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아류 제국주의 국가 대한민국(한겨레)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미국의 군사보호령이면서도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에게 최악의 가해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은 과연 세계체제 차원에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이 부분에 대한 학술적 해명부터 있어야 이제 국제적인 착취세력으로 커버린 국내 자본에 대한 올바른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며칠 동안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세가지 소식은 많은 국내인들을 놀라게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최대의 의류업체로 통하는 영원무역에서 임금 삭감이 이루어지자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진압당하는 과정에서 한 여성노동자가 경찰의 실탄에 맞아 죽었다. 캄보디아에 진출한 약진통상의 저임금에 신음해온 노동자들의 시위에 군대가 실탄을 발포해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냈는가 하면, 또 베트남 삼성전자 건설 현장에서 현지 노동자에 대한 경비직원의 폭력은 결국 ‘봉기’를 방불케 하는 노동자들의 집단 저항을 유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들 중에서, 수치심을 느낀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기아임금부터 폭력까지, ‘한국식 노무관리’ 백태가 또 하나의 ‘한류’(?)처럼 한국계 기업들이 가는 곳마다 번져 현지인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 같은 감정은 개인을 행동으로 나서게끔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냉철한 분석을 대체할 수 없다. 미국의 군사보호령이면서도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에게 최악의 가해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은 과연 세계체제 차원에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이 부분에 대한 학술적 해명부터 있어야 이제 국제적인 착취세력으로 커버린 국내 자본에 대한 올바른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운동권 일각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신식민지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신식민지’란 단지 강력한 종속관계를 의미한다면 이는 꼭 틀린 말도 아니지만, 여기에다 한 가지의 단서를 달아야 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에서 산업국가로 크고, ‘친미성’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돼버린 대한민국에서는, 미국은 굳이 일일이 ‘식민지적’ 통치를 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인들이 다 알아서 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으로서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사이의 경쟁에서 어느 한쪽에 베팅할 필요라도 있는가?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미군과 미국 투자자를 자국민보다 먼저 배려할 것이 어차피 보장돼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아니면 최근 10여년간의 영어 광풍을 관찰해보라. 과연 고려대나 성균관대 등이 영어강의 비율을 50%까지 높이려고 안간힘을 동원하는 것은 ‘미국 신식민지 당국’ 간섭 때문인가? 한국에서 영어는 이미 전통시대의 한문처럼 사회귀족들의 특권언어가 돼버렸으며, 부모에게 조기유학이나 영어연수 보낼 돈이 없어서 영어를 덜 하게 된 학생들에 대한 차별은 전통시대의 천민차별처럼 당연지사가 되고 말았다. 식민성은 이미 우리들의 집단 정체성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 안의 미국’ 외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을 위시한 핵심부 국가 자본의 통제력도 엄연히 존재한다. 예컨대 한국 은행가에서 외국인 지분율은 2006년에 절반을 넘었으며 이제는 60% 이상이나 된다. 서민금융이 외면당하는 만큼 고배당, 곧 초과이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은행권 이외에 핵심부 자본의 지분율이 가장 높은 곳들은 전자(43%)와 통신산업(41%), 곧 고이윤이 보장된 기술집약적 분야들이다. 한국식 신자유주의는 끊임없는 외자 유입을 전제로 하는 만큼 종속형 신자유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외국자본이 노리는 고이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착취적 하도급 구조와 비정규직들에 대한 차별, 전체적인 고강도·장시간 노동구조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공인된 (곧 많이 축소된) 자료로 봐도 1년에 약 700명의 노동자를 과로사로 몰아내는 구조야말로 한국을 핵심부 자본을 위한 희망적 투자처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자본가들은 과연 미국에 대한 순수한 고마움(?)으로 은행권을 비롯한 가장 ‘단맛이 나는’ 투자시장들을 미국 등 핵심부 자본을 위해 열어젖히고 있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한-미,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등을 통해서 국내 시장을 핵심부 자본에 ‘제공’해준 데 대한 반대급부로 한국 기업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착취질서에 비중 있게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그 질서 자체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는 만큼, 미국의 충실한 후국(侯國)으로서 그 질서에 참여하는 대한민국을 아류 제국주의 국가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감히(?) 이라크의 유전들을 국유재산으로 묶어 두었던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한 불법 침략을 감행해 이라크에서 시장주의적 정부를 세워주는 것이 ‘본류’(本流) 제국주의 국가가 할 일이라면, 그 시체 더미 속에 들어가서 ‘자원개발’ 등으로 경제적 착취의 기회를 노리는 것은 아류 제국주의 국가의 몫이다. 사실 한국 대자본으로서는 1990년대 초반 이후의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유행병과도 같은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확장이야말로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1987년 대투쟁 이후에 한국 노동자들에게 더는 과거와 같은 저임금을 강요하기가 어려워진데다가, 어차피 수출 중심의 산업이라면 차라리 국외에서 만들고 국외에서 파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한국식 제국주의’라면 결국 대자본의 경제 영토의 대폭적 확장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바로 이와 같은 확장은 현실이 됐다.

 

우리 현재 상황으로서의 아류 제국주의의 문제를 최초로 본격적인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관련 자료를 박사학위 논문에서 정리한 김어진 선생(경상대)이 인용한 통계를 잠시 재인용해보겠다. 2008~2009년 세계공황 이전까지 한국의 국외직접투자는 계속해서 폭발적으로 증가해왔다. 한국 대기업들의 본령인 수출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해온 것이다. 2005~2009년간 한국 기업들의 연평균 국외직접투자 증가율은 29.7%였는데, 그 기간의 수출 증가율은 8.3%였다. 한국 국민총생산 대비 해외직접투자의 비율은 2012년에 2.1%에 달했는데, 이는 일본(2.1%)이나 미국(2.6%)과 같은 수준이다. ‘국외로, 국외로!’는 한국 산업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나타나온 현상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에서 현지 노동자들에게 기아임금을 강요하고, ‘대들기’만 하면 바로 무력진압이 벌어지게끔 하는 식으로 군림하는 한국 자본은 임금비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류업계인 반면, 베트남에서 현지 노동자에 대한 구타가 발생된 곳은 삼성전자의 공사장이었다. 삼성전자의 국외생산 비중은 이미 80%를 넘었는가 하면,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는 약 60% 정도다.

 

한국 경제제국주의는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탄압적인 정권과의 결탁관계, 그리고 아직도 경쟁이 덜 심한 시장만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자원·에너지 집약적인 제조업 위주의 국내 산업구조의 특수성 차원에서 보면, ‘국외자원 개발’, 곧 세계적 규모의 자원 약탈전에의 참전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석유공사만 해도 이미 진출해 있는 지역은 페루부터 이라크까지, 가히 전세계적이라고 하겠다. 농지도 약탈의 대상이다. 2008년에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에서 농지의 상당 부분을 헐값으로 임대하겠다는 ‘노예계약’을 체결했다가 그 여파로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정권이 아예 무너지고만 대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국 기업의 ‘개도국 농지 약탈’이 국제적으로 비판받은 일은 있었지만, 다른 나라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거래들은 대체로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는다. 그 자원을 관리하는 정권들과 한국 기업들의 유착은 매우 ‘조용하게’ 발전돼 간다.

 

 

한국 지배자들은 각종 자유무역협정으로 미국 등 중심부 자본에 국내 고수익 투자 기회를 제공해가면서 미국 주도의 신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승해 일종의 아류 제국으로서 농지·에너지 약탈부터 저임금노동 착취까지 세계의 주변부에서 또 하나의 ‘작은 식민모국’으로 군림한다

 

 

결국 친미성향이 거의 내면화돼 있는 한국 지배자들은 각종 자유무역협정으로 미국 등 중심부 자본에 국내 고수익 투자 기회를 제공해가면서 미국 주도의 신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승해 일종의 아류 제국으로서 농지·에너지 약탈부터 저임금노동 착취까지 세계의 주변부에서 또 하나의 ‘작은 식민모국’으로 군림한다. 이들의 승승장구의 대가는 국내외 노동자들의 피땀인 만큼, 결국 한국 자본의 국내외 피해자들이 그 힘을 하나로 모으지 않으면 아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캄보디아·베트남·방글라데시 등지에서의 한국 자본의 피해자들을 단순히 동정하지만 말고, 그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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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2 14:25 2014/01/2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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