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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피랍: 자기책임론을 걷어버리자

지금 아프간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20명의 기독교 선교단에 대해 여론은 대체로 두 가지 수식어를 붙여주고 있다. '멍청이' 또는 '광신도'. 이 수식어들은 '자업자득이니 가서 순교하게 내버려둬라'라는 주장이나 '일단 구출하고 그 다음에 책임을 묻자'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어느 주장이나 '자신들의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위험한 줄 알면서 간 것이니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러한 자기책임론은 기독교의 공세적인 선교정책에 평소부터 가지고 있던 반감이 투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들이 아프간에 간 목적이 기독교란 사실이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 기독교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갖고 있는 국가에 기독교를 선교하겠답시고 가서 저 꼴을 당해 국가에 피해를 끼치는가? 지금 사경을 헤매는 이들을 눈 앞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자기책임 논쟁은 어느 정도 그들이 기독교도라는 사실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기독교도가 아니고, 따라서 반기독교 정서에 우리가 쉽게 기댈 수 없다면 그 때도 지금처럼 쉽게 자기책임론을 말할 수 있을까?


(1) 인권이란 이름이었다면

911 테러사건 직후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겠다며 아프간을 침공해 그들의 화려한 군사기술을 뽐내고 있을 무렵, 언론에 비친 아프간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미사일과 문을 박 차고 들어와 '빈 라덴 내놔!'라고 소리치는 미군에 의해 고통받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이 아니라 여성에게는 교육도 못 받게 하고, 문화를 파괴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를 자행하는 탈레반에 의해 신음하고 있었다. 차도르로 눈만 겨우 내 놓은 아프간 여성의 모습 뒤에 이어지는 미군의 미사일은 마치 억압자를 향해 내리 꽂히는 신의 망치처럼 보이지 않았는가? 아프간은 단순히 알 카에다에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에 '인권'이라는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물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미국이 탈레반을 몰아내고 집권시킨 북부동맹은 탈레반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이들이었고, 전쟁복구가 미비한 가운데 아프간은 가난과 마약과 정치적 부패로 신음하고 있다. 

만약 피랍된 사람들이 종교인이 아니라 아프간의 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사업을 벌이거나 마약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처럼 반기독교 정서가 강한 곳에서 기독교를 선교한 것에 대해 책임을 돌리고, 기독교의 공세적 선교정책을 문화 다원주의를 거스르는 몰상식한 행동이라 여긴다. 하지만 우리의 문명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식민화된 지역에 찾아가 자신의 삶을 헌신한 백인 영웅들의 이름 또한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앞 문장은 기독교의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피랍된 이들의 행동이 인권의 이름으로 비호받을 수 있다면 여론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인권은 기독교보다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얻고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래서 미국의 아프간 침공의 공식 이데올로기이자 한국의 파병의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인권 사이에 명확한 위계를 매긴 채 기독교 선교라는 목적을 비판할 수 있는가?



(2) 납치가 일어난 파병이라는 현실

인권이건 신이건 상관 없이 자청해서 간 것이니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피랍자'가 '납치'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뭔가를 당한 사람이 그 일에 책임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왕따 당한 사람에 대해서 '저러니 왕따 당할 만 하지'라고 말하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어도 '니가 그렇게 행동했으니 왕따 당한 건 네 책임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자업자득이니 가서 순교하게 내버려둬라'라는 말은 '왕따 당한 건 네 책임이니 선생님 귀찮게 하지 말아라'라는 말과 똑같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들이 위험한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선택한 것과 실제로 납치를 선택한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당연히 위험에 처한 국민은 국가에게 그들을 도울 것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 이를 저버린다면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물론 자기책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국가가 그들을 무시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국가의 책임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국가가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그들을 구해내지 못하더라도 국가를 비난해서는 안 되며, 국가가 요구를 수용해서 그들을 구출하더라도 이로 인해 발생한 국가의 피해를 그들에게 문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번 피랍사건으로 국가가 어떤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인가?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인력이나 비용은 원래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한 것이니 피해라고 볼 수는 없다. 요구를 수용했을 때 '테러에 굴복한 약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붙는 것이 피해라고들 한다. 국가 신뢰도도 떨어지거니와 한 번 굴복했으니 이를 노리고 테러범들이 계속 한국인들을 납치할 것이니 실제적으로도 테러위협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테러와 국가라고 하는 것이 모든 맥락을 무시한 채 추상적으로 둥둥 떠다니는 것일까? 테러범들이란 다이하드에서 존 맥클레인이 무찌르는 일당들처럼 허공 속에서 뜬금없이 쑥쑥 솟아나는 이들이며 국가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능력치 항목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프간과 탈레반이라는 지금 테러의 맥락 속에서 한국이라는 국가의 신뢰도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게는 자신들과 더불어 세계의 패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끔, 적당히 이익을 쫒을 줄 알고 힘 앞에 굽힐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슬람 국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침략하는 더러운 욕망을 의미할 것이다. 국가의 신뢰도라는 일견 중립적인 말은 사실은 강력한 가치를 수반한 말이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이 전쟁이 일어나는 맥락을 고려한 후에, 한국의 아프간 파병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하는 것인가?  

요구수용이 테러의 연쇄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 주장에는 테러범들의 구체적인 존재가 사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언제나 일관되게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인권의 이름으로 침공을 정당화 하다가 전쟁에 대한 보도가 시들해지자 그를 위한 노력을 방관하는 것처럼 한국 역시 이번 테러와 다음 테러에서 취할 태도는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다음 테러'라니? 다음에 테러를 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캐나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퀘벡사람들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다음에 또 납치 소식이 들려온다면 아마도 한국군이 침략군의 일환으로 파병되어 있는 이라크에서 일 것이다. 다음 테러가 걱정이라면, 20명의 희생을 감수하며 테러범들에게 강경책을 펴기 보다는 더 빨리 철군을 계획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테러범들은 '악의 집단'으로 추상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존재한다. 다음 테러를 걱정하기 전에, 그리고 테러범들을 테러범이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한국의 군대 파병이라는 현실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한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우리는 아프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국일 미국의 요구를 받아 침략군의 일원으로서 아프간에 갑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인권과 봉사의 이름으로 파병을 정당화했다. 정부의 뒤를 이어 국민들이 신앙과 봉사의 이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간에 갔다. 이들이 국익을 침해했다고? 과연, 이들은 아프간이 결코 한국인들을 반기지 않는 곳이며 한국군 역시 결코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냈으니 국가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해야 하는 것은, 피랍자들에게 왜 그런 데엘 왜 갔느냐며 문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게 대체 파병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고, 파병이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번 일로 이런저런 마음 고생을 할 게 분명한 국가를 위로한답시고 피랍자들의 책임을 얘기할 게 아니라, 국가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국민을 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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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는 없다

얼마 전에 이글루의 이오공감에 올라와서 꽤 많은 리플에 시달렸던 글이 하나 있었는데, 그 포스팅을 한 블로거는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 없는 것 같으니 제발 좀 알려달라'며 예의바르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이 무감각은 곧 타인이 받는 억압에 대한 무감각을 의미할 것이란 생각에 얄밉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름 성실하게 리플을 달았었다. 그 글은 이오공감에서 내려갔고, 그 블로거의 아이디도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새로운 예를 하나 들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당신은 밤에 동네 슈퍼로 맥주사러 갈 때, 귀신 밖에 무서워할 게 없지 않습니까? 




최근에 알게 된 지인과 그녀의 친구는 인사동을 지나쳐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종각과 종로3가로 이어지는  가게가 많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거리. 그런데 그들에게 나이트의 삐끼가 달라 붙었다. 메인스트리트와 직접 마주한 골목길 안 쪽에 있긴 하지만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 나이트였으니, 당연히 삐끼의 출현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삐끼들은 팔을 잡아 끌며 그녀들을 골목 안으로 이끌었고, 안 간다고 말하고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완력으로 그들을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가 부킹을 기다리는 방에 앉혀 놓았다. 그 와중에 그들은 사물함에 보관하겠다며 가방까지 가지고 가 버렸다. 그녀들은 너무나 황당한데다 겁이 덜컥 나서 가방을 돌려달란 말도 하지 못한 채 웨이터가 방에서 나간 틈을 타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내가 이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날 술자리에서였다. 가방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아직 찾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지금 같이 가자고 나섰고, 그녀들과는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인 나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불타는 사명감에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먼저 나선 사람은 남자였고, 뒤따라 나선 나도 남자였다. 그렇게 겁에 질린 두 명의 여성과 불타오른 두 명의 남자가 함께 하는 가방원정대가 자연스럽게 결성되었다.   

택시가 종로에 가까워질 수록 어제 험한 꼴을 당한 두 명은 점점 겁에 질려 갔고, 나머지 둘은 '자연스레' 원정을 이끄는 지휘관처럼 그들을 독려했다. 겁에 질린 두 사람과 그들을 돕는 두 사람, 괴로워하는 두 명의 여자와 그들을 격려하는 두 남자. 그녀들이 겁에 질려 나이트 근처의 가게에 들어가 있고, 남자들만 나이트에 찾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가방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정말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약간의 갈등을 겪은 것을 빼고는.

가방을 돌려달라고 웨이터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바깥쪽 큰 길가에서 삐끼들이 호객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길을 가는 여자들을 막아 세우고는 팔을 잡아 끌기 시작했다. 그들이 싫다고 거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삐끼 하나가 여자를 들쳐 안더니 안으로 달려들어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는 질질 끌다시피 골목 안 쪽으로 끌고 들어왔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안겨 들어 오는 여자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또 다른 여자는 손을 빼내려고 애처롭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 다행히 삐끼들은 그녀들을 가게 문 앞에서 내려 놓았고, 다시 팔을 잡아 끌며 안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나서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려웠다. 나는 내 몸무게보다더 무거운 바벨을 들어올릴 것 같은 남자들에 둘러 쌓여서 그들이 순순히 가방을 돌려주기만을 바라는 운동부족인 약골일 뿐이었다. 뭐, 적었다시피 사건은 없었다. 나는 정말 똥줄이 탈만큼 긴장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들은 무사히 가던 길을 갔고, 가방은 되돌려 받았고, 삐끼들은 힘들어 죽겠다며 흘러내리는 땀을 쓸었다. 이렇게 가방원정대는 무사히 임무를 수행했고, 안도하며 고마워하는 그녀들과 의기양양한 한 남자-나, 나보다 훨씬 의젓한 모습을 보였던 다른 한 남자는 어땠을까?- 다시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갔다. 




나는 의기양양해 하지는 않았다. 나는 출발할 때보다 더 침울해져서 그녀들의 고맙다는 말도 듣는둥 마는둥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왜 그녀들은 내게, 하필이면 가방을 뺏어간 그들과 같은 남자인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가? 만약에 내가 여자였으면, 여자로서 그녀들을 따라나섰으면, 나는 그녀들과 함께 경찰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국가-아버지의 권위를 체현하는 경찰들에게. 그리고 내가 여자였다면, 아마도 그녀들과 나는 나란히 나이트 앞에 서서 두려워 하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내 뒤에 숨은 그녀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린시절부터 무수히 주입 받아온 그 이미지, 칼이나 총을 들고, 용이나 갱들을 무찌르고 감금돼 있던 여자를 어깨에 들춰 없고 돌아오는 히어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딸들을 다른 남자들의 음험한 시선으로 보호하다가 다른 남자에게 건내주는 아버지, 자기의 부인들을 평생 지키겠다는 남편, 어머니-국가의 땅을 지키고, 우리의 누이들을 지키겠다는 군인과 너의 딸과 아내와 너희의 여자들을 강간하겠다는 그 모든 남성들 사이에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같은 판 위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삭제된 채로 이루어지는 그들 사이의 게임을. 고마움은 결코 내가 한 일에 합당한 대가가 아니다.

내가 어쩐지 여자가 가면 가방을 쉽게 받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따라 나섰을 때 나는 내가 그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긍정해 버린 셈이다. 모든 일은 사실 그렇게 이루어진다. 성폭행의 책임이 밤길에 밖에 있던 여성이나 그녀의 옷차림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한 편으로 밤 늦게 아슬아슬한 차림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여성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게 되고, 그녀의 부모님은 여자가 밤길에 싸돌아 다니지 말라고 훈계를 하고, 그녀의 친구는 밤길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걱정어린 인사를 하며,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를 집 앞 까지 바래다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으로 여성에게 밤길이 위험한 이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하게되는 행위들이고, 사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어쨌든 무서운 일을 당해 가방을 빼앗기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누구든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내가 사실은 진짜로 의기양양해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이트에는 가본 적도 없고, 여자들에게 멋진 모습 내세울 건덕지 하나 없는 내가 그 덩치들한테서 여자의 물건을 되찾아 오다니! 세상의 참상을 하나 더 목격한 사람으로서 우울해 하고 있었지만, 그 우울함도 자뻑의 효과를 고조시켰을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우울과 자뻑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우리가 밤길에 귀가하는 여자친구를 바래다 줄 때, 그 행동은 단순히 필요에 대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은 그 행동의 상당부분이 여자친구를 배려하는 나의 자상함에 대한,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자기의 애정을 과시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긍심으로 채워지고 있지는 않을까? 과연 스스로를 여자를 품에 안고 말을 달리는 남성 구원자의 이미지와 완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우리의 행동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미지들의 작용과 효과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특정한 권력 구조를 재/생산하는 장치는 도처에서 언제나 이미 작동중이다. 내 자신이 '자연스런' 관계맺음 이라고 생각하며 한 행위들이 그 장치들에 기름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이성이 만나서 춤을 추고, '자연스럽게' 섹슈얼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으로 상정되는 그 곳은 이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실은 여성의 주체성은 배제된 남성들의 공간이다. (동성애 클럽은 어떨까? 그곳에서의 관계는 성차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권력관계가 어떻게 나타날까?) 모든 관계맺음(특시 성적 관계)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상정하는 바로 그 사고가 억압적 권력이 그 모습을 숨긴 채로 꿈틀댈 공간을 마련해 준다. 나는 그 공모의 사슬, (성)관계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에 우울해 한 것도 잠시, 여전히 도처에서 사랑과 관계는 진행중이다.  

(써 놓고 보니 맨 처음 생각했던 거랑 무척 다른 글이 되어버렸다. 제목과도 매치가  안 되고. 그래도 다른 마땅한 게 생각이 안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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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 - 한국의 브레히트 수용에 대한 씁쓸한 소고

 

 브레히트 사후 50 주년을 맞이 했던 작년에 몇 개의 브레히트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베를린 앙상블에서 온 연출가에 의해 예술의 전당에 올려졌던 '서푼짜리 오페라'는 이 기념할 만한 극작가의 사후 50 주년에 걸맞은 '성대한' 잔치 였다고 할 수 있을 테고, 이보다 조금 앞서 이윤택의 연출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공연되어 흥행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탓인지 올해에도 브레히트의 작품의 공연은 이어지고 있다. 대학로의 극단 아리랑이 브레히트의 <아르투어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을 <달수의 저지 가능한 상승>이라는 이름으로 번안한 것이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일단 길이 면에서, 그리고 주제면에서 다루기가 만만치가 않은 만큼,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문제의식이 반세기라는 시간의 장벽과 더불어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로 인해 자칫 낡고 고루한 문제의식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만큼 이렇게 브레히트의 작품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일단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공연에서 맛본 실망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대를 품고 극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달수>는 정확히 <억척어멈>이 보여줬던 바로 그 실망을 안겨주었다. 역설적이게도 <달수>의 연극 팜플렛에 실려 있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말처럼, <달수>나 <억척어멈>은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Verfremdungseffekt)’가 그 본래의 비판적 맥락을 상실한 채 일종의 재치 코너로 전락해 버린 추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달수>에서는 브레히트적인 비판의 맥락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연극적으로 훌륭히 형상화 해 낸 진부한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 작품은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의 성공 신화와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여진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주인공에게 달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배경을 한국의 60년대를 연상시키는 시공간으로 설정했다. 폭력배 달수는 자본가들이 정치인과 결탁해 자신들의 부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모든 것이 탄로날 위기에 처한 이들을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지켜준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을 이용하여 정치인과 자본가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까지 손에 쥐고 주무르는 지배자가 된다. 플롯이 보여주는 것처럼, 원작은 파시즘이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비열한 결탁이 만들어 낸 틈새에서 출현하였음을 풍자하고 있다. 제목에 들어간 '저지 가능한'이라는 표현은,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저지 가능한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공연은 독재자가 된 달수의 외로운 모습과 더불어 이 사실을 강변하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문제는, 극의 마지막에 부각시킨 이 주제가 한 없이 어색하다는 데에 있다. 이 공연에서는 부하들 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따르던 부하를 배신해야 만 하는 집권의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면서 한국 조폭영화의 상투어를 충실히 묘사되고 있다. 조폭영화에서 갓 튀어 나온 듯한 외모의 배우들과 이들의 건들건들한 몸동작, 그리고 각 지방의 사투리가 섞인 '양아치'들의 대화들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장면들이 관객의 눈 앞에 펼쳐 지고, 이는 당연히 연극을 무척 '재미나게' 만든다. 이미 익숙한 장면들이 연극투의 과장된 연기를 통해 눈 앞에서 박력 넘치게 펼쳐지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폭영화에 대한 참조는 후반에 가서는 그저 행동이나 대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도 이루어 진다. 초반에는 희극적이었던 극의 분위기가

충직하지만 거친 부하들과 교활하고 유들유들한 부하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는 지배자의 고뇌, 충직했던 '아우'를 배신해야만 하는 갈등을 묘사하면서, 조폭영화의 그 익숙한 비극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달수의 상승이 저지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야기되는 가운데 무대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 있는 달수의 모습은 비판적 의식이 아니라 비극적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비열한 거리>나 <하류인생>에 등장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


 이렇게 해서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특정한 정치체제가 만들어 낸 역사적 결과물로서의 파시즘 비판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나가는 한 '인간'에 대한 성찰로 옮아 간 것이다. 사회의 구조와 그 구조가 갖는 역사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이 들어섰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말하려는 바의 정확히 반대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의 변화는 연출의 변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는데, 연출가 김수진은 푸코의 '모든 인간은 크고 작은 권력 관계로 엮여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자신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권력욕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쓰고 있다. 연출가는 정반대로 해석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구조에 선행하여 구조를 결정짓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테마는 푸코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고, 브레히트에 있어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의 문제를,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인간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 오히려 그 반대를 설명하는 것, 브레히트에게 있서는 악의 존재는 본성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파시즘이 광기일 따름이라는 상투적인 설명에 맞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브레히트의 목적이며, 후자 또한 상투적인 지금에 와서 우리가 간취해 내야 할 주제의식은 연출가가 의도한 것의 정확히 반대, 즉 주체의 우위에 서는 역사적 구조의 존재이다.  


 <억척어멈> 역시 브레히트의 작품을 <달수>와 꼭 같은 정도로 손상시켜 놓았다. 공연을 보고 난 후 연출가 이윤택과 잠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억척어멈은 한국에서 더 잘 표현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몽골리안 여성에게는 한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택은 사회주의자 브레히트와 초월적 실체로서의 한민족을 성공적으로-정말로 성공적이었다. 공연은 정말로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결합시킨 것이 퍽이나 자랑스러운 듯 했다. 그에게는 억척어멈이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구현하는 인물이며, 그녀에게 일어나는 비극은 자본주의의 욕망에 대한 그녀의 순응에서 기인하는 것이란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처럼 지금 한국의 브레히트 수용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을 정치 속에서 사유하는 것에 대한 무능, 국회에서 벌어지고, 그 이름으로 신문의 카테고리가 꾸려지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등가적인 무능이다. 이러한 무능 속에서 브레히트가 말하고자 한 것, 현재의 정치 체제 속에서의 인간의 결정과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구, 그리고 그것을 위해 현재를 '낯설게' 만드는 것, 사회관계를 바라보는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방식, 즉 인간의 권력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라는 테마를 '낯설게'하는 것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문제는 이러한 무능이 단지 연출가들 개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지금 사회의 총체적인 무기력의 증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소위 '포스트 모던'을 소비하는 방식들 역시 이와 유사한 무기력의 표출이 아닐까?-


 물론 우리가 파시즘을 철폐하고, 따라서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길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라는 브레히트의 공식적인 주제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제시했던 대안 뿐만 아니라 그를 움직였던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에 있어서 진정으로 혁명적이었으며, 정치에 있어서 혁명적 사유의 유산을 이어받은 이 작가로부터, 그 모든 혁명성을 박탈하는 지금과 같은 해석을 인정할 수는 없다. 브레히트가 아니라면 좋다. 하지만 브레히트라면,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의 몇몇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최소한 그의 진정한 혁명성, 따라서 영원히 낯 설 그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의는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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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놓고 여성의 성에 대한 상품화가 확대되었다거나, 어린 소녀에 대한 로리타 컴플렉스가 인기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비판 또는 걱정어린 이야기들을 듣고는 한다. 현상을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다지 생산성 없는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멤버들이 나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대 소녀들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들이 나오기 전에도 노골적으로 섹시 컨셉으로 활동했던 그룹들도 있지 않은가? 로리타 컴플렉스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들의 십대 소녀들에 대한 욕망은 이미 원조교제가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건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의 guilty pleasure 에 그럴 듯한 이유를 하나 붙여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10대 소녀들의 성이 상품화되는 (우려할 만한) 사회 현상'이라는 틀로 바라 보면 성적 욕망과 그 실현의 문제를 도덕의 잣대를 통해서 바라 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보수적인 도덕적 훈계나 얄팍한 자기 변명 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남성들의 로리타 컴플렉스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욕망의 기호로 사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조교제는 불법이고 심각한 도덕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이들 그룹에 대한 욕망은 인정되고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억압되었던 욕망이 사회적인 인정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이란 말은 기존에 존재했지만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고, 비-의식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모호한 그 '무언가'가 최근에 와서야 의식적인 추구가 가능한 분명한 욕망으로 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조교제의 형태로 표출된 이 '무언가'는 당시에는 그저 심각한 사회적 일탈로 취급되었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서 비로소 이것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형상을 부여 받아, 그러니까 개념을 부여 받아, '욕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이 사실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되는데, 이 욕망이 그저 남성의 다양한 성적 욕망들 중 하나로서의 '로리타 컴플렉스'인 것 뿐만 아니라, 모종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난 이 욕망을 한국 사회의 남성 욕망 패러다임의 커다란 전환점이나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사례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와 군인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TV-Angels 라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반을 일본 여자 연예인으로 하여 일종의 국가 대항전 컨셉으로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친구의 반응은 "확실히 일본 여자애들이 '제대로' 할 줄 알더라"라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제대로'는 성적 욕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기호들을 잘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한국 여자 연예인들이 성적인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강한 행위를 연출하는 반면에 일본 여자 연예인들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적 의미를 부여 받은 기호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안경, 고양이 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 대상과의 유사성에 따라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구분했던 퍼스Peirce의 기호론에 적용해 보면 한국의 것은 도상에 가깝고, 일본의 것은 상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상과 지표가 대상과의 경험적 유사성 및 연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상징은 의미와 기호의 결합이 사회적 규범과 약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경험적이라는 사실은 또한 상징이 개념적인 것임을 의미하는데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적 다양성에 상관 없이 무언가를 '그 자체로' 논할 수 있다(의자라는 개념을 의자의 무한한 경험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퍼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그것이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이고, TV-Angels는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또는 일본 사회와는 달리 한국에는 남성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비근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조폭마누라2>>에는 기억을 잃은 전 조폭 보스인 신은경이 다방 종업원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다방 종업원이 신은경에게 가르친 것은, 가슴을 흔들며 끈적한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영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본 영화라면 결코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남자의 유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상징들의 사용법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한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프레 플레이'와 같은 일본에서 발달한 성매매 시스템도 이의 한 예로 보인다. 한국이나 유럽에서, 성매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반쯤 벗은 여성들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변태' 문화를 그저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게는 이게 욕망이라는, 극히 경험적이라 간주되는 그 무언가가, 경험의 구속을 벗어나 자립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들로 보인다. 그리고 내게는 개념화 또는 상징화를 통한 자립은 일반적으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 만세, 하악하악" 이러는 오타쿠들이나 성행위에 관련된 얘기를 하며 낄낄대는 사람들이나 음담패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같은 음담패설이라도 오타쿠의 그것이 더 큰 문화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적 욕망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는 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양상을 지켜 보며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이런 욕망의 상징화(개념화)가 대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윤곽이라도 그려 보는 것이다. 


 남성중심으로 짜여져 왔고, 짜여져 있는 이 사회에서 언제나 긍정되고, 장려되는 것이 남성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만한 것이다. 남성의 자위는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반면에 여성의 자위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이고(자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던, 구성애의 아우성도 여자의 자위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었다), 이성 연애에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먼저 하도록 기대되는 것은 주로 남자이다. 이런 식의 예는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남성의 이면은 주체적인 욕망을 전혀 갖지 않는, 단순히 욕망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욕망의 판타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로, 그러니까 그의 욕망을 추동해서 그를 일탈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들 중의 하나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판타지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의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혁명 의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관해 논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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