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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중에서...


 사실 우리 서구인은 우리의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가상적인 박물관처럼 생각하며 거기서는 모든 삶의 형태와 모든 지적 입장이, 그것이 관조만으로 접할 수 있는 한, 동등하게 환영받는다고 여긴다. 따라서 여러 철학체계 중 하나에 불과한 마르크스주의라면, 기독교 신비주의자와 19세기 무정부주의자, 초현실주의자 및 문예부흥기의 인문주의자들과 더불어 그것에도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식으로 동화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 절대적인 믿음을 일정하게 요구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종교들 자체도 이미지로 변형되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절충적인 전통 속에 쉽게 병존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그렇다. 사적 유물론의 구조적 독특함은 그것이 사유의 자율성 자체를 부정하는 데, 즉 자기 자신도 하나의 사상이면서도 순수사유가 사회적 행위의 위장된 양태로 기능하는 방식에 역점을 두며 정신의 물질적·역사적 현실을 거추장스럽도록 자꾸 상기시키는 데 있다. 이처럼 하나의 문화적 대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 활동 일반에 적의를 품고 달려들어 그것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그것을 향수하는 데 전제되는 계급적 특권과 여가를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의 정신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없애버리며 서구의 맥락에서 자신이 참여하였던 문화소비 과정을 파탄시킨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이나 관조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이란 바로 사적 유물론의 구조 자체-사유와 행동의 통일, 혹은 사상의 사회적 결정 등의 학설-이며, 서구 중산계급의 철학적 전통은 이를 마르크스주의 체계의 결함으로밖에 보지 못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거부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순간 오히려 그편에서 우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창비, 170p)

 




 예전에 이 문장에 매료되었을 때, 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적 호사가들을 위한 박물관의 한 자리에 놓여지는 것을 거부한다.' 지금 다시 원문과 비교해보니, 처음 부분과 마지막 부분만을 연결시켜 놓은, 논점을 미묘하게 벗어나버린 기억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이 문장을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에 대한 최고의 다시쓰기라고 평가하고는 감동을 받아서 '그래! 나도 마르크스주의를 소비할 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해야지!'라고 결심까지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에 공부를 계속하면 닥치게 될 현실적 어려움과 더불어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어떤 사회적 가치를 가질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나도 맑스를 소비할 것이 아니라, 맑스를 갖고 뭔가를 하자! 교양 삼아, 재미 삼아 책을 읽는 녀석들 따위에게 지지 않겠어!'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불타 올랐었다. 결국 그 때의 결의의 소박한 실천의 일환으로 블로그를 열 마음까지 갖게 되었던 것이다-_-;; 조금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일단 '교양'으로라도 뭔가를 나불거릴 수 있을 만큼이라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늘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 따름이다-_-


 하여간 좀 어긋난 독해긴 했지만, 저 멋진 구절들은 분명히 마르크스주의가 품고 있는 오래된 정서들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의 물적인 조건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면서 낳는 효과는 단지 철학의 자율성과 완결성이라는 환상의 해체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그 물적 조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제적 구조, 현재 절대적으로 차별적인 경제 구조를 보여주면서 철학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에 대해, 그리고 문화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 유려한 문장이 제기하는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이 갖는 호소력은 사고의 자율성이란 개념과 부르주아적인 '교양' 개념을 연결시키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상의 자율성과 독립적인 가치는 그것을 삶과 분리시켜 향유할 수 있는 유한 계급에게나 가능했던 것이고, 이러한 교양은 계급을 가르는 중요한 정신적 기초로서 작용해 왔기 때문에 분노와 거부의 대상이 된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적은 것처럼, 이런 교양은 이미 '그 편에서' 거부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프레데릭 제임슨이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이 거부하는 편이 아니라 거부 당하는 교양, 유한 계급이라는 것이 재밌게 생각된다. 그것은 이 글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자가, '교양'의 개념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현대적 상황의 새로운 '교양 계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사적 유물론적 사고으로부터 초래되는 어떤 악순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이 갖는 선언적(선동적) 효과는 그것이 실현되자 마자 그 역으로 전도된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발리바르는 11번을 논하며 "앞 문에서 쫓겨 난 철학이 됫 문으로 다시 들어 온다"라고 적고 있는데(불확실;), 제임슨의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이 문제를 그 자체로 증거하고, 치밀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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