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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1)

1부. 여럿으로부터 나온 하나

 

 1장(하나에 대해)을 일관되게 꿰뚫고 있는 주제는 기표의 논리에 대한 해명이다. 보통 라캉의 기표의 논리는, 언어는 의미와 관련 없이 기표라는 질료 그 자체의 끝없는 차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기표 망이 보지하는 의미의 체계는 결코 일관되게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지젝은 기표의 논리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서술에 수정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기표의 논리란 하나의 기표와 다른 기표 사이의 변별적 차이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의 논리를 특징짓는 근본적 차이는 기표와 그 자신 간의 차이, 기표와 그것이 기입되는 공백 사이의 차이이다. 지젝이 인용하는 자크 알랭 밀레는 세미나에서 기표의 장이 구성되려면, 우선 하나의 기표가 그 자신과 변별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즉, 기표의 결여가 표현되어야 한다. 이 결여가 바로 순수차이이다. 이것은 차이가 모든 것에, 즉 일체의 실체나 동일성에 선행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기표의 장은 이 순수차이가 표현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순수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기의 없는 기표, 기표의 결여의 기표인 주인 기표이다. 그러나 순수 차이와 주인 기표 간의 궁극적 일치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기표의 환유적 미끄러짐이 완결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양자 사이에는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 존재한다. 지젝은 이 상황을 “어떤 것의 형식을 가진 無(214)"라고 표현한다. 이는 내용과 형식 간의 순수한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긴장과 진동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젝은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 논리를 해명한다. ‘신은 신이다’라는 동어반복, 따라서 동일성을 표상하는 이 명제는, 동일성이 사실은 근본적 차이, 절대적 모순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이런 공백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적은 것처럼, 이 공백은 그 자신의 공백을 표현하는 불가능한 기표와 함께 존재한다. 공백은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공백의 자리에는 공백을 메우는 기표가 남고, 이로써 기표의 계열이 존재하게 된다. 이를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 볼 수 있다. 보편자는 어떻게 그 규정 속에 온갖 특수자를 포함한 완결된 것으로 구성되는가? ‘신은 신이다’라는 명제에서처럼, 보편자의 동일성이란 궁극적으로 모순이며, 규정성의 결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모순, 공백은 모순과 공백 그 자체를 표지하는 기표에 의해서 메워진다. ‘왕정주의자는 공화주의자다’라는 명제처럼, 보편은 자신의 규정들 속에 전도된 형태의 그 자신-즉, 아무런 규정도 갖지 않는 그 반대물로서의 그 자신-을 지님으로써, 비로소 개념적으로 완성된다(헤겔식으로, 대자 존재가 된다). ‘신은 신이다’를 분석해 보자. 첫 항의 신은 그 온갖 규정성으로 충만한 신이다. 두 번째 항은, 이 신에 속하는 여러 가지 규정성들을 위한 자리로 마련되어 있다. 첫 항과 두 항의 관계는 유와 종의 자리, 보편과 특수의 자리의 관계이다. 이 두 번째 항에 온 신은 순수한 동어반복, 첫 항의 신에 대해 아무런 추가적 규정도 지니지 않는 대립물이다. 이처럼 보편적 개념은 언제나 자신의 대립물을 공제하고, 또 공제는 바로 예외로의 정립이라는 의미에서, 예외로 삼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라캉의 성차 공식에서 남성 논리에도 적용된다. 남성이라는 전체는 남근 기능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예외-프로이트에 의하면, 아들들에 의해 살해된 시원적 아버지-를 통해서만 구성가능하다. 이 예외적 존재가 개념적 규정이 전체가 아님을, 따라서 일관되게 구성될 수 없음을 메우는 것이다. 
 
 주인기표의 탄생과정은 <<자본론>>의 가치형식절에 대한 독해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이 설명을 통해 내려야 하는 결론은, 지젝에게 있어 차이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정성이 아니란 것이다. 차이는 이미 주인 기표에 의해 점유되어 있으며, 차이는 공백을 내용으로 하는 형식이라는 주인 기표의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상징계의 균열, 결여의 형태로만 드러난다. 따라서 기표의 장에 대한 분석은 차이와 주인 기표의 모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일반적인 기표들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해서 차이를 대리 표상함으로써 기표의 장을 성립시키는 주인 기표로 진행된다. 차이와 모순은 결코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의 부재는, 부재 자체가 상징적 가치를 갖는 변별적 질서에서만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다."(338)고 지젝은 쓰고 있다. 즉,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주인기표를 상징계의 근원(일관된 의미의 장으로 봉합한다는 의미에서)으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징계 내적 질서 안에서, 그 모순의 형상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가치형식에 대한 분석이 이미 가치를 전제하고 시작되는, 맑스의 가치형식절의 자기 모순과도 일치한다. 이는 <<자본론>>이라는 체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자본주의는 자기 안에서 그 전화를 위한 조건을 산출한다는 맑스주의의 상식은, 다른 말로 하면 체제 외부의 관점에서의 비판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데올로기에 외부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사용 가치와 가치의 구분은 각각 기표와 그것이 기입되는 공백에 대응한다. 하나의 상품(상대적 가치 형태)이 다른 상품(등가 형태)의 사용 가치를 통해서 그 가치를 표현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의 현존을 통해서 그 자신의 공백을 표현한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치가, 그리고 공백 그 자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가치 형식의 끝에서 다른 모든 상품들은 화폐 속에 포함된, 즉 화폐가 표현하는 가치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주인 기표를 대신해서 다른 모든 기표들이 공백을 표현한다. 즉, 다른 모든 기표들은 주인 기표의 존재를 통해서 서로의 변별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지젝에게 있어 주인 기표의 공백 표현은 모순, 즉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기표들은 주인 기표를 대신해서 공백을 표현하지만, 주인 기표는 다른 모든 기표들을 대신해서 공백을 표현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관계는 그대로 화폐에도 적용될 수 있다.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들을 대신해서 가치 표현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는 라캉에게서 은유와 환유의 관계와 일치한다. 궁극적으로 은유란 이처럼 공백, 무를 하나로 세는 행위이며, 환유는 이로써 실체적 대상이 발생하고, 하나와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공백,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화폐를 통해서 세어지고, 즉 정립되며, 화폐는 따라서 가치 그 자체를 대표한다. 이처럼 화폐를 통해 가치가 정립된 한에서, 상품들 간의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다.

 

 2장(방탕한 동일성)에서 지젝은 이 논리를 헤겔의 변증법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는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 즉 변증법적 과정은 그 전개를 통해 온갖 차이를 지양하고, 동일성에 다다른다는 생각은 완전한 오해라고 말한다. 반대로, 변증법적 과정의 마지막 순간, 즉 차이의 지양은, 어떻게 그 차이들이 ‘언제나 이미’ 지양되었는지에 대한, 즉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의 경험이다. 변증법적 지양은 소급적 철회의 형태를 갖는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성립하는 동일성의 위상은, 헤겔에게 있어 그 실정적 내용은 無일 따름인 순수한 형식이며 따라서 절대적 모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변증법적 소급 철회란, 차이에 대한 동일성의 궁극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자와 그 특수한 부정들인 차이와의 관계는 보편자 자신이 이미 극단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성격이 변화한다. 이를테면, 법과 그 부정인 범죄와의 외재적 대립 관계는 법은 그 자체 범죄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변화한다. 특수한 범죄들이 자각되는 것은 오직 법을 모순 없는 보편적 개념으로 인식할 때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부르주아 독재 사회로 인식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범죄와 맺는 애매한 관계와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사회의 많은 범죄는 부르주아의 폭력적 지배 체제, 즉 법의 탈을 뒤집어 쓴 그들의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에, 사실은 범죄가 아니다 또는 그렇게 단정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가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법은 범죄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 삼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나아가 이런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서의 동일성으로 뒤집는다. 범죄가 지양되는 것은 순수한 관점의 전도만을 수반한다. 범죄의 구체적 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이 상징적 장에 기입되는 양태가 변화할 따름이다. 이는 누빔의 효과, 주인 기표가 일관된 상징적 장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겔의 동일성은 라캉의 주인 기표와 동일한 것이다. 한 편에서 그것은 순수한 모순이며, 순수 차이를 표지하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편과 차이(특수)라는 관계가 성립하는 공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보편의 (불)가능성인 이러한 잉여가 작동하는 논리에 대한 면밀한 파악에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문제는 보편의 해체가 아니라, 어떻게 모순이 보편으로 ‘필연적’으로 기능하는지에 대해 밝혀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차원에서 동일성의 근본적 불가능성은, 개념과 내용, 그리고 개념과 대상 간에는 근본적인 불일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즉, 개념은 필연적으로 대상과의 어긋남 속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의 역설(240)은 이런 논리에서 해석된다. 아름다운 영혼은 그 상상적 자기 인식 차원에서, 즉 내용의 차원에서는 가혹한 세상의 조건들에 대한 희생자이다. 하지만 그의 상징적 진실에서, 즉 개념의 차원에서 세상을 향한 그의 절망의 몸짓은, 자신의 (상상적) 존재론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아름다운 영혼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여기서 또한 변증법적 소급 철회의 논리가 작동하는 데, 그의 이전까지의 저항의 몸짓은 완전히 무의미했던 것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 자신의 개념에 도달하는 순간, 이미 개념 자체가 변화해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형식이 예술의 개념과 일치할 때-관념이 감각을 매개로 하여 절단되지 않은 것처럼 나타날 때-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종교이다."(237) 자신의 진실에 도달한 아름다운 영혼은 더 이상 아름다운 영혼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상상적 자기 인식을 필요로 할 테고, 마찬가지로 그의 상징적 진실 또한 변화한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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