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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2)


  통치의 형식인가 사회 생활의 형식인가
 

 우리들이 이 패러독스의 이해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면, 내가 앞서 언급했던 두 번째 논쟁을 일별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것은 더 작은 불일치이지만, 우리들이 주요한 논쟁에 내기로 걸린 것과 민주주의의 패러독스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병사들이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 '중동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굉장히 색다른 견지에서 제시하며, 최종적으로 '좋은' 민주주의와 '나쁜' 민주주의의 동명성(同名性)을 해체하는 짧은 저작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쟝 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의 <<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적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주1). 저자는 많은 이유에서 알려져 있었지만, 주로, 이른바 '공화주의' 정치 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서 알려져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민성citizenship은 전적으로 법의 보편성, 교육, 지식의 권위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온갖 형식의 다문화주의 또는 적극적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에 반대하고, 사회적 또는 문화적 차이가 권위와 보편성을 침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밀네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중동에서 평화를 추진하는 것, 즉 이스라엘-팔레스티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는 것에 있다. 밀네르는 이 유럽적 평화는 단 한 가지, 이스라엘의 파괴만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라고 논한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팔레스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방식의 평화를 제안했다. 유럽의 민주주의적 평화는 홀로코스트의 결과였다. 민주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유럽, 과거의 유럽의 청산은 1945년 이후에 가능했다. 유럽은 그 시점에서, 나치가 행한 대량학살에 의해, 자신들의 꿈의 방해물이었던 사람들, 즉 유대인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밀네르가 논하 듯이 '민주주의적 유럽'이란 실제로는, 정치-그 원리는 한정된 전체성에 의한 지배이다-를, 사회-그 원리는 반대로 비한정성非限定性이다-속으로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민주주의란 이 비한정성의 법적 성취를 말하는 것이며, 이 비한정성의 법은 기술에 의해 상징됨과 더불어 그것에 의해 달성되며, 오늘날, 성별과 혈통의 법으로부터 해방되는 프로젝트에서 정점에 달한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민주주의는 적절한 기술의 발명에 의해, 혈통과 전승을 원리로 하는 사람들을 절멸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논증은 편집광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증은, 민주주의의 치세는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행하고, 개별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행위성agency의 제諸 형식과 공동체 감각 그 자체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나르시시스틱한 '대중 개인주의'의 치세라고, 이 20년간 주장해 온 사조 전체와 획을 같이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밀네르는, 좋은 정책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사회 생활에서 생겨난 필요needs, 요망, 요구의 비한정성에 대해 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새로움은, 이 대립을 근본화하고radicalize, 그것을 논리적인 대립으로써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가 기술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의 이론과 계산 방법은 온갖 형식의 좋은 통치와 대립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과잉을 통제할 수 있을 좋은 통치는, 밀네르에 의해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신중하면서도 인상적인 방식으로, 사목司牧통치라고 불린다. 이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세이며, 또한 일찍이 좌파 지식인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또 다른 책, 예전의 모택동주의 지도자 베니 레뷔Bernard-Henry Levy에 의해 쓰여진 <<사목의 살해>>(*주2)라는 책이다. 레뷔는 서양의 철학과 정치학의 전통이 억압했던 성서의 인물로서, 사목을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사목통치'는 무엇보다도 우선, 플라톤으로부터 차용된 관념이다. 레뷔는 플라톤이 <<정치가>>에서 검토한 목인牧人에 관한 그 자신의 사고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는 더 복잡하다. 한 편으로, 플라톤은 사목통치를 세계가 신의 목인의 손에 의해 직접 인도 되었던 신화적인 과거에 위치 짓는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사목의 패러다임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조탁彫琢했던 수호자 지배라는 견해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사목통치를 참조하는 것에 의해,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행하는 작전과 프랑스에 의한 민주주의의 범죄고발에 있어서, 민주주의에 대해 현재 행해지고 있는 논의의 이론적 중핵이 명시되고 있다. 실용적인pragmatic 정책과 대립하는 인민의 자기-통치의 유토피아로서든, 공통의 법의 규율과 대립하는 개인적 욕망의 무질서한 소란으로서든, 민주주의의 이중의 과잉에 대한 현대의 논의는, 플라톤의 민주주의의 초기설정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린다. 한 편으로,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는 변경될 수 없는 쓰여진 법의 강고한 체제이다. 이 형식의 민주주의는, 치료해야 할 병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의사라면 누구라도 딱 잘라 썼을 처방전(=명령, 지시)과 닮았다. 다른 한편으로, 문자의 엄격함은 인민의 완전한 자의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환언하면, 개인이 공통의 규율에 관심을 가지는 바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위하는 무제한의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 플라톤의 논의가 의미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정책의 원리가 아니라 좋은 정책에 저항하는 생활 양식way of life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혼돈에 다다른다. 더욱 근본적으로 그것은 온갖 것들이 뒤집혀 버린 생활 양식이다. <<국가>> 제 8권은 온갖 자연적 관계가 전복된 국가를 묘사하고 있다. 민주제의 도시에서, 지배자는 지배하는 대신 피지배자에게 복종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종하고, 연장자는 젊은이를 모방한다. 여성과 노예는 남성과 주인과 똑같이 '자유'이다. 그리고, 길 위의 당나귀 조차, '최고의 자유와 존엄을 가지고 길을 양보하지 않고, 마주쳐도 옆으로 피하지 않는 온갖 사람들과 부딪혀 버린다(*주3)'는 것이다.
 사회적인 생활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와,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의 위험에 대한 포스트 토크빌Tocqueville 적인 논의 전체는, 거만한 당나귀에 대한 오래된 플라톤의 농담을 반복하고 있다. 이 농담의 지속적인 성공에는 뭔가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우리들은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대국민국가, 세계시장, 강력한 기술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 문맥context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여성, 노예, 외국인 배제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하는 고대의 소규모 남성 도시와는 이미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다. 그 결론은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고대의 민주주의적 촌락의 통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받아 들여질 수 있다면, 고대의 반-민주주의자에 의한 민주주의적 촌락의 논쟁적인 묘사가, 주식거래, 슈퍼 마켓, 온라인 경제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세계의 민주주의적 개인의 진짜 초상으로서 여전히 타당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패러독스가 시사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의 묘사가 민주주의의 개념화를 뒷받침하는 방식은 기만일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민주주의적인 당나귀가 일으키는 소란은 더 심각한 문제를 상징한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패러독스에 관한 표준적인 언명(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통치가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형식이다)는 훨씬 근본적인 패러독스, 즉 정치 그 자체의 패러독스의 지표이다.
 민주주의는 통치의 형식도 아니고, 사회생활의 형식도 아니다, 이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그와 같은 것으로서의 정치의 제도화이다. 민주주의는 패러독스로서의 정치의 제도화인 것이다. 그것이 패러독스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것은, 일견,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을 무엇이 근거짓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 물음에 대답을 주지만, 그것은 놀랄만한 대답이다.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배권력의 근거 그 자체다, 라는 대답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플라톤이 <<법률>> 제3권 서두에서, 일순의 섬광 속에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구절은 내가 아는 한 민주주의에 관해 논의하는 데리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패러독스'의 핵심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구절에서 플라톤은 지배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열거한다. 그는 우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자연적 차이에 기초하는 여섯 개의 자격을 열거한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권력, 연소자에 대한 연장자의, 노예에 대한 주인의, 천한 자에 대한 고귀한 자의, 더 약한 자에 대한 더 강한 자의,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교양 있는 사람들의 권력이다. 이런 자격은 사회적 위치의 명백한 배분을 포함하고 있다. 플라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더 강한'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가능하지만, 약함이 강함의 반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연장이라는 것이 권력행사를 위한 충분한 자격인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격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차이이며, 이미 사회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 형식이다. 이런 자격은 지배를 위한 아르케arche로서 기능할 수 있다. 아르케는 시간적인 시작임과 동시에 이론적인 원리이다. 원리로서의 아르케는 사회적 위치와 능력의 명백한 배분을 의미하고, 이 배분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권력 배분의 근거가 된다. 시작으로서의 아르케는 지배의 사실이 지배를 위한 적성 속에서 예기預期되어 있으며, 역으로 이 적성의 명증성이 그 경험적인 작용 사실에 의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치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왜 어떤 사람들이 지배자의 입장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피지배자의 입장에 있는가, 그 이유를 제공하는 것인 것처럼 보인다. 최초의 여섯 개의 지배 원리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원리가 있으며, 플라톤은 그것을 '제비뽑기'라고 부른다(*주4). 이것이 민주주의이며, 두개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체제이다. 민주주의는 역할의 선先-취取된 배분도, 권력 행사를 지배를 위한 적성에 속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제비뽑기'는, 온갖 아르케의 부재와 같은, '자격 없는 자격'과 같은 자격의 패러독스를 제시한다. 이 '자격 없는 자격'으로부터 두 개의 다른 귀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아르케도 아니라고 결론 짓고, 그것을 통치 원리의 리스트에서 제외할 수 있다. 플라톤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이것을 두고 그가 민주주의에 관대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 '주체', 즉 인민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아르케의 민주주의적 결여는, 적절한 아르케를 과시하는 '좋은' 자격과는 반대의 움직임을 한다. 확실히 위에 열거된 자격들은 좋은 자격들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무엇에게 좋은 것인가. 연장자가 연장이라는 것은, 확실히 통치를 근거지을 수가 있다. 그 정확한 이름은 장로제일 것이다. 교양있는 사람들의 지식은 통치를 근거지을 수 있으며, 그 이름은 에피스테모크라시epistemocracy 또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가 될 것이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 통치형식의 리스트에는 정치적인 통치가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통치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그 이상의 것, 즉, 연장, 부성, 지식, 강함 등에 의한 통치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형식은, 가족, 부족, 학교, 일터에 이미 존재하고, 인간의 공동체의 더 광범위하고 더 복잡한 형식에 유형을 제공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천공'에서 도래하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없으면 안 된다. '천공'에서 도래하는 통치는 둘 뿐이다. 첫 번째 것은 사목통치, 즉 신의 목인이 인간의 무리를 직접 지배하고 있던 신화적 시대의 통치이다. 두 번째 것은 운에 의한 통치, 즉 제비뽑기, 즉 민주주의이다.
 얼마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해 보자. 인간이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통치의 많은 유형이 있다. 출생, 부, 힘, 지식은 가장 공통적인common(=보통의) 것이다. 그러나 통치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에게 공통의 대리보충적인 자격을 의미한다. 이미 신의 목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면, 자격은 이미 한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되는 자격도 지배하는 자격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갖는 자격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의미이다. '데모스demos의 권력'이란, 어떠한 아르케에 의해서도 권력을 행사하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자의 권력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일련의 제도도 특정한 집단의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제도, 그리고 어떠한 하나의 인민 집단의 권력을 정통화하기도 하고 그 정통성을 뺏기도 하는, 대리보충적인, 근거짓는 권력이다.


*주1 Jean-Claude Milner, Les Penchants criminels de l'Europe demomcratique (Paris: Editions verdier, 2003).

*주2 Bernard-Henry Levy, Le Meurtre du Parteur (Paris: Editions Verdier, 2004).

*주3 Plato, Republic, book VIII, 563c-d.

*주4 Plato, The Laws, Book III, 69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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