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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8
    전뇌(電腦)코일(1)
  2. 2008/01/01
    원더걸스와 소녀시대(9)

전뇌(電腦)코일

다 봤으니 몇 자 적어 놓으련다. 


 하고 싶은 말은 칭찬, 칭찬, 칭찬 뿐이다. 정말 가진 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연출과 작화 모두 흠잡을 데 하나 없고-흠 잡기는 커녕 감탄하기 바빴다-, 학원 코메디, 미스테리, 사이버 펑크 등 다양한 장르적 특징을 잘 버무려 놓은 데다가, 셋 중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충실한 종합 선물 세트를 받는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모든 요소 가 '전뇌 안경'이란 소재와 딱 들어 맞게 연결 되어서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뇌 코일>>의 세계에선 정보 송수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일상 공간에 전뇌 공간을 덧 씌우고, '전뇌 안경'을 통해 그렇게 일상과 겹치게 전뇌 공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캡쳐한 화면에서 보이는 미사일은 안경을 쓴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설정). 내겐 이 설정이 상당히 재밌었는데, 내가 다른 작품들에서 본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구분돼 있는데 반해 <<전뇌 코일>>에서는 이 두 세계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뇌 코일>>은 이 독특한 설정을 마음껏 사용해서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는데, 학원 코메디의 성격을 갖는 전반부에선 주인공들의 모험을 '전뇌 안경'의 비주얼적 가능성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에선 미스테리 속에 소재가 던지는 인간학적인 질문을 잘 풀어내며 사이버 펑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분위기가 취향에는 훨씬 맞긴 하지만, 후반부의 구성에 높은 평가를 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인데, <<전뇌 코일>>은 소재에 함몰되지도, 그렇다고 진부한 인간학적 관점을 추상적으로 제시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가 저런 문제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 두 개의 세계가 두 개의 액션 스타일을 낳을 뿐인 <<매트릭스>>야 말할 것도 없고, 의체와 네트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논하는 <<공각기동대>>도 인용을 통해 17세기 유물론식 문제를 평면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두 영화에선 세계의 이원성은 그저 배경으로 놓여 있을 뿐 주인공들을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끌어 가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트리니티에 대한 네오의 사랑은 매트리스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 같고, <<공각기동대>>의 네트는 미지의 공간일 뿐이다. 반면에 <<전뇌 코일>>은 소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위에서 <<전뇌 코일>>에선 현실과 가상 공간의 애매함이 다뤄진다고 했는데, 이야기가가 전개됨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터일 뿐이었던 전뇌 공간은 놀이 이상의 진지한 체험, 타인과의 소통의 공간이자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가상 세계가 인물들이 심리적인 갈등을 겪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삶의 공간으로 그려짐으로써, 단순한 배경이나 설정이 아니라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상 세계란 소재도 전적으로 드라마 내적인 과정 속에서 마무리된다. 작품의 후반부, 부모들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라"며 안경을 뺏어갔을 때, 아이들은 "마음이 아픈 곳에 진실이 있다"면서 안경을 쓰고 다시 한 번 가상 세계로 들어가는데, 나는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기술의 진보란 인위성과 인간 영혼 또는 육체의 순수함이라는 대립적인 테마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한 주인공들의 감정이 전개의 구심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술 변화가 초래하는 변화를 받아 들이며 새로운 문제에 진지하게 마주하려는 감독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안경을 벗지도 쓰지도 않고, 이마 위에 걸치고 있는데 여기서도 감독의 낙관적인 생각이 엿보인다. 그 낙관이 대책 없는 긍정은 아니란 것은 애니메이션을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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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놓고 여성의 성에 대한 상품화가 확대되었다거나, 어린 소녀에 대한 로리타 컴플렉스가 인기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비판 또는 걱정어린 이야기들을 듣고는 한다. 현상을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다지 생산성 없는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멤버들이 나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대 소녀들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들이 나오기 전에도 노골적으로 섹시 컨셉으로 활동했던 그룹들도 있지 않은가? 로리타 컴플렉스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들의 십대 소녀들에 대한 욕망은 이미 원조교제가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건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의 guilty pleasure 에 그럴 듯한 이유를 하나 붙여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10대 소녀들의 성이 상품화되는 (우려할 만한) 사회 현상'이라는 틀로 바라 보면 성적 욕망과 그 실현의 문제를 도덕의 잣대를 통해서 바라 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보수적인 도덕적 훈계나 얄팍한 자기 변명 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남성들의 로리타 컴플렉스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욕망의 기호로 사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조교제는 불법이고 심각한 도덕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이들 그룹에 대한 욕망은 인정되고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억압되었던 욕망이 사회적인 인정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이란 말은 기존에 존재했지만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고, 비-의식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모호한 그 '무언가'가 최근에 와서야 의식적인 추구가 가능한 분명한 욕망으로 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조교제의 형태로 표출된 이 '무언가'는 당시에는 그저 심각한 사회적 일탈로 취급되었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서 비로소 이것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형상을 부여 받아, 그러니까 개념을 부여 받아, '욕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이 사실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되는데, 이 욕망이 그저 남성의 다양한 성적 욕망들 중 하나로서의 '로리타 컴플렉스'인 것 뿐만 아니라, 모종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난 이 욕망을 한국 사회의 남성 욕망 패러다임의 커다란 전환점이나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사례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와 군인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TV-Angels 라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반을 일본 여자 연예인으로 하여 일종의 국가 대항전 컨셉으로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친구의 반응은 "확실히 일본 여자애들이 '제대로' 할 줄 알더라"라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제대로'는 성적 욕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기호들을 잘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한국 여자 연예인들이 성적인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강한 행위를 연출하는 반면에 일본 여자 연예인들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적 의미를 부여 받은 기호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안경, 고양이 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 대상과의 유사성에 따라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구분했던 퍼스Peirce의 기호론에 적용해 보면 한국의 것은 도상에 가깝고, 일본의 것은 상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상과 지표가 대상과의 경험적 유사성 및 연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상징은 의미와 기호의 결합이 사회적 규범과 약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경험적이라는 사실은 또한 상징이 개념적인 것임을 의미하는데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적 다양성에 상관 없이 무언가를 '그 자체로' 논할 수 있다(의자라는 개념을 의자의 무한한 경험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퍼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그것이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이고, TV-Angels는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또는 일본 사회와는 달리 한국에는 남성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비근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조폭마누라2>>에는 기억을 잃은 전 조폭 보스인 신은경이 다방 종업원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다방 종업원이 신은경에게 가르친 것은, 가슴을 흔들며 끈적한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영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본 영화라면 결코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남자의 유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상징들의 사용법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한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프레 플레이'와 같은 일본에서 발달한 성매매 시스템도 이의 한 예로 보인다. 한국이나 유럽에서, 성매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반쯤 벗은 여성들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변태' 문화를 그저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게는 이게 욕망이라는, 극히 경험적이라 간주되는 그 무언가가, 경험의 구속을 벗어나 자립했음을 보여 주는 다양한 예들로 보인다. 그리고 내게는 개념화 또는 상징화를 통한 자립은 일반적으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 만세, 하악하악" 이러는 오타쿠들이나 성행위에 관련된 얘기를 하며 낄낄대는 사람들이나 음담패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같은 음담패설이라도 오타쿠의 그것이 더 큰 문화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적 욕망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는 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양상을 지켜 보며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이런 욕망의 상징화(개념화)가 대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윤곽이라도 그려 보는 것이다. 


 남성중심으로 짜여져 왔고, 짜여져 있는 이 사회에서 언제나 긍정되고, 장려되는 것이 남성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만한 것이다. 남성의 자위는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반면에 여성의 자위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이고(자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던, 구성애의 아우성도 여자의 자위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었다), 이성 연애에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먼저 하도록 기대되는 것은 주로 남자이다. 이런 식의 예는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남성의 이면은 주체적인 욕망을 전혀 갖지 않는, 단순히 욕망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욕망의 판타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로, 그러니까 그의 욕망을 추동해서 그를 일탈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들 중의 하나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판타지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의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혁명 의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관해 논의가 벌어졌을 때, 여성의 참정권 부여에 반대하는 주장의 근거로 나왔던 것 중에는,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라 국무에 방해된다는 것도 있었다(조앤 스콧Joan W. Scott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원제:Only Paradoxes to Offer)>>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지금 책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대충 맥락은 맞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팜므 파탈을 통해서 남성들은 여전히 그들이 머물고 싶어하고 갖고 싶어하는 이미지에 따라, 자기를 통제할 수 있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 원래 남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국가의 일 같은 공적인 일을 보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지만, 이 죄 많은 여성들이 간악한 유혹의 힘을 갖고 있어서 가끔 이성이 흔들리고 일탈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인 것이다. 이 논리대로 하면, 남성은 욕망에 있어서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성의 이끔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물론 이 논리는 남성이 쾌락 달성과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라는 이중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훌륭한 수단으로 기능하였지만, 나는 한편으로 모든 당위와 논리가 그렇듯이 이것도 순수한 위선으로 기능했다기 보다 실제로 남성들의 삶을 규율하는 어떤 규범으로 작동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성의 성적 욕망의 표현에 대한 어떤 강력한 규제적 틀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물론, 여성의 경우에는 성적 욕망의 표현이 아예 인정되지 않거나, 남성의 우월한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 모든 것을 하도록 허용되는 팜므 파탈이라는 틀을 만들어 냈지만).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세계를 포함하여 자기 자신의 강력한 통치자여야 하기 때문에 욕망도 그러한 남성적 주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자는 성적 관계에서 언제나 주도적이어야 하고, 성행위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악기의 비유처럼 여자의 몸을 잘 '연주'할 수 있어야 하며, 마치 학문을 하고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처럼 그쪽 방면의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역시나 유명한, "좋았어?"라는 멘트를 상기하자). 한국에서 이것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데, 수많은 남자들이 연하의 여자와의 연애에 집착하는 것에는 관계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 보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역시나 유명한 "오빠만 믿어"를 상기하자). 남성들은 점잖게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 주거나, 능수능란하게 여자를 '정복'하거나 해야 하는 것이지, 촐싹거리면서 여자를 뒤쫓아서는 안 된며,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아이돌에 대한 팬덤은 주로 여성들의 것이었다. 소년팬들의 열광을 받는 여자 가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팬덤 문화는 여성들의 것이었고, 공개방송에서 비명을 지르고 오빠를 연호하고, 숙소 앞에 장사진을 이루며 연예인을 기다리는 것은 경박한,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었고, 남자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남성의 욕망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그 논리에 따라, 욕망은 추구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확고한 규범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시 일본과 비교해 보자. 모닝구 무스메의 콘서트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내 귀에 들리는 연호하는 관중들의 음성은 거의가 남자들의 것이었다. 몇 만 명이나 되는 남자 관객들이 여자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보러 가서, 그들 노래의 온갖 세부적인 디테일에 맞춰서 구호를 넣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정말 낯선 광경이었고, 동시에 약간은 낯이 뜨거워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남자들이 저런 부끄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 부끄러운가? 우리는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들이 그들의 콘서트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을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하면 부끄러운 일이 된다. 이것이 남성의 성적 표현의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등장은 이런 구도에 아주 미미한,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표현되지 않아야 할, 또는 근엄한 지배자의 형상으로 표현되어야 할 성욕이 아니라 아이돌에게 환호하는 '퇴행적'인 욕망의 표출로서의 성욕 또한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다는. 이것을 욕망의 패러다임의 변화, 그러니까 예전에는 권위적이고 은밀하게 작동했던 남성의 성욕이 지금은 덜-권위적이고,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성욕(하지만 그렇다고 덜-폭력적일까?)으로 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논리적 모순에 따라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것으로 막연하게 존재하던 그 '무언가'가 자기 개념을 획득하여 비로소 구체적인 욕망이 되었다고(성 상품 구매의 옵션이 증가?), 따라서 이성적인 남성에게 드디어 욕망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후자가 좀 더 재밌을 것 같다. 약간은 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것도 같고.

 물론 내가 인터넷에서 접한 이들에 대한 열광은 아이돌에 대한 순수한 열광이 아니라 키치적인 감수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는 마치 대선에서 허경영이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 유행 중의 하나가 될 것인가? 한국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원더걸스나 소녀시대가 아니더라도, 박진영은 확실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할 수 있고, 일단 남성의 성욕이 구체적이고, (그러나)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채널이 열린 이상 앞으로 이와 비슷한 상품들이 계속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미 무시할 수 없게 확장되어 버린 한국의 오타쿠 문화를 이러한 경향과 분리시킬 수도 없을 것 같고, 오히려 하위 문화로서의 오타쿠적 감수성이 주류 문화 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적은 '욕망의 개념화'라는 이해가 옳다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기존의 개념 체계 전체의 의미를 새롭게 짜는 것이기 때문에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한국 사회에 남기는 문화적 영향력은 막강할 것이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엄숙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한국의 남성 성 문화에 다양성과 발랄함이 도입되는 긍정적인 징후로 보아야 할 것인가, 또다른 남성 중심주의의 표현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더 강력한 지배로 읽어야 할 것인가? 사실 전자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에 대한 남성팬들의 시선에서 "오빠가 다 해 줄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두 그룹의 등장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더라도, 아직 시작일 뿐이고, 아이돌 팬인 남자는 분명 여전히 '남성성을 결여한' 사회적 소수자일텐데 그들에게서 소수자로서의 자기 방어와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경우보다는 여전히 주류 남성의 감수성을 느끼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 활동을 하는 성인 여성들은 대개 부끄러워 하면서도 즐겁다며 자신의 감정을 소박하게 표현하고는 하는데,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남성 팬들이 이러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을 팬덤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남성적 논리와 감수성의 한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키치적인 문화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것인지는, 좀 더 지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덧. 졸려서 비몽사몽하며 써서 글이 무척 엉성하다. 기호니 상징이니 하는 건 완전 다 엉터리로, 개념들을 '개념없이-_-' 마음대로 써 먹은 것이다. 개념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게 되거나,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내 사고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법을 깨우쳐야 할텐데. 한 동안 이 주제가 머리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앞으로 며칠간 글을 쓸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급하게 두드렸다. 사실 나는 농담으로라도 "소녀시대짱!" "원더걸스쵝오!" 라는 말은 못할 만큼 저 두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덧2. 이글루의 방송&연예 밸리에서 어떤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씁쓸해졌다. 블로그 프로필에 아이돌 팬 활동과 동인 활동에 거부감이 있을 사람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나는 별로 법을 중요하게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라고 다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한테 미리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인터넷 공간에서 그만큼 많은 혐오와 조롱에 노출되었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이너리티들의 마이너리티로서의 자각과 약간의 겸손함과 수줍음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이돌 팬인 남자가 많아지면 좀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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