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윤리21>,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존재함을 분석한 이래 좌파적인 비판의 특징은 현상을 그 사회적-물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 파시즘의 광기는, 인간의 내면의 어두운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개의 한 양태이며, 여자화장실의 몰래카메라는 그저 한 남자의 정신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지배사회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사회적 문제를 신비화하거나 개인화 하려는 경향에 맞서서 그것을 정치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인간의 삶이 사회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거나 나아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 역시 기표의 규칙에 따를 뿐이라는 인식은, 일어난 일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 어찌됐든 도덕적 책임이란 것은 자유에 의해서 일어난 일에만 지울 수 있다고 생각되고 있으니.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독일의 전범들은 심판을 받았고, 도촬을 한 사람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결국, 윤리에 대한 요청이 존재하는 한 사라진 주체든. 변화된 주체든, 주체에 대한 물음은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윤리21>에서 고진은 칸트를 빌려와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란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한 편으로 세계의 모든 것들은 어떤 인과적인 질서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인과질서의 계열에서 벗어난 자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서 경험적 현실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법칙을 따른 행위, 즉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나 선행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물리적인 외적 현실 뿐만 아니라 내밀한 욕망의 층위에서까지 인과질서는 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존재할 수 없는 이런 곤궁에 대한 칸트의 해답은 역설적인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오직 의무를,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따르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진은 이 지점에서 칸트의 도덕법칙을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으로 해석하면서 개입한다. 그렇게 되면 그 의무의 준수에 대한 요구로 인해 얻어지는 자유가 역설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배반적 세계 속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고진은 칸트가 미적판단의 특징을 '무관심'에서 찾았다는 데서 끌어내고 있는데, 미적판단을 함에 있어서 진리나 도덕에 대한 판단이 배제되는 것처럼 도덕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진리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괄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 자유로웠던 것처럼 판단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이며 따라서 타자를 자유로운 주체로 대하는 행위란 무엇인가가 도출된다. 칸트는 일반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사용이라고 하였으며, 주체로서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사용이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마치 무제약적 상태에서처럼 보편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칸트의 사고에서 주체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진에게 있어 칸트의 윤리는 단순한 개인의 의무를 다루는 윤리를 벗어나 사회의 구조와 관계까지 사유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마치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대해서 판단하라는 것은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영역과 부문에 있어서 나의 책임이 인정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윤리적 행위란 그것에 대해 책임지고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21>에서 고진이 제기한 칸트론은 다음 두 가지를 축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괄호론'이라고 부를만한 것으로 칸트에게 있어서 갈등적인 세 개의 비판 영역을 상황에 따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진은 "'자유로워져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은 '자유다'는 것이니까 특별히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고진이 다른 맥락에서 거론한 이중구속의 대표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명령에 따른 자유란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타율을 택하는 것이므로, 그 명령은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명령 이전에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란 무엇인가이다. 법칙과의 관계에서 자유란 법칙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한 편 자유는 초월적 이념으로써 실천이성의 요청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 편으로는 사실로써 존재하고, 한 편으로는 요청의 대상인 자유의 역설적 위상을 고진은 '괄호'를 통해 해소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칸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떠받치는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분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결국 예지계라는 것은 현상계를 괄호치고서 논의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고진의 칸트는 공허한 형식주의자인 칸트나 인간의 선을 향한 의지를 요청했을 뿐인 허약한 칸트와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고진은 특정한 판단을 할 때 괄호를 하거나 푸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문법에 의한 명령일 따름이라고 쓰면서, 괄호를 푸는 것의 중요성도 동시에 강조했다. 이 때 문제는 괄호의 힘을 빌려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유가 괄호 없는 세계, 즉 취미 판단과 진리 판단이 더불어 존재하는 세계에서 무엇일 수 있는가에 있다. 결국 지금 구조와 주체의 갈등이라는 곤궁 속에서 칸트가 다시 불려지고 있는 것은 구조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탐구하기 위함이지, 구조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존재하기를 원해야 하는지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고진이 자신의 정치적 실천항으로써 끌어낸 생산자 협동조합의 모델은 칸트가 아니라 마르크스 또는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에서 유인할 수 밖에 없다. 고진의 논의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고 느낀 것은 특히 이 부분에서였다. 주체와 마찬가지로, 고진이 풀었다 쳤다 하는 괄호들 속에서 생산자 협동조합이라는 세계 모델의 실재적/정치적 위상은 극히 불분명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가해진 종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칸트가 예지계에서의 자유만을 인정할 뿐이고, 그래서 현실에서의 변혁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고진은 현실에서의 변혁을 칸트윤리학의 실천적 요청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기는 하지만 칸트 철학 내에서 '실천적 요청'이라고 하는 것은 곧 현상계에서의 법칙적 불가능성에 다름아닌 이상, 그 역시 이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윤리21>은 이론적인 것을 목표로 했다기 보다는 고진이 자신의 정치를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고진이 칸트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만을 그려낸다고 하는 말은 어쩌면 그저 동어반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을 읽어갈 표지는 세워 둔 셈이니, 나같은 얼치기가 고진의 글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단 무모함이 의미없는 일은 아니게 되기를.


덧. 이미지가 일본판인 이유는 그저 한국판 표지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