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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끝)

타자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는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결론을 이야기하고 싶다. 거기서의 물음은, 민주주의를 그 자신에 대립시키는 패러독스를 어떻게 이해할까란 것이었다. 이름의 불확심함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계속해서 반복되는 언명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자기-차이에 대한 더 근본적인 해석으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자신만만한 자기-만족의 토대에 다시 균열을 여는 것을 목표로, 자유 민주주의의 역사적 성취에 대한 후쿠야마의 테제에 주석을 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의 이름으로 새로운 복음을 설파하려 하고 있을 때-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는 인간 역사의 이상으로서의 그 자신을 드디어 실현했다고 주장한다-,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 불평등, 배제, 기아, 따라서 경제적 압박이 세계사와 인류사 속에서 이 정도로 많은 인간 존재에 피해를 끼친 적은 없다고(주1).' 다시 균열을 열기 위해서, 데리다는 그 자신에 도달했던 또는 그 자기에 도달했던 민주주의에, 도래할 민주주의 대립시킨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장래 도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은 상이한 시간 내부에서 구상된 민주주의이다. '도래할 민주주의'의 시간은, 결코 완수될 수 없지만-그리고 완수될 수 없기 때문에-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약속의 시간인 것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도래할 것에의 무한한 열림-그리고 '타자' 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포함하기 때문에, 결코 '그 자신에 도달'하는 것, 그 자신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한 민주주의이다.
 데리다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와 대립시켜, 두 개의 시간성을 같은 시간 속에 놓고, 두 개의 공간을 같은 공간 속에 놓는다-나는 이 원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두 개의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이라고 불리는 것 속에 문제가 있다. 데리다는 한 편에는 통치형식으로서의 자유 민주주의를, 다른 편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또 온갖 기대를 벗어나는 사건에의 무한한 기대를 놓는다. 내가 보기에 제도와 초월론적 지평 사이의 이 대립 속에서 소멸하는 것은,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이 실천은 '타자' 또는 헤테론의 정치적 발명에 다다른다. '신참자'-누구의 것이든 평등한 권력을 제정하고, 소여所與의 공동세계 속에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구축하는 새로운 주체-를 계속해서 창조하는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이다. 헤테롤로지heterology(타자성, 이타적 논리)의 정치적인 권력을 무시하는 것은, 한 편에 '자유 민주주의'-이것은 실제로는, 자기의 법을 구현하는 과두제를 의미한다-, 다른 편에 '도래할 민주주의'-사건과 타자성에의 무조건적 열림의 시간과 공간이라 보여진다-라는 단순한 대립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의 방기와 타자성의 실체화 형식과 같다. 민주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자기의 실체화의 거부가, 대칭적인 방식으로 '타자'의 실체화-이것은 현대의 윤리적 풍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상징이다-에 이르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자율과 대비되는, 사건과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의 참조는 현재의 윤리적 풍조에 있어서 빈번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참조는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굉장히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암네스티 인터네셔널Amnesty International의 인권에 관한 강연(주2)에서 장=프랑소와 리오타르가 제시한 '타자'의 권리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리오타르에게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이란 인간존재가 그 인질 또는 노예가 되는 '타자'-프로이트적인 사물 또는 유대의 율법으로서의-의 권력에의 복종을 의미한다. 계몽과 해방의 꿈은, 타율의 법을 부정하려 하는 유해한 의지, 전체주의와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의지가 된다. 따라서, '타자'의 권리는, 궁극적으로는, 악의 축에 대한 군사작전의 정당화에 이른다. 윤리, 타자성,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은 일종의 '새로운 복음'이 되어,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정통화한다.
 확실히 데리다는 레비나스적인 '타자'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으로부터, 윤리적 풍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리오타르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형태로 데리다는 윤리적인 명령을 해방의 지평과 결합시킨다. 그는 명백히 메시아적인 약속을 '법'에의 복종에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건, 타자 또는 무한자에 관한 어떠한 선-취적인 동정同定도 피하려 하는 시도 속에서 그는, 탈구축, 말소선抹消線, 아포파시스apophasis의 끝없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성에 관한 이 윤리적 과대언명은 두 가지 문제의 어느 해석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탈구축은 궁극적으로 신의 병사에 의한 군사작전을 지탱하는 근저적인 타율의 법을 주장하던가, '타자'의 모든 선-취적 동정同定을 말소하는 무한의 임무를 강조하던가, 그 어느 것인가이다.
 데리다에 의한 개념화는 민주주의에 충분한 것을 부여하지 않음과 동시에, 너무나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는 국가에 의한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은, 민주주의는 '타자'에의 무한한 열림 이하의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에의 한 가지 무한한 열림 같은 것은 없으며, 타자의 분할(=열할)parts을 기재하는 많은 방식이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실천을 어떠한 분할도 갖지 않는 자-이것은 '배제된 자'가 아니라, 누군가 또는 누구라도를 의미한다-의 분할을 기재記載하는 것으로 개념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기재는 '신참자'인 주체에 의해, 즉, 새로운 객체가 나타나 공통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고,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나고 받아 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주체에 의해 행해진다. 이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타자성을 다루는 많은 방식의 하나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주체와 객체의 발명은 부서진 시간이자 해방의 단속적斷續的인 계수繼受인 특수한 시간을 창조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들은 메시아적인 시간에 호소하는 대신, 이 부서진 시간 속에서 계속 사고하고 행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우리의 입장의 이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데리다는 '파괴'의 본성 그 자체가 내기에 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이 싹 트는 시기에, 또 그런 시대를 위해 말하고 있다. 즉, 국민국가의 내부에서 오래도록 연기되어 온 데모스의 형상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국민국가의 '소멸'은 논쟁의 대상일 수 있지만, 오늘 민주주의가 코스모폴리탄적 질서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데리다의 대답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식은 분명하지 않다. 주요한 물음은, 그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이다. 그것을 정치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존중'은, '사건' 또는 메시아에의 무한한 기대라는 형식 대신에 타자성을 기재하는 다수의 형식, 변경 또는 부동의不同意의 형식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외형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주(1)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New York: Routledge, 1994), p. 85
 

(주2) Jean-Francois Lyotard, 'The Other's Rights', in Stephen Shute and Susan Hurley (eds.), On Human Rights (New York: Basic Book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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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끝났다. 쉽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서 대충 보는 것과 남에게 보여 줄 만한 글로 옮기는 것은 정말 다른 일이란 걸 알았다. 일본식 문장과 단어가 가득해서 한국에서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도 잘 모르겠다. 이런 게 중역의 폐해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재밌는 글이었고, 또 마지막의 데리다 비판을 포함해서 맥락과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가기도 해서 사람들과 공유하고, 코멘트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옮겼는데, 조회수와 댓글수로 반영되지는 않는 듯 하다ㅎ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뭔가 그럴 듯한 평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만한 깜냥은 없고, 요즘 그의 <<불화>>를 영어와 독어로 찔끔찔끔 읽기 시작했으니 도래할 완독의 순간을 기약하며 미뤄 둬야 겠다. 랑시에르가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직후 진태원 선생의 번역으로 재출간 되었다.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질테니, 언젠가 랑시에르와 관련한 비판적 해석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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