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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좋게 얼큰히 취해 골목길을 돌아나오다
고양이 한마리와 마주쳤다.
그녀석의 특징이라면 큰 덩치, 멋진 수염,
그리고 고양이답지 않아보이는 눈빛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뭔가 곤란해보이는 듯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듯하기도한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대답없는 녀석......
난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뭐, 내가 엄청 취해보이기라도 하는 거냐?
나 안취했다, 이 녀석아~
여전히 응답은 없다.
역시 속지 않는군, 그래 나 좀 취했다 취했어~
설마 그 눈빛은, 대낮부터 취한 주제에 시침떼는
거짓말쟁이에 대한 경멸의 표시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이봐, 네가 아직 뭘 잘 모르나본데.
세상에는 꼭 상대방을 속이려는 거짓말만 있는 건 아니라고.
그의 눈빛이 한층 진해지는 듯한 낌새에
난 살짝 미소로 답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선의의 거짓말' 따위 진부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냐.
선의건 악의건 그런 '전통적인' 거짓말의 목적은 결국
상대방에게 진실이 아닌 정보를 전달하고도
그것이 진실임을 인증받으려는 것이지.
즉, 속이려는 거짓말임엔 마찬가지라는 거야.
눈빛의 농도에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거짓말은 전혀 다르지.
나는 그걸,
상대방이 속아주느냐 아니냐와는 무관한
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로서의 거짓말!
이라고 정의하고 싶어.
누군가가 "나 안취했다"라고 했을 때
상대방이 꼭 속아주기를 기대하지는 안잖아.
술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누가 속겠느냐고.
그건 그냥, '이런 경우엔 이렇게'라는 매뉴얼에 맞춰
내뱉을 뿐인 거야.
그래, 그러므로, 이런 거짓말을 하고서는
죄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는 거야.
그런 시시한 거 말고 더 그럴 듯한 사례를 들어보라고?
네가 인간사회, 특히 이 대~한민국이라는 요지경에
관심이 있다면 굳이 내가 말 안해줘도 잘 알 수 있을텐데.
최근(이라기엔 이미 '한물간' 얘기일지도...),
서해에서 전함 하나가 침몰한 사건에 대해
책임있는 기관에서 내놓은 말들을 좀 봐봐.
그들의 이야기 중에 진실인 것이 약간은 섞여 있을진 몰라도
전체적으로 거짓의 냄새가 풀풀 난다는 것 쯤은
고양이인 너라도 알 수 있을 거야.
뭘 모르는 사람들은 경악했지.
저 정도의 책임있는 기관에서 하는 말들이 왜 다 저모양이냐.
우리를 바보로 아는 거냐, 속아선 안된다, 와글와글......
근데 말이지. 사실은 그게 아니거던.
그 녀석들은 사람들이 속아줄까 아닐까 전혀 고민도 안하는 거거던.
이렇게 곤란한 경우엔 이정도의 뻥을 친다...
라고 하는, 사회적으로 검증된 절차에 따른 것 뿐이고
그렇기 땜에 그렇게 당당히 뻔뻔스러울 수 있었던 거지.
누가 봐도 거짓인게 분명한 말을 밥먹듯 하는 사람이
권력 최상부에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여전히 건재한 꼴을 좀 보라고.
엊그제까지 시끄러웠던, 뭐시냐 인사청문회 어쩌구 하는데를
주름잡던 분들의 면면을 좀 보란 말이지.
그리고 사실 그렇게 '높은' 곳을 볼 필요도 없어.
얼핏 보기에 그 꼴들에 저항하는 듯한 '보통사람들'이라 해서
뭐 그리 크게 다르겠냐구.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쉽게 '상대가 속거나 말거나'
거짓말들을 많이 하냐구~ 응?
너는 그러지 않니?
고양이가 아닌 척 해본 적 없어?
이제 슬슬 지루해지는지 녀석의 실루엣이 꿈틀대기 시작했고
다급해진 나는 한 레벨 높인 언성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물론!
그러니 시끄럽게 떠들어본들, 진실을 호소해본들
무슨 소용이냐, 인생 뭐 있냐...
뭐 이런 결론을 내리자는 건 아냐.
내가 그런 정도의 패배주의자로 보이진 안잖아, 그지? 허허...
자 자, 그러니까 우리,
이와 관련해서 이제부터 좀 더 진지하게 얘기해보자고!!!
점점 더 꼬여가는 혀를 부드러운 연기로 마사지해주고자
담배 한개비 더 뽑아무는 순간,
곤란한 듯-측은한 듯 눈빛의 그 건장한 고양이 녀석은
배에 달린 주머니에서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문짝 하나를 꺼내서
땅에 턱~ 세우더니 그 문 너머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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