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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9.04~07

며칠 도쿄에 머물렀다.
도쿄는 서울보다 거리의 폭도 좁고, 건물의 높이도 낮아서 약간 아기자기한 느낌이 묻어나는 귀여운 도시였고,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많아서(일본 남자들은 다들 신기할 정도로 날씬해서 하나 같이 스키니를 입고 있었고, 소문으로만 듣던 코갸루가 아직도 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무척 신기했다-_-;)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그리 심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서울과 비슷한 또 하나의 대도시였고, 안타깝게도 대도시의 문화를 향유할 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는 나에게는 더욱이 그다지 좋을리는 없는 곳이었다.




9월 초인데도 끔찍하게 덥고, 게다가 하루 종일 소나기가 오락가락 하고, 급기야는 태풍까지 찾아온 도쿄에서 유일하게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던 곳은 도쿄대학의 캠퍼스 뿐이었다. 오래된 역사를 보여 주는 듯, 곳곳에 아름드리 나무가 솟아 있는 캠퍼스는 울창하다는 느낌마저 주었고(아쉽게도 배터리가 없어서 사진은 찍지 못했다ㅠ.ㅠ), 게다가 개강 전인지 무척 한산했다. 그리고 캠퍼스 특유의 싼 커피와 샌드위치! 

 

굳이 도쿄대학을 찾은 것은 일본의 옛 학생운동이 지금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캠퍼스 안의 게시판에는 어떤 흥미로운 게시물도 붙어 있지 않았고-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기업의 홍보물도 붙어 있지 않아서 한결 보기 좋았다-, 야스다 강당도 굳게 문이 닫힌 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그 무언가는 뜻 밖의 장소에서 마주칠 수 있었는데, 바로 캠퍼스의 서점이었다. 일본에서는 책이 더러워지지 않게-아니면 책 제목을 읽히지 않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종이를 접어 커버를 만들어 씌우는데, 서점에는 여러 종류의 책 싸는 종이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연히 점원이 내 손에 쥐어 준 종이가 바로 위의 사진. 한글어로 씌여진 문장을 읽었다면 짐작하겠지만, 저 위의 문자들은 모두 일본 헌법 제9조를 번역한 것이다(모두 13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평화를 진심으로 희망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권(國權)의 발동(發動)에 의한 전쟁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포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리고 그 외의 어떠한 전력(戰力)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북 커버를 만든 곳은 도쿄대학생협 평화프로젝트로 이들은 다음과 같이 발행의 이유를 적어 놓았다. 

<전후의 식량난, 물자난을 협동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만들어진 대학생협에는, 안심하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하다는 이념이 지금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금지한 일본국 헌법 제9조는, 대학생협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찾아오는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이 헌법 제9조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바탕으로 이 북 커버가 만들어졌습니다. 13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헌법 제9조 북 커버를, 활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간절한 마음이 전해 오는 듯 하여 마음이 움직였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평화 헌법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학생들도 있는 것이다. 고작 며칠, 그리고 몇 시간 머물 거면서 제법 큰 기대를 품었던 탓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마주침이었다. 

 

 

일본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도쿄 대학의 캠퍼스와 북 커버와 아사히 맥주였다. 정말로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밋밋한 나날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독일행 비행기의 경유 시간이 안 맞아 들어온 것이니 괜찮지 않나 싶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이미 늦은 거 며칠 더 늦으면 어떠냐는 생각을 뒤로 물리고, 어린 시절 일본게임이나 만화를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지금껏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일본에 간다는 생각에 부풀어 떠난 것인데 이건 좀 너무했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억지로 몸을 일으켜도 밖에서 몇 시간 못 버티고 다시 들어와 버렸던 것을 보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관광객으로서 도쿄를 헤매고 다니는데, 내가 관광객임이 왜 그리 낯설고, 또 타지에서 관광객으로 머문다는 것은 어찌나 재미없게 느껴지는지, 내가 도쿄 대학에서 옛 흔적을 찾아 헤매거나 길에서 일본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사본 것은 어떻게든 관광객과는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기대해도 결국 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내가 관광객일 수밖에 없다면 내게는 여행이라는 게 별로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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