체계는 소급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모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화폐형태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단순한 가치형태는 오직 사후적으로, 상상적으로 가정된 것일 뿐 화폐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진의 운동론에 대한 의문이 따라 나온다. 진정한 외재적 비판이란 결국 내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텐데, 고진의 운동론은 잘해야 자본과 병존하는 자본의 외부를 창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닐까? 

 
 
 
  이해를 얼마나 했느냐에 관계 없이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사상들이 있다. 나는 고진을 <<근대 일본 문학의 기원>>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때 그를 알게 된 기쁨은 사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많이 옅어 졌었다. 나는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문학 평론가로써의 고진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만-여전히 <<근대 문학의 종언>>은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사 볼 책 중 하나다- 철학/운동 이론가로서의 고진과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감히 그 이유를 "고진의 이론은 나이브하다"고 댈 수는 없을 것 같고-비록 내 글이 건방지긴 하지만, 이건 관용을 기대하는 초심자의 어리광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굳이 찾자면 지젝이 말하듯 고진이 '아나키스트'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낡은 편가르기에 더 이상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덧.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지젝의 비평이 올라와 있는 페이지를 링크해 둔다. 요약이 중심이고 마지막에 짤막하게 비판을 하고 있는데, 내게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맑스의 화폐론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일반 개념을 설명한 사상가로 참조한 바 있는 알프레트 존 레텔Alfred Sohn-Rethel을 <<트랜스크리틱>> 비판을 위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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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state와 대중mass

0.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교과서에서 배운 로크식 사회 계약론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낯설다. 이기적인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논의가 결국에는 군주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홉스의 전제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보존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도 이 권리 만큼은 군주의 권력 앞에 내어 줄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권을 옹호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국민의 이 권리는,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에서 도출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갖는 최소한의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존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이를 근대 인권 사상의 출발점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똑같은 사상에 근거해 홉스 정치론의 위험성을 공격하는 사람도 역시 많다. 고백하자면 나는 <<리바이어던>>은 일부만 읽었고, <<시민론>>은 손도 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전에 근거해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주제는 안 된다. 그런데 홉스의 정치 사상이 일견 모순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그의 사상을 로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사회 계약론에 대한 통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현대 정치 질서에 엄존하는 한 경향을 대변하는 치열한 사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홉스는 중세를 벗어난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대중'의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한 사람이고, 이 문제는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화두가 되니까. 이에 대한 재밌는 논문들을 몇 편 읽어서 정리를 좀 해 보려고 한다. 



1. 고원과 진태원은, 에티엔 발리바르의 해석을 참조하며 스피노자와 홉스를 비교하고 있는데,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가 대중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홉스의 대중 개념에서 재밌는 것은 그가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대중은 대중mass에 대한 현대의 통념과 비슷하다. 일관성이 없고, 멍청하다. 현대에 인민 또는 민중people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자각한 대중을 가리키거나 또는 (결국엔 같은 말일 수도 있지만) 대중을 그런 정치적 자각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된다. 홉스도 마찬가지로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개념화는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도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도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고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Hobbes, On the Citizen

 

 인용문에 홉스 자신이 적어 놓은 것처럼, 이런 관계는 역설적이다. 진태원은 이에 대해서 홉스가 대중과 인민을 구분하며,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행위자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중이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고, 홉스가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배제가 가능한가? 이는 홉스의 의인疑人person 이론에 근거한다.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 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감각의 작용과 반-작용의 체계일 뿐, 인간의 동일성-정체성identity은  결국 타인들이 그를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건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에 의해서만 보장되므로, 사회를 전제한다. 단순화시키면,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서로 인간으로 존재하며 법적, 규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사회 안에서 의인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의인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계약의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계약을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자연권을 하나의 의인에게 양도한다. 의인은 물론 다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의인이 국가를 대표한다. 즉, 하나의 의인이 국가의 주권자이며,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인민'인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은 인민이 아닌 것이다. 개인이 의인, 즉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국가에 참여하는 한에서인데, 국가란 권력을 양도 받은 하나의 의인으로 인해 성립가능한 것이므로, 주권자의 뜻을 받들지 않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고, 따라서 주권도 없다. 이런 논리는 나아가 대중을 정치적 행위자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근거가 된다. 행위란 행위자를 상정한다. 행위자는 하나이지 여럿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대중을 "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의인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은 행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있어야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다.  



2.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홉스에게서 국가가 국가에 포함되는 무차별적 인간 다수와 일치하는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권력의 구심점과 동일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현대의 국가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를 구성 요소는 영토, 인민, 주권이라 말해진다. 주인 없는 땅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열 사람 집어 넣는다고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란 거다. 그 열 사람이 '우리는 열 명이지만 그래도 하나야, X 란 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야.'라고 말하면 그들은 X 라는 국가를 만드는 거다. 그런데 대체 이 '하나'는 뭔가? 열 명을 정체불명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것 보다 힘든 일이다. 홉스는 그래서 의인이란 인공적 인간 개념을 설정하고, 열 명을 하나의 인간으로 만든 뒤 그 인간이 국가라고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이 필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적 인간'이란 말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의 속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삶을 영유하는 공동체는 당연한 것이지 정체를 물어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의 개념사를 고찰하는 김기봉에 따르면 서양에서 지금의 국가를 지칭하는 state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다소간의 시기차가 있지만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물론 state는 라틴어 status 가 어원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국가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기까진 많은 변화를 거쳤다. 

 우선 status 는 인간의 지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특수하게 주로 지배자로서의 위치, 지위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것이 나아가 지배자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는 말로 이용됨으로써, 왕의 권력이라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status 는 단순히 상태(condition)나 형태(form)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이 나아가 왕국이나 공화국의 상황 또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로 이어진다. 여기서 status 는 공공적인 것과 좋은 것이란 뉘앙스를 갖게 된다.  status 의 근대적 의미로의 전환의 분수령은 마키아벨리인데, 그에게서  status 는 "지배를 받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과 그 영역을 총칭하는 것"이란 의미로도, "군주가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명령권력"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국민과 영토란 근대적 국가 구성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status는 "명령권력이면서 동시에 그 권력의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이는 국민 스스로 통치하고 통치 받는 근대 국가의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 개념과 관련한 그의 큰 기여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가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정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도덕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처음으로 정치 권력의 문제를 도덕적 문제와 분리시켜 제시했고,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목적은 국가의 안정과 유지 그 자체였다. 이 문제가 국가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고귀한 혈통을 가진 영주의 소유물이든, 신이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곳이든 뭐든 간에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갖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피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닌 비인격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자체를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했다. 자율적autonomous이란 말은 스스로에 대한 통치력을 갖는다는 것이고, 이는 근대 주권 개념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김기봉은 근대 주권 개념에 대해서 "일정한 영토 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초월하여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이루는 공권력의 한 형식"이란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이는 주권의 담지자인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가를 구성하는 인격적 실체들인 지배자와 피지배자들과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뒤에 남겨 두는 것이다.   

 홉스는 이에 대해서 국가=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의인(인민)의 것, 따라서 국가 주권=의인(인민) 주권이란 대답을 내린 것이지만, 이는 당연히 이런 국가 개념 안에 시민적 권리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홉스식 사고에선 시민적 권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진태원이 지적하듯이 홉스 계약론의 특징은, 자연 상태를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병리적 상태로 생각하고, 계약에 의해 시민 사회 또는 국가가 탄생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려면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와 시민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즘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지."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왜 우리가 불법체류자의 인권을 신경 써 줘야 하느냐?"라는 분노에는 인권은 천부적 가치가 아니라 국가가 법적으로 부여해 준 것이란 생각, 국가를 인간 관계를 규율하는 최고의 원리이자 가치 척도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 사상의 문제점은 도덕적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관점은 자칫하면 현실적, 합리적이지만 당위가 결여된 홉스와 이상적인 로크라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며, <<정의론>>에서 롤즈의 작업처럼 정치 철학의 관건을, 합리적 계약론과 도덕적 당위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라는 협소한 지평으로 제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홉스 정치 철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데 있기 보다 오히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3.  홉스의 국가와 대중에 대한 생각은 논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국가가 하나라면 국가 주권도 하나여야 하는 반면에 대중은 행위의 담지자인 하나의 실체가 아니고, 따라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즉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홉스의 생각은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주체의 자격을 논하고, 따라서 정치 주체를 하나의 특질 아래 묶일 수 있는 동질적인 무엇으로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거권이 돈 많은 사람들한테 주어져 있던 시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부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중세의 농민 봉기를 정치 행위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홉스 같은 이가 아무리 열외자들을 정치에서 몰아내려고 하든 말든 간에 실제 정치에서는 언제나  하나로 셈해 지지 않는, 무한한 대중이 존재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진태원과 고원의 논문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개념을 많이 차용하였지만 홉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피노자는 인민과 대중을 정치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상태와 사회/국가 상태를 단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계약에 의해 국가가 만들어졌어도 그 안에 사고와 정념의 이질성으로 인한 충돌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의 절대적 안정성이 보장된 홉스의 이상 국가와는 달리 스피노자의 이상 국가 속에선 사회에 적대 관계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국가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 계약을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하고, 종교적 계약은 홉스에게서처럼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통해 국가 설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설정된다. 이런 스피노자식 설정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구분하고, 이데올로기의 호명呼名을 종교적 모티프로 설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조롱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인 '대중'을 정치적 주체성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덧. 사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독어로 원전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한국 글은 3월까지만 보겠다고 다짐하고-_-;; 여전히 찔끔찔끔 논문들을 찾아서 보고 있다. 외국어 공부를 멀리하는 나를 늘 다그치던 선배는, 내 근황을 묻는 동기에게 걔는 독일까지 가서도 한국 글만 본다며 흉을 봤다고 한다-_- 어쨌든 놀기만 하는 건 아니잖슈ㅠ 하여간 정리한베낀 논문은 아래와 같다. 

고원, <대중이란 무엇인가>, <<영국 연구>> 16호,
김기봉, <국가란 무엇인가 : 개념사적 고찰>, <<서양사론>> 82호,
진태원,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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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뇌(電腦)코일

다 봤으니 몇 자 적어 놓으련다. 


 하고 싶은 말은 칭찬, 칭찬, 칭찬 뿐이다. 정말 가진 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연출과 작화 모두 흠잡을 데 하나 없고-흠 잡기는 커녕 감탄하기 바빴다-, 학원 코메디, 미스테리, 사이버 펑크 등 다양한 장르적 특징을 잘 버무려 놓은 데다가, 셋 중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충실한 종합 선물 세트를 받는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모든 요소 가 '전뇌 안경'이란 소재와 딱 들어 맞게 연결 되어서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뇌 코일>>의 세계에선 정보 송수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일상 공간에 전뇌 공간을 덧 씌우고, '전뇌 안경'을 통해 그렇게 일상과 겹치게 전뇌 공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캡쳐한 화면에서 보이는 미사일은 안경을 쓴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설정). 내겐 이 설정이 상당히 재밌었는데, 내가 다른 작품들에서 본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구분돼 있는데 반해 <<전뇌 코일>>에서는 이 두 세계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뇌 코일>>은 이 독특한 설정을 마음껏 사용해서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는데, 학원 코메디의 성격을 갖는 전반부에선 주인공들의 모험을 '전뇌 안경'의 비주얼적 가능성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에선 미스테리 속에 소재가 던지는 인간학적인 질문을 잘 풀어내며 사이버 펑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분위기가 취향에는 훨씬 맞긴 하지만, 후반부의 구성에 높은 평가를 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인데, <<전뇌 코일>>은 소재에 함몰되지도, 그렇다고 진부한 인간학적 관점을 추상적으로 제시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가 저런 문제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 두 개의 세계가 두 개의 액션 스타일을 낳을 뿐인 <<매트릭스>>야 말할 것도 없고, 의체와 네트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논하는 <<공각기동대>>도 인용을 통해 17세기 유물론식 문제를 평면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두 영화에선 세계의 이원성은 그저 배경으로 놓여 있을 뿐 주인공들을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끌어 가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트리니티에 대한 네오의 사랑은 매트리스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 같고, <<공각기동대>>의 네트는 미지의 공간일 뿐이다. 반면에 <<전뇌 코일>>은 소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위에서 <<전뇌 코일>>에선 현실과 가상 공간의 애매함이 다뤄진다고 했는데, 이야기가가 전개됨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터일 뿐이었던 전뇌 공간은 놀이 이상의 진지한 체험, 타인과의 소통의 공간이자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가상 세계가 인물들이 심리적인 갈등을 겪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삶의 공간으로 그려짐으로써, 단순한 배경이나 설정이 아니라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상 세계란 소재도 전적으로 드라마 내적인 과정 속에서 마무리된다. 작품의 후반부, 부모들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라"며 안경을 뺏어갔을 때, 아이들은 "마음이 아픈 곳에 진실이 있다"면서 안경을 쓰고 다시 한 번 가상 세계로 들어가는데, 나는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기술의 진보란 인위성과 인간 영혼 또는 육체의 순수함이라는 대립적인 테마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한 주인공들의 감정이 전개의 구심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술 변화가 초래하는 변화를 받아 들이며 새로운 문제에 진지하게 마주하려는 감독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안경을 벗지도 쓰지도 않고, 이마 위에 걸치고 있는데 여기서도 감독의 낙관적인 생각이 엿보인다. 그 낙관이 대책 없는 긍정은 아니란 것은 애니메이션을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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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놓고 여성의 성에 대한 상품화가 확대되었다거나, 어린 소녀에 대한 로리타 컴플렉스가 인기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비판 또는 걱정어린 이야기들을 듣고는 한다. 현상을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다지 생산성 없는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멤버들이 나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대 소녀들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들이 나오기 전에도 노골적으로 섹시 컨셉으로 활동했던 그룹들도 있지 않은가? 로리타 컴플렉스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들의 십대 소녀들에 대한 욕망은 이미 원조교제가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건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의 guilty pleasure 에 그럴 듯한 이유를 하나 붙여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10대 소녀들의 성이 상품화되는 (우려할 만한) 사회 현상'이라는 틀로 바라 보면 성적 욕망과 그 실현의 문제를 도덕의 잣대를 통해서 바라 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보수적인 도덕적 훈계나 얄팍한 자기 변명 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남성들의 로리타 컴플렉스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욕망의 기호로 사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조교제는 불법이고 심각한 도덕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이들 그룹에 대한 욕망은 인정되고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억압되었던 욕망이 사회적인 인정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이란 말은 기존에 존재했지만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고, 비-의식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모호한 그 '무언가'가 최근에 와서야 의식적인 추구가 가능한 분명한 욕망으로 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조교제의 형태로 표출된 이 '무언가'는 당시에는 그저 심각한 사회적 일탈로 취급되었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서 비로소 이것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형상을 부여 받아, 그러니까 개념을 부여 받아, '욕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이 사실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되는데, 이 욕망이 그저 남성의 다양한 성적 욕망들 중 하나로서의 '로리타 컴플렉스'인 것 뿐만 아니라, 모종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난 이 욕망을 한국 사회의 남성 욕망 패러다임의 커다란 전환점이나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사례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와 군인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TV-Angels 라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반을 일본 여자 연예인으로 하여 일종의 국가 대항전 컨셉으로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친구의 반응은 "확실히 일본 여자애들이 '제대로' 할 줄 알더라"라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제대로'는 성적 욕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기호들을 잘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한국 여자 연예인들이 성적인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강한 행위를 연출하는 반면에 일본 여자 연예인들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적 의미를 부여 받은 기호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안경, 고양이 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 대상과의 유사성에 따라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구분했던 퍼스Peirce의 기호론에 적용해 보면 한국의 것은 도상에 가깝고, 일본의 것은 상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상과 지표가 대상과의 경험적 유사성 및 연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상징은 의미와 기호의 결합이 사회적 규범과 약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경험적이라는 사실은 또한 상징이 개념적인 것임을 의미하는데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적 다양성에 상관 없이 무언가를 '그 자체로' 논할 수 있다(의자라는 개념을 의자의 무한한 경험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퍼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그것이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이고, TV-Angels는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또는 일본 사회와는 달리 한국에는 남성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비근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조폭마누라2>>에는 기억을 잃은 전 조폭 보스인 신은경이 다방 종업원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다방 종업원이 신은경에게 가르친 것은, 가슴을 흔들며 끈적한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영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본 영화라면 결코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남자의 유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상징들의 사용법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한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프레 플레이'와 같은 일본에서 발달한 성매매 시스템도 이의 한 예로 보인다. 한국이나 유럽에서, 성매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반쯤 벗은 여성들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변태' 문화를 그저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게는 이게 욕망이라는, 극히 경험적이라 간주되는 그 무언가가, 경험의 구속을 벗어나 자립했음을 보여 주는 다양한 예들로 보인다. 그리고 내게는 개념화 또는 상징화를 통한 자립은 일반적으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 만세, 하악하악" 이러는 오타쿠들이나 성행위에 관련된 얘기를 하며 낄낄대는 사람들이나 음담패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같은 음담패설이라도 오타쿠의 그것이 더 큰 문화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적 욕망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는 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양상을 지켜 보며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이런 욕망의 상징화(개념화)가 대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윤곽이라도 그려 보는 것이다. 


 남성중심으로 짜여져 왔고, 짜여져 있는 이 사회에서 언제나 긍정되고, 장려되는 것이 남성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만한 것이다. 남성의 자위는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반면에 여성의 자위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이고(자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던, 구성애의 아우성도 여자의 자위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었다), 이성 연애에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먼저 하도록 기대되는 것은 주로 남자이다. 이런 식의 예는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남성의 이면은 주체적인 욕망을 전혀 갖지 않는, 단순히 욕망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욕망의 판타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로, 그러니까 그의 욕망을 추동해서 그를 일탈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들 중의 하나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판타지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의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혁명 의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관해 논의가 벌어졌을 때, 여성의 참정권 부여에 반대하는 주장의 근거로 나왔던 것 중에는,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라 국무에 방해된다는 것도 있었다(조앤 스콧Joan W. Scott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원제:Only Paradoxes to Offer)>>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지금 책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대충 맥락은 맞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팜므 파탈을 통해서 남성들은 여전히 그들이 머물고 싶어하고 갖고 싶어하는 이미지에 따라, 자기를 통제할 수 있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 원래 남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국가의 일 같은 공적인 일을 보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지만, 이 죄 많은 여성들이 간악한 유혹의 힘을 갖고 있어서 가끔 이성이 흔들리고 일탈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인 것이다. 이 논리대로 하면, 남성은 욕망에 있어서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성의 이끔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물론 이 논리는 남성이 쾌락 달성과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라는 이중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훌륭한 수단으로 기능하였지만, 나는 한편으로 모든 당위와 논리가 그렇듯이 이것도 순수한 위선으로 기능했다기 보다 실제로 남성들의 삶을 규율하는 어떤 규범으로 작동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성의 성적 욕망의 표현에 대한 어떤 강력한 규제적 틀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물론, 여성의 경우에는 성적 욕망의 표현이 아예 인정되지 않거나, 남성의 우월한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 모든 것을 하도록 허용되는 팜므 파탈이라는 틀을 만들어 냈지만).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세계를 포함하여 자기 자신의 강력한 통치자여야 하기 때문에 욕망도 그러한 남성적 주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자는 성적 관계에서 언제나 주도적이어야 하고, 성행위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악기의 비유처럼 여자의 몸을 잘 '연주'할 수 있어야 하며, 마치 학문을 하고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처럼 그쪽 방면의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역시나 유명한, "좋았어?"라는 멘트를 상기하자). 한국에서 이것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데, 수많은 남자들이 연하의 여자와의 연애에 집착하는 것에는 관계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 보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역시나 유명한 "오빠만 믿어"를 상기하자). 남성들은 점잖게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 주거나, 능수능란하게 여자를 '정복'하거나 해야 하는 것이지, 촐싹거리면서 여자를 뒤쫓아서는 안 된며,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아이돌에 대한 팬덤은 주로 여성들의 것이었다. 소년팬들의 열광을 받는 여자 가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팬덤 문화는 여성들의 것이었고, 공개방송에서 비명을 지르고 오빠를 연호하고, 숙소 앞에 장사진을 이루며 연예인을 기다리는 것은 경박한,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었고, 남자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남성의 욕망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그 논리에 따라, 욕망은 추구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확고한 규범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시 일본과 비교해 보자. 모닝구 무스메의 콘서트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내 귀에 들리는 연호하는 관중들의 음성은 거의가 남자들의 것이었다. 몇 만 명이나 되는 남자 관객들이 여자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보러 가서, 그들 노래의 온갖 세부적인 디테일에 맞춰서 구호를 넣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정말 낯선 광경이었고, 동시에 약간은 낯이 뜨거워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남자들이 저런 부끄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 부끄러운가? 우리는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들이 그들의 콘서트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을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하면 부끄러운 일이 된다. 이것이 남성의 성적 표현의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등장은 이런 구도에 아주 미미한,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표현되지 않아야 할, 또는 근엄한 지배자의 형상으로 표현되어야 할 성욕이 아니라 아이돌에게 환호하는 '퇴행적'인 욕망의 표출로서의 성욕 또한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다는. 이것을 욕망의 패러다임의 변화, 그러니까 예전에는 권위적이고 은밀하게 작동했던 남성의 성욕이 지금은 덜-권위적이고,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성욕(하지만 그렇다고 덜-폭력적일까?)으로 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논리적 모순에 따라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것으로 막연하게 존재하던 그 '무언가'가 자기 개념을 획득하여 비로소 구체적인 욕망이 되었다고(성 상품 구매의 옵션이 증가?), 따라서 이성적인 남성에게 드디어 욕망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후자가 좀 더 재밌을 것 같다. 약간은 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것도 같고.

 물론 내가 인터넷에서 접한 이들에 대한 열광은 아이돌에 대한 순수한 열광이 아니라 키치적인 감수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는 마치 대선에서 허경영이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 유행 중의 하나가 될 것인가? 한국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원더걸스나 소녀시대가 아니더라도, 박진영은 확실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할 수 있고, 일단 남성의 성욕이 구체적이고, (그러나)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채널이 열린 이상 앞으로 이와 비슷한 상품들이 계속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미 무시할 수 없게 확장되어 버린 한국의 오타쿠 문화를 이러한 경향과 분리시킬 수도 없을 것 같고, 오히려 하위 문화로서의 오타쿠적 감수성이 주류 문화 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적은 '욕망의 개념화'라는 이해가 옳다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기존의 개념 체계 전체의 의미를 새롭게 짜는 것이기 때문에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한국 사회에 남기는 문화적 영향력은 막강할 것이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엄숙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한국의 남성 성 문화에 다양성과 발랄함이 도입되는 긍정적인 징후로 보아야 할 것인가, 또다른 남성 중심주의의 표현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더 강력한 지배로 읽어야 할 것인가? 사실 전자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에 대한 남성팬들의 시선에서 "오빠가 다 해 줄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두 그룹의 등장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더라도, 아직 시작일 뿐이고, 아이돌 팬인 남자는 분명 여전히 '남성성을 결여한' 사회적 소수자일텐데 그들에게서 소수자로서의 자기 방어와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경우보다는 여전히 주류 남성의 감수성을 느끼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 활동을 하는 성인 여성들은 대개 부끄러워 하면서도 즐겁다며 자신의 감정을 소박하게 표현하고는 하는데,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남성 팬들이 이러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을 팬덤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남성적 논리와 감수성의 한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키치적인 문화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것인지는, 좀 더 지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덧. 졸려서 비몽사몽하며 써서 글이 무척 엉성하다. 기호니 상징이니 하는 건 완전 다 엉터리로, 개념들을 '개념없이-_-' 마음대로 써 먹은 것이다. 개념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게 되거나,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내 사고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법을 깨우쳐야 할텐데. 한 동안 이 주제가 머리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앞으로 며칠간 글을 쓸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급하게 두드렸다. 사실 나는 농담으로라도 "소녀시대짱!" "원더걸스쵝오!" 라는 말은 못할 만큼 저 두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덧2. 이글루의 방송&연예 밸리에서 어떤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씁쓸해졌다. 블로그 프로필에 아이돌 팬 활동과 동인 활동에 거부감이 있을 사람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나는 별로 법을 중요하게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라고 다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한테 미리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인터넷 공간에서 그만큼 많은 혐오와 조롱에 노출되었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이너리티들의 마이너리티로서의 자각과 약간의 겸손함과 수줍음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이돌 팬인 남자가 많아지면 좀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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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에 반대하는 독일 학생들의 데모


 
 헤센 주의 일년 등록금은 최대 1,000 유로.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2005년에 보수 세력이 등록금 징수 금지에 반대하는 소송을 걸어 승리를 했고, 기독민주당원인 헤센 주지사도 이에 참여하여, 헤센 주에 올해부터 등록금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헌법에 등록금 금지 조항이 있는 탓에, 등록금(Studiengebühren)이 아니라, 학업기여금(Studienbeiträge)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학생들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징수하는 것이니 실제로는 등록금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고세훈 교수가 복지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에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복지 수준이 높은 국가일 수록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서 복지 정책이 추진되기가 더 쉬운 반면, 복지 수준이 낮은 국가일 수록 국민들이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 자체가 워낙 낮다 보니, 복지가 더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복지 정책이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이 내용을 무척 신선한 분석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내가 이 당연한 사실을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복지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네, 한국 경제 구조에선 서유럽 식의 복지는 시기상조네. 하는 주장들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 경제 수준에서 복지가 가능한지를 증명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정치의 논리를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라는 주제만을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놓쳤던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은 결코 정책적 합리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이었다. 빼어나고 우수한 관료가 뛰어난 정책으로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독재를 긍정할 가능성이 다분한 위험한 사고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이라는 점에서 비합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 어떤 관료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어떤 정책이 모든 이해관계를 넘어서 투명하게 작동할 수 있겠는가? 중우정치의 위험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사람의 관계에는 불투명성과 불합리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나라 안팎 사정을 손금 보듯 꿰뚫어 보는 관료 도사들이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 모두가 마치 자신이 그 도사 자리에라도 앉은 양 생각하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자신의 필요를 근거로 해서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 말고, 어디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는가? 

 12월 14일 토요일에는 데모와는 도통 인연이 없어 보였던 인구 10 만의 소도시 다름슈타트를 포함해서 독일 곳곳에서 등록금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등록금에 반대하는 것이고, 교육이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낯 뜨거운 이상을 말짱한 정신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낳는 것이 2만불과 3만불이라는, 한국과 독일의 국민소득 차이는 아닐 것이다.



시내 광장에 사람들이 200명 정도 모여 있다. 현수막에는 등록금에 반대하는 부모들이라고 적혀 있다. 

 
 슬슬 움직이기 시작. 방송차는 산타 모자를 배포 중.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동네 아이들이 신나서 받으러 다녔다. 한국처럼 방송차가 선두에 서지 않고, 시위대와 섞여 느슨하게 움직인다. 노래는 역시 트는데, 민가나 저항음악을 트는 게 아니라, 적당히 신나는 음악을 튼다. 킬빌 OST 라던가..
           

경찰은 이런 느낌으로 선두와 후미에서 같이 움직인다. 손에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찍어대는 경찰들이 많은데, 신기하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데모대는 뛴다. 뛴다고 불평들은 하지만, 여기서도 뛸 때는 사실 다들 헤벌쭉 웃고 있다. 앞에서 못 찍어서 아쉽다. 
잠시 멈춰서 발언을 듣는 시간. 2008년 지방선거를 향해 분투 중인 Die Linke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 발언자가 발언을 마무리하며 외친 구호는, "투표 하러 가지 말고 정부를 무너뜨리자, 코뮤니즘을 위해!!"였다. 아, 저렇게 노골적인 구호를 외칠 수 있다니...조금 감동 받았다.                  
                                                                                   퍼포먼스

                                                                       교양(Bildung)은 죽었다!

                                                                             왜 이러고 있냐면...   

                               반대편에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독일이나 경찰하곤 사이가 안 좋다.

 
                                                   너희들의 정책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저항이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야!
 

 

 


                               아나키스트 그룹, 우리는 더 큰 파이 조각이 아니라, 요리법을 바꾸기를 원한다! 

 

 


 광장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찰이 길을 안 내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놀고 있다. 아까 퍼포먼스를 했던 친구와 일행이 북을 치면서 놀고 있다. 차에서도 마침 꽤 클럽에나 어울릴 법한 음악을 틀어 줘서 꽤 그루브한 분위기를 연출, 여기서 꽤 오래 머물렀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춤을 추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물론 마임은 아니고..
 
 
 오늘 집회를 나가 보고 확실해진게 있는데, 나한테는 아무래도 겨울 집회 징크스가 있나 보다. 왜, 겨울에 집회에 나가는 날은 평소보다 훨씬 추워지는 걸까? 오늘도 평소보다 5도는 더 낮을 것 같은 맹추위 속에서 달달 떨고 있다가, 마지막 사진을 찍은 곳에서 몸도 녹이고 장도 볼 겸 잠시 앞에 있는 마트에 들어 갔다 나오니, 대오가 사라지고 없었다(......) 해산하기 전에 인터내셔널가라도 부르지 않을까 싶어 끝까지 있으려 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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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폭풍Sommersturm>>, Marco Kreuzpaintner

                              주인공 Tobi 와 그의 친구 Achim. 누운 자세를 보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독일은 동성애에 대한 차별의식이 한국보다 현저하게 낮다. 유럽이 그렇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저녁시간의 공중파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침대에서 포옹하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에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선거 유세에서 자신의 동성 파트너를 소개한 후 오히려 지지율이 올라가기도 하는 곳이니 공적 영역에서는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테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걷다가 실제로 동성 커플을 마주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는데, 아직은 사적 영역에서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은가 보다. 한국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정치적 계산에 밀려, 어이없게도 법이 동성애 차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꼴같잖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제도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로 잡는 것보다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든 편견에 맞서는 게 더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더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법, 이런 독일의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는 영화가 한 편 있어서 소개해 본다. 


 영화 <<여름폭풍Sommersturm>>의 미덕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동성애가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는 양상을, 사춘기 소년의 경험을 통해 섬세하게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남자 조정부 주장을 하던 남자 아이가, 여름 합숙 캠프에서 자기 단짝 친구의 여자친구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기분이 대체 어떻겠는가? 한국에서라면 어쩐지 집단 린치 신이라도 들어가야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지만, 독일 영화인지라 옆 캠프에는 베를린에서 온 퀴어 조정팀이 합숙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게이들이 다른 남자 캐릭터들 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개성있게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당당하다. 티셔츠에는 큼지막하게 Queer Team 이라고 박아 넣었고, 몸짱도 하나 있는 데다가, 자신들이 게이임을 알고 움찔거리는 '일반 남자' 들에게 윙크를 날려 주는 센스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수자이자 약자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주눅드는 것은 '일반 남자' 들인데,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네가 게이든 뭐든 상관 없어'라고 선심 쓰듯 말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여자 꼬시겠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해 하며 온 놈들이 도리어 꼬심을 당하는 위치에 서게 됐으니 얼마나 무섭고 당혹스럽겠는가? 이 영화는 게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가득찬 '일반 남자'들이 게이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과 공포를 역으로 이용해서 유쾌한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가장 호모 포비아가 심한 녀석이 심부름 하러 캠프에 찾아 올 때 일부러 그의 망상적인 공포에 맞춘 상황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디를 통해 편견을 전복적으로 조롱하는 한 편으로 게이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편견을 유감 없이 깨뜨리는 실제 게이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당혹스럽다. 편견과 다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부정하기가 더욱 어려워 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비극적 피해자가 아니라 주체로써 당당히 그려진 덕분에 주인공의 고민은, 동성애 정체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폭력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란 맥락에서 다뤄진다. 동성애 배제적인 세계 속에서 살던 한 소년이 어떻게 소수자 정체성을 수용하고,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가?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편견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말은 그럴 듯하게 해도 막상 동성애자를 실제로 만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패션 소품처럼 여기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이성애 정체성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도 그러한 편견의 소산일 것이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배제라고 표현될 수 있을텐데, 법적, 제도적 접근으로는 해결되기는 커녕 포착될 수 조차 것이지만, 분명히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수용하는데 있어 장애로 작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정 코치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혐오 발화를 억제하는 일이 전부일 뿐, 학생들의 고민에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 주는데, 이와 동일한 무능함이 제도적 차원의 사고를 바탕으로 한 동성애 담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그 선택의 과정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의 틀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차별과 심리적 압박을 경험할 것이다. <<여름폭풍>>은 무능한 교사와는 대조적으로, 편견에 휘둘리던 아이들이 조금씩-결코, 유토피아적인 하나됨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 변화하는 모습을 살피며, 미세한 차별들이 얽혀 있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섬세하게 형상화 해 내고 있다. 이렇게 제도 담론이 그 구조적 한계로 인해 포착해 내지 못하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의미화해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 동성애를 주제로, 그리고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에 대해 <<여름폭풍>>이 갖는 한 가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한국에는 <<썸머스톰>>이란 이름으로 개봉했다. 끄응, 나는 <<타인의 삶>>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도 흥행에 실패했나 보다. 이런 영화가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서 단체 관람되면 얼마나 좋을까. 성교육도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지..

+ 사실 퀴어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는데, 앞으로 찾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좀 살펴 보고 싶다. 난 그 유명한 <<브로크백 마운틴>>도 안 봤는데, 여전히 그다지 보고 싶단 생각은 안 들고... 괜찮은 거 추천 좀..

+ 3개월이나 전에 본 영화를 갑자기 포스팅한 이유는... 오늘 Tobi 와 꼭 닮았다고 생각되는 애를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집에 와서 확인을 해 보니 역시 아니긴 했다. 그래, 어쨌든 연예인인데 그렇게 쉽게 만날리 없겠지. 하여간 내가 참 사람 보는 눈이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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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 슬라보예 지젝


 라캉 관련 논문들을 찾다가, New left review 에 기고되었고, <<창작과 비평>> 2006년 여름호에 번역 수록된 지젝의 <반인권론>을 찾아 읽었다. 민주주의와 이를 논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권은 내가 철학 텍스트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을 추동하고, 한 편으로는 (정치의 공간의 모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맑스와 프랑스 혁명기의 시민권 개념의 관계에 대해 논한 발리바르의 글(요즘들어, 내가 이 글을 굉장히 오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당장은 글이 없으니 확인해 볼 수도 없고..)이나 민주주의와 인권을  '정치적인 것'으로 읽으려는 랑시에르의 글이 반가웠던 것은, 이 글들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문화주의,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내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관념에 자신을 내맡길 수도 없는 내게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논의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나 인권처럼, 그 동안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해 왔던 것을 좌파적 관점으로 재전유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통해 다시금 (거대) 정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 역시 <반인권론>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글의 말미에는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며, 인권의 참조를 통해 정치의 영역이 가능해짐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결말은 랑시에르를 거의 그대로 옮기다 시피 하고 있는데, 지젝이 '행위', '공제의 정치' 등과 같은 자신의 중심 개념과 랑시에르나 발리바르의 정치론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지 무척 궁금해진다.  이하는 또 내맘대로 요점 정리. 기탄 없는 지적 부탁드린다.

 덧. 사실 난 지젝의 외모도, 말하는 스타일도, 심지어 글 쓰는 스타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글을 찾아 읽게 되지만... 하여간 보라, 최대한 부드럽게 나온 사진을 골라 본 것인데도, 여전히 음험해 보이지 않는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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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에 대한 호소가 전제하는 세 가지 가설.

(1) 인권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우연적 특질들을 자연 내지 본질로 여기는 다양한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능을 한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악(惡)은, 악을 지각하는 시선 속에 자리한다. 근본주의는, 서구인들의 재귀적 규정(또는 자기-지시적 규정reflexive determination)인 바, 다문화적 합리성으로 표상되는 서구 문화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발칸'의 타자성이라는 위장된 형태로 유럽은 '자기 속의 이방인', 자신의 억압된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던 발칸 반도에 근본주의적 갈등이 싹튼 것은 정확히 서구식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추진되기 시작했던 때라는 역사적 경험 역시, 이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우연적 특질의 '근본주의적' 본질화는 어떤 점에서 자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인가? 공공 매체가 발달하고, 개인의 사생활이 이에 전시되는 사회가 오면서, 내밀한 개인적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불평은 문제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진짜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속성과 특이성의 덩어리, 즉 사적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징적 행위자가 되게 하는 공공 생활, 공공 영역이다. 정치의 공간이 갈 수록 전문가의 사회행정으로 대치되는 '탈정치'의 시대에서, 정치적 문제는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특이성의 조율에 대한 태도로 번역된다. 탈자연화의 시대라는 통념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은 유례없는 재(再) 자연화이며, 이런 까닭에 전 세계적으로, 준(準)자연화된, 종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2) 선택의 자유와 (이념적 대의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기보다) 즐거움의 추구에 인생을 바칠 권리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1) 선택의 자유 

 자유주의가 말하는 선택이란 실은 사이비 선택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선택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슬림 여성은 베일을 벗고 쓸 지를 선택하기 전에, 우선 선택의 양식 그 자체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이 여성이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 즉 사회적 관습에 복종하여 베일을 쓰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참된 선택이 아니다. 참된 선택이란 개인적인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 여성은 패션을 위해서 베일을 걸치던가, 베일을 걸치지 않던가를 선택할 수 있겠지만, 무슬림 공동체 소속의 표지로써 베일을 착용하는 선택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 논리는,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 주체라는(386)' 이데올로기에 의존해 있는데,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는 복지 사회의 해체를 국가로부터 국민의 자유의 증대로 포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열락(悅樂)의 정치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서구와 근본주의적 이슬람의 대립은 대개, 자기 몸을 전시하거나 드러내고 남성을 자극하거나 교란할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로운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와 다른 한편으로 이런 위협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는 필사적인 남성적 시도 사이의 대립으로 압축된다......상반되는 두 입장은 엄격한 기율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서로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근본주의자'는 성적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의 자기 표현을 통제하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식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여러 형태의 침해(harassment)를 막는다는 목적에서 이들 못지않게 엄격한 행위규제를 가한다."

 타자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타자가 자신을 침해하고, 성가시게 하지 않는 한, "즉, 진짜로 타자가 아닌 한, 타자는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관용은 그 대립물, 타자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과 일치한다. 이런 태도는 갈 수록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인권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슷한 역전이 이른바, 인도주의적 혹은 평화주의적 군사주의 논리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평화나 민주주의, 혹은 인도적 원조를 베풀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괜찮고.....고문과 영구 비상국가를 포함하도록 '재고'된다면 인권도 괜찮고......민주주의를 제대로 행할 만큼 성숙한 사람들에 국한한다면 민주주의도 괜찮다는 식이다."

 근본주의적 태도는 열락의 추구에 대한 '자연적인' 대립물로, 향락을 몰아 내려는 극단적인 몸짓이지만, 이런 노력은 잘못된 것이다. 향락을 몰아내려는 이런 몸짓 자체가 잉여적 향락을 낳기 때문이다. 정념을 배제한 채 의무만을 따르려는 행위는 의무 자체를 따르는 데서 오는 열락을 낳는다. 이는 즐거움의 추구라는 서구식 정언명령에도 적용된다. 즐거움의 추구는 즐거움의 추구에의 의무로 변화한다. 이 두 극단적 태도는 서로를 떠받치는 악순환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둘 모두 외설적이고 음란한 초자아와 연결되어 있다.


2. 권력의 과잉에 저항하는 방어 기제로서의 인권? 

 지젝은 맑스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의 계급투쟁>>을 독해를 통해, 속성상 언제나 과잉인 권력에 작동 양상에 대해서 논한다. 법의 차원에서 국가 권력은 그 신민의 이해를 대변하고, 여기에 책임을 지며 통제를 받지만, 그 초자아적 이면(裏面)의 차원에서, 이 공적 메씨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대립물, 즉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이 외설적 과잉이 주권 개념의 필수 구성 성분이다. "신민들이 법에서 권력의 외설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주장의 메아리를 들을 때에만 법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권력과 (전-정치적이고 비-정치적인)폭력이 언제나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인권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응해야 하는데, 우선 "폭력을 어떤 정치 행위자도 도구화할 수 없는 것, 행위자 자체를 자기파괴적인 악순환에 말려들게 하는 위험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개진하는 한 편, "혁명 과정 자체를 어떻게 문명화의 힘으로 전환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외견상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폭력이나 인권과 같은 관계들의 중립성을 깨고 그 안에서 윤리적,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식별해 내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정치는 포괄적인 조직화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지젝을 20세기 거대 정치가 낳은 폭력을 성찰했던 몇몇 사상과들과 구분한다. 계몽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잠재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하버마스적인 태도는 폭력과 권력의 구조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으며,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오늘날의 아감벤으로 연결되는 "계몽의 전체주의적 성향은 내재적, 결정적이며...집단수용소와 종족학살은 전체 서구역사의 일종의 부정적, 목적론적 종점"이라는 견해는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없게 한다. 지젝이 옹호하는 것은, 발리바르와 같은 이들이 표명하는 견해로, "근대성이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열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의 영역도 열며, 그 귀결은 목적론적 보장 없이, 양자의 결합은 미결이며 미정"이라는 것이다. 


3. 인권과 정치의 관계 

 인권이라는 비 정치적 의제와 정치의 맞물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인도적' 위기라고 칭해졌던 사라예보 사태이다. "군사적, 정치적 갈등을 인도주의적 용어로 바꿔 부르는 것의 배경에는 정치적 선택이 있다....이런 담화는 정치 담론을 밀어내고, 모든 논란을 미연에 무력화시킨다." 표면상 탈 정치화된 인권 정치란 특정 경제, 정치 목표에 봉사하는 군사 개입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개입은,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안겨줄 자유민주제 자본주의, 지구시장경제와 같은 조건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깔고 있는데, 이는 적극적, 집단적 사회 정치적 변혁 기획의 모색을 은영 중에 금지하는 것이며, 희생된 타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인권과 정치의 맞물림은,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적인(전-정치적인) 인권과 시민 내지 특정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 갖는 특정한 정치적 권리 사이의 대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발리바르는 시민 신분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설명하며, '인간'과 '시민' 사이의 역사적, 이론적 관계의 역전을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아감벤의 호모 싸케르(homo sacer)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어떤 사람이, 시민권, 종교, 민족 정체성 등 인간에게 비 본질적인 각종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권의 이상적인 담지자인, 진짜 인간,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으로 환원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인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시민에 우선하여 그 존재 근거가 된다고 여겨져 왔던 인권은 '호모 싸케르'의 권리, 아무 권리도 없고, 비인간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따라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쓸모없는 권리는, 서구 사회에 의해 의약품이나 옷가지와 함께 해외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건네 진다. 하지만 "정치적 이름과 정치적 장소는 결코 단순히 빈껍데기가 되지는 않는 법"이라, 서구 사회는 자신들의 인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는 이 희생자들을 대신해,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나선다. 즉, 서구 사회가 말하는 제3세계 희생자들의 인권이란, 사실 인권옹호를 명분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개입할 서구 열강 자신의 권리인 것이다.  

 이렇듯 인권이 탈정치화되어 사고되는 순간 인권을 다루는 담론도 바뀌어서, 선악의 전 정치적 대립이 새롭게 동원된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적 인도주의와 푸코나 아감벤 식의 논의는 정치의 공간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이들의 '생체정치(biopolitics)' 개념은, "집단수용소가 존재론적 숙명처럼 되는 일종의 '존재론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표준적인 반 본질주의', 이를테면 성(sex)이란 무수한 성애(sexuality) 실천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의 정치적 번안에 다다른다. 인권은 거짓된 보편성, 서구 제국주의나 군새개입, 신식민주의의 구체적 정치를 은폐,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고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4. 보편성의 귀환 

 맑스주의적인 징후적 읽기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형식 아래, 실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 시장에서 착취할 권리라는 특수한 내용을 식별해 낼 수 있다. 또한 권력과 관련하여 지적한 것처럼, 보편성은 애초의 유기적 평형을 깨뜨리는 초석적 폭력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에 무결한 보편성의 외관이란 기만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떻게 이러한 추상적 보편성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효능을 가지며 기능하느냐를 파악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벗어나는 생활 세계의 진정한 표현들에 대한 추구는 곧 권력자들에게 재전유될 따름이다. 페미니즘이나 노조운동의 정치적 요구를 추동한 것도,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였던 것처럼,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피지배자들이 이 이데올로기들을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랑시에르를 경유하여, 인권의 보편성과 시민의 정치적 권리 사이의 간극을, "공동체 전체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하는" 간극이라 설명한다. "인권이 결국 뜻하는 바는 보편성 자체에 대한 권리"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사회가 자신에게 할당한 자리가 자신이 근원적으로 불일치함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사회에서 고유한 자리를 할당 받지 못한 열외자(supernumerary)의 권리로, 새로운 사회 정치적 보편성의 수립과 관련된 정치적 공간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 정치란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정치'적인 놀이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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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6


 며칠 전 눈을 맞으며 걷고 있는데, 뜬금없이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추운 날씨에 볼이 얼얼한 느낌이, 왠지 눈을 맞고 있는 나카야마 미호의 발간 볼을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어 열풍을 불러 일으킨지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에 잠시 망연해 졌다가, 곧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 잡혀 정신없이 영화를 구하러 다녔다. 꼬꼬마 시절에는 그저 눈을 맞는 나카야마 미호의 모습과 눈 덮인 오타루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겼을 뿐이어서인지,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추억을 딛고 나아가려는 사람과 마들렌 과자처럼 갑자기 찾아 온 흘러가 버린 시간에 애잔함을 느끼는 사람 모두 무척 사랑스러웠다(그러니까, 같은 나카야마 미호지만). 영화의 마지막, 후배들이 가져다 준 옛 추억은, 사랑이나 슬픔, 증오 같은 것과는 커다란 감정과는 관계가 전혀 없는, 대단할 것 없는 과거의 조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추억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커다란 사건이 없더라도, 미화된 과거가 아니더라도, 흘러간 시간의 덩어리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큰 무게를 갖는 것이다. 아무런 과장도 없는 설득력 있는 감정과 그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화면, 이와이 슌지의 감수성은 딱 이 영화까지만 좋았던 것 같다. 

 눈 덮인 오타루의 모습과 나카야마 미호가 너무 아름다워, 영화를 보는 동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와이 슌지는 사춘기, 추억 같은 테마에 집착하고, 이것이 그의 아름다운 화면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멤버로 추억을 되집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섬세하게 다루는 <<설국>>을 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굉장히 멋진 영화가 됐을 것이다. 아, 글을 쓰고 있자니 이번에는 <<설국>>이 무척 읽고 싶어진다. 나는 이와이 슌지보다도 훨씬 과거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이고, 영화고, 음악이고, 만화고,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것들만을 늘 되돌아 보고, 또 되돌아 보고는 한다. 



 사실 오늘은 영화를 두 편 연이어 보았는데, 다른 하나는 켄 로치의 <<달콤한 열여섯>>이었다. 스코틀랜드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삶 대신 아름다운 설국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택한 것은, 순전히 공감의 문제였다. 일상의 말랑말랑한 감정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고통에 공감하기란 정말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한 편으로 족해도, 켄 로치의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도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달콤한 열여섯>>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영어라고 할 수도 없을 영어를 구사하는 스코틀랜드 하층계급의 모습이다. 이들은 영국England로 일하러 가기 위해 심지어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United Kingdom 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계급과 지역을 경계로 삶의 양상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영국 사회의 은폐된 진실이다. 이런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셰인 메도우즈Shane Meadows감독의 <<이것이 영국이다This is England>>를 놓을 수 있을 듯 싶다. 이 영화는, 대처의 집권과 포클랜드 전쟁을 배경으로, 영국의 하층계급 속으로 스며드는 파시즘을 날카롭게 보여 준다. 여기서는 반대로, 하층계급들의 좌절감이 England라는 민족적 환상에 지배 당하는 스킨헤드들을 만들어 낸다. 켄 로치와 셰인 메도우즈 감독은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 똑같이 어두운 내용이지만 <<이것이 영국이다>>가 더 생기발랄한 연출을 보여 준다. 음악이나 영상이 더 감각적이기도 하지만, 80년대 영국 하위문화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나 유머가 많아서 꽤 잔재미가 있다(영화에 등장하는 귀여운 패션 스킨헤드족, Woody 는 루팡3세를 쏙 빼닮았다ㅎㅎ). 사실, 두 영화 중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것이 영국이다>>를 고를 것이다^^

 사진은 존경하옵는 켄 로치 감독과 <<달콤한 열여섯>>의 주인공 Liam 역을 연기한 Martin Compston 군이다. 사진은 Kino 1997년 9월호에 수록되었던 것인듯. 다시금 추억 한 토막이 떠오르는데, 역시나 꼬꼬마 시절에, '뭐야 이건, 재미없어'하면서 들춰봤던 것들 중 하나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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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 대한 단상들

1. 이회창이 대선에 출마한단다. 한 동안 정신을 빼 놓고 살다가, 정신 좀 차려야겠다 싶어 들여다 본 뉴스에서는 이회창이 좌파 정권에게 잃어버린 십년 운운하고 있었다. 진짜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이번 대선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봤다. 이명박이 승승장구하는 꼴에 베알이 꼴려서라도 투표는 하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회창의 출마 소식을 듣고나니,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의 출마는 대선을 챔피언 벨트를 앞에 두고 벌이는 타이틀 매치로 바꿔 버렸다. 나름의 위치에서 이명박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 모든 정당들을 우습게 만들며, 이회창은 경쟁이라는 선거의 원초적 속성을 스펙터클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경기의 결과는 당사자들과 그들 각각에게 베팅한 사람들에게나 중요할 것이다. 유권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흥을 돋궈 주는 들러리일 뿐이다.  

2. 이명박 독주 체제를 가능하게 한 대립구도는 경제 대 이데올로기였다. 이명박은 경제를 살리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인 반면, 그 외의 모든 집단들은 공허한 소리만 되뇌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는 널리 퍼진 인식이 이명박의 독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각종 추문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그의 지지율이 떨어질 줄을 몰랐던 것은, 사람들이 가치 판단에 냉소를 보내며 경제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본 표현처럼 "섭생하는 존재가 밥하고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언제나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관점 아래서 작동한다.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있다는 저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맞서 진보 정당들(물론 범여권은 제외)은 성장 대 분배를 내세우며, 경제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고 하였지만 조금도 먹혀 들지 않았다. 여기에는 소위 범여권의 영향이 지대한데, 그들은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이명박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면서 경제 영역 바깥에서의 차이를 통해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을 설정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경제와 이데올로기를 외적인 관계에 맺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제로 이명박 지지자들과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이명박이나 이회창에 대한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민노당이나 사회당 같이,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강고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하나의 경제에 다른 경제를 대립시키려는 노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김규향은 강준만 같은 사람이 조갑제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나도 내심 이번에 범여권 일당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에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20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우려 먹으며, 518 기념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고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짜증났는데, 이제는 한술 더떠 이명박과 이회창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꿈쩍도 않던 이명박의 지지율이 이회창의 등장 이후에야 요동을 치고 있다. 이회창은 도덕성과 대북 정책을 내세우며 이명박과 선을 가른다. 이것이 대선의 명분을 얻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유권자를 가르는 지표로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구도 속에서 이명박에 대한 지지가 경제를 불가침의 대상으로 설정한 후 일종의 판단 없는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이회창의 등장으로 지지자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자의식에 의거해 누가 진짜 보수인지를 판단할 것을 요구받는다. 둘의 지지율이 6할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글프게도 이 분열은 공히 한국 사회 최대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어디가 다른지, 실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차이와 분열은 작동한다. 그래서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이회창과 이명박의 싸움이,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 사이의 각축일 뿐인 그들 정치의 진실을 은폐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구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구도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난 십여년 동안 작동했던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는 비록 허울 뿐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규제적 성격은 있었다. 하지만 이회창과 이명박이 만들어 낼 그 무엇에도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4. 뉴스에서 이회창의 사진을 보면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5년 전의 모습과 너무 똑같아 보여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 여행을 온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진을 볼 때 졸려서 비몽사몽이었던 탓이었겠지만, 마치 다른 시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 기묘한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회창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무덤에서 걸어 나온 유령이기 때문이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그가 이미 죽었음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되도록. 물론 이회창에 맞서 이명박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낳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한 번은 희극으로. 이회창은 보수 대 진보의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등장한 희극 배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그의 손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손에서 시작되기를.
 
5. 찾아 보니 해외 거주자는 부재자 투표가 안 되는 것 같다. 순식간에 쑈가 되어 버린 대선을 바라 보며, 무엇을 해야 하나 착잡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아무 고민도 할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지 싶다. 대선을 맞이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러니까 스포츠 중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맛있는 맥주와 주전부리를 사다 놓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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