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어둠의 땅>, 존 쿳시


  글을 읽는 내내 마치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무척 괴로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화자, 남아프리카를 '개척'하는 18C 의 제국주의자와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심리전 전략을 입안하는 20C 의 제국주의자가 사고하는 스타일이 꼭 나의 것인 양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쿳시가 '봐라! 이게 네 사고 방식이야! 네가 바로 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거야!'라고 얼굴에 책을 들이미는 것 같았다. 아마도 쿳시는 똑같은 말로 자신 또한 괴롭혀 가며 글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작품에서 18C 의 제국주의자의 이름은 야코부스 쿳시이다. 이 이름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존재가 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빚지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자 그 역사적 연관성을 넘어서서 그의 사유와 그가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제국주의와 공모하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과연, 쿳시의 글을 읽는 이 세상의 그 누가 그 공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이성이 실은 이미 광기라 하더라도 과연 누가 그 이성의 작동을 멈출 수 있겠는가?

  쿳시의 소설이 진정으로 윤리적인 이유는 자신이 그럴 수 없음을 솔직하게 시인한 채로, 이성의 내부에서 이성이 스스로의 광기를 드러내는 순간을 끈질기게 파헤치기 때문이다. 결국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고민하고 반성해 보는 것이다. 쿳시의 첫 작품인 이 소설의 화자가 백인 남성 제국주의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억압의 구조와 얼마만큼 공모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는 고민이란 결국 진실성을 결여하기 마련이다. 이후 쿳시의 소설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으로, 동물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원주민과의 소통의 문제 등으로 넓어져 간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어둠의 땅> 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가능성을 얘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가 <어둠의 땅> 에서 자기 자신의 문제이자 모두의 문제로서 제시했던 이성은 그 모든 문제들 속에 언제나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가능을 형상화 해 내는 것은 그 이성의 야만을 다시 작동시키지 않으려는 최대한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섣부른 희망보다는 이런 끈질긴 반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