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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과 고세훈의 민주주의 복지국가론




 
 
 고세훈의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와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의 문제의식은 한국 정치의 정치 체계가 냉전반공주의라고 하는 협소한 이념적 틀을 기반으로 구성되었고,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를 기반으로 한 균열-핵심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계급갈등-이 정당을 통해 정치과정에 반영되지 못 한 채, 정치가 보수 엘리트들의 권력획득의 장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사회는 민주화운동을 통해 일정 정도 권위주의로부터의 체제 전화에 성공했지만, 제대로 대표되지 못한 사회의 균열은 지역감정으로 전화되어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왔으며, 재벌의 경영은 여전히 권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전 시대 기득권의 헤게모니가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이 아직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 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합리적' 사회경제적 균열에 기반을 둔 정당이 조직되어 사회의 갈등을 폭넓게 반영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당정치의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위상의 강화가 최장집의 주장이다. 

 고세훈의 복지국가론은 최장집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여 나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적 성격을 갖고 있다. 최장집과 마찬가지로 고세훈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하는 기반 위에서도 국가는 독립적인 변수로 기능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세계화를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수용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의 건설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사회투자국가론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나 "노사정 협의회"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 복지는 기술교육에 기반한 노동 유연화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고, 정부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동반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와 더불어 고세훈은 이해관계자 복지라는 모델을 제시한다.  유럽 사민주의 모델이 시장의 구조에는 큰 압력을 가하지 않은 채 국가의 민주화를 기반으로 하여 복지제도를 구축했는데, 신자유주의의 복지 위기담론에 맞서기 위해서는 시장의 민주화를 공세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을 그 이해관계자인 종업원들도 경영에 참여하는 체제로 개편하고, 시장을 시장 외부에 있는 사회의 이해관계자와 매개시켜 파악하는 것이 이해관계자 복지이다(...같다-_-;). 이를 위한 실천적 방안은 최장집의 주장과 거의 유사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노동자의 이익이 정당을 통해 정치에 폭 넓게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세훈의 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복지국가 발전에 대한 우파와 좌파의 접근을 분석한 것이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대한 우파적 관점은, 복지란 경제가 발전하면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복지를 가능케 하는 힘은 경제발전이기 때문에 경제발전은 근본적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좌파적 관점은, 복지가 자본이 축적의 위기를 겪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를 통해 마련된 장치라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자본 축적의 안정적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산물로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봉사하여 혁명적 전화를 늦추는 장애물이 된다. 고세훈은 좌파와 우파의 접근이 그 지향은 다르더라도, 둘 모두 복지를 기능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똑같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론적으로는 좌파가 복지정책을 매우 무관심하게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복지정책을 가장 강력히 지지해 온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뜨끔하다. 복지를 위한 투쟁은 맑스주의에서 '경제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늘 폄하되었고, 오직 그것이 정치적 이행을 위한 맹아적 투쟁이라는 조건-간단하게는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투쟁 속에 혁명적 전화를 위한 요소들이 뒤섞여 발전할 수 있을 때-하에서 긍정되었다. 따라서 초점은 언제나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젠가 도래할 혁명에 맞추어져 있었고, 당연히 당면한 문제에 있어서 투쟁 이외에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것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일찍이 맑스주의의 문헌들을 통해 사고가 정향되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각은 아닐까? 감정적으로는 한없이 잘 되길 바라면서도, 막상 맑스주의적 사고의 틀에서는 달리 보태줄 것이 없는. 

 최장집은 한국의 운동세력과 노동운동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념으로 인해 유효한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내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나는 그 사고들을 감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고, 최장집처럼 강력하게 '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맑스주의 정치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현실 속에서 당면한 문제에 '유효한' 비전을 제시해 오지 못한 것은 맞는 듯 하다. 맑스주의가 학생운동의 수준에서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한국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 속에서 맑스주의의 정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화제를 돌려서, 두 글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대의제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더불어 거리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두 저자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의 갈등을 반영하는 정당체제가 설립되면 사회의 갈등은 민주주의라는 과정을 통해 조화롭게 표출되고 합의를 이뤄낼 것이라고, "과격한" 운동의 표출은 줄어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요구란 기존 대의제 정당체제가 반영할 수 있는 테두리에 국한되는 것이며, 이를 넘어서는 추구란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고세훈에게는 노동과 자본 문제를 제외한 영역의 문제제기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강하게 배척 당한다.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환경에 대한, 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체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얘기하는 민주주의란 결국,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수용할 수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닌가? 최장집은 민주주의에는 수용해야만 할 "게임의 규칙"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겠지. 

 이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문제는 사회적 갈등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범주로 환원하고, 이를 정당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것으로 단순화 해 버린다는 것이다. 고세훈의 글을 보면  계급존재와 계급형성이라는 말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계급이라는 질료와 의식과 결합돼 실질적인 그것의 주체로의 형성이 구분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최장집에게도 나타난다. 어찌됐든 이처럼 계급구조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니만큼, 사회의 본원적 갈등은 계급을 기반으로 나타나는 경제영역의 갈등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에는 노동의 정치화라는 대안 외에 다른 담론들에 대한 검토가 결여되어 있다. 정말로 노동 하나면 충분한가? 민주주의라는 바탕 위에서 오히려 환경과 여성이라는 담론이 기존 담론의 틀에 균열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갈등 상황들을 창출해 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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