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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를 위하여>, 서문: 오늘 , 루이 알뛰쎄르

 

 역사. 역사는 이미 인민전선과 스페인내전 때부터 우리의 청년기를 지배하면서 전쟁 그 자체 속에서 사실들을 처절하게 교육시켰다. 역사는 우리가 태어난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역사는 부르주아 또는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학생들이었던 우리들을 계급들의 존재와 계급들의 투쟁 그리고 그 관건에 의해 교육받은 사람들로 만들었아.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인 공산당에 참여하면서, 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자명성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때는 전쟁 직후였다. 우리는 당이 이끌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전투에 급작스럽게 집어던져졌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선택을 따져봐야 했고 그 결과들을 책임져야 했다.

 

 우리의 정치적 기억 속에서 그때는 대파업들과 대중시위들의 시대, 스톡홀름 선언과 평화운동의 시대로 남아 있다. 레지스땅스로부터 솟아난 거대한 희망들이 무너졌고, 파국의 그림자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힘을 통해 냉전의 지평 속으로 후퇴시켜야만 했던, 험난하고 긴 투쟁이 시작되었던 시대였다. 우리의 철학적 기억 속에서 그때는 오류를 그 모든 서식지로부터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였고, 세계를 단 하나의 칼날로 갈랐던, 예술, 문학, 철학과 과학들을 계급들의 가차없는 절단으로 갈랐던 철학자들, 정치를 자신의 저술로 삼았던, 바로 우리들이었던 저서없는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맑스를 위하여>, 루이 알뛰쎄르, 백의, 17p 

 

 

 

 이 글은 이 논문 모음집에서 알튀세르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들 중 하나인 공산당 내에서의 지적 경향, 모순들을 단일한 경제적 모순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겠다고 하는 헤겔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과학을 프롤레타리아의 과학과 부르주아의 과학으로 거칠게 구분함으로써 지적 통찰력을 마비시켰던 그 단순성이 그들이 세계를 가차없이 절단할 수 있게끔 하였던 것이다. 이 서문은 지적으로 무능했던 공산당에 가해진 알뛰쎄르의 비판의 포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비판적인 글이 갖는 냉혹함, 가차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을 뛰게 했던 거대한 옛 열정들과 흘러간 시간을 회고하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알뛰쎄르는 전후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면서 종교적 엄숙함과 어머니가 자신에게 투사한 이미지에 사로 잡혀 있던 유년기에서 벗어나 그의 늦은 청년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문장에서 전해오는 따뜻함은 강력하고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좌절하면서 동시에 희망을 보았던 시절,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자명해 보이고, 그들의 언어로부터 우리의 언어를 분리시켜내 그것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청년시절에 대한 헌사이다.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 절망과 낙관이, 단호함과 부드러움이 열정 속에서 뒤섞여 있던 시절은 알뛰쎄르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고, 투쟁하였던 모든 이들의 청년기이기도 하기에, 그의 문장은 이들 모두에 대한 헌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듯 하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알뛰쎄르의 장례식에서 위 문장의 일부를 인용하여 낭독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알뛰쎄르의 죽음과 더불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자신의 젊은 시절을 애도하였던 것이 아닐까? 아직 젊음의 한 복판에 있는 나는 이 문장을 보면 맑스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사로잡혔던,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을 강력한 힘을 얻은 것만 같았던 그 느낌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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