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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19
    씁쓸한 만남
    김지씨
  2. 2005/01/19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김지씨

씁쓸한 만남

요즘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서인지 군대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옛날에는 억지로 말뚝을 박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새는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으면 떠밀었지 제대 말년의 장교나 부사관들을 남겨두려고 애쓰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제대가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너도 나도 복무기한을 연장하려고 신청하며, 보다 더 길게 군 생활을 지속하기 위하여 장기복무를 신청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성공률은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장기복무하기가 어려워졌다는 현상과 더불어 불경기로 인해 찾아온 또 한 가지 현상은 군에 입대하는 여성들의 숫자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군대의 민주화와 함께 남녀평등 바람이 군에도 불어와 차츰 군 내 여군의 숫자를 늘이는 추세도 추세지만, 여러 가지로 취업이 힘든 여성들은 장기적으로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군으로 눈을 돌리는것 같다. 사실 군인 또한 공무원이니 고용의 안정성 측면으로 따지면다를 점은 하나도 없다.

내가 맡고 있는 소대에도 여자 후보생이 몇 명 있다. 나는 그들을 담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신상명세서를 들추어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물론 남자 후보생들의 신상명세서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는다) 나도 인간인지라 남들의 과거를 살펴보는 일에 흥미가 없을 리 없다. 흥미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소대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라는 유,무언의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난 그네들에 대한 신상명세서 및 여러 가지 자료들을 뒤적거려야만 한다. 이번 차수에도 어김없이 난 신상명세서를 펼쳐보게 되었다. 그렇게 신상을 살피다 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중학교 후배라거나, 혹은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나가던 학원의 학생을 발견하게 될 때, 난 아무튼 세상이 별로 넓지 않다는 삶의 관용구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번에도 또한 마찬가지 가냘픈 삶의 인연을 하나 발견했다. 근데 이번 인연은 약간은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인연이었다.

 

난 기본적으로 교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마음 한켠에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무작정 교사가 되는 것만이 내 희망은 아니다. 물론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좋은 선생님이라고 하면 너무 막연하니까, 일종의 역할 모델을 하나 설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도 그런 역할 모델이 되는 좋은 선생님들이 몇 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광동고등학교에 있는 송승훈 선생님, 즉 승훈이 형(^^)은 대학시절부터 쭉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본 좋은 선생님이다. 대학 다닐 때는 선,후배 관계로 학회를 통해 이것저것 많이 배우며 살았고, 지금은 교직에 진출해서 승훈이 형이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나중에 나도 이러저러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삶을 가꾸게 하는 형의 노력들은, 책을 좋아만 하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무지한 나에게 깨달음을 줄 때가 많다. 언젠가 학교 근처에 있는 형의 집에 놀러가서 그때 학생들이 쓴 글들을 읽어보고 감탄한 적도 있었다. 형이 끌어낸 학생들 마음 속의 숨은 말들이 날 놀라게 만들었다.  

 

이번에 여자 후보생 신상명세서를 뒤지다 보니 그 승훈이 형이 있던 광동고등학교 졸업생이 한 명 있음을 발견했다. 난 송승훈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 40명 쯤 되는 인원의 모임에서는 어쨌거나 이런 식의 인연을 있기 마련이구나라고 난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기분이 영 찜찜했다. 승훈이 형이 보다 넓게 사고하고,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비판하며,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들을 가르쳤을텐데, 난 그와 반대로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고, 복종하게 하며, 로봇처럼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내 기분을 그렇게 다운시킨 것이다. 내가 이런 교육방식을 선호한다면 모르겠지만, 나 또한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사가 되고 싶기에 난 더욱 우울해졌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연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인연을 악연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물론 군대에서의 훈련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역할로 만나고 있는 인연들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인연은 나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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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서른 살 무렵의 여자는 어떨까? 나는 아직 서른 살이 되지 못했고, 그리고 여자가 될 가능성은 더더욱 없기에 어쩌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될 듯도 싶다. 하지만 99년 말 2000년 초 쯤에 내 머릿 속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황당하게도 위의 그 질문이었다.

뺀찌의 영향도 컸겠지만, 그 당시 읽고 있던 전경린이나 하성란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들은 여자가 살아간다는 것, 특히 서른 살 쯤 된 여자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그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으로 되돌아 왔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은 결국 서른 즈음이 되면 일상의 틀 안으로 들어오고야 만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서른이 정말 나이 서른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닐테고... 흔히 말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단계를 말할 거다. 철든다는 것, 그리고 세속적이 된다는 것, 그런거겠지.

하지만 전경린은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서른이 되어버린, 아이도 하나 있고, 남편도 있고, 그럴 듯한 집도 있고, 남편과의 불화도 있고, 우울증도 있고, 자기처럼 꿈을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는 그런 여자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떻게 환한 감옥 속에서 환하게 갇혀 있는지를 말한다.

전경린은 말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오전의 아파트 단지를 생각해보라고. 각 방마다 여자들이 하나씩 있고, 그녀들은 조금씩 우울하고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며, 돌아올 남편과 아이들은 기다리는 그 장소.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런데 전경린의 그 여자는 그런 일상을 뚫고 들어온 염소 남자에 의해 자신의 일상성을 자각한다. 무턱대고 염소를 맡긴 남자. 그리고 도시와 염소의 불균형 속에서 그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삶의 메마름을 그 여자(역설적이게도 이름이 "미소"이다.)는 느낀다. 그리고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한다. 작품의 마지막은 떠나는 여자의 뒷 모습을 그려낸다.

전경린은 이처럼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 그녀들이 떠날 수밖에 없음을 열정적인 어조로 밝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서른 살 여성들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서른 살 남성은 또 어떨까?

그녀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나는 이렇게 두 눈을 감고 훌쩍 뛰어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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