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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 종교적 피터팬 신드롬

난 가끔 의하하다. 개혁신학을 외치는 교단에서 전혀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는 모습을 보고...

또 신기하다. 자신의 과거의 모순을 부정하려는 모습 보단 억지로 두둔하려는 태도들의 벽이 교회에서 나의 신앙생활을 질식하게 한다.

내 신앙적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 줄 알지만 내가 배우고 성경을 통해 얻게된 신앙의 기준엔 많은 교인들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건 피장파장의 오류가 아니다. 난 당신들이 진심으로 걱정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으로 자유를 주겠노라 하셨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준 나의 자유를 다시 회수해간다. 그래서 난 두 개의 적과 싸우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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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피터팬 신드롬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1005000/2004/09/001005000200409301917065.html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보수주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란 과거 전통이 물려준 것들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기능에 더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종교인들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데 요청되는 ‘비판의식’보다는 이전 것을 그대로 전승하는 무비판적 ‘수용의식’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종교가 부여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던 사람들은 단순한 비판이 아닌 ‘종교화한 심판’을 받는다.

‘마녀’ ‘악’ 또는 ‘사탄’이라는 표현은 특정한 종교적 코드에 저항하고,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종교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붙여주는 이름표다. 그리고 이 종교화한 심판의 이름표가 붙여지면 정당한 재판의 과정도 생략된 채 무참하게 희생되어 생물학적 죽임이나 사회적 죽임을 당하게 된다. 수백만명의 여성들이 500여년에 걸쳐서 마녀로 몰려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중세 유럽에서의 마녀화형 사건은 한 종교가 자행하여 온 ‘죄악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뒤 발표한 글에서,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악’의 개념을 구성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비판적 사유’가 부재할 때, 착하고 평범하고 신실한 종교인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동료 인간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엄청난 악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이라크 공격을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신성한’ 일로 여기는 무수한 종교인들, 한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잣대가 되어 온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것을 마치 거룩한 종교적 사명인 양 착각하는 종교인들을 볼 수 있다. 종교적 색채로 가려진 이 비판적 사유의 철저한 부재야말로 ‘죽임의 문화’를 재생산하는 현대판 ‘악의 축’이 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놀라운 양적 성장 이면에는 ‘비판적 사유’를 억누른 ‘단세포적 복음 이해’와 ‘교회성장지향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비판적 사유란 ‘비판적 물음표 붙이기’ 작업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물음표’를 박탈함으로서 비판적 사유가 작동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무조건적인 ‘아멘’과 ‘예’만을 신앙적이라고 가르쳐 왔다. 결과적으로 그 가르침과 실천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차원을 철저히 상실함으로서 더 이상 성숙하기를 거부하는 ‘종교적 피터팬 신드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기독교 안에 ‘인식의 사각지대’의 골이 깊어지고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인식의 사각지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원은 성차별에 대한 인식의 부재다. 한국 기독교 인구의 70%를 이루는 절대 다수인 여성들이, 절대 소수인 남성들에 의하여 모든 결정 과정과 결정권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문제 제기하는 비판적 소리가 이토록 부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성들은 남성 지도자들에 의하여 ‘교회의 꽃’으로 치켜세움을 받으면서, ‘물음표 붙이기’를 박탈당한 ‘영원한 유아’가 된다. 특히 목회자 중심적인 한국 기독교는 설교와 성서해석을 통하여 ‘순종과 희생과 봉사’라는 기독교적 덕목을 가부장제적으로 포장하여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들의 ‘제2의 성’으로서의 존재를 강화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이제 양성평등에 대한 사회정치적 인식이 다양한 차원에서 광범하게 확산되는 이 시대에 한국 기독교가 그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기독교 인구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여성들을 끊임없이 ‘부차적 존재’로만 규정하는 그 남성중심성의 상자로부터 과감히 탈출해야 할 것이다.

강남순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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