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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종을 찾아서..

나는 가끔 문명인으로 살고 있는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흔히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볼 때 그러하다.

아래 글을 읽으면 진정으로 진화한 부류는 원주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바람과 얘기할 수 있는가? 또는 도살을 위해 엄청난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 쉬운가? 기도로 식량이 될 짐승을 부르는 게 쉬운가? (호주 원주민 중 일부는 식사시간이 되면 기도를 하는데.. 그때마다 짐승이 나타나서 스스로 그때의 식사를 해결하도록 했다고 한다.)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연설문


배경-1885년 미국의 14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는 지금의 워싱턴주에 살던 북미 인디언 수와 미족의 추장 시애틀 씨에게 그의 땅을 정부에 팔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시애틀 추장이 피어스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신하였고 미국정부는 독립2백주년을 기념하여 그 내용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내용이다.

신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워싱턴에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그 위대한 지도자는 또한 우정과 친선의 말들을 우리에게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답례로서 우리의 우정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 까닭은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백인들이 총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 수가 있습니까. 그러한 생각은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선한 공기가 반짝이는 물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우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구석구석은 우리 백성들에게 신성합니다. 저 빛나는 솔잎들이며 해변의 모래톱이며 어두 침침한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은 우리 백성들의 추억과 경험속에서 성스러운 것들입니다.
백인들이 우리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백인들에게는 어떤 한 부분의 땅은 나머지 부분의 땅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중에 그 땅에 와서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들의 형제가 아니라 적입니다. 그들이 어떤 땅을 정복하면 그들은 곧 그곳으로 옮겨옵니다. 그들의 왕성한 식욕은 대지를 마구 먹어치운 다음에는 그것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당신네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인디언들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우리가 야만인이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겠지요
내가 만일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나는 하나의 조건을 내 놓겠습니다. 즉 백인들은 이 땅에 사는 짐승들을 그들의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입니까만일 모든 짐승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커다란 영혼의 고독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로 인간들에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백인들이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한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당신네 신과 우리의 신은 같은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우리의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신도 상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신입니다.
그리고 신의 연민은 인디언이나 백인들에게 동등합니다. 이 대지는 신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지를 해치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백인들도 역시 소멸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종족들보다 더 먼저 소멸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오염시켜 나간다면 당신은 어느 날 밤 당신 자신의 오물속에서 질식하게 될 것입니다. 들소들이 모두 살육 당하고 야생마들이 모두 길들여지며 성스러운 숲속이 인간의 냄새로 꽉 찰 때 그리고 산열매가 무르익는 언덕이 수다스러운 부인네들에 의해서 더럽혀질 때 잡목 숲과 독수리는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삶의 종말이요, 죽음의 시작입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라곤 없습니다. 아무데서도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며 벌레들이 날아 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내가 야만인이어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음은 내귀를 상하게 합니다. 만일 사람이 쑥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북미의 인디언들은 한낮의 비로 씻겨지고 소나무의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더 좋아합니다. 공기는 인디언들에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짐승과 나무의 인간들의 똑같이 숨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은 자기들이 들어마시는 공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오래 동안 죽을 병에 걸려 신음하는 사람들처럼 냄새를 알지 못합니다.우리가 백인들이 꾸고 있는 꿈과 그들이 긴긴 겨울밤에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려주는 희망과 그들이 마음속에 불태우고 있는 미래의 비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해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만인들입니다.
백인들의 꿈은 우리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동의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약속한 인디언 보류지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인디언들이 사라지고 오직 광야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만이 남더라도 이 해변들과 숲들은 여전히 우리 백성들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갓난 아기가 엄마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고동소리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땅을 당신에게 팔려고 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그 땅을 사랑하듯 사랑하고, 우리가 보살피듯 보살피며, 그 땅에 대한 기억을 지금의 모습대로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모든 힘과 모든 능력과 모든 정성을 기울여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 땅을 보존하고 또 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그 땅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신도 우리의 신과 같은 신이라는 한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에게 있어서 대지는 소중한 것입니다.
백인들일지라도 공동의 운명으로부터 제외 될 수는 없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들이 남긴 말

인디언들은 표현을 중시했다. 그들의 언어는 곳곳에 배어 있는 자연의 힘에서 비롯되고, 단어는 바람에 의해 다듬어지고, 문장은 숲의 향기에서 우러났다. 백인들과의 만남에서 추장들은 잊을 수 없는 명언들을 남겼다. 그들의 말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위대한 민족성을 읽을 수 있다.

헤하카 사파(검은 사슴). 크레이지 호스의 혈족으로, 수족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테톤족의 분파이자 오글랄라족에 속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대사제들로부터 부족의 신성한 전통을 전수받았다.

[인디언은 모든 것을 원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것은 우주의 기운이 원을 그리며 돌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우리 민족이 강하고 행복했을 때 모든 부족의 힘은 나라의 성스러운 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겁니다.

동쪽에서는 평화와 광명을, 남쪽에서는 따뜻한 기운을, 서쪽에서는 비, 북쪽에서는 거센 찬바람이 힘과 끈기를 줍니다. 이러한 지식도 우리의 종교와 함께 초월적인 세계에서 얻은 것입니다. 우주의 힘을 만드는 건 모두 원의 형상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하늘도 둥글고 지구도 둥글다고 들었고 별도 또한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람도 그 맹렬한 흐름이 극에 달하면 소용돌이가 됩니다. 새들도 둥지를 둥글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나 봅니다. 해가 떠오르고 지는 것도 원의 형상으로 이루어집니다. 달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둥근 형상을 하고 있어요.

계절도 커다란 원형을 그리면서 변화되다가 어김없이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삶도 어린 시절에서 출발하여 마치 원을 그리듯 마지막에 가서는 어린이같이 되어 마침내 생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처도 새둥지처럼 그 형태를 둥글게 하고 배치도 원형으로 합니다. 위대한 정령께서 우리 후손을 보호하사 여러 둥지를 모으셨고, 그렇게 모은 둥지가 부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케타아히(독수리 날개)는 다음과 같이 인디언이 후세에 물려준 과업을 찬양한다.

[형제들이여, 인디언은 이 땅에 영원한 추억을 남겼도다. 아름다운 것들에 우리의 언어로 이름을 남긴 것이다. 미네하하는 우리를 생각하면서 웃음을 지을 것이고, 세네카는 우리의 모습에 눈을 반짝일 것이며, 미시시피는 나지막한 소리로 우리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할 것이다. 광활한 아이오와, 가파른 지형의 다코타, 비옥한 미시건도 태양을 향하여 우리의 이름을 속삭이게 될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포효하고, 일리노이는 탄식하며, 델라웨어는 우리의 타와에(장송곡)를 끊임없이 노래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이 영원한 장송곡을 태연히 듣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백인들이 탐내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밖에 우리는 아무 죄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가 지는 편으로 떠났다. 우리가 살던 곳을 백인들에게 남겨주고말이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전설은 추장이 잔존 세력을 이끌고 어떻게 큰 강을 건너왔는지 들려준다. 추장은 거처할 곳을 만들려고 기둥을 땅에 박으며 "앨라배마!"라고 한탄조로 말했다. 그 말은 "이곳이 우리가 쉴 땅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백인들이 그곳까지 들이닥쳐 거기서도 살수가 없게 되었다. 쫓겨난 사람들은 어두운 늪의 수렁으로 밀려나 학살되었다. 추장이 한숨지으며 탄식했던 그 말이 바로 백인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 별마저 반겨주지 않던 그곳에서도 인디언은 탄식조로 "앨라배마"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나마 와칸만이 우리에게 겨우 한 귀퉁이 쉴 곳을 마련해줄 수 있었을 뿐이다.]

크로푸트는 블랙푸트 연합의 대변자로 1877년 협정에 따라 5만 평방 마일의 초원지역을 캐나다 정부에 양도했다. 그 결과 들소가 사라졌고, 블랙푸트족은 굶주리게 되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밤하늘의 반딧불, 한겨울의 들소의 콧바람, 풀섶에 짧게 드리워졌다 해가 지면 사라지는 작은 그림자인 것을.]

위네바고(인디언 속담)

[우리의 신성한 어머니인 대지와 나무,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증명해 준다.]

인디언 추장이 1876년에 펜실베니아 주지사에게 한 말.

[우리는 고요함을 좋아합니다. 쥐들까지도 평화롭게 놀도록 놓아둘 정도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도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크레이지 호스. 수족의 오글랄라 인디언 추장이었던 그는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1877년 봄에 커스터 휘하의 결사대에게 추격당하다가 빅 혼 산맥에서 마일스 장군에게 생포된다. 바로 그해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한다.

[아무도 당신들 보고 이곳에 오라고 하지 않았소.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가 살도록 이 땅을 주신 것이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땅이 있소. 당신네들을 괴롭힐 마음은 추호도 없소. 위대한 정령께서 우리들이 살 수 있도록 광활한 대지와 들소, 사슴, 영양 등 사냥감들을 마련해 주셨으니 말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의 땅을 강탈한 것이오. 당신들은 우리 사냥감을 죽이고 있소. 그래서 우리는 살기 어려워졌소. 지금 당신들은 우리더러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소. 하지만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를 노동이나 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하라고 만드신 것이오.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네 백인들이나 노동을 하면 되지 않소. 왜 우리에게 문명을 멀리하냐고 묻는 거요? 우리는 당신네들의 문명을 원치 않소! 우리의 아버지처럼, 그 이전의 아버지들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살아갈 것이오.]

[아메리카 인디언의 땅] 필리프 자캥 지음. 송숙자 옮김. (주)시공사. 1998. 14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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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不滅)의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

(펌)체게바라 추모앨범 중에서 - Hasta Siempre / Soledad Bravo  
불멸(不滅)의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



1. 탄생과 진실을 향한 여행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 Che Guevara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 6. 14 ~ 1967. 10. 9

본   명 :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Guevara de la Serna)
출생지 : 아르헨티나
국   적 : 쿠바
저   서 : 《게릴라전》, 《혁명전쟁 여행》외
추   모 : 1997년 체 게바라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체 게바라 사령관이여! 영원하라!)라는
              주제로 헌정앨범이 발표되었다.
              앨범명 "
El Che Vive! 1967-1997"
              속에 수록된 Carlos Puebla가 부른
              체 게바라 추모곡 Hasta siempre
 
(듣기☞)는 특히 남성적 톤의 애절하면서도 힘있는 선율이 인상적이다.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중류층 가정의 미숙아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고,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는
독립전쟁 당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은 모두 노동자와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계급 출신이었고, 무신론자였으며,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까웠다.
모두 5남매의 자식을 두었으며, 게바라가 맏아들이었다.

어린시절의 체 게바라  에르네스토는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는데,
이 천식은 그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이 천식의 고통이 후에 그를 의사로 만들었고,
병에 걸려 신음하는 민중을 치료하다가, 이들이 걸린 병마보다,
가진 자들의 억압과 착취가 더 큰 문제임을 인식하여 마침내,
민중해방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불사른 위대한 게릴라 전사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식에 고통받는 그를 위해 가족들 모두 코르도바
(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간다.
그러나, 천식증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을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으로 배운다.
비록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그는 활동적이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돈에 대한 집착이 없었고, 옷차림도 자유롭고 활달했다. 그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았으며, 광적으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후에 그의 이 문학적 역량은 유감없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편지와 일기, 연설문 및
저서에서 보여지는 것외에도 회견장에서 자작시를 낭독체 게바라 육성 자작시 낭송 듣기 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던 에르네스토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反 페론"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벌써 이시기에 그는 파시즘적 군사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부르조아들의 "부(富)의 독점"
그중에서도 특히, 힘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청년 체 게바라 청년 에르네스토는 특히 여행을 통해서 많은 지식과 견문, 그리고,
후에 혁명을 위한 경험들을 얻게 되는데,
열일곱살 때, 자전거로 아르헨티나의 중부지방을 둘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곳을 답사하게 된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은 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의 행동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당시만 해도 그는 행동하는 이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의학을 공부하려 한 것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두살때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서 였지만,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의 부모님들은 불화끝에 1950년에 이혼하고, 그는 어머니와 생활하게 된다.
그는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을 돕고 학비를 벌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한 건설회사
에서 한때 사무원으로 일하며 공부했다.
1951년 그의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데,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병들고 가난한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눈다. 같은 해 의사시험에 합격하자, 다시 여행을 떠나는데, 칠레에서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고,
페루의 나환자촌에서는 한동안 봉사활동에 열중했다.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는 폭동이 일어나,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헤프닝을 겪기도 했다.
여행은 그에게 남미대륙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대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
소중한 진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그곳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알 수 있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해방에 기초한 인식의 굳건한 토대를 쌓게 되었다.
이러한 소중한 여행으로 인해서 훗날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땅에서도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힘없는 민중은 이미 그의 가족이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 중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 더 머물게 된적이 있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다시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평소에 관심 가지고 있던 나병과의 인연으로 <알레르기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지만, 중류계급을 보장받는 개업의가 되길 원하진 않았다.
결국 그는 두달만에 흰가운을 벗어 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는 혁명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2. 일어서는 체 게바라

We are fighting against misery - Che Guevara

볼리비아 라 파스에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변호사 리카르도
로호와 만나게 되는데, 조국에서 추방된 이 반페론주의자와의
만남에서 그는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고, 남미 일부국가에서
이미 현실화 되어가는 사회개혁 운동과 부딪히면서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로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1953년 볼리비아 혁명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그의 의견에 따라 베네수엘라로 가지 않고, 과테말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마야와 잉카문명에 관한 고고학 쪽에 관심을 두어 오래도록 머물렀다.
과테말라는 당시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공산당 가입은 거부했고 따라서 정부가 좋은 조건으로 제의해온 의료담당관 자리도 거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 혈통의 마르크스주의자 가디아(Hilda Gadea)와 기거하며,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훗날 쿠바혁명의 둘도없는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의 조직원
로페즈(Nico Lopez)를 소개받아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1954년 과테말라 중미의 이 작은 나라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면서, 혁신적인 정책을 폈는데, 당시 막강했던 유나이티드 프루츠사
(미국 곡물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그것을 인디언과 소농
에게 분배하려는 개혁을 실시하려는 중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지독한 빈곤상태에 충격을 받고, 아르벤즈의 이 없는 자를 위한 정책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또한,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그는 일생동안 간직한다.
이러한 경외심을 품고, 그는 드디어 혁명의 실천을 위해 패덴드 순켈에 의사로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과테말라의 우익 망명인사인 호세 카스틸료 아르마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원조받고 군대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아르벤즈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일으킨 쿠데타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CIA의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헐벗고 굶주린 민중을 철저히 파괴하는
반혁명 대리공작을 낱낱이 목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과테말라 좌익정부의 전복이 계기가 되어 그는 막스-레닌에 관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알게된 것은 가난하고 착취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가 세력에 의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과 제국주의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범죄에 정면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대항하기로 마음 먹는다.            

                                       마침내,
"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이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의 청년은 후세 휴머니스트이며, 리얼리
스트인 진정 위대한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로 다시 태어났다.
"
체(Che)"는 스페인어로 "오!", "어이 친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친숙과 존경을 표현하는 호칭이다.
하지만, "
게바라"""가 붙으면 그 의미는 엄청난 것이 된다.
"
체 게바라"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 바로 격동의 60년대를 온몸으로 뜨겁게 살다간 가장 완성된 사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실천하는 이성이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인터뷰가 있어 소개한다. 이 인터뷰는 현재는 행방불명이 된 아르헨티나의 신문기자 호르헤 리카르도 마셋티와의 대화이다.

"나는 아르벤즈 정부의 요직에 앉을 생각은 전혀 없소.
명백한 정치경제적인 침략을 자행한 미국과 미국자본의 횡포에 덩달아 날뛰는 반민족적인
매판자본가들에게 맞서기 위해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군대를 조직하려 했을 뿐이요.
과테말라는 지금이야말로 투쟁이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소."

미국 CIA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간섭했다.
그 결과 라틴아메리가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선교사를 앞세운 미국식 민주주의란 것을 통해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갔다. 과테말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과테말라의 여러 지역이 CIA의
조정을 받고 있는 군대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 아르벤즈는 피신할 틈도 없었다.
과테말라 쿠테타는 시작되자마자 어이없이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게바라는 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
투쟁을 촉구하기도 하고 무기를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미 CIA의 사주를 받은 과테말라정부의 재판부가 이미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결정,공고하였기 때문에, 게바라는 과테말라인 친구 엘 파토호와 함께 멕시코 시티로 도피한다.
이때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게바라와 파토호는 어미잃은 새처럼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 역경을 혁명이론과 마르크스주의,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전술을 두루 연구하는 기회로 삼는다.
굶주림과 억압 그리고, 독서를 통해 게바라는 철저한 급진주의자로 변해갔다.


3. 혁명의 시작

자유라는 깃발 아래 분연히 일어설 줄 아는 인간이 되자!
- Che Guevara

게바라는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쿠바해방운동에 가담해 달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피델은 그를 쿠바 진격대의 의사로 임명했다.
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게바라와 멕시코에 있던 망명 쿠바인들은 철저하고 강도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외인부대의 대장으로 게릴라 전투에 다년간 경험이 있는
알베르토 베이요 대령이 맡았다.
베이요는 멕시코에서는 살바로르 태생의 지주로 통하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은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멕시코주 찰코 지방 부근에 있는 오래된 농장을
구입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된 훈련과 사격연습에 들어갔다.
7.26운동의 지도자들은 수개월 동안 카리브해를 건너 전사들을
무사히 쿠바까지 실어다 줄 튼튼한 배를 찾아 다녔다.
마침내, 피델이 베라쿠르즈주의 리오타투스판이라는 작은 항구에 묶여 있던 고물이 다 된 보트 그란마호를 찾아냈다.
이 배의 주인은 미국인인 로버트 에릭슨이었는데, 피델 일행은
멕시코인 안토니오의 중개로 5만페소를 주고, 이 낡은 배를 별 수 없이 사들였다.
이 배는 1939년에 건조된 것인데 전체 길이는 19미터, 폭 4.5미터로서 정원은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약 20명 정도였다.
250마력짜리 두 개의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수리해야 할 만큼 고물
이었다.
그란마호는 1956년 11월 25일 일요일, 동이 틀 무렵 닻을 올렸다.
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82년이나 승선했다.
게다가 연료, 무기, 전투복, 식량을 적재했으니 최대 시속 9노트에 48톤의 고물 보트는 출발
하자마자 허덕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쿠바의 동부 오리엔테주 해안까지 가는 가장 길고 비효율적인 항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도중에 FBI나 멕시코 경찰을 만나는 일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보트는 언제 격침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승무원들은 모두 배멀미를 했다. 게다가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게바라는 지병인 천식이 도져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졌고 휩쓸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항로를 잃고 말았다.
상륙예상지점인 코로라다스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배는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해안에 배를 갖다대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맥질
쳐서 간신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망그로브 숲은 상륙지로는 최악이었다.
붉은 망그로브 숲은 바다 쪽에서는 두터운 장벽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나무들의 밑둥에는 라카로운 빛을 띤 굴조개 따위가 칼끝처럼 빛을 발하며 닥지
닥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물 위로 드러난 망그로브의 뿌리에는 바늘깥은 가시가 돋혀있어서
밟으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발밑은 뻘밭이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지기 쉬웠고 마치 뜨듯미지근한 고기국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기분마저 불쾌했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커다란 게들이 우글거리며 기어올라와 전사들을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모기나 파리떼가 몰려오면 망그로브숲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세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빠져나와 일행은 아침 9시에야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원정대원들이 늪지대를 막 벗어나자마자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이 상륙한 것을 발견하고 폭격을 개시한 것이다.
11시에는 폭격기 세대가 다시 나타나 피델과 그의 동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농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정대원들은 다시 쫓겨 나가야 했다.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쿠바에서의 악몽과 같은 첫 날에 대해 기록하였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예정지인 코로다스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부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수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멀미로 탈진해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무모한 계획과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물론 초기의 이러한 자살행위에 가까운 실수들이 후에 성공할 수 있는 생생한 교훈이 되었
지만...
장비중에서 우리 손에 남은 것이라곤 총, 탄약대, 눅눅해진 탄환뿐이었다.
대부분의 구급낭과 배낭은 늪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잃어버렸다.
밤새도록 제당공장 소유의 사탕수수 밭을 헤치고 걸어나갔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 대원들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행군 도중에 버렸기 때문에
나중엔 식량이 모자라서 사탕수수만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심코 버린 음식 찌꺼기가 후에 화를 자초했다.
수색대가 이를 발견해서 우리를 추격하는데 좋은 단서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길을 안내했던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그들이 돌아가서 바티스타의 정부군에게 우리의 행로를 밀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쿠바진격 부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주해야 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레지스탕스들과 접선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 했다.
 12월 5일 바티스타군은 그들이 숨어있던 알레그리아
델 피오라는 사탕수수 재배지역을 습격했다.
사탕수수밭에서 140명에 달하는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세 사람이 전사하고, 게바라를 포함하여
다수가 부상당했다.
대다수의 대원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버려 생사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들과 바티스타가
두목인 1만 2천여 용병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전 속에서 단련된 장교들과 네이팜탄을 비롯하여 무엇 이든 탑재할 수 있는 최신형 전투기, 게다가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바티스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제국주의.....
이 모든 것들과 소수 게릴라들은 맞서 싸워야 했다.


4. 최초의 승리와 산타 클라라 대첩

We will not allow another Cuba - Che Guevara

1956년 1월 16일 살아남은 대원들은 본격적으로 게릴라전을 개시했고,
1957년 라 플라타 병영 습격을 성공하므로써 게바라는 첫번째 승리를 이루었다.
이 역사적 승리를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전쟁의 회고]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1957년 초, 우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방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라 플라타강
하구에 위치한 소규모의 병영(라 플라타 병영)을 습격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험준한 산간벽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알려져 쿠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습격은 게릴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투쟁의 준비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였고, 부대전체에 있어서는 앞으로 다가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릴라군은 이 라 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으로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승리의 전과는 약 36명의 바티스타군을 22명의 게릴라
부대가 습격, 라 플라타 병영에 붙잡혀 있던 포로들을 이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쿠바 국내에서는 독재자 바티스타 일당이 국민들에게 더 이상
게릴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뉴욕 타임즈의 허버트 매튜즈라는 기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 속의 게릴라 기지에 들어가 카스트로와 회견을
했다(1957년 2월 17일).

사진까지 곁들인 이 회견기사는 정부측 주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4월에도 미국의 방송국 기자인 봅 티버를 초청하여 기자회견을
했다. 이 회견 장면이 미국 전역에 TV로 방영되었다.
산속의 게릴라군과 도시의 레지스탕스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산속과 도시에서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이러한 통일전선은 게릴라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체 게바라는 이렇게 회고했다.
"열악한 조건이었다.
의약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산속의 환자는 모두 비슷한 증세로 앓고 있었다.
이빨이 몽땅 빠져버린 노인, 기생충이나 구루병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
여러가지의 비타민 결핍증, 이 모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농민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었다.
나는 단순한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조건 자체를 철저하게 변혁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57년 6월에는 치과의사로도 개업했다.
내가 진료한 첫환자는 이스라엘 프라도였다. 그는 완전히 나아서 돌아갔다.
두번째 환자는 호엘 이글레시아스였는데, 그의 충치를 뽑기 위해서는 이빨에 맞춘 치료용
화약이 필요했다.
그건 일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이빨은 그대로 남아 잇몸에 달려 있었다.
그것을 뽑아내려고 온갖 짓을 대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치과의사역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고, 진통제 한 알도 없었다.
그래서 심한 충치로 고통받는 환자에게는 심리적 마취를 십분 활용했다.
즉 고통스런 치료가 성공하도록 주문을 외우게 하는 방법이었다.
게바라는 의사로서 활동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산속에서의 전투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라 플라타병영 습격에서부터 엘 우 베로 전투, 엘 옴 브리트 전투,
그리고 알토스 데 콘라도, 브웨이시토, 피노 델 아구아, 마르 베르데 등의 전투에까지....
이 공적이 인정되어 7월에는 소령으로 진급되었다.
게바라는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갖추고 있었고, 조직가로서의 능력도 탁월하였다.
그의 생애중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25개월간은 그를 조직이론가, 사상가, 전략전문가
그리고 영웅으로 만들었다.
게릴라군은 산속의 근거지를 확고히 구축했다.
게바라는 병영본부를 건설하고 야채밭, 목장, 진료소, 빵 공장, 간이 방송국, 담배와 신발,
무기제작창 등을 세웠다.
물론 사소한 일이라도 신중하게 추진했다.
이 모든 것은 보통 사람의 능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게바라는 등사판 신문 [자유 쿠바인]을 발간하여 병사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1958년, 게릴라들은 세력을 확장하고 역량을 강화해 갔다.
이해 2월, 게릴라군은 드디어 산을 내려가 혁명전쟁을 개시할 것을 결의했다.
시가전이 조직되었고, 독재자에 대항하는 투쟁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개되었다.
날이 갈수록 전선은 확대되었다.

1. 피델 카스트로,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속에 남아 전부대 지휘.
2. 3월 라울 카스트로, 시에라 크리스탈 지역에 동부의 제2전선을 구축.
3. 후안 알메이다, 산티아고 데 쿠바를 포위하기 위해 하산.
4. 카밀로 시엔후에고스 별도의 공격부대 지휘를 맡기 위해 섬의 서쪽으로 출발.
5. 8월 31일,
체 게바라, 제 8공격부대와 함께 출발.
6. 에스캄브레이 산속에서는 또 다른 저항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다.
   핵심적인 그룹은 '대학생동맹'과 '인민사회당(공산당)'이었다.


 게바라가 이끄는 부대는 농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다.
옷은 너덜너덜하게 헤어지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배를 채웠지만, 조국해방에 대한 신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들판에서는 하늘에 노출되어있어 자주
비행기의 폭격을 받았다.
게다가 이해관계 때문이거나 혁명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참가했던
병사들은 자주 도망을 쳐서 밀고해버
리곤 했다.
이런 와중에도 게바라 부대는 20개 이상의 강을 건너며 섬 중앙부를 횡단하여 마침내, 에스캄브레이 산속의 게릴라들과 합류했다.
게바라는 그곳에서 가축을 훔치는 등,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던 산적과 다름없는
"자칭 혁명가"들의 규율을 바로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도적떼 같은 가짜 혁명가들에게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1958년 12월, 마침내 바티스타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독재의 날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게바라 부대의 산타클라라 공격은 독재자 바티스타 일당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 되었다.
산타 클라라 전투의 상황을 게바라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산타 클라라는 쿠바섬의 중앙평원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 15만의 이 지역 중심
도시였다.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온갖 소문이나 정보가 가장 빠른 시간에 모여들고 퍼져나갔다.
우리는 공격 당시 소총부대를 상당히 증강시겼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만한 역량도 갖추었다.
비록 폭탄은 부족했지만 중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바티스타군의 전차대를 공격할 바츄카포도 입수했다.
우리들은 까마후아니가의 도로 입구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경비에 임하고 있는 바티스타군
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12월 29일, 해방조국을 향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까피로 언덕의 수비는 상당히 완강했다.
30일, 이곳에서 하룻동안 전투를 계속하는 동시에 시의 다른 지역을 점차 장악해 들어갔다.
정부군은 본부와 장갑부대 사이의 통신이 두절되자 까피로 언덕이 포위되어버린 것을
알고는, 그제서야 당황하여 철도를 이용해 도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미 철로를 파괴해 퇴로를 끊어 놓았기 때문에 기관차와 객차 여러대가
탈선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집중 폭격을 퍼부어 대자 장갑열차는 성냥곽처럼 부숴졌다.
고사포와 기관총, 그리고 엄청난 양의 총탄을 고스란히 내놓고, 적들은 22대의 차량과 함께
항복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바라 부대는 12월 31일 경에 산타 클라라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날 밤.....
 1959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 새벽, 바티스타의 탈출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현금과 보석자루가 비행기에 실리고, 공포에 질린 바티스타
부부와 그들의 절친한 몇몇 외국인 친구들이 함께 탑승했다.
 (※ 영화 "대부"에 이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비행기는 산토 도밍고를 향해 소리없이 이륙했다.
새벽 2시 10분에 너무나도 황급히 떠나야 했기 때문에 경호원
이나 수행원들은 거의 따라가지 못했고, 측근들은 작별인사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바티스타의 부인 루시아는 귀금속이 달린 블라우스
와 현란한 장미빛 판타롱을 차려입고 한껏 멋을 부렸지만 불안
해하고 초초해하는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티스타는 측근들에게 자신이 출발한 직후 일어나는 일들을 반드시 보고하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두 명의 장군에게 집무를 대행하도록 명령하고, "
체 게바라"라고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의사 따위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는 정권이 절대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5. 쿠바해방! 또다른 시작

The people liberate themselves - Che Guevara

1959년 새해가 밝았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부대가 드디어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 피델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군 쿠바 수도 아바나 입성 장면 동영상
보기)
게릴라군의 아바나 입성장면, 가운데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가 보인다.  쿠바는 해방된 것이다.
1월 5일, 사법관 마누엘 우르티아가 대통령에,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수상에 임명되었고,
체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의 요새인 라 카바냐
지역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끈 용감한 애국청년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역사적 과업을 이룩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던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무력을 사용한 싸움이 끝나고 나자,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다.
그것은 새로운 혁명이었다!
쿠바가 또다시 양키의 식민지(차라리 양키의 사창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를
변혁시켜야만 했다.
피델과 까밀로 시엔후에고스는 아바나의 군정관이 되어 바티스타군의 잔당을 일소하는
일을 맡아했다.
군부와 경찰은 수년에 걸친 내전 기간동안 2만명 이상의 쿠바 민중을 학살했다.
살인, 강간, 고문, 폭력, 강도질에다가 마지막엔 농가에 불을 지르기까지 온갖 만행을 밥
먹듯이 저질러 왔다.
이런 야만적인 폭정을 휘두르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아낌없이 받아왔던
것이다.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처형하는 쪽이 옳겠는가?
게바라는 이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임무(재판권)를 맡았다.
살려두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재차 반혁명을 꾀할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총살하고, 나머지는 징역을 살도록 했으며,
모함을 당한 것으로 밝혀진 극소수만 무죄로 석방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게릴라들은 멕시코나 과테말라 혁명의 선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전면 개편했다.
직업군인제를 폐지하고 미국이나 부르조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 그리고, 그의 동지들은 수염을 깍는 일도 미루고 제반문제를 검토했다.
1959년 1월, 게바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멕시코의 어느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혁명의 강령을 쿠바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몬카타병영 습격에 참가
했던 한 병사가 이렇게 주장했다.
이건 단순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쿠데타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그 놈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빼앗으려면 또 한 번의
쿠데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티스타가 100의 이권을 미국에 바쳤다면 우리들은 101의 이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은 확고하게 기초를 다진 후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중요한 일은 권력을 잡은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체 게바라의 이 말속에 숨은 뜻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잡는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이 생긴 후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또, 어떻게 해줘야 그들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내야 할 진정한 혁명이다."


오리엔테의 산과 평지에서, 카므게이의 저지에서, 라스 비야스의 산과 평지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의 2년 동안에 걸친 처절한 투쟁 후에 아바나에 개선한 우리 게릴라들은 초창기
와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토지를 소유
하지 못한 농민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이론도 정립해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수행되었던 "토지개혁"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쳐 우리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우리는 "토지개혁"을 통해 모든 무산자들에게 토지가
돌아가야 하며, 불법 소유자들에게서는 토지를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수행하는 노력과 치르고 있는 희생이 농민의
해방을 위한 것일 때에는 아낌없이 치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농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급진적 토지개혁은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자
들과 그들에 빌붙어먹는자들 즉, 대토지 소유자, 설탕공장 경영자, 대규모 농장소유자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부르조아들은 이러한 충돌을 두려워하나 프롤레타리아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이 토지 소유자들에게 불리하게 제정된 법률을 지지하고 있다.
혁명군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본적인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민중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토지를 쟁취하는 투쟁에 그들을 불러 일으켜서 참여시켜야 했고,
그 일을 위해 오리엔테주의 구석구석까지 바로 그곳 출신의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 각 분야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고, 민중의 단련된 민주
주의 의식이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지개혁 구상을 구체화하여, 실현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적인
법률이 요청되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토지의 재분배와 늘어난 농산
물의 수급을 처리할 대형 유통기구의 마련이라는 두가지의 과제는 혁명정부가 어떻게 해서
라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일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국내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난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데 산업장려정책을 진행시킴에 있어서 막 생겨나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이
기업에서 생산해낸 상품을 소비할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대책도 필요하다.
이 시장의 규모는, 구매력은 크지 않더라도 물품을 필요로 하는 농민들의 수요에 맞출 정도
면 된다.
사탕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한 상선도 필요하다.
또한 이전에 우리들의 소유였던 토지, 광산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 전력을 확실하게 쿠바민중의 것으로 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요금은 비싸고 아직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없는 전화회사를 국유화하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게바라는 피델과 몇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조직가로서의 뛰어난 수완이 있었다.

1959년 2월 9일에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시민권을 얻었다.
이즈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확실히 라울(피델의 아우)과 나는 자주 충돌한다.
그래서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1,2등을 다투를 잔소리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모델
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는 석유를 국유화한 후에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카르데나스는 멕시코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도 멕시코처럼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들의 정책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우리들이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고, 이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있는 것들을 국유화하는 것과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것은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착실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이익보다 민중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일하는 태도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도르티코스 대통령은 피델의 천거를 받아
게바라를 공업장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 32세였다.



6. 제 3의 길을 향하여...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필요없다! - Che Guevara

피델 카스트로의 추천과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게바라는 국립농업개혁국의 공업부장
이라는 경제 부문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59년 6월, 게바라는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유고 등을 돌아보는 여행길에 오른다.
표면적으로는 그 나라들의 경제부문에 대한 연구가 주목적이었지만, 게바라 개인으로는
일찍부터 자신이 꿈꾸어 왔던, 자본주의적 방법도 아니고 공산주의적 방법도 아닌 이른바
"제3의 길"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었다.
 같은 해 11월 28일,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초대총재가 된 게바라는 셔츠차림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낡아빠진 군복풍의 셔츠를 걸치고, 빗질도 하지 않은
부시시한 머리로 총재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급료를
5천페소에서 1천2백페소로 줄인 일이었다.
이에 놀란 쿠바의 부르조아들은 당황하여 허둥거리며
모두 마이애미로 줄행랑 쳤다.
이즈음, 쿠바의 지폐는 미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폐가 남아 돌아갈 정도로 남발
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쿠바 경제가 붕괴될 수도 있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쿠바의 경제공황을 노렸다.
이를 간파한 체 게바라는 쿠바내에서 지폐를 인쇄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 쿠바의 인쇄기술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게바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체 게바라의 싸인 미국에서 쿠바의 지폐를 마음대로 찍을 수 없도록 지폐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인쇄하도록 하고, 위조할 수 없도록 자신의
싸인을 새겨 넣었다.
지폐 난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쿠바 혁명정부의 전복을 노리던, 미국의 계략은 게바라로 인해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게바라가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중앙은행의 임원이었던 호세 산티에스테반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행업무 중에서 그가 가장 고심한 것은 외화의 축적이
었습니다.
그는 매일 외환수지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외환보유고를 보면서 모든 문제를 분석하곤 했습니다.
그는 새벽 서너시까지 피로도 잊은 채 일을 하고 늘 재정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상의했었지요.
간부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그가 결정을했습니다.
부하들이 과실을 범할 때는 엄격하게 질책했었지요.
하지만 항상 인간적이었어요.
심약한 것은 용서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죠.
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이 정직하고 혁명적인가 어떤가 살펴보고, 일단 눈에 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금융정책을 오로지 혁명사상을 현실화시키는 무기로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게바라는 어떤 방법론을 채택할 경우, 그 채택의 근거를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
적인 측면에서 찾았지요.
중앙은행은 단 하나의 참된 가치 즉 "혁명수행에 있어서의 동지애"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원칙과 일상적인 삶 그 모두에 있어서 가장 인간적이며 혁명
적인 사람이었지요."
1960년에 게바라는 자신의 발로 사회주의 국가의 땅을 밟아보는 꿈을 실현했다.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등을 방문하고 RDA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강경하고 빈틈없는 체 게바라의 쿠바내 미국재산의 국유화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확대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국유화한 토지, 은행, 제당공장, 상사 등은 대부분 양키 자본가들의 소유였었기 때문이다.
참지 못한 미국은 마침내, 쿠바에 대한 공격을 결심했다.
 1961년 1월 8일 미국은 쿠바와 국교 단절을 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17일부터 48시간에 걸쳐 미국은
피그만해안을 침공했다.
게바라는 이 전투에 참전하여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그의 게릴라 전술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미국의 침공으로 쿠바의 육, 해, 공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혁명군은 결국 미국의 공격을 물리쳐내었다.
체 게바라가 버티고 있는, 쿠바군은 이제 더이상 미국
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드디어,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치를
높이들고 세계를 향해 공언했다.
쿠바는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 재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동맹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바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게바라는 전국 각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산업발전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갖가지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했다.
그의 경제 정책의 골격은 아래와 같았다.
급진적 농지개혁, 사탕수수 경작지의 축소, 급속한 산업화, 1차 상품의 수입제한, 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외화축척, 임금제도의 개선...
그러나,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즉, 노동자의 투쟁이 한결같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경제투쟁으로 나아간다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체 게바라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 해결이 훨씬 쉽다.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욕심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임금인상의 요구가 있어도 여유있게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가서 임금을
아주 조금 인상해주어 생색만 내면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이제야 게릴라들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지나친 임금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을 하지않는 매우 고급스런 직업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하고도
기아임금에 허덕이는 심각한 상태였다.
게바라가 생각하기에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신성한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의무감에 의해 노동하게 해야 하는 것
이었다.
노동의 본을 보이는 체 게바라"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자국보다는 '의식의 개혁' 이 훨씬 더 효과적
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금전욕이나 명예욕 혹은 체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지도자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상태에 이를 때, 더
이상 노동이 괴로울 필요가 없어지고 즐거운 의무가 될
것이다.
물질적 유혹이란 새로운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다.
그것은 완전히 척결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그런 부조리한 것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주의 정신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쿠바 사람들처럼 놀기 좋아하고 소란스러우며, 행실이 분방한 국민을 하나의 기치 아래 결집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쿠바에는 기술자도 전문직 노동자도 없었고,
경제 계획도, 예산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론에서 실천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태만함, 결근, 여럿이
모여서 복잡거림 등의 생산성 하락요인을 없애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습득, 유능한 관리자의
육성, 양키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공장운영...
이런 사항이 게바라에게 부과된 중대한 과제였다.
게바라는 노동 그 자체보다는 자유의지로 하는 잉영노동을 더 많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하나의 요인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대중교육의 원천이다.
모든 사회적 과제 배후에 있는 목적은 새로운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게바라는 붉은 자발노동대를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 돌아가 사탕수수를 거두고 노동자 주택의
건설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 교육의 일환이었다.
물론 게바라 역시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었다. 이순간 그는 중앙은행 총재도, 쿠바의 2인자도
아닌, 한사람의 노동자였다.
그는 민중을 사랑했고, 그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사람
답게 사는 것을 보고자 했다.
아래는 그 당시 체 게바라와 함께 일했던 한 노인의 증언이다.
"체 게바라는 좋은 옷이라든가 새구두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어요.
한번도 우리 노동자보다 좋은 음식을 먹은 적도 없었구요.
우리와 같은 노동자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지급받은 것을 먹고 입었어요.
그는 특권을 갖는 것도 매우 싫어했지요.
자신의 부하에게조차 어떠한 특권도 행사하지 않으려고 항상 자신을 경계했어요.
그는 살아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이 게릴라 병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지요.
이만하면 대단한 인물아닙니까?"
증언을 마친 노인의 눈에선 어느새,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그는 일을 나갈 때는 제일 먼저였고 퇴근할 때는 맨 마지막이
었거든요.
게다가 대개의 경우 가능한 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다가 너무
늦어 돌아갈 수 없을 때는 작업장에서 그냥 노숙했지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잤어요.
침대에서 자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요."
"그는 노동자에게 공손하고 싹싹했지요.
함께 자발적 잉여노동을 할 때나 공장으로 갈 때,
처음에는 아무도 호감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도 게바라는 우리와 함께 어울려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자유
롭게 이야기를 한다든가, 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
리면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그는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체 게바라 사령관이 아니었어요.
그저 한사람의 노동자 친구였어요."

"산타 코로마 농장에 있었을 때, 새벽녘 무렵이었는데,
게바라가 갑작스런 천식 발작으로 시달리고 있었어요.
내가 '왜 잠시도 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약을 꺼내오면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렇게 닥달하지 말아요.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요.'"

"그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였고,
그가 세운 계획들도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습니다."

1961년 8월 게바라는 쿠바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 갔다.
그곳에서는 OEA(미주기구=미국의 지배기구의 하나)의 '경제사회심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라이프지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실렸다.
"어떤 때는 화려하고 잘난 척하는 또 어떤 때는 온화하고 호감을
주는, 구렛나루를 기른 이 쿠바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참석자는 게바라가 능숙하게 외교적인 제스쳐를 쓴다고
하여 <체체>라고 이름 붙였다.
게바라의 이상한 언동은 그를 적대시하는 그룹에게 있어서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 망명자들
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좌익의 보호를 받지도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진보를 위한 동맹"의 스폰서인 미국을 공격하면서, 쿠바가
동맹의 자금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
을 했다.
각국의 대표들은 게바라야말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소련의 침입과 지배를 불러들일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서 NO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푼타 델 에스테 헌장에 서명한 각국 대표들은 만족해 하며 해산했다.
쿠바로 돌아가는 길에 게바라는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시켰던 쿠바경제가 이젠 위기에
직면했고, 미국과의 암거래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소련권으로부터의 원조는 만족할 만큼의 효과가 없고 쿠바에는 적당하지도 않다고 주장
했다."
게바라는 적대국인 미국과 예전처럼 식민지적 상업거래가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의 거래가
성립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7. 게바라의 예언

If you tremble indignation at every injustice then you are
a comrade of mine
-
Che Guevara

체 게바라
연애에 대해서는 매우 쑥맥이었다.
그러나, 뭇여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게릴라 전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전사들이 개선할 때까지 일다(게바라의 부인)는 딸 일디타와 멕시코시티에서 살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결혼식  1959년 1월 21일 두 모녀는 아바나에 도착
했다.
게바라를 만나기 위해 쿠바로 돌아온 것이었다.
"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아바나로 온 것은 1959년 1월 21일이었습니다.
이때 에르네스토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녀와는 엘 페드레로 전투에서 서로 알게 되었답니다. 나는 매우 슬펐지만 두사람 사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그는 이혼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외에 별 다른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1959년 5월 22일에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했고 그는 6월 2일에 재혼했습니다."
- 일다 가데아 <체게바라, 투쟁의 나날>(1972)
아이를 안고있는 체 게바라  

다른 여자란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22세의 쿠바인 교사, 알레이다 마르치 데 라 토레이다.
"7.26운동연합"의 일원이고, 게바라와는 엘 페드레로 농장의
전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게바라부대에 합류하여 승리의 날까지 그의 곁
에서 모든 투쟁을 함께 수행했다.
게바라는 재혼한 알레이다와의 사이에 네자녀를 두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부정이 넘치는 아버지였다.
그는 아이들을 특히 사랑했다.
지금도 쿠바의 아이들은 체 게바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말이 재미있다.
"체 게바라 사령관은 우리 같은 아이들을 많이 사랑했대요.
 그래서 우리도 체 게바라 사령관을 사랑해요."
게바라의 결혼생활이 정상적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혁명가는 결혼생활에 실패한다.
남편의 인생이 혁명과 함께 진행되므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게바라는 우루과이에서 후에 "게바라의 예언"으로 이름 붙여진 두가지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 중에서 케네디의 "진보를 위한 동맹"의 속셈을 폭로하고 양키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 케네디 대통령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체 게바라와 케네디는 둘다 쿠바산 시가를
    무척 애용했다고 한다. 차이가 있었다면,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고,
    게바라는 쿠바산 시가보다, 쿠바의 가난한 민중을 더 사랑했다는 점이다.)
열변을 토하는 체 게바라  아래는 게바라의 예언중 일부분이다.

"우리 민중이 주권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독점자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독점자본은 이미 쿠바에 침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미국자본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쿠바는 이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른 삶의 노동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

회의가 끝난 후에는 비밀리에 아르헨티나로 가서 후론 디시대통령과 회견하고, 다시 브라질로 가서 쟈니오구아 드로스 대통령으로부터 공식적인 훈장을 수여받았다.

1962년, 미국은 쿠바 국내에 소련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해군을 파견하여 쿠바를 봉쇄했다.
후루시초프가 소련 미사일의 철수를 결정할 때까지 봉쇄는 계속되었다.
1962년에서 1964년 이 3년 동안은 게바라에게 있어서나 모든 쿠바인에게 있어서나 매우
격심한 노동의 나날이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당과 대중조직을 견고하게 꾸미고, 향후 경제계획을 세우는 등 많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1963년 7월, 게바라는 경제계획 세미나에 참석 하기 위하여 알제리를 방문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관리들과 경제운영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 과연 늙은 공산주의자들이 게바라의 노선을 받아들였을까?
고참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게바라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고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을 노골적
으로 경멸했다.
게바라는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던 공장자주 관리방식이나 국가계획 경제가
골간이 되는 소련형 사회주의 모델보다도, 정신적 자격(刺激)을 중시하고 통일적인 예산
융자제도를 취하는 중국형 사회주의 방식을 더 선호했다.
게바라와 소련의 동지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논쟁이나 서로 상대방을 비꼬는 좋지못한 평이 오고가고 했지만 그다지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상의 대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바라가 소련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
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한 당내 논쟁에 있어서도 게바라의
동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쿠바경제는 자력갱생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했다.
다양한 체험이나 생각들을 받아들여 가면서.....
한편에서는 혁명의 원동력이자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시킬 당이
만들어졌다.
게바라에게 있어서는 두번 다시 맡기는 힘든 어려운 일만 계속
되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엔 혁명적 과업의 완수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도사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주위에서 염려했던 대로(왜냐하면 그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큰 실책을 범하지는 않았다.
레닌도, 카스트로도, 아니면 예수일지라도 그런 경우라면 그와 같이 실천했을 것이다...
여하튼, 쿠바경제는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러쿵 저러쿵 헐뜯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 게바라의 노선에 따라서......
1965년 그러나 게바라는 경제학자로서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쿠바경제는 그가 바라는 대로 나아가 주지만은 않았다.
1965년 1월, 그는 장기여행을 계획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콩고, 기니아, 가나, 다오메이, 알제리, 탄자니아. 그리고 카이로를 방문했다.
알제리에서는 "제2회 아프리카 아시아 연대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줍니다....."
이 연설에는 그의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뇌하는 체 게바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처음의 순수한 열정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민중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힘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실망한 체 게바라는 가슴속에 분노를 가득 안고,
3월 14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돌아와서 피델 카스트로와
모종의 장소에 틀어박혀 밀담을 나누었다.
그후 직장으로 돌아온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했다.
마치 먼 곳으로 떠날 사람처럼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쿠바혁명때 사용했던 권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1965년 4월 중순, 홀연히 게바라가 자취를
감추었다.
정부청사에도 사탕수수밭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요하는 쿠바 민중들에게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내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바라는 늘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아무 이상없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의 실종에 대해서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피델과 싸우다가 죽었다, 도미니카에서 객사했다, 발작을 해서 멕시코시티의 병원에 감금
되어 있다, 소련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보냈다, 수도승이 되어 스페인으로 갔다,
반카스트로주의자 그룹이 미국으로 납치해 갔다.......등등



8. 불가능한 꿈을 위해 다시 전장속으로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 Che Guevara

1965년 7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 콩고에서 돌았다.
게바라가 어떤 쿠바인과 더불어 촘베의 용병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11일, 피델은 아바나의 채플린 극장에서 게바라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했다.
그것은 양친에게, 자녀들에게, 그리고 피델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였다.
그중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살펴보면,

"
사랑하는 일디타, 알레이디타, 카밀로, 셀리아 그리고, 에르네스토에게...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
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들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이 공부하여라.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특히,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 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공부하여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늘 너희들을 다시 보길 바라고 있으며, 아주 커다랗고 힘찬 키스를 보낸다.
아빠가
"

민중해방을 위한 게릴라군의 한 전사로써 게바라는 영원한 민중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단념하고, 다시 전장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체 게바라가 한 명언중에 이런 말이 있다.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 누구의 억압도, 속박도, 부조리도 없는 모든 민중이
평등한 세상, 기존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또다른
제 3의 길, 그가 가슴속에 가지자던 꿈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였기에, 이 꿈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후에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
그는 이 불가능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믿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대신할 새로운 게릴라들이 그 꿈을 이루어 줄 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민중 해방에 바치기로 한 체 게바라는 투쟁에 뛰어들기 위해 옛 벨기에령
콩고를 훈련장으로 택했다.
그후 1966년 3월, 게바라는 게릴라 훈련을 마치고 콩고를 떠났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공산당원과 만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나서 최종 목적지로 볼리비아를 택했다.
그러나, CIA는 이미 그가 콩고에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유럽을 통해서 볼리비아로 갈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 때문에 게바라는 면밀한 변장작전으로 대응했다.
구렛나루와 콧수염을 깍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헤어스타일도 커다란 수건을 이용해서 변화시켰다.
그는 우루과이의 상인 아돌포 메나로 변장을 한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증명서도 준비했는데, 증명서에 쓰인 이름은 라몬 베니테스
훼르난데스였다.
볼리비아에 입국할 때는 메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메나는 볼리비아의 오지에 별장 하나를 갖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볼리비아는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게릴라 전투의 근거지로 적당하였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 대중화된 불만, 기근,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인 군대, 투쟁의욕이 넘치는 광부들, 게다가 정부내의
부정부패, 그리고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삼림까지 모두가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남미의 5개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볼리비아는 장차의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군을 구성할 게릴라 공작기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
이미 볼리비아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에서 새로운
투쟁이 싹트고 있다.
혁명가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위험하면 위험해 질수록 혁명의
싹은 무럭무럭 커나갈 것이다.
즉 한 나라의 해방 후에도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
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완수하도록 끝까지 투쟁해야만 한다.
"


- 제3세계(A.A.LA)의 연대를 위해 발간된 기관지
   트리 콘티넨탈지에 체가 쓴 메시지(1967.4.16) 중에서...

"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현대의 오랜 정치투쟁에서 잊혀진 대륙
이었다. 그러나, 쿠바혁명이라는 인민대중의 함성이 제 3세계 단합기구를 통해 전세계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으며, 이제야말로 혁명에 대해 명확한 임무를 가진 대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임무란 범세계적으로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종단계에서 발악적으로 등장한 세계 체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 세계적인 연합전선을 통해서 이를 타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점잖은 신사인 미국인들은 전쟁도덕에 있어선 매우 악랄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항하는 투쟁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지 투쟁만이 미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
적들은 우리로 하여금 투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투쟁을 준비하고 투쟁을 시작할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런 전쟁이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두지배 계급은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해오고 온갖 폭력과 악선전을 이용할 것이다.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트남에서 실천된 것처럼 무장선전이라는 게릴라의 영원한 규범이 실행될
것이다.
즉, 총에 의한 선전, 적과 대치하여 승부를 거는 전투,
그 자체에 의한 선전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게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위대한 교훈이 착취받고 있는 민중들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민족정신이 고양되고, 보다 어려운 임무에 대한 준비와
폭력적인 탄압에 대해 저항할 준비가 가능해진다.
적이 있는 모든 지점까지 투쟁의 장을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적의 집, 적의 휴식처까지도 전쟁은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적에게 일초의 평온, 잠시의 휴식도 주어서는 안된다.
그 어떤 미국 병사도 자신의 막사에서나 극장, 혹은 거리에서 안심하고 다닐 수 없도록, 자신을 독안에 든 쥐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점점 더 그가 야수와 같이 행동하게 되면 될수록,
그의 발광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다......
"
- 1967년 4월, 아바나에서 개최된 "3대륙 단합기구"
   회의에서 대독된 게바라의 보고서
1966년 8월 : 체 게바라, 볼리비아에 도착, 비슷한 차림으로 변장한 쿠바인 10명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같이 싸웠던 강인한 전사들)도 도착 완료.
1966년 10월 : 산타 크루스 근처에 있는 집을 입수. 약 15명의 볼리비아인과 조직을 형성.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릴라전에 동조하지 않음.
1966년 11월 : 체 게바라, 농촌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의 준비 개시.
                    같은 날, 즉 11월 7일부터 저 유명한 <
게바라 일기>를 쓰기 시작함.

"오늘부터 새로운 상황에 접어들었다.
밤에 은신처에 도착했다. 여행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변장도 아주 훌륭히 되었고 무사히 코챠밤바를 통과했다.
파충고와 나는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면서 두 대의 지프로 이틀간 돌아다녔다.
은신처 부근에 도착하여 일단 차를 멈추고, 한 대만 몰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혹시 코카인을 제조한다는 소문이라도 나서 근처 주민들의 주의를 끌게 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두우마이니라는 자가 우리 그룹의 화학기사로 일하게 된 것이 수상하다...." - 게바라의 일기 중에서...


게바라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면 한 사람의 게릴라 전사가 겪는 인생의 희비극을 엿볼 수 있다. 동지의 배반, 낙심과 기쁨, 투쟁과 죽음 등...
체 게바라는 처음에 지형을 숙지하는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게릴라들이 속속 도착했다. 1967년 3월까지 적과의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2명이 훈련중 익사했다.
이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지 드브레와 시로 브즈토스가 내방했었다.
경찰이 이 두사람을 취조해서 중요서류를 압수하고 그들로부터 게바라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드브레와 부즈토스는 후에 체포되었고 고문에 못이겨 게릴라의 은신처를 자백한 것이다.
4월1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 기지를 수색하면서 그 속에서 게바라의 사진을 찾아냈다.
이 정보를 넘겨받은 미국 CIA는 볼리비아에서 수색활동을 시작했다.





9. 볼리비아의 음모

Is to fight, to die fighting - Che Guevara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쿠바는 그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고양이 목의
방울처럼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왼쪽부터 체 게바라, 라울, 피델 카스트로 그 쿠바의 중심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체 게바라가 있었다.
미 CIA는 그중에서도 피델과 체 게바라에게
상당히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일례로 피델 카스트로 한사람에 대해 무려 8번에 걸친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것과 체 게바라 한사람의 게릴라를 잡기 위해, 당시 최고의 정보기관 CIA가 총력을 기울였고, 미국이 자랑하는 특전대 그린베레의 게릴라전 특별 고문관들까지 파견한 것으로 보아 미국이 이 두사람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체 게바라에 대한 CIA의 보고서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두사람의 듬직한 동지를 가지고 있다.
한사람은 혁명의 도끼 역할을 하는 라울이고, 또 한사람은 그의 머리 역할을 하는 체 게바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체 게바라는 하루 속히 제거 되어야 한다. 그가 쿠바의 카스트로에 두뇌로 건재하고 있는 한, 미국은 언젠가 그로인해 재앙을 맞을 것이다."
미국이 체 게바라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 와중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미국은 게릴라 중 두 사람의 변절자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게릴라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명령은 간단했다. 즉시, 사살하라......
두 사람의 변절자 바레라와 로카바드는 볼리비아 군대에서 게바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불어버렸다.
4월,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으로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그 주역들은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그린베레), 그리고,
CIA의 앞잡이들이였다.
게바라는 게릴라전에 관한 논문 <
게릴라전-하나의 방법>을 쓰면서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을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실패의 원인이란
1. 아직 군대와 싸울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버렸다.
2. 볼리비아의 민중은 쿠바의 민중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게바라의 큰 오산이었다.
3. 당시 지극히 미약한 상태였던 게릴라 활동에 미국의 CIA와 그린베레가 개입하리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4. 볼리비아 공산당(비합법이어서 지하활동만 하고 있었음)의 지원이 없어, 도시와 연대가
   이루어 지지 않아 통일전선 구축에 실패한 게릴라는 고립되어 있었다.
5. 당시의 볼리비아는 혁명적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
   예를들어 바티스타 같은 독재자도 없었고, "7.26운동연합" 같은 조직이 결성돼 있지도
   않았다.
체 게바라는 마지막 일기에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관측하는 체 게바라"
정부군이 게릴라를 추격하고 있음,
쿠바와 연결이 안됨, 라 파스와 연락이 두절됨, 볼리비아
농민의 협력이 없음, 게릴라 내에 환자 속출, 식량 부족,
천식재발에 대한 초조함, 윤리의식의 저하, 부대가 둘로
갈라져 전투에 임했으나 한쪽이 전멸 (나머지 절반도
호아킨이 지휘하는 부대와 연락이 두절됨).
"
8월 3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들이 당일 오노라트
로하즈라는 농부의 집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로하즈는 엘 이에소의 얕은 곳으로 마시쿠리강을 건너
도록 게릴라를 안내할 예정이었다.
한달전, 게바라는 로하즈의 아이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결국 로하즈는 배신을 했다.
호아킨의 게릴라 부대가 얕은 내를 건너기 시작할 때,
매복해 있던 정부군은 집중 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열 명의 게릴라가 쓰러졌다.
그중 오직 한 사람 파코만이 살아 남았다.
게바라의 일기와 볼리비아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던
볼리비아인 저널리스트 호세 알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게바라부대는 겨우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에는
실패하여 결국은 다시 포위되었다.
게릴라는 둘로 나뉘어 행동했다. 게바라의 부대와 호아킨의 부대로 게릴라를 나눈 게바라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2000명 이상의 병력과 20여명의 게릴라는 너무
큰 전력차가 있었다. 체 게바라가 아무리 게릴라전의 귀재라 할지라도 역부족이었다.
3월  3일 : 게릴라,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군측 7명 사망, 4명 부상, 10명 생포. 게릴라들은 야영지를 떠남.
4월10일 : 이리피티에서 군과 전투. 군병사 10명 사망, 6명 부상, 쿠바인 게릴라 루비오 전사.
4월20일 : 정부군을 속이기 위해 무유팜파로 내려감.
              그곳에서 일행과 떨어져 있던 드브레와 브즈토스 두 사람이 체포됨.
              게릴라는 길을 바꿈.
4월25일 : 정부군과 전투. 쿠바인 롤란도와 군측 병사 2명 사망.
              항공부대가 지역 전체에 폭탄 투하.
5월  8일 :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정부군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포로 10명(후에 즈봄만 석방).
              게릴라 전원 병에 걸림.
5월30일 : 매복,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5월31일 : 다른 장소 매복, 수색대 병사 2명 사망.
6월26일 : 군과 전투, 수색대 병사 4명과 게릴라 도우미 사망. 게릴라 전체 인원은 24명이 됨.
7월20일 : 다른 그룹에 의한 매복. 군병사 4명과 게릴라 1명 사망.
7월27일 : 정부군과 전투. 4명 사망.
7월30일 : 군과 전투. 게릴라 라울 전사, 3명 부상, 군병사 6명 사망.
              부상자가 속출하지만 약이 없었다.
8월26일 : 정부군과 전투. 사상자 없음.
8월31일 : 후위부대의 와나로 후퇴. 호아킨외 8명의 게릴라 전사.
9월26일 : 게릴라(게바라가 이끄는 그룹)에 대한 정부군의 매복 공격. 게릴라 2명 전사.
              캄바와 레온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10월6일 : 계곡에서 게릴라는 정부군 1천 8백명에게 포위됨. 도망갈 길이 없었다.
10월8일 : 운좋게 탈출한 세 명의 게릴라 중 한 사람이었던 베니그노는 게바라의 최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볼리비아 군은 우리를 발견했다. 촌장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촌장은 마을의 한 노파와 사원의 경내에서 감자를 파는 그의 아들 두 사람에게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산의 계곡에 배치되었다.
정부군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 2시 반에 이동하기로 했다.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의 착오가 생겼다.
잠에서 깬 게바라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찰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이 부근 전체를 정찰해 주었으면 좋겠네.
특히,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이야'라고
말했다.
체 게바라 사령관과 게릴라 전사들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파쵸를 동반했다.
나는 그때,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다.
백미터 정도 나아가 전방의 구릉을 살피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때 파죠가 구릉위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동인가 했지만, 목동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가 아침 6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초병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윽고 구릉의 전체에 걸쳐 차례차례로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와 게바라에게 전했다.
'최악이다. 저 구릉 전체에 적이 깔려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오른쪽 계곡으로 나가서 적어도 오늘 하룻동안만이라도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밤이 되면 봉우리를 넘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계곡에는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위장을 하였다.
봉우리는 5백미터 정도 앞에 있고 그곳에 군인들이 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모두를 격려하면서 방어체제를 조직하고, 탈출경로를 지시하고, 흩어졌다가 어느
장소에 재집결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계곡의 입구에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파쵸,
아르투로, 윌리가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계곡의 깊은 곳은 폼보와 나토, 우르바노가 맡았다.
계곡의 바위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게바라는 나에게 그리고 가라고 했다.
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시한 그곳은 적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고, 공격을 받을 경우 탈출지점으로도 용이했기 때문에 가야
만 했다. 아침 8시, 나는 인티와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11경,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로 다가온 게바라에게 보고했다.
곧 우리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까지 적이 바짝 다가왔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겼다.
나무는 둥치는 곧았고 뭄을 숨기기에도 매우 작은 은폐물이었다.
게바라가 있는 곳에 윌리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아니세트와 엘나토가 폼보와 우르바노가
있는 쪽으로 파견되었다.
폼보 등을 게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세트가 계곡의 중앙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언덕 위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사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반 경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티와 다리오 그리고 나 세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적을 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동지들은 낮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동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총격전을 계속했다.
적군 5명 사망, 부상자 6명 발생.
오후 늦게 폼보가 우르바노와 엘 나토와 함께 우리들이 올라왔던 지점으로 계곡을 건너
오려고 했다.
우리는 몸짓으로 그렇게 하면 전멸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숨어있었다.
우리가 모두 다시 집결했을 때, 폼보가 '게바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동시에 그들에게 반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게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시한 집합장소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낭과 발자국이 남아있어서 부상당했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집합장소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봉우리를 넘어서 라 이게라 시가로 돌아가려 할 때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그 이후
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라 이게라시가에서 6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관목지대에 몸을 숨겼다.
아침 9시 반 경,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11시 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들려왔다.
후에 그것이 윌리와 엘치노, 또 체 게바라를 살해하는 총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10. "체 게바라"의 최후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 - Che Guevara

입회인으로서 체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 볼리비아인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함께 붙잡힌 사람은 볼리비아인 광부 윌리와 시몬 쿠바였다. 10월 8일 오후 세시 반 경이었다.
10월 9일 11시15분, CIA는 게바라를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사형 직전의 체 게바라의 모습 볼리비아군은 총살을 집행하기 위해 하사관 세 사람을
불렀다. 그들은 그 중 마리오 테란을 선택했다.
테란은 차분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체 게바라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테란은 분노에 불타는 체 게바라 의 눈빛에서 자신이 임무를 완수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 때 체 게바라는 그가 일을 끝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
쏴! 겁내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감히 체 게바라를 쏘지 못했던 심약한 볼리비아 병사는
오후 12시가 되고, 술까지 한잔 한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직후 다시 다른 볼리비아 군인 페레스 중위가 확인사살로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쏘았다. 후일 마리오 테란은 라파스의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 다니다가,1968년 4월 자신이 살던 집 4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체 게바라의 사살을 확인하기 위해 미 국방부와 CIA는 총력을 기울여 움직였다.
여기서, 그의 사형에 대한 미 국방부와 CIA의 보고서 내용을 일자별로 잠시 요약해 보겠다.

미국방부 기밀 문서 1967년 4월 28일
미국 정부는 게바라의 게릴라부대를 볼리비아에서 제거하기 위해 파나마에 있는 미 8사단의
특수부대 소속 그린베레 16명의 최정예 요원과 CIA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볼리비아 제2보병
대대를 훈련시키고 체 게바라를 제거하겠다는 내용.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5월 11일
메모 형식의 이 보고서는 미대통령에게 체 게바라의 행적을 CIA가 계속 추적하고 있으며,
대통령에게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인지 시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 9일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모로 볼리비아부대가 체 게바라를 사살했다는 미확인 정보 내용.

백악관 문서 1967년 10월 10일
1967년 볼리비아 부대의 보고 내용으로 볼때, 10월 8일의 공세에서 체 게바라가 게릴라
희생자들 사이에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는 내용.

백악관 보고서 1967년 10월 11일
이 보고서에서 Walt Rostow는 존슨 대통령에게 99%의 확신을 가지고, 체 게바라가 지난
전투에서 사살되었음을 확신한다고 보고한다. 또한 미국에 16명의 그린베레 최정예
요원들에게 훈련받은 볼리비아 제 2보병대대가 그를 코너로 몰았고, 그리고 그를 사살
했음을 보고한다.

미 국무부 보고서 1967년 10월12일
체 게바라의 죽음이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그리고 소련에 미칠 중요한 의미를 중심으로
지역 전문가가 만든 보고서이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13일
백악관은 체 게바라가 제거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정보국 CIA 기밀문서 1967년 10월 17일
CIA가 1966년 9월부터 1967년 6월까지 수집한 쿠바와 소련사이에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활동에 대한 불화와 이견에 대해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이다.

볼리비아 주재 미 대사 핸더슨의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볼리비아주재 미 대사인 핸더슨이 본국에 보내는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로써
체 게바라는 확실히 사살되었으며, 그 증거로 CIA요원의 감시 아래 두 손목을 잘랐으며,
시신은 비밀리에 빌라그란데 근처의 활주로에 매장 되었음을 보고한다.
볼리비아 제2보병대대의 훈련경과와 활동, 체 게바라의 체포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상세히
기술한 보고서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체 게바라를 쏜 볼리비아 병사의 보고가 흥미롭다.
체 게바라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은 "
Know this now, you are killing a man"이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후에, 이 병사는 방아쇠를 당길 때의 심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그의 눈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고, 전 그의 눈에 매혹 당했죠.
나는 그 위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CIA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국민을 향한 연설을 번역.

눈을 반쯤 뜨고 있는 체 게바라의 주검
1967년10월9일 12시 쿠바혁명의 주역
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39세를
일기로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
으로 막을 내렸다.
부르조아의 아들이었으나, 진정 민중을
사랑하여, 안락한 의사의 직업도, 국가
중앙은행 총재라는 명예도 쿠바의 2인자
라는 지위도 모두 포기한 채, 항상 민중과
함께 먹고, 함께 입으며, 억압에 대항하는
민중해방 전쟁의 최전선에서 투쟁했던 이
위대한 게릴라 전사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신화(神話)가 되어 쓰러졌다.

체 게바라의 죽음 이후, 최근까지 활발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란 말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체 게바라"
산타클라라 전투의 영웅", "위대한 민중의 사령관", "전사 그리스도",
"
20세기 최후의 전사", "최후의 게릴라
"등등
체 게바라의 사진 앞에서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온갖 미사어구가 난무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평가 받는
가운데, 또다른 쿠바혁명의 영웅 피델 카스트로는 이 재평가 작업
에서 체 게바라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견제와 미국과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던, 소련의 압력은 피델이 조직했던, 체 게바라 구조특공대의 해체를 요구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이에 굴복해 체 게바라에게 원조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체 게바라는 결국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볼리비아군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과연 피델 카스트로는 위의 내용처럼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쿠바 혁명의 둘도 없는 동지인 체 게바라를 버렸을까?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는 이미 체 게바라와 쿠바의 혁명을 이야기
하던 그가 아니다. 권력에 눈이 먼 또다른 독재자일 뿐이다...
쿠바의 대다수 민중들은 그때 왜? 피델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죽은 후에 그가 과연 체 게바라 만큼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심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기사들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피델을
믿었던 것 같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사형당하기 직전 그가 한 유언 내용이
"
피델에게 전해 주시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고......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체포된 직후,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구스만이라는 사람이 게바라의 최후 순간을
공개했는데, 당시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구스만은 체
게바라 등 생존 게릴라들이 억류된 마을로 파견됐다.
그는 게바라가 처형되기전 그와 장시간 마지막 대화를
나눈 증인으로, 대화는 볼리비아 군인 수명이 둘러싼
작은 방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데 구스만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피맺힌 목소리로
"
피델이 날 배신했다"고 몇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게바라는 혁명의 실패 원인에 대해 "
쿠바와 볼리비아
공산당으로부터의 지원이 줄고, 당과 볼리비아 노동자
세력의 분열이 원인
"이라고 주장했다.
데 구스만은 게바라에게 담배를 주었고 부상당한 체 게바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장화속에서 갈색표지의 육필로 쓴 소책자를 꺼내 구스만에게 건냈다고 한다. 진정 피델 카스트로는 그를 배신했단 말인가? 이 역시 시간이 더 흐른 후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어쨌든, 체 게바라를 쿠바민중들의 품으로 꼭! 찾아오겠다는 피델 카스트로의 약속은 지켜
졌다. 비록 유해로 돌아왔지만.......

체 게바라를 살해한 볼리비아군은 이 위대한 게릴라의 두 손목을 잘라 그를 사형
시킨 증거로 그의 친구 피델 카스트로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암매장했다.
그는 갔지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혹자들은 그에게 "
최후의 게릴라
"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틀린 말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시체 위로 또다른 게릴라들이 민중을 위해 싸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
- Che Guevara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고, 그가 죽은지 30년만에 그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던, 조국 쿠바로 돌아와 묻혔다.)




11. 체 게바라 사령관이여! 영원하라! (상)

"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야만의 세기라는 20세기가 저물고 또 다른 세기가 밝아오던 지난 1997년 여름
볼리비아 비야그란데의 공동묘지에서 한 무덤이 열리고 한 게릴라가 신화로 되살아났다.
그는 바로 체 게바라였다.
그는 죽어서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되살아났다.

체 게바라의 귀환을 환영하는 쿠바 국민들과 체 게바라의 대형 깃발  ◀◀◀(귀환하는 체 게바라를 환영하는 쿠바 국민들)
60년대 저항운동의 신화적 게릴라 체 게바라의 유해가 쿠바로
돌아오던 날. 쿠바의 모든 국민들은 이 위대한 게릴라의 귀향을 열렬히 환영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쿠바의 모든 거리에서 "
체 게바라와 함께
"라는 구호가 메아리쳤고, 체 게바라의 깃발이 넘쳐 흘렀다.
의사출신의 엘리트, 쿠바의 제 2인자의 자리를 박차고 있는
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여 전쟁터를 누빈 이 검은 베레모에 멋진 콧수염를 기르고, 열정적인 눈빛을 지녔던, 영웅이
그가 해방시킨 쿠바의 품에서 편히 잠들기를 빌면서...
거리는 온통 게바라의 모습으로 도배되었고, 그의 사진이 찍힌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중앙 방송국에서는 매일 체 게바라의 기록영화를 방영했으며, 그의 인생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들이 잇따랐고, Hasta siempre(음악듣기)와 같은 추모음악과 그가 생전에 남겼던, 저작들의 출판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외형적인 것들이 아니다.
없는 자, 착취 당하는 자, 억압 받는 자들을 위해 싸웠던 그를 마음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열기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의 영웅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집안에 걸려있는 체 게바라의 초상(전사 그리스도)"체
게바라는 나에게 성인이었어요.
이 세상에 체 게바라처럼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볼리비아에 체가 투쟁한 지역의 농민들이 집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와 함께 게바라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들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요.
그는 예수와 같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까요"
59년 쿠바혁명 당시의 게바라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한 노인이 한 말이다.
왜? 그를 "
전사 그리스도"라고까지 칭하는지 알게 하는 대목
이다.
체 게바라를 직접 대했던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쿠바를 해방시킨 뒤 국립은행 총재 등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으며, 함께 노동을 했던 체 게바라의 모습은 가식
없는 진정한 영웅의 이미지로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영향력도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해 버리는듯 했다.
그를 직접 접해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그는 게릴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가 제국주의의 간섭을 타파하기 위해 주창했던, 게릴라전이 점점
세력을 잃어가고 있고, 그의 사상적 뿌리 마르크스 주의도, 동유럽 사회주의도 붕괴되면서
빛이 바래져 버렸다.그는 이대로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90년대 이 영웅이 없는 시대가 60년대의 영웅인 그를 부르고 있었다.
사망 30주기를 맞이해 그의 영향력은 쿠바와 남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목숨을 잃은 볼리비아에는 유럽과 미국, 남미등지에서 성지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체 게바라가 66년 8월 볼리비아에 도착해서  67년 10월 최후를 마칠 때까지의 "게바라 루트"를 그대로 답습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한사람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대학 교정에서 게바라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평등과 정의를 의미한다"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던져 본다.
과연 체 게바라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을까?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체 게바라의 초상화 체 게바라는 행동과 사상을 일치시킨 특별한 사람이었다.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찾기가 힘들다.
나약하기만 한 현대인들에게 격동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체 게바라와 같은 영웅을 다시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체 게바라는 앞으로도 "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우는 위대한 전사의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다.
지금의 체 게바라는 현실적 폭발력을 상실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잠재된 폭발력은 여전하다.
80년대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민중들이 전태일 평전을
통해 그들의 안락한 일상에서 떨쳐 일어났던 것처럼, 체 게바라 역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력적이다.
"
부자에게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우리나라의 의적 홍길동이 주장
했던 것과 같은 체 게바라의 목표는 아직도 부익부 빈익빈이 편재한 인간사회에서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변함없는 목표이기도 하다.
사상운동, 노동운동 혹은 시민운동의 형태로든 이 목표를 추진하는 이들에게 체 게바라는
죽지 않았다. 언제나, 손을 잡아주는 믿음직한 동지로써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12. 체 게바라 사령관이여! 영원하라! (하)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 Che Guevara

체 게바라의 동상 돌아온 영웅 체 게바라는
1990년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매장되었다.
지난 7월12일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옮겨진 체 게바라의
뼈만 남은 유해는 이날 마침내 쿠바혁명 전적지에서
영원한 안식를 취한 것이다.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군이 정부군을 크게 물리친
산타클라라 대첩 후 39년,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이며, 쿠바 정부가 지정한
체 게바라 추모 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쿠바 정부는 위대한 영웅의 마지막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게바라의 유해를 수도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11일부터 13일까지 안치하고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32년만에 귀환한 체 게바라의 유해 그 뒤 14일에 아바나에서 3백km 동쪽, 산타 클라라의
묘지로 옮겨졌는데, 아바나에서 산타 클라라에 이르는
행진 루트는 지난 58, 59년 그가 산타 클라라에서 대승
을 거두고, 쿠바 수도 아바나로 진격하던 길을 방향만
반대로 갈 뿐이었다.
10월17일 체 게바라 장례행사는 텔레비젼을 통해 전국
으로 방영 되었고, 쿠바의 민중들과 그를 사랑한 이들
은 또한번 진한 눈물로 그의 최후를 배웅했다.
이렇게, 체 게바라가 32년 만에 자신의 조국에 안치 된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었다.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서쪽 240km 떨어진 비야그란데 공항 근처 공동묘지
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체 게바라 유해의 행방은 지난 30여년간 갖가지 추측만을 낳았다.
체 게바라의 유해를 찾기 위한 조사와 연구는 아주 어려운 조건에서 진행됐다.
우선 희생된 게릴라 대원들의 시체가 땅에 묻혔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볼리비아군이 체 게바라의 주검을 헬리콥터로 아마존 밀림에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들은 따라서 이미 게바라의 주검은 사나운 동물의 밥이 돼 버렸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이렇게, 체 게바라 유해 발굴이 어려웠던 것은 비난을 우려한 볼리비아 군대가 시체가
묻혔을 수도 있는 지역과 장소에 대한 정보를 조사팀에게 차단했던 탓도 컸다.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되는 모습 그러나, 쿠바와 아르헨티나인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끈질긴 추적 끝에 처형 당시 체 게바라의 시체를
비야그란데 근처로 옮겼다는 운전사의 증언을 확보
하고 이 지역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90년 6월말 드디어, 포르말린 성분이 들어 있는 그의 유골을 발견한 것이다.
발굴 당시 체 게바라는 두 손목이 없는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지난 67년 볼리비아군이 체 게바라의 죽음
을 쿠바 당국에 확신시키기 위해 주검에서 손목을 잘라 쿠바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곧 관련자들의 증언과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 유골이 체 게바라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마침내 머나먼 혁명의 여정을 마치고, 혁명의 고향이자 전적지인 쿠바의 산타 클라라에 묻히게 된 것이다.

체 게바라의 추모곡 중에
Hasta Siempre
"베네수엘라의 보석"이자 저항가요의 기수인
Soledad Bravo가 리메이크한 곡이 있는데,
Soledad Bravo
언제나 압제에 힘겨운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노래했었으며, 지금도
그들을 위해서 노래하고 있는 진정한 영혼의 목
소리를 지닌 가수로, 체 게바라의 상징성과
Soledad Bravo의 민중가수적 이미지가 합쳐진

Hasta Siempre Soledad Bravo version
한대의 기타가 전해주는 애잔함과 Soledad Bravo의 애절한 절창이 어우러져, 체 게바라 추모곡 중에서도, 백미중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수십년전의 인물이자 머나먼 라틴 아메리카의 한 혁명가를 현재의 젊은이들은
잘 알지 못한다.
불과 10여년 전의 우리 현실을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 것 처럼 체 게바라 열풍
이 잠시 동안에 찻잔속의 폭풍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체 게바라는 충분히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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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사령관이여 영원하라 'Hasta Siempre Comandante' & El Che Vive!

http://blog.naver.com/ityjkim/80010360735
출처블로그 : 푸른툭눈의 일기 새로운 시작입니다!

Various Artist - El Che Vive! (1997)

 

     1. Hasta Seimpre (Cuba) - Carlos Puebla

     2. Zamba del Che (Chile) - Victor Jara 

     3. Su Nombre Ardio Como un Pajar (Chile) - Patricio Manns 

     4. Nada Mas (Homenaje a Guevara, Ernesto) (Argentina) - Atahualpa Yupanqui

     5. Cancion del Hombre Nuevo (Uruguay) - Daniel Viglietti

     6. Que Pare el Son (Cuba) - Carlos Puebla

     7. Guitarra en Duelo Mayor (Chile) - Angel Parra

     8. Siembra Tu Luz (Argentine) -  Miguel-Angel Filippini

     9. Hasta Siempre (Venezuela) - Soledad Bravo

   10. Ay, Che Camino (France) - Matio 

   11. Lo Eterno (Cuba) - Carlos Puebla

   12. Alma Morena (El Sueno del Che) (Argentina) -  Miguel-Angel Filippini

   13. Un Nombre (Cuba) - Carlos Puebla

   14. Che Esperanza (Cancion del Indio Libre) (France) - Egon Kragel / Arachanes

   15. Hasta Siempre (Greece) - Maria Farantouri

   16. Habla el Che - Che Guevara

 

 

Carlos Puebla -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칠레의 아옌데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 - 20세기 초 미국의 식민지와

다름없었던 니카라과는 1936년부터 무려 40여년이 넘는기간 소모사家의 친미독재정권 지배하에

있었다. 1927~34년 미군주둔에 항거하다 암살당한 A. 산디니스타의 전통을 계승하여 61년

산디니스타 해방전선(FSLN)이 결성되고 지난한 무장투쟁을 거쳐 산디니스타는 1979년 마침내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소모사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미국은 갖은 경제제재와 봉쇄정책으로 

니카라과를 압박했을 뿐만아니라 적대국이었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여 얻은 불법자금으로  

반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을 지원하는 짓도 서슴치않는데 이것이 보수매파의 히스테리와 레이건 정부의 반도덕성을 드러냈던 콘트라반군 사건이다. 여전히 군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약속대로

실시한 1990년 자유투표에서 노골적인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보수세력에게 당한 패배에 

'나는 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의 가족의 이름을 걸고, 동료들의 이름을 걸고,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지도부의 이름을 걸고, 또한 이번 선거에 참가한 영웅적이며 헌신적인 그리고 불굴의

자각적인 사람들의 이름을 걸고 모든 니카라과 국민, 세계 모든 이들에 대해 니카라과 대통령과

정부는 이번 선거투표에서 보여진 국민의 의사를 인정하고 존중할 것임을 표한다'는 말을 남기고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들이 실패했는가 물었을 때 산디니스타의 한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니카라과 민중이 산디니스타 정권을 통해서 하늘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잠깐 동안

본 하늘은 그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고 이것은 후에 다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 '좌파의 태도와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항상 산디니스타를 떠올린다.

 

희망을 자신만의 당대에 한정하지 않고 삶과 인간의 긍정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 끝에서 생각난 이름과 앨범이 바로 이것이다.

죽어묻힌 시체로 이제는 더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닌채 저항이라는 키워드로 자본주의 유행의  

외곽에서 프린트되어 떠다니는 그를 기억한다. 볼리비아로 떠나는 그에게 바쳤던 뿌에블라의 노래들도.

 

 

 

사족1. 체 게바라 사후 3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입니다. 주로 라틴 아메리카의 아티스트들이 많이

          참여한 컴필레이션 앨범인데 체 게바라와 관련된 곡들을 모아놓고 있습니다. 체 게바라가

          쿠바의 공직을 떠나 볼리비아로 무장투쟁을 떠날때 카를로스 뿌에블라가 바쳤던 그 유명한

          '사령관이여 영원하라(Hasta Siempre Comandante)'를 베네수엘라의 보석같은 존재인

          솔레다드 브라보의 목소리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얼터에고이자 '지중해의 조안 바에즈'

          라는 평가를 받았던 마리아 파란투리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남미 누에바 깐시온의

          주요인물인 빅토르 하라나 아따우알파 유팡끼의 노래가 수록된 것은 당연한 일.

 

사족2. 쿠바의 유쾌한 열정을 얘기하며 언급한 Los Van Van은 현재까지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당대의 댄스그룹(?)입니다. 쿠바의 사회주의 인민들을 미치게 하는 이 댄스곡들은

          우리나라에 살사로 소개된 음악들과 유사한 풍입니다. 흑인의 비율이 높은 영향으로

          아프로-라틴 리듬의 성지가 된 쿠바음악의 영향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들의 음악이

          미국쪽에 살사로 소개되기도 했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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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자와 혐연자 간의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

<폭로>

 

저는 애연가로서 혐연자들에겐 심히 죄송한 맘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 억울한 부분을 어필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시스템의 폭력입니다.)

 

제가 어렸을 땐 버스나 기차에 재털이가 있을 정도로 흡연인구가 많았었고 군대에서도 담배를 보급할 정도로 담배가 기호품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용인 하에 자연스럽게 흡연을 하게 됐고 담배 매출로 인한 세금 징수가 국고에 의미있는 수치를 기록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심한 세금 징수의 매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혐연자에 대한 죄책감을 다소 완충시켰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흡연인구가 사회적 약자의 지위로 하락해버리게 됐습니다. 대부분의 건물이 금연건물로 됐고 여러 업소들이 당연하게 금연구역으로 바꼈죠.. 등등의 흡연자가 심각한 사회의 문제아로 등장하게 됐습니다. (이 서러운 지위 하락?은 흡연자만이 아실겁니다. ㅠ,ㅠ)

 

제가 문제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그동안 흡연을 장려(혹은 배려)하듯이 사회 구조를 만들었으면서 갑자기 왜 흡연자를 죄인 취급하는가... 입니다. 금연으로 향한 프로세스나 흡연자들이 흡연할 수 있는 대안 같은 것은 부재한 채 갑자기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타인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친다..) .. " 식의 운동을 벌이는가... 입니다.

담배인삼공사 시절에도 담배가 인체에 백해무익한지 모두가 알았다는거죠.. (하지만 그땐 공익광고 식의 소극적인 금연독려 정책뿐이었죠..)

 

담배는 마약류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 중독성은 심각합니다.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민폐도 큽니다... 하지만 정부는 흡연을 인정했습니다... (90년대 후반까진.. 묵인적 장려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흡연자로서 저는 담배값 인상이나 금연 캠페인들을 접할땐... 어쩔땐 일종의 변심한 애인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혐연자분들껜 일관되게 송구스런 맘이 있구요.. 관건은 피아식별이라고 보는데요.... 공격의 대상은 정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혐연자들에게... 흡연자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정부에 대한 공격도 함께하시길 조심스럽게 부탁드립니다.

 

 

<다른 시각>

 

이 논제에 대해 쪽수의 논리를 적용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인데요.. 제가 군대 가기 전엔 공중전화 부스에서 흡연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았었는데.. 제대 후 신촌 공중전화 부스에서 담배를 피며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나오는 장면에 뒤에 진입하던 여자분이 아주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혐오하는 제스춰를 보이시더라구요.. 약간 죄송했지만.. 아주 생경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기존엔 자연스러웠는데..)

 

그때 느낀 것이 '쪽수의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흡연인구가 줄어듦에 반비례해서 그 만큼 구박받는구나..' 하는..

 

즉, 현재의 흡연권 vs. 혐연권의 문제가 쪽수의 힘의 역학관계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안 모색>

 

저는 비흡연자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제 흡연권을 지키고 싶습니다. (아직은 금연의사가 없습니다.. ^^;;; )

 

근데 이 부분은 정책의 문제입니다. 흡연자와 혐연자가 싸울 부분이 아니라고 봅니다.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서로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대안이 충분히 많을 거라고 보거든요..

 

(사례)

 

이를테면 매킨토시 사용자는 전자 금융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인터넷 전자 (금융) 인증은 윈도우즈 밖에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매킨토시 사용자 그룹에서 신한은행을 상대로 모종의 거래를 했는데요.. 프로젝 비용의 일부와 매킨토시 사용자들의 주 결제 은행으로 신한은행을 택하겠다는 조건으로 신한은행의 매킨토시용 인터넷 결제 프로젝을 띄웠습니다.

 

이런 일례로 흡연자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흡연권을 보호받을 요량으로 보다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것에 불만이 없구요..

이런 정책적 대안이 현안에 대해 더 고민할 이슈라고 생각이 듭니다.

 

 

<가족의 문제>

 

가족에겐... 상당히 죄스럽죠.. ^^;;;

빨리 의학이 발전해 자타에게 해를 주지 않는 담배가 나오길.. ^^;;;

 

더불어 제 건강의 문제에 대해선.. (전에도 어필했지만) 현재까지 정부가 제 건강에 대해 애정어린 걱정을 하지 않을꺼란 심증이 짙습니다.

내 건강을 핑계로 제 주머닐 가볍게 하기보다 뻔뻔하게 제게 삥뜯길 바랍니다.. ^^;;;;;

 

 

<끝으로..  흡연자님들께..>

 

담배 에티켓 좀 지킵시다.

꽁초 휴지통에 버리기.. 되도록 사람이 적은 곳에 흡연하기.. 화제 가능성 없애기.. 특히 식당에서 담배피지 말기..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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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내부문건 “영업이익 3년뒤 1조”

인터넷 종량제는 헐값에 장기 기호품을 배포하고 (시장을 장악하여) 갑자기 제품 가격을 터무니 없이 올리는 수법의 전형입니다.

자기네께 빠르다고 그렇게 자랑들하더니 이대로 가면 (사용량 증가로) 인터넷 속도가 느려서 아무것도 못 할거라는 개그는 실소밖에 느껴지지 않군요..

 

그 나물에 그 밥이겠지만 KT망을 쓰시고 인터넷 서비스 변경이 가능하신 분들... 딴 회사로 옮겨주심이.... .^^;

 

 

 

 

출처 : 한겨레 (http://www.hani.co.kr/section-004000000/2005/04/004000000200504140228142.html)

 

KT 내부문건 “영업이익 3년뒤 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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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자재원 없다”며 인터넷종량제 추진하더니

    ‘매가패스 경제성’단독입수


     

    케이티가 인터넷 요금제를 이용자들의 부담이 커지는 ‘종량제’로 바꿔야 초고속인터넷 투자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며 종량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정액제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며, 사업 전망도 밝게 내다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국내 최대 통신업체인 케이티의 인터넷 종량제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새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12일 <한겨레>에서 입수한 케이티의 ‘메가패스 사업 경제성 분석’ 문건을 보면, 케이티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2003년 559만명에서 올해 660만명으로 늘고, 2008년에는 716만명으로 불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초고속 인터넷 매출은 2003년 1조8890억원에서 올해 2조2514억원, 2008년에는 2조5천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투자비는 2003년 5235억원에서 올해 2948억원으로 줄었고, 2008년에는 2400억원으로 떨어진다.

    이에 따라 케이티의 초고속 인터넷 영업이익이 빠르게 늘어, 2004년 223억원 적자에서 올해는 2240억원 흑자로 돌아서고, 2008년에는 9616억원으로 흑자 폭이 커질 전망이다. 2007년에는 그동안 쌓인 영업이익 적자를 모두 떨고도 1900억원을 남길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실적 및 전망에 따라 전체 매출에서 초고속 인터넷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17.5%에서 올해는 18.5%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케이티는 문건에서 “지속적인 매출 증가, 투자비 감소, 영업비용 절감에 따라 영업이익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특히 매출에서는 부가서비스 이용료가 증가하고, 비용에서는 투자 감소에 따른 감가상각비가 줄어, 사업성이 좋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문건은 케이티 초고속사업팀에서 작성해, 지난해 12월 투자조정위원회의 의결을 거친 것이다. 업계 전문가는 “투자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초고속 인터넷 요금제를 종량제로 바꿔 수입을 늘려야 한다는 케이티 주장이 잘못됐음을 보여준다”며 “케이티가 그동안 누리꾼들의 요구에도 수치를 공개하지 못한 속사정도 짐작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케이티는 소량 이용자에게는 지금처럼 요금제를 적용하고, 다량 이용자에게는 요금을 더 받는 쪽으로 초고속 인터넷 요금제를 2007년부터 바꿀 방침이다. 6s김재섭 정보통신전문기자 jskim@hani.co.kr

    ◇ 인터넷 종량제란?=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하는 만큼 요금을 내게 하는 방식이다. 이용하는 시간이나 데이터양에 따라 요금을 물리는 완전 종량제와 다달이 정한 액수로 일정량을 이용하게 하면서 초과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용량에 따라 요금을 물리는 부분 종량제로 나뉜다. 지금은 상품별로 월 2만5천~5만원 정도를 내면 무제한으로 이용하게 하는 정액제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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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진정한 보수주의란?

    제가 적해있는 카페에서 올린 내용입니다..

    ==========================================================================


    일반적인 사회학에서의 균형론과 갈등론적인 분류에서 보수의 정체성을 구분하고 싶은데요..

    사회학에서 균형론은 사회를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유기체로 생각하고 있죠.. 이런 균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항상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회는 일정한 체계에 의해 움직이고 사회의 변화는 이런 틀을 유지하기 위해 (안에서) 통합과 조정의 과정의 연속으로 접근하고 있죠..

    반면 갈등론은 사회는 변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여러가지 사회 현상의 원인을 각각의 이해/이익관계에 있어 지배 세력(계급..)과 저항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의 멘털리티는 균형론적 태도를 갖는데요.. 이들은 기존 체제의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부분을 지지하고 이 원리를 기반으로 사회가 발전된다고 보고 있구요. 일반적으로 이들의 성향은 변화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국수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 (한국에선) 숭유 등등의 성향을 갖습니다. 좀 더 구체화해야겠지만 이견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현재 '진정한 보수'의 논의에서 논점이 되는 것은 진정한 보수와 짝퉁과 구분짓는 기준, 즉 보수의 대상일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수할 것이냐?)
    다시 말하자면,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현재의 보수를 자처하는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보수'와 거리가 있구요.. 이 기준은 '보수의 대상'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보수가 문제되는 이유는 기존의 체제의 긍정적이지 않은 지역주의, 친미, 유신숭배, 반공, 천민 자본주의, 군국주의.. 등등을 보수하려는 태도일 겁니다. 과거에 있었던 가치를 보수한다고 해서 무조건 보수라고 볼 순 없죠.. 과거의 가치는 시대적으로 많이 바꼇습니다. 가령 숭유억불 정책이 있었던 반면 이사금을 현재 대통령으로?? ... 이 모두가 과거지만 현실에서 보수할 수 있는 것은 현재 현실에 적절한 가치들이겠지요..

    위에 열거한 내용들(보수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의 가치들)은 현재까지 국가 시스템이 유지되어온 기반 이데올로기나 사회가치였죠.. 하지만 중요한건 이것들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반하고 있죠.. - 우리나라가 얼마큼 변태적으로 급성장해왔는지의 반증이 될 겁니다..)

    현재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이런 모순되고 부조리한 논리들에 의해 만들어져온 자신의 기득권의 기반을 부정하지 못 해 보수주의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기득권을 고수합니다. 즉 자신의 기득권의 (부조리한) 정체성을 고수하려고 만든 이데올로기입니다. 안타까운 분들은 이들의 정교한 쇠뇌로 기득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보수를 지지하는 분들입니다.

    이 기득권의 존재 유무가 보수와 수구를 가르는 특징일겝니다. 즉, 현재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은 보수주의라기보단 기득권 고수주의로 봐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보수와는 별반 상관이 없죠..

    진정한 보수주의란 역사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데 긍정적이고 건설적이었던 가치를 실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모델을 제시하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싶구요...

    보수란 어떤 시점을 갖게 되는데요.. 가령.. 기독교가 천주교 시대에는 개혁의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보수가 되버린 것처럼.. 시간에 따라 개혁/진보가 보수로 자리이동 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적 진행성을 갖다보니 (시차관계로) 과거의 진보가 현재의 보수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따라서 보수던, 진보던 흐르는 시간 속에 각자의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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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 자생적 친일멘털리티와 세계화 시대의 친일?

                   
    요즘.. 홍윤기 교수가 멋지게 보이는데요..
    친일 망발을 하신 한승조 노인과 관련하여 장문의 반박글을 내셨군요...

    추천합니다...




    출처 : OhmyNews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no=215335&rel_no=1&back_url=




      
    [전문] 자생적 친일멘털리티와 세계화 시대의 친일?
    '친일-반공-국가주의'에 기반한 '권력숭배-물질만능-국민윤리'의 재생산 구조

           강이종행(kingsx69) 기자  



    <오마이뉴스>가 지난 4일 보도한 한승조 고려대 전 명예교수의 일본 시사월간지 <정론> 기고문 파문이 확산되는 가운데,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14일 최근 제기되고 있는 친일담론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친일지상주의'의 결과라는 글을 보내왔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자생적 친일지상주의, 우리 사회에 치명적"





    1. 한승조 사태가 던지 두 문제: 친일 담론의 업그레이드와 친일 비판 담론의 수세성

    3월 4일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전 고려대 명예교수인 정치학자 한승조 노인(奴人? 老人?)의 일제식민지배 축복론을 접했을 때 처음 느낌은 충격이나 분노가 아니라 일종의 신기함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즉, “아, 그랬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지금까지 그 말 참느라 그동안 되게 고생했겠다.” 돌발적으로 보이는 한승조 노인의 이런 망언을 황대권 선생은 친일파의 “커밍아웃”이라고 표현했다. 황대권, 「커밍아웃」, 『한겨레』(2005. 3. 7. 월)


    그리고 그가 일본 산께이신문 자매월간지인 <정론>에 기고한 글의 전문을 일본 산케이 신문의 자매지인 <정론>에 기고한 한승조, 「공산주의·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 - 한일병합을 재평가하자」의 전문은 『오마이뉴스』(2005/03/04 오후 11:33)에서 접할 수 있다. 앞으로 진행되는 반박에서 한승조 인용은 모두 이 인터넷 번역에 의존한다.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서 밀려온 두 번째 느낌 역시 충격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두 번째 느낌은 당혹감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나이들대로 든 노인네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정치 전공자라는 사람의 글인데, 그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학문적 허약함과 이론적 부실함을 깔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가치감정에 있어서는 주위의 의견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고집스럽게 세우는 의사소통능력의 박약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저히 제대로 학문한 사람이 제 정신을 갖고 쓴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만큼, 정말 그를 극력 옹호하는 어떤 고대생의 말대로, 한승조 사태가 나자 가장 당혹한 것은 한 노인이 봉직했던 고려대의 후학들이었다.

    사태 발생 직후 고대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되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그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옹호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초중등생 조차도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다. … 그야말로 중증 정신병자가 아니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고 있는 그 ''생각''이 한승조 교수의 진정한 ''생각''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한승조 교수는 글을 기고한 이후에도 그것은 소신에 의한 것이었다며 공론화되어야 한다고 오히려 더욱더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이것만 봐도 한승조 교수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무언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결코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여 그것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발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가 말하려고 했던 진정한 진실은,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종교철학에서 다루는 문제로 ''악의 문제''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세상에 악이 도대체 왜 존재하냐는 것이다. 악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여러 이론이 있는데 많은 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신은 선을 더욱더 크게 확장시키고 드러내기 위해 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다. 즉 악을 이용해서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연단시켜 선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궁극적으로 영혼의 성숙 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그 어려움과 고난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비온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는 말이 이와 같은 뜻을 말한다.

    한승조 교수의 말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지배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http://agorabbs1.media.daum.net/griffin/do/debate/read?bbsId= D104&articleId=1446&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BISMILLAH : 고대 게시판에서 한승조 옹호하는 글 퍼옵니다.) 혹시 다른 뜻이 있어 반어법을 구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글이 무엇보다 우선 사실 관계에 대한 추정에서부터 틀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야 했으나 비판의 최우선 전제, 즉 비판할 대상이 진실성과 진지성을 가진 것처럼 간주하면서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변 규칙을 그 글에 적용해 주는 것이 못마땅해 비판을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런 어정쩡한 마음에 한참이나 어쩔 줄 몰랐다.

    아무리 모든 문제를 토론과 대화로 처리해야 한다지만, 일본 우파의 정신자세를 그대로 유전받아 현존하는 국가의 정당성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도 전혀 그런 점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런 자폐성 멘탈리티에 대해 그것을 반박한답시고 논증씩이나 하면서 학문적 예우를 해야 할 내 자신이 솔직히 말해 역겨웠다.

    이 사태가 처음 불거진 3월 4일 한승조 노인은 <연합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글을 쓴 것에 대해 전혀 부끄러울 게 없다"며 "오히려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했다. 유창재 기자, 「한승조, 소신과 변명 사이 ‘오락가락’」, 『오마이뉴스』(2005/03/05 오후 12:44 )

    사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마치 불량 논문을 교정하듯이 반박하다보면 오히려 나의 비판보다는 그가 필요 이상으로 뜰지 모른다는 쓸데없는 노파심이 몇 자 적기 시작했던 반박문의 전송을 질질 끌게 만들었다.

    내가 이리저리 쓸데없는 생각을 곱씹는 동안 한 노인의 망언에 대한 시민과 언론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수구 언론은 냉담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이런 망언을 한 한승조 노인을 적극 옹호하거나 최소한 노골적으로 엄호하는 제스추어를 보이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한 노인과 내내 보조를 맞추었던 일부 극우파 청년들도 즉각적으로 선을 긋고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한 노인의 망언에 대한 국민적 혐오와 증오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다양했다.

    그러면서도 한 노인에 대한 직접적 위해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동안의 민주화 과정에서 길러진 시민적 인내심덕분이었다. “가족까지 전부 일본으로 보내라”는 식의 험한 말에도 『오마이뉴스』에 전문 번역된 한승조, 앞의글에 대한 네티즌 리플, “21. 차라리 일본으로 가시요~~... 을지문덕 , 2005-03-05 13:10” 및 같은 인터넷신문의 김덕련 기자, 「한승조 명예교수,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 사임 」(005/03/06 오후 3:12)에 달린 아이디 산이좋아(chm258)의 댓글, “ 한승조는 일본으로보내어 우리한국에서는 한승조의 가족까지도 전부 보내야한다” [2005-03-06 21:06] 한승조 노인을 아예 한국에서 내쫓아버리자고 주장한 오프라인에서의 의견으로는 수필가 신영규 씨의 「한승조씨를 추방하라」, 『한겨레』(2005. 3. 11., 18면, 독자기자석, 발언대) 가 있다.

    불구하고 이 ‘한승조족’(韓昇助族)도 우리가 부여안고 해결하고 극복해야 하는 우리 현실의 일부라는 정조는 그 모든 비판의 밑에 깔려 있는 정서적 공분모였다.

    그러면서도 한승조 개인에 대한 압박이 늦춰지지는 않는 것같다. 사태가 발생하고 단 이틀만에 한 노인은 고려대 명예교수 자리를 던졌고(그런데 고려대는 내가 이 글을 마무리하는 3월 10일 현재 아직 그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네티즌과 일부 정치권에서는 1980년대 군부 정권이 대한민국 국가의 이름으로 그에게 수여한 세 개의 서훈을 문제 삼고 나섰다. 예전에도 이 사회의 어느 부분에선가 항시 잠복하면서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던 친일옹호론이 간헐적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는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승조 사태 이후 망설임과 개인적인 다망함으로 글을 마칠 수 없었던 나는 한승조 노인의 친일 담론 자체가 기존의 것들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런 업그레이드된 친일 담론에 대한 논변적 대응들이 시민적 공분에 담긴 비판적 직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는 것 같다는 두 가지 문제점 때문에 이 사태에 대한 나의 소견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2. 한승조 사태가 던진 문제(1): 한승조 망언 자체의 문제로서 친일담론의 업그레이드, 즉 친일지상주의와 세계화 시대의 친일론

    한승조 망언은 기존의 친일담론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가지 주장을 내포한다.

    [친일지상주의1] 그 중 하나는, 친일이야말로 식민지 당시의 현실이나 탈식민지 국면에서의 한국 현실을 감안할 때 가장 정당한 국가적 선택이었고 그렇지 않은 어떤 민족지향적 입장이나 행위도 잘못된 것이었다는, 단순 친일옹호론이 아닌, 친일지상주의이다.

    (친일지상주의1-1) 우선 ‘친일이 정당했다’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천만다행이며 저주할 일이기보다는 도리어 축복이며 일본인들에게 고마워 해야할 사유는 될지언정 日政35년 동안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무라고 규탄하거나 죄인취급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에게 합방된 것은 “불행 중 다행” 또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일 러시아에 合邦병탄되었더라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국은 공산화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

    (친일지상주의1-2) 그러면서 ‘친일을 하지 않은 쪽은 부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 근거는 대한민국과는 달리 철저하게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북한의 현실이다. 한 노인에 따르면, “친일파를 단죄해서 민족정기가 선 사회는 북한이며 그러지 못하여 혼탁하며 발전하지 못한 사회가 남한이라고 공산주의자나 좌파들은 일상적으로 주장해왔지만 그렇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남한보다도 훨씬 더 크게 성장 발전하였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지 못하고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났다면 그들 주장이 얼마나 부실하며 잘못된 기본전제 위에 서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친일청산' 주장은 중대한 역사왜곡이며 억지주장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친일지상주의1-3) 그리고 ‘친일은 식민지지배가 종식된 이후에도 한국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친일의 지속적 유익론이 친일지상주의의 대미를 장식한다. 즉 “일본은 과거 식민지 때 우리에게 그다지 큰 억압을 자행하지 않았으며”,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제는 삼일 운동 때도 스탈린보다는 훨씬 적은 인명을 살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 문화적인 뿌리가 같았음으로 인하여 한국의 민족문화가 일제식민통치의 기간을 통해서 더욱 성장 발전 강화되었을망정 소실되거나 약화된 것이 없었다. 한국의 역사나 語文學 등 韓國學(한국학연구)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이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과 그의 한국인 弟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영어의 sibling rivalry(어린 자매들 간의 경쟁의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인에 대하여는 무조건 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을 갖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한국인들의 성장 발전의 의욕을 크게 자극하였다.”고도 주장한다.

    [친일지상주의2.] 한승조 망언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이런 친일지상주의의 시간적 타당성을 미래로까지 무한 연장시켰다는 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한승조 노인은 바로 세계화 또는 탈산업주의 국면에서 친일의 진정한 정당성이 높이 평가받겠다는 세계화 시대의 친일론을 펴고 있다. 즉, “親日行爲는 산업화 단계 내지 민족주의 시대에는 罪惡視(죄악시)되며 반민족행위로 지목되어 비판 규탄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탈 산업사회(post industrial society)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에 와서는 친일행위가 도리어 애국애족행위로 인식되고 환영받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친일은 청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를 맞아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 더욱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유산이 된다.

    지금까지 친일을 정당화한 논법에서 주종을 이루었던 것은 목숨을 연명하거나 자기 가족이나 조직을 지키는 등, 일제 당시 제국체제의 강압 아래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친일적인 행위를 한 자락이라도 하지 않으면 못 배겼다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을 때 나올 얘기가 있다면, 바로 우리 민족을 위해 친일 행위를 했다든지, 아니면 ― 소설가 복거일 씨가 대표적으로 제기한 논변으로 한 노인도 적극 끌어다 썼지만 ― 식민지 지배 당시 지배기구와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와 비친일파를 가르는 기준이 애매하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친일옹호론쯤은 조소꺼리도 되지 못한 채 무시되어 왔다. 친일행위와 친일파에 대한 지금까지의 그 어떤 논의도 친일이나 친일행위가 가장 옳은 일이었으며, 따라서 반친일파가 부당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승조 망언에 대해 이 국가 시민들이 예전의 친일옹호론에 대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분노를 표한 것은 단지 그가 명문 고려대의 명예교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감히 일본 우파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고강도 친일론, 즉 친일지상주의를 펼쳤다는 데 있었다. 즉 오직 친일만이 정당했었고 또 현재에도 정당하며, 여기에 반하는 일체의 민족지향적 담론과 실천은 틀린 일이었다고 현란하게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네이버에 나온 'gwxr4033'라는 네티즌의 견해에 따르면, "잊을 만하면 일본인들이 '조선이 합방을 원했다'고 발광해 열받게 만들더니 이제는 한국의 교수라는 사람이 일본인들보다 더 심한 망언을 했다"고 한탄했다. 김태경/이한기 기자, 「네티즌들 분노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는 테러리스트냐?" 」, 『오마이뉴스』(2005/03/04 오전 11:21)

    3. 한승조 사태가 던진 문제(2): 한승조 망언에 대한 대응의 문제

    그런데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시민의 공분을 배경으로 많은 필진들이 여러 매체에서 한승조 노인의 <정론> 기고문에 가한 비판적 논변에는 한승조 논조에 대한 단호한 반박이나 연민과 냉소가 섞인 경멸, 그리고 친일옹호논변에 노출된 한국 사회의 취약함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논거를 구성하는 시각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한승조 비판 논변들은 우선 한 노인에 대한 전례 없는 시민적 공분의 직관적 내용을 담기에 미흡했을 뿐 아니라, 한 노인이 “나이들어 혼미한 정신” 속에서나마 제기한 구체적 논점과 증거들을 완벽하게 청산하기에도 불충분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승조 사태에 대한 대응이 아직은 초기 단계이고, 대부분의 비판이 시민적 공분에 동참하는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즉각적 반응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나는 앞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하는 보다 철저한 친일 인식과 그 극복을 위해 예비 작업을 하는 심정으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제기되었던 한승조 비판의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보겠다.

    3.1. 일본 제국주의 부당성 논거의 보강: 일제야말로 최악의 강제였다는 보다 적극적인 논증의 필요성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한승조 비판의 가장 중요한 논거가 아직은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들 사이의 관계는 평화와 정의의 원칙에 의해 설정되고 규제되어야 한다는 국제관계의 윤리규범은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의 최고원칙임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우리 대한민국은 …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과 본문 제5조 ①항(“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은 국제관계에 있어 대한민국이 바로 이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국가적 의지를 확고하게 천명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으로서, 어떤 국가에 사는 국민이면서, 온전하게 판단할 능력을 갖춘 이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그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할 바로 이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는, 그것이 일본에 의한 것이든, 러시아에 의한 것이든, 일체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는 부당하다는 판단을 내리며, 세계의 동료 인류에 대해 아주 떳떳하게 보편적인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전세계의 질서를 결정했던 서유럽 및 미국, 나아가 일본의 제국주의는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가 평화로워야 한다는 평화의 원칙과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관계가 정의롭게 규제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원칙을 장기간 침해한 부당한 국가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국가행위가 적어도 규범력에 있어서는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은 제국주의 당시에도 이미 공인된 인식이었다.

    따라서 일체의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부당성 판단은 역사에서 일회적으로 조성된 당시의 상황에 기대어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이므로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우익의 논리”에 비해 권태억, 「식민지 소년 한승조, 불쌍한 시대의 희생자. [긴급기고] 서울대 국사학과 권태억 교수가 본 '망언 파문'의 뿌리」, 『오마이뉴스』(2005/03/05 오후 3:18)

    도덕적으로 명백하게 규범적 우위를 가진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영국을 비롯해 옛 제국주의가 급속히 쇠퇴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피압박 민족들의 ― 무장 또는 비무장 ― 저항이 가열됨으로써 식민지 통치 비용이 급속하게 불어난 결과 제국주의적인 물리적 지배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서방 제국주의 세력들이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더도 덜도 말고 제국주의 지배의 정당성 기반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각에 있었다. 누구보다 제국주의 식민 통치로 거의 300년간 혜택을 누려왔던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피압박 민족들의 저항 앞에서 도덕적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20세기 후반기에 들어 적어도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 설정에서 제국주의 담론이 더 이상 명분으로 통하지 못하는 인륜적 상황이 정착되었다. (물론 경제와 군사에서도 이런 상황이 확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유독 일본 제국주의만이, 참으로 특이하게도, 그것이 붕괴될 때 서구 제국주의 붕괴의 전형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형세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포기할 때 양국의 정세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대만의 민중적?민족적 저항에 의해 타도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끈질긴 무장 투쟁을 배경으로 하여 연합국인 미국과 중국의 승인 하에 조선 국내 침공 작전을 준비 중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과 국내 지하 세력의 내응 계획이 종전 당시 군사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것은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일본 안팎의 일본 제국주의 옹호자들의 심리적 저변에는 ‘피압박민족의 저항에 패배당하지 않은 유일한 제국’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으며, 그 또 다른 한 측면에서는 ‘자발적으로 식민지나 속령을 포기한 전례가 없는 과거 제국주의 상황’을 자기정당화의 유력한 근거로 확보하고 있다는 망상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한승조 비판의 대부분의 논거는 일단 국제윤리에 강하게 의존하여 보편성을 끌어잡는 반면 제국주의 붕괴의 일반적 유형에 비추어 일본 제국주의 붕괴의 전반적 정당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 부당성 논거가 보편적인 윤리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한승조 비판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아쉬움은 일제에 의한 한국 병탄 당시의 사실적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당시로서는 망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이 병탄하지 않았다고 해도 러시아가 삼켰을 것이라는 일본 우익들이 흔히 내세우는 논리”를 일단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시작하는 전제설정의 소극성이다. 위의 같은 글.


    일제 시민지 체제의 성립과 전개와 관련된 당시의 사실을 이렇게 소극적으로 미리 예단하게 되면 당시의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사실에 대한 이 정도의 인식만으로는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이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에게 합방된 것은 “불행 중 다행” 또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한승조 노인의 망언을 충분히 반박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한승조 노인의 말을 보다 근본적인 도덕 원칙에 의거하여 반박하기 위해 “설령 러시아로의 병합은 최악이라는 교수님 주장을 받아들이는” 대 바로 “그렇더라도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차악’이 곧 한국에게 축복을 준 ‘선’으로 둔갑될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다. 김정환, 「한승조 교수 글에 대한 공개 반론」, 『한겨레』(2005. 3. 10.), 21면. <왜냐면>

    하지만 이 경우 근본적 비판에 대한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사태 인식의 측면에서 러시아로의 병합이 과연 최악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의문의 공백을 틈타 한승조족이나 일본 극우파의 논리 일각이 친일옹호 담론의 한 구석에 다리를 걸칠 여지가 남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사태의 기술에 대한 용어와 개념의 선택도 사태의 객관적 진행과정과 부합하도록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그 뒤에 이어진 한일합방을 두고 “한국이 국권을 상실했다” 또는 “대한제국이 망했다”라고 기술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기술은 20세기 초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국권이 교체된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태에 즉하여 일어나 사태대로 기술하면 당시 한국은 “국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국권을 상실당한 것”이다.

    보다 넓은 맥락에서 당시 사태를 정확하게 조망되도록 하면, 당시 대한제국을 두고 “망할 수밖에 없었다”든지 “국권을 상실했다”는 표현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 금방 인지할 수 있다. 즉 어떤 국가라도 알아서 망하거나 자기 국권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국가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사회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력체는 국가이며, 그런 국가가 알아서 망하는 법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그 어떤 경우에도 망해져야 망하는 것이지 저절로 망하는 법이 없다. 그 자체만으로 놓고 보면 “망할 수밖에 없는 국가”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 국가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국가를 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국가 안팎의 국가도전 요인들을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한승조 노인의 발언은 마치 망할 수밖에 없는 대한제국이 1) 러시아와 일본 둘 중의 한 나라를 골라서 망해줄 선택권을 행사한 듯한 인상을 주면서, 2) 더욱 가관인 것은, 사후 역사를 끌어들여 러시아보다 일본에 망해준 것이 당시 한국으로서는 올바른 길이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망한 것이 고려가 조선에 망한 것이나 신라가 고려에 망한 것과 같은 차원에 놓고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 침탈의 일반적 운동양식을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이다. 왜냐하면 특정 국가, 가령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될 운명에 처해졌을 때 이미 인도는 선택의 여지없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게끔 되어 있었다. 당시 인도가 볼 때 포르투갈이나 프랑스보다 영국이 차라리 나아서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식민지가 된 월남이나 알제리도 그러했고,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위상을 바꾼 필리핀도 자신들이 선택해서 미국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제국주의 시대에 어떤 국가나 민족이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되느냐 여부는 철저하게 제국주의 열강들 각자의 자기 관심과 서로간의 상호 역학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런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승조 노인은 대한제국이 원해서 일본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기로 자청한 것처럼 역사를 묘사한다. 그런데 합방 당시의 사태에 대한 이런 식의 기술은 한승조 사태가 벌어진 직후 한일간의 국가 쟁점으로 불거져 나온 일본 극우파 역사교과서가 제시하는 한일합방의 기술 및 그 정당화 논리와 빼다 박은 듯이 똑같다.

    따라서 일본에의 종속을 당연시하는 이 한일 극우파의 담론 유착은

    ― 1) 20세기 초 조선 상황에서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점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가해진 선택권 없는 강제였으며,
    ― 2) 그 이후 역사의 전개 과정으로 볼 때, 일제의 조선 강점은 러시아에 의한 강점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

    는 점이 입증되었을 경우에만 논변상 가장 타당하게 기각될 수 있을 것이다.

    3.2. 탈제국주의 조건 아래에서의 친일멘탈리티의 지속적 배양 조건에 대한 의문: 단순한 일제 잔재가 아닌 자생적인 친일 후속 세대로서의 한승조 및 ‘우리 안의 친일’ 문제

    그렇다면 해방 60년을 맞는 21세기 초의 대한민국에서 도대체 어떻게 바로 100년 전 을사늑약의 악몽이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재현될 수 있는 것인가? 한승조 사태가 터진 후 그 사태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사방에서 제기되었다.

    가장 첫 번째로 제기되었으면서 평자들이 대체로 공감하는 한승조 사태의 진단은 현재 75세로서 바로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거친 한승조 노인을 식민지 시대 당시의 친일파 및 친일 정책의 직접적인 끝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승조 노인은 ‘최후의 일제 잔재’이다. 그는 이제 수명을 다해가면서도 그런 운명에 단말마적으로 저항하는 우리 사회의 쇠락하는 친일파를 대변한다.

    한승조 사태가 터진 바로 다음날 제기된 서울대 국사학과 권태억 교수의 「식민지 소년 한승조」에 대한 냉소적 연민이 섞인 비판이나 “그의 망언과 광태야말로 지금이라도 우리가 친일잔재를 청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으며,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자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가열차게 치고 나온 민족문제연구소의 성명 「한승조 교수의 일제 찬양 망언과 광태를 강력 규탄한다」가 ‘현재의 한승조 노인’을 ‘과거 친일의 강력한 잔재’로 보는 한승조관을 가장 전형적으로 표출한다.

    제국주의 본국의 부르주아와 식민지 부르주아의 차이를 더 할 나위 없이 예리하게 비교한 성공회대의 김동춘 선생도 “한승조 교수의 발언은 바로 탈식민화 물결에 대한 식민지 부르주아의 위기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한다. 김동춘, 「신부르주아를 기다리며」,『한겨레』(2005. 3. 12.), 19면.

    분명히 한승조족, 특히 한승조 노인 개인의 활동 양식은 과거 일제의 잔재와 내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누차 지적되었지만 청소년기의 사회화 과정에서 작용한 성장 체험에서 해방후 분단형 건국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지배 세력으로서 사회 각 방면에서 기득권과 세력을 구축한 제2세대 친일파와의 인적 교류 관계 등일 일생에 걸쳐 누적되면서 가한 영향이 노년에 접어든 명문대 전직 교수의 발언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 사회에서 ‘현재’에 이르러 한승조로 표출된 그런 친일 성향 개인의 역정을 우리 현대사의 진행과정과 즉사실적으로 결부시켜 가면서 아주 정밀하게 한 번 추적해 보자.

    한승조 씨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과 같이 한일합방 당시 제국 일본을 상대로 국가를 ‘제국주의에 직접 매도한’ 제1세대 친일파는 아니다.

    나아가 한승조 씨는 3.1운동 이후 실시된 총독부의 문화정치나 1937년의 중일 전쟁 이후 수없이 변절하거나 아니면 식민지 교육 기관이나 보안 기관 및 군사 조직에서 ‘제국주의에 의해 직접 양성된’ 제2세대 친일파로서 ‘식민지형 근대적 엘리트 그룹’으로 분류되기에는 일제 당시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내가 보기에 참으로 기막힌 것은 식민지 소년 한승조의 친일 멘털리티는 제국주의 식민 통치가 끝나고 대한민국에 일제가 남기고 간 잔재물들이 한국 사회와 국가 안에서 현재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가운데 ‘제국의 부재 아래 포스트임페리알리즘(탈제국주의) 국면에 이르러 한국 사회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제3세대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속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한승조 개인은 단순히 제국주의 시대의 은혜를 직접 입은 일제 잔재가 아니라 제국주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사후에 본격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친일 의식을 갖게 된 자생적 친일파에 속하며, 사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를 더욱 치명적으로 만든다.

    우리 국가와 사회의 어떤 부분이 일본 제국주의 통치가 종식된 이 국가 안에서 일본 없는 친일파를 자생적으로 온존시키면서 급기야 일본 극우보다 더 극심한 식민지배축복론, 친일지상주의를 고창하게 만들었는가?

    한승조 현상을 과거의 일로 간주하여 일제잔재청산 문제로만 접근하면 ‘후속 친일파’를 계속 온존시키고 양산시킬 잠재성이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 자체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결과가 된다.

    한승조 비판으로 제기된 기왕의 논지들에 전폭적으로 찬성하면서도 필자는 한승조 현상은 ‘현재 한국’(contemporary Corea)의 자화상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생적 친일파를 만들어온 ‘우리 안의 친일’ 부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투시하는 작업이야말로 ‘친일의 현재화’에 근본적으로 대처하는 관점이 아닐까?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큰 문제점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까지의 한승조 비판을 보강하는 입장에서 필자의 소견을 다음과 같이 적어본다.

    4. 일제식민지배 최악론: 일제 지배 차악론 및 최선론의 반증

    우리 국가와 민족의 장기 발전 추세를 사후적으로 조망하는 입장에서 볼 때 한승조 노인의 견해와는 정반대로 필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야말로 우리에게 그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덮쳐온 최악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자신있게 입증할 수 있다고 본다.

    4.1.일제 강점의 무대안성: 권력숭배주의의 은폐

    무엇보다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점이야말로 당시 러시아도 저지할 수 없었던 강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들으면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식의 말은 아는 사람이 들려주는 참으로 그럴 듯한 진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상황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주장했어야 했고 또 그것이 당시 사태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당시 상황은 결코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오직 일본에게 合倂당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일전쟁 중 만주와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육해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러시아 국내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나 제정이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던 1905년 초까지의 상황을 보면 러시아가 한국을 합병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이 점은 이미 한승조 사태가 난지 며칠 되지 않아 즉각 지적되었다. 3월 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교수는 한승조 노인의 “악성 망발”의 논리적 모순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한 교수의 주장 가운데 논리적 모순은 크게 두가지다. 한 교수는 '일본이 병합하지 않았으면 러시아가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러시아 정세와 국제관계를 모르고 한 무지한 망언이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과 폴란드와 군사적으로 대치한 상황이어서 조선을 점령할 처지가 아니었고 의지도 없었다. 1903년 7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파블로프 조선주재공사 등이 참석한 여순회의에서 북만주는 계속 점령하되 조선의 북부(북한) 점령은 러시아에 이득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호진 기자, 「"친일사대 지식인,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 [인터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진단하는 '한승조 발언' 」, 『오마이뉴스』(2005/03/07 오후 12:39)


    그러면서도 친일옹호론자들은 한국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는 일본 극우파의 상투적인 주장에 논리적으로 완전히 매료된 듯이 보인다. 여론의 뭇매를 맞는 한승조 노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논전의 바다에 뛰어든 지만원 씨는 3월 10일 CBS TV의 시사프로 <시사저널>에서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와 벌인 논쟁에서 한승조 노인과 똑같은 주장을 폈다.

    “가장 먼저 맞붙은 주제는 한승조가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면 러시아 식민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됐던 '러일 전쟁' 부분. 지 소장은 이와 관련, "한승조 교수 글 전체를 두고 봐야 한다"며 "러시아에 먹혔으면 1917년 혁명 때 수천명이 죽고 분산정책으로 오지로 끌려갔을 것이며 해방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진 교수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겨 아시아에 공산주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는 얘기는 '일본이 아시아를 구원했다'는 일본 파시스트들의 생각"이라고 반박했다.”김하원 기자, 「지만원, "김구는 빈 라덴. 얻은 게 뭐냐". 지만원-진중권 '정면격돌', 진중권 '지만원 친일론' 초토화 」, 『PRESSIAN』(http://www.pressian.com 2005-03-10 오후 6:48:4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의 가정에 입각한 한일 극우파의 일제지배 행운론이 안고 있는 논리적 부당성의 치명적 약점이 드러난다. 진중권 교수가 예리하게 지적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진중권 교수)는 이어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며 "예컨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안 터뜨렸으면 일본 본토까지 전쟁이 확산되고, 수 천만 명이 죽어 일본에 불행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복탄이라 부르자'라고 말하면 말이 되겠는가"라고 지 소장의 주장의 비논리성을 꼬집었다.” 위의 같은 글. 이 토론이 있은 다음 날인 3월 11일 아침 7시20분 MBC에서 방송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진중권 교수의 ‘원자복탄’(原子福彈) 발언을 ‘오늘의 말, 말, 말’로 내보냈다.

    이런 상황을 완전히 묻어두고 한승조 노인은 마치 당시 조선이 러시아나 일본 중 합방당할 상대를 고를 수 있기나 했었던 것처럼 러시아를 얘기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그 뒤에 오는 스탈린의 학정과 일제 통치를 독자에게 비교시켜 일제 통치의 야만성을 상대적으로 덜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논리적 잔꾀인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가정하는 한승조 노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백번 수긍하더라도 그 가치감정이 참으로 박약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일본과 러시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합방당할 수 있었던 상황이고, 그 어떤 쪽에도 합방당하지 않을 운명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합방 그 자체가 강제로 되는 한에도 우리 쪽에서 합방 그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저항’이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쪽에 의해서든 제국주의에 의한 일체의 합방 그 자체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설사 어떤 경로로든 합방을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도, 합방에 저항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로 남는다. 타자에 의한 합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타자에 무조건적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가 나의 ‘영토’를 부당하게 ‘합방’하더라도 나의 ‘의견’의 ‘합의’를 정당하게 갖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의 의무에 속한다. 한승조 노인에 대한 전에 없는 분노는, 합방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권력이 있다면 그 권력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그 파렴치한 권력 숭배에 대한 혐오가 친일에 대한 증오에 더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론은 권력숭배주의야말로 친일정당화론이 일반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친일멘털리티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임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4.2. ‘핀란드-혁명 러시아’ 반증: 제국주의 정당성 기반의 붕괴를 알리는 효시

    그러나 한승조 노인의 이른바 역사 인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은 그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내세운 다음 논거이다.

    한승조 노인에 따르면 한국이 “만일 러시아에 合邦병탄되었더라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국은 공산화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고 한다. 듣고 보면 참으로 그럴 듯한 얘기이다. 그런데 참으로 연소한 내가 감히 한승조 노인의 학문적 자질을 의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러시아에 합방된 모든 나라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자동적으로 전부 공산화되어야 했다. 그 말은 곧 러시아의 합방국은 적색 식민지가 된다는 뜻이다. 한승조 노인 식의 논법을 좀 거들어주면, 러시아 혁명 이후 당시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던 식민지 민족들은 러시아에는 얼씬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 반대였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이후 레닌을 지도자로 한 혁명 러시아는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횃불로 등장하였고, 모든 식민지 민족 운동의 지도자들은 어떤 경로로든 러시아의 지원을 얻으려고 애썼다. 한국의 경우도 바로 이 때 이동휘를 비롯한 비타협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주도로 시베리아에서 처음으로 고려공산당이 결성된다.

    당시 한국에 산업 노동자가 몇이나 있어서 공산당이 조직되었겠는가? 그리고 무엇을 보고 당시 한국 민족 운동의 지도자들이 제정 러시아는 믿지 않았으면서도 공산주의를 추구한 혁명 러시아는 믿으려고 했는가?

    문제는 핀란드였다.

    1809년 이래 핀란드는 ‘만민감옥’(萬民監獄)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을 정복하여 철권으로 통치하고 있던 차르 치하 러시아 제국의 한 공령(公領)이었다. 본래 18세기에 인근 스웨덴 왕국의 속령이었던 핀란드는 스웨덴 왕정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짜르의 힘을 빌었다. 제국 러시아의 핀란드 통치는 상당히 온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제국주의 지배의 가혹한 비판자인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핀란드와 짜르 러시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880년대 러시아의 동화정책이 반러시아 감정을 조장할 때까지 핀란드인은 19세기 내내 짜르에게 충성했다. 로마노프가에 대한 기념물이 정작 러시아 안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반면, 해방자 짜르로 불리는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은 헬싱키의 주광장에 여전히 버티고 서 있다.” 에릭 홉스봄,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강명세 옮김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3. 2., 초판6쇄/1994. 4., 초판1쇄), 118쪽.


    그러나 19세기 말에 제정의 압박도가 심해진 상태에서 핀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러시아의 제국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에는 또 다른 제국이었던 독일의 힘을 빌려 독립을 구하고자 했다. 바로 이 때 핀란드 독립의 절호의 찬스가 왔다. 그것은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서도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던 게렌스키 정권을 10월 혁명으로 타도한 레닌의 볼세비키 정권은 러시아 제국의 ‘만민감옥’에서 갇혀 있던 피압박 민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문제담당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때 인민위원장이 스탈린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핀란드는 바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련의 민족 문제를 다년간 취재했던 독일 언론인 에버하트 베크헤른에 따르면, “방금 장악한 권력과 충만한 이상으로 도취되어 있던” 당시 러시아의 젊은 소비에트 정부는 10월 혁명이 성공하여 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딱 1주일 뒤인 1917년 11월 15일 최우선 혁명 정책 중의 하나로 「러시아 제민족 권리 선언」을 선포하였다. “볼세비키들은 처음부터 민족문제를 자기들 정책의 중점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볼세비키들은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지원할 방도를 모색하였으며, 바로 자신들이 그 민족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볼세비키 권력 자체가 매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민족선언에 담긴 기본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러시아 내의 모든 민족들의 평등과 주권
    ― 러시아의 모든 민족들은 자유로운 민족자결권을 갖는다. 러시아 내의 제 민족은 러시아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 특정 민족 또는 국가종교에 부여된 우월권 또는 침해조치는 폐기된다.(이 때 우월권을 부여받은 특정 민족은 러시아 민족이고, 특정 종교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 러시아 내의 모든 소수 민족과 종족집단들은 자유로이 자기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 Eberhard Beckherrn, Pulverfaß Sowjetunion. Der Nationalitatenkonflikt und seine Ursachen (Munchen Knaur, Sep. 1990), 19쪽.

    따라서 볼세비키 혁명 정부는 핀란드가 독립을 선언하자 그 달을 넘기지 않고 지체 없이 핀란드의 독립을 승인했다. 레닌이 핀란드의 분리독립을 허용한 전후 사정에 대한 기술로는 홉스봄, 앞의 책, 212쪽 참조.
    1917년 12월 31일 핀란드는 10월 혁명 성공 두 달을 갓 넘기면서 100년을 기다리던 독립을 선포하였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레닌의 동상도 아직 핀란드의 몇 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레닌은 핀란드 독립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한승조 노인이 마구 불지른 대로 역사를 놓고 마음껏 상상해 보자.

    만약 한국이 당시 제정 러시아에 합병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제국주의 국가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혁명 러시아는 당장의 위협이 되지 않는 한 통제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극동의 반도국 정도는 국제적 선전을 위해서도 풀어주지 않았을까? 핀란드 만을 사이에 두고 당시 러시아 수도였던 페테르스부르크와 빤히 바라보는 위치에 있으며 100년 이상 합병하고 있던 바로 건너편 핀란드도 풀어주는 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필요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왜 필요 이상인가 하면, 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세계 제1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902년 일본의 카쓰라 외상과 미국의 태프트 국무장관 사이의 밀약에 의해 미국의 우선권이 보장된 필리핀이 독립한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근 반 세기에 걸친 호세 리잘 이래의 오랜 독립 투쟁과 2차 대전 당시 대일 전쟁에 미국에 협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당시 승전국이었던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정말 바랄 수 없던 것을 바라면서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 뛰어든 셈이었다.

    그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베르사이유 회의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선언되기 이전에 이미 위와 같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천’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단지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각종 방식의 적극적인 민족 독립 운동들이 다양하게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필요 이하로’ 잘 모르고 있다. 왜 필요 이하인가 하면, 바로 자기 식민지와 땅을 맞대고 있는 두만강 건너편 러시아에 독립운동 근거지가 형성되는 것을 두려워 한 제국 일본이 반공을 위한 각종 탄압 정책과 민족 분열 공작을 아주 본격적으로 실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 분단의 씨앗을 본격적으로 배태시킨 것이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바로 레닌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연합국측의 반응이었다는 점이다. 즉 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던 1차 대전 당시의 연합국들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 걸친 거대한 다민족 제국들,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터키가 무너지자 이들 패전국의 민족들이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사회혁명 및 국제적으로는 혁명 러시아 진영에 가담하는 것을 예방할 필요가 있었다. 위의 책, 172쪽.

    따라서 한승조 노인이 설정해준 역사적 상상의 권리에 따라 1917년 러시아 혁명 상황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는 러시아에 병합당했던 것이 독립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아니면 말 일이다! 어차피 상상 게임 아닌가.)

    그리고 이 때 독립을 얻었으면 그 독립이 영구적이었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이번에 문제는 핀란드와 스탈린의 제2라운드 조우였다.

    1939년 9월 히틀러와 독소 비밀조약을 근거로 폴란드를 양분한 스탈린은 독일에 대한 불안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레닌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핀란드에 카렐리안 섬의 해군기지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핀란드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과 독일에 대한 두려움 및 은근한 의존감에 그 요청을 거부했다.

    격분한 스탈린이 바로 공격을 개시하면서 핀란드군이 무너지고 결국 핀란드의 요청으로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이 성사되었다. 그 결과 핀란드는 핀란드 동남부의 상당 지역을 할양하고 핀란드 최대 항구인 항코항을 30년간 소련에 임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전면 공격이 개시되면서 상황을 근본적으로 오판한 핀란드 정부는 독일군 승전 상황에 편승하여 소련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 1941년에서 1944년까지 소련을 상대로 상당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핀란드 정부는 곧 실책을 깨달았다. 결국 핀란드 정부는 1940년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이행하고 상당한 영토적 양보를 하면서 2차 대전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서둘러 소련과의 관계를 재정리하였다.

    결국 핀란드는 자체의 현명한 판단력 덕분에 제2차대전 패전국 반열에 끼는 운명을 간신히 모면하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핀란드를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핀란드의 독립을 완전히 몰수할 수는 없었으며, 공산화는 더더구나 추진하지 못하였다. 스탈린 때에 이르러 소련은 차르 시절에 확보했던 모든 민족과 영토를 다시 점거하긴 했지만 1920년대의 혁명기 동안 독립을 허용한 핀란드와 폴란드만큼은 다시 편입시킬 수 없었다. 핀란드와 폴란드의 경우에 대해서도 같은 쪽 참조,
    즉 독립 선언의 기득권이 국제 정치에서 elk방면으로 실효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만약 조선도 제1차대전 당시 러시아 식민지였다면 볼세비키 혁명기였던 1919년 이전에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을 허용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1차 대전 당시 볼세비키 혁명을 통해 연합국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조선이 승전국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에 입각해 독립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연합국의 영향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레닌의 독자적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 즉각 독립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따라서 러시아에 합병된 나라라면 1917년 이후 전부 공산화되었으리라는 한승조 노인의 역사적 상상력은 사실상 청년 시절부터 내면화한 공산당 공포증이 되살아난 반공 치매증의 발병임이 확실해졌다. 20세기 전반기에 일찌감치 독립한 핀란드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축적한 국가적 역량으로 소련을 상대할 물리적, 지적 자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바로 소련의 코 앞에서 국가적 번영을 구가하였다고 현재에는 핀란드 모델이라고 불릴 만큼 지속적인 발전을 보이면서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강소국이 되었다.

    100년 동안 러시아의 식민지 아니 속국이었던 핀란드의 현재 사정은 어느모로 보나 단 36년 동안 일본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보다 훨씬 낫다고 평가된다. 이 핀란드의 예를 보고도 한국이 러시아보다 일본에 병합된 것이 다행이었다고 계속 우길 것인가?

    4.3. 스탈린의 ‘고려인 이주 정책’의 원흉은 누구인가? : 박두하는 일-소 전쟁의 희생자들

    그렇다면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는 한승조 노인의 또 다른 상상은 어떠할까?

    이 구절을 쓸 때 한승조 노인은 스탈린 시대의 역사를 한 번쯤은 들춰보고 정확하게 연대를 확인하고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민족추방정책의 연원을 다시 한 번 짚어 봤어야 했다.

    스탈린은 언제 한국인들을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오지로 분산 수용하였을까? 그 때 분산 수용된 한국인들은 어디에 살던 누구였을까? 무엇 때문에 그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그런 무지막지한 정책을 강행했을까?

    스탈린이 고려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를 단행할 당시 소련 영내의 조선인 수는 약 47만으로 집계된다. 이 때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된 고려인은 주로 두만강과 접경하고 있던 연해주 지방에 거주하던 15만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그야말로 한 밤중에 들이닥친 적군(赤軍)의 총칼에 떠밀려 세간도 챙기지 못한 채 제대로 옷도 입지 못하고 무리지어 기차에 태워진 채 며칠을 끝도 없이 가다가 중앙아시아 초원 한복판에 내동댕이처지는 모진 고초를 당한 연유가 기막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만주를 석권하면서 소만(蘇滿)국경에 도달했다. 소련과의 전쟁은 거의 불가피하게 보였고,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전쟁 수행에 방해될 요인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 상책으로 보였다. 이런 그의 눈에 연해주에 거주하는 15만 고려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고려인은 1905년 러일 전쟁 때 조선 영내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점령지역을 벗어나 시베리아를 바라보고 이주한 피난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소련 당국으로서는 이들의 생김새가 일본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독일과의 전쟁을 예상하던 스탈린은 역시 독일과 협력할 가능성이 있던 민족들에 대해서도 대규모 추방정책을 실시하였다. 1941년 8월 볼가강 유역에 오랜 연고가 있던 독일인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38만이 역시 시베리아도 강제 이주당했다. 1944년 2월에는 40만의 체첸인들이 역시 독일군에 부역할 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고향에서 뿌리뽑혔다.

    어쨌든 우랄 산맥 서쪽에서 약 120만 정도의 10개 소수민족들이 강제 이주 내지 분산을 당하는 동안 우랄 산맥 동쪽에서 이런 기막힌 고초를 겪은 민족은 오직 고려인뿐이었다. 이유는 바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소련이들에게 일본인으로 취급당했고, 일본의 스파이가 침투할 경우 은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잠복지로 보였다. 즉 조선 주둔 일본군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소련군이 볼 때 소련 영내의 조선인은 자신들의 등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장 일본인”(verkappte Japaner)이었다. 그런데 정작 소련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한 것은 일본군이 연합국에 항복하기 겨우 보름 전이었다. 졸지에 연고지에서 추방당한 고려인들은 “일본-소련의 정치적 대결의 희생”이었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에 대한 서술 역시 Beckherrn, 앞의 책, 237~242쪽에 의거했다. 이 책은 러시아 내 각 민족 중에서 연해주 고려인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 광부로 왔다 사할린에 잔류한 한국인에 대해서도 눈을 떼지 않았는데, 고려인 문제야말로 냉전기동안 그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을 비롯해 그 누구에 의해서도 기억되지 않은 “망각된 문제”였다고 단정하고 있다.


    한승조 노인은 마치 스탈린이 농업 집단화 정책에서 보여준 학정의 연장선 위에서 고려인들을 추방한 것처럼 서술하는데, 고려인에 대한 강제 추방에 일본 제국주의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감쪽같이 은폐하고 있다. 알고 그랬다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을 상대로 마음놓고 사기를 친 것이고, 모르고 그랬다면 알지도 못하고 전문가 행세를 한 것이다.

    4.4. 일제 폭정의 상대화: 스탈린의 숙청 정책과의 편향적 비교

    또한 한승조 노인은 “일본은 과거 식민지 때 우리에게 그다지 큰 억압을 자행하지 않았으며,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단언한다.

    (1) 한승조 노인이 일제 식민지체제가 그다지 억압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첫 번째 증거는 일본이 삼일운동 때 살상한 독립운동자들의 숫자가 스탈린이 농업 집단화를 추진하는 과정에 희생된 소련 국민들의 숫자보다 적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의 틀 안에서 생산력을 급증시키기 위해 조급하게 서둔 농업 집단화 정책이 러시아 농업의 인적 기반을 잠식해버릴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야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비단 농업집단화뿐만 아니라 각종 정치적 숙청에 의한 강제노동수용소 운영, 정치적 테러, 내전에 준하는 분쟁, 그리고 독일과의 전쟁 등, 스탈린 시대에 각종 원인으로 사상된 소련 국민의 수는 최소 8백만에서 최대 2천만까지 엄청난 규모로 추정된다.

    한승조 노인은 바로 그런 공산당의 작태와 비교해서 일제가 자행한 악행의 희생자 수가 “불행 중 다행”으로 훨씬 적으며, 바로 그 상태가 당시로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바랄 수 없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그런데 이왕 일본에 대해 다행함을 느끼는 비교치로서 소련의 예를 댈 바에야 그 다행함의 크기를 더 키우려면 차라리 아메리카 인디언의 예를 드는 것이 더 낫다.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찾았을 당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인디언 수는 5천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5백여년이 지난 현재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수는 50만이 넘지 않는 것으로 집계된다. 단 5백년 동안에 100분의 1로 줄어든 인디언에 비하면 우리 한민족을 2천만이나 남겨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보통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보다 통치의 질이 훨씬 나은 것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질서 안에서 인디언 인구가 100분의 1로 줄어든 반면 일본 제국주의 통치 안에서 우리 민족의 인구가 어쨌든 증가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의 두터운 호의와 제국 통치의 탁월함 덕분인가?

    (2)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승조 노인이 일본이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너무나 유치하다. 한 마디로 ‘신판 내선일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논거는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 문화적인 뿌리가 같았음”에서 찾아진다. 한 마디로 일본과 한국의 인종과 문화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일본 통치 기간 동안, 일본이 성취한 각종 발전성과를 아주 용이하게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발전이라는 것을 마치 ‘일본이라는 거대 실체’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한국의 발전을 위해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실현시켜 주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가 논의의 끝에 아주 자연스럽게 튀어나는 것은 한승조 노인의 의식에 ‘일본이라는 것’(the Japan)이 전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인격적 자립성을 갖고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한승조 노인의 의식이 ‘일본이라는 것’과 고도로 자발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정도로 자발적 교감이 가능한 상태라면 그 교감의 상대자에 대해 인격적 일체감과 의무감, 그리고 그런 것을 바탕으로 한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확신도 가능하다.

    4.5. 친일 면죄부 북한?

    친일을 옹호하는 자들이 끝까지 버티다가 논리적 기력이 다하면 마지막으로 빼드는 카드가 있다. 현재 북한이 처한 부정적 상황은 친일파에게 만능 면죄부이다. 한승조 노인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친일파를 단죄해서 민족정기가 선 사회가 북한이라고 한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남한보다도 훨씬 더 크게 성장 발전하였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북한을 빌미로 하여 친일 청산 주장을 조롱하거나 상대화시키는 언변은 친일청산에 반대하는 이들의 상투적 논법이 되고 있는데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2005년 2월 18일 한나라당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인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을 두고 한 다음의 발언이다.

    “강만길 공동위원장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일본군이 정권을 잡아 과거 청산이 안됐다라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자면 독립군 활동을 했던 사람이 정권을 잡아서 과거 청산을 잘했다는 북한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반문하고 싶다. 또 강만길 공동위원장 말씀 중에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잡아서 역사적인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지금 정통성 수립을 위해서 경제 건설에 급급했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뒤집어서 보자면 정통성도 바로 되고 자주 노선을 외쳤다는 북한은 경제 건설에 급급하지 않아서 오늘날 국민의 삶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런 점들이 무조건 부정한다고 역사는 아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손병관 기자, 「심재철 의원 "내가 언제 강만길 총장에게 막말했나" <한겨레>·<데일리서프> 보도에 강하게 항의 」, 『오마이뉴스』(2005. 2. 21 오후 12:13)에 실린 심 의원의 2월 18일 발언 전문 중에서

    그런데 한승조 노인은 북한을 단지 친일 면죄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친일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단죄하는 증거로 삼는다. 그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되지 못했다면 친일파 청산 주장이 “얼마나 부실하며 잘못된 기본전제 위에 서있음을 증명한 것”으로서 “결론적으로 '친일청산' 주장은 중대한 역사왜곡이며 억지주장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일의 면죄부나 반친일에 대한 단죄용으로 북한을 내걸기 이전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 이런 이들은 북한의 부정적 행태를 친일청산거부의 핑계로 남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이 마치 친일 잔재를 청산했기 때문에 발전을 하지 못한 것처럼 잘못된 인과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북한의 예를 오용한다. 남의 잘못을 합리화의 근거로 대는 것은 가장 야비한 도덕적 실책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서 친일 청산 문제에서 북한 논법을 쓰는 이들은 자기 역사의 부정적인 과거 행태를 척결함으로써 사회적 발전을 달성한 또다른 국가들의 사례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 아주 편향된 주장을 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나 독일이 나치즘을 척결함으로써 이들이 나치 체제에서라면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대륙적 차원의 통합을 선도할 도덕적, 정신적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도외시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독일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일본이 아시아 이웃 국가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자기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기는커녕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면서 그 발전된 경제 역량을 가지고도 무엇을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숙고해 보지 않는다. 일본이 결코 아시아의 지도 국가가 되지 못하거나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청산을 하지 않을 경우 그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국가 행위의 일정 국면에서 그 국가의 발목을 잡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만약 과거 청산만 하고 발전을 위해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북한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필자는 과연 북한의 적대자나 아니면 드물기는 하나 그 체제의 옹호자들이 상정하는 것만큼 북한이 철저하게 일제 청산을 수행했는지에 상당한 의문을 갖고 있다. 분명히 북한은 그 폐쇄된 공간 안에서 김일성 일인통치의 도전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서라도 일제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숙청하거나 적어도 재생불가능할 정도로 격멸 또는 억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정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제의 인적 청산’에 상응할 정도로 국가운영 차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여구조 극복’에도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일제가 추진한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에서도 남아 있던 사회 많은 부분의 전근대적인 봉건적 유제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국가적으로 표방된 인민민주주의와는 정반대로 작동하는 정치의 비민주성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경제 운용은 소유 구조의 변화 빼고는 사실상 일제말의 전시국가경제체제의 방식을 그대로 준용하고 있으며, 사회적 위계구조에서 문화적 기풍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대 남겨진 유습들이 거의 청산되지 않고 사람만 바꿔 그대로 통용되는 모습이 적지 않은 자료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철저한 일제 청산의 예로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인적 차원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했다고 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는 북한 특유의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이 저렇게 피폐하면서도 어떻게 여태껏 망하지 않고 그나마 지배층의 결속이 유지되고 있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991년 소련의 분해로 동유럽권의 붕괴가 급속하게 완료되었을 때 대두분의 사람들은 북한도 조만간 초우세츠쿠의 루마니아처럼 자멸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현재 가까운 시일 내에 북한이 동유럽식으로 붕괴할 것으로 단언하는 이는 거의 없다. 중국 북부에 떠도는 상당한 숫자의 탈북자에도 불구하고 그 탈북자들을 북한 체제의 의식적 이탈자 내지 전복자로 해석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탈북자 문제를 북한 체제의 붕괴 조짐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난민으로 보는 시각이 적잖이 설득력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 앞에서 북한에 관해, 북한은 언제 망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참으로 공허하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오히려 북한에 관해 우리는, 북한은 왜 아직도 망하지 않는가를 물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북한 지배층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자체 해체나 해소 또는 분열의 징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북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국이 북한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는 가운데 남한과 대치하는 상태에서 북한 지배층의 구성원들에게 남한 체제가 자기들의 대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북한 지배층이 남한에 순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적어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문제였던 항일반제 투쟁에 있어서는 남한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명분상의 강한 자신감’이다.(이 자신감은 결코 드물지 않게 자만감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길게는 6.25 당시 북한이 아무 거리낌 없이 대남 정규전을 감행할 때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친일파가 장악한 남한에 대해 제2차 독립군 전투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인다.

    라서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도가 북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북한 체제 유지의 가장 큰 명분을 제공하며, 북한 지배층으로 하여금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대한민국의 우위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대한민국과의 체제경쟁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의 친일파야말로, 역설적으로, 북한 체제 자체에 존립의 명분을 안겨주는 가장 친북적 세력이다.

    5. 친일멘털리티의 재생산 구조: ‘친일-반공-국가주의’에 기반한 ‘권력숭배-물질만능-국민윤리’의 재생산 구조

    그러면 어떻게 <식민지 소년 한승조>가 바로 일본 제국주의도 물러간 이 대한민국에서 그 노년에 이르러 일제 당국도 감히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친일지상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한승조 문건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명문 고려대의 명예교수라는 것에 일차적으로 자극되었고, 자유시민연대의 공동대표라는 사실에 격앙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전두환 군부정권의 절정기였던 1980년 1월에서 1984년 1월에 이르기까지 '한국국민윤리학회'의 5, 6대 회장이었고, 현재에도 그 학회의 수석고문으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가 5공 출범 당시 바로 이 국민윤리학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군의 정훈장교를 특별회원으로 받아들인 조치는 이 학회의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로 여전히 게시되고 있다. 한국국민윤리학회 홈페이지인 www.kethics.com 참조

    ‘국민윤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국민정신교육에 기여했다”는 명분으로 세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국가의 서훈을 받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윤리’라는 것은 박정희 시대에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을 모태로 하여 전두환 시대에 대학에 독자적인 교과교육학으로 제도화 시켜 거기에서 양성된 인력들을 통해 국가지상주의를 국민정신으로 국민 개개인에게 내면화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였다.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도덕’ 및 ‘윤리’ 교과는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 장치가 작동하던 현장이었고, 애초에 ‘국민윤리’라고 불려지던 바로 이 도덕 및 윤리 교과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덕목으로 국민교육헌장에서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국민정신”의 핵심은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었으며, 이 정신으로 도달할 가장 큰 목표는 “민족중흥”이라는 비전으로 미회된 “국가 건설”이었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국민교육헌장 안에 반공, 경제만능, 그리고 국가지상주의를 이 나라 국민됨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국민정신’으로 묶어내는 일관된 의식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권력숭배 코드’라는 점이다.

    권력숭배 코드란 남이나 나 자신에 대해 마음먹은 대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자원이나 세력이 당장에 확보되어 있지 않으면 나 또는 우리의 실존이 말살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대전제로 강제력을 보증하는 자원과 세력의 축적에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는 정신태도(멘털리티)를 가리킨다.
    박정희체제에서는 반공을 바로 이 권력숭배코드의 지상 목표로 설정하였으며, 민족사에서 치러 왔던 타민족과의 전쟁 사례들을 국민의식 안에 권력숭배 코드를 내면적으로 장착시키는 드라이버로 사용하였다. 이 때 권력숭배의 최상위 대상으로 설정된 것은 국가였다.

    문제는 반공, 경제만능, 그리고 국가지상주의를 국민정신의 내용으로 묶어 이것을 국민에게 최고의 도덕적 가치 즉 ‘국민윤리’로 부각시키면서 국민 개개인의 개별적 의식 자체는 모두 이 최고권력체인 국가에 전적으로 순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지상주의는 단일체로서의 국가의 권력을 극대화시키면서,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 구성원 개개인이 통어할 수 있는 권력은 극소화 또는 무화(無化)시키는 권력불균등의 메커니즘을 장착하고 있다. 이것은 국민교육헌장에서 민주 국가의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자기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터전인 ‘사회’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는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박정희식 국민윤리는 대한민국 국가의 국민 개개인을 ‘사회의 매개 없이’ 바로 국가와 직접적으로 대면시키고 그 앞에서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다짐시킨다. 국민교육헌장 제정 과정에서 ‘사회’라는 단어 자체와 그와 관련된 윤리적 덕목들 즉 자유, 평화, 정의 등이 삭제되어 나가는 경위에 대한 자세한 추적으로는 홍윤기, 「한국 도덕?윤리 교육의 이념적 혼돈과 정체성 위기」, 한국철학교육자연대회의 펴냄, 『한국 도덕?윤리 교육 백서』(서울: 한울, 2001. 4.), 제9장, 310~338쪽 참조.

    즉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길러진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 발전에 직접 이바지하기에 이르는 국민에게서 권력에 대한 비판적 저항을 기대하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이렇게 권력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결여된 국민에게 동일한 차원의 권력체들과의 비교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쪽에 순응하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힘들 것이다.

    비록 그 권력체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을 안긴 외부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권력에의 순응과 권력 숭배가 국민윤리 차원에서 내면화된 의식을 갖고는 우리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강자에 맞서 끝까지 우리 존재의 요구를 제기하기란 힘들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권력 숭배와 권력 순응을 내면화시킨 국민윤리의식으로는 우리보다 더 약한 존재를 능멸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자책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식의 권력숭배/순응 코드를 내장한 국민정신이 나보다 우월한 강자에의 복종을 축복으로 여기는 친일지상주의의 권력코드와 바로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승조 노인이 장년기에 4년씩이나 회장으로 재임한 이른바 국민윤리교육학회의 원로 멤버들은 모두 문교부와 교육부에 걸친 한국 교육 권력의 최고 부분에서 한국 도덕?윤리 교과서의 집필과 도덕윤리 교육과정의 지침 규정을 주도해 왔다. 그리고 바로 이런 교과체제를 거점으로 친일파에 친화적인 권력숭배/순응의 멘털리티가 국민정신을 명분으로 후세대에 직접 주입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권력행태에 무감각한 도덕윤리교육으로 고착되어 왔다.

    대한민국 국민교육체계에서 도덕?윤리 교과는 애국애족의 명분을 내건 국가지상주의의 확립을 목표로 권력숭배코드를 체계적으로 주입하는 국민정신교육의 확고한 거점이었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고 민주화되면서 다양화된 욕구들과 이해관계들을 시민들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고도로 발전된 도덕의식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도덕?윤리 교육이 발전된 도덕의식의 교육에 거의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너무도 당연하다.

    현행 도덕 및 윤리 교과의 큰 틀은 아직도 한승조 노인 같은 사람이 주도했던 국민정신이라는 틀 안에서 배양된 국가지상주의에 의해 지배된다. 21세기에 이른 현재 상황에서도 국민공통기본교과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덕윤리 교과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도덕 문제보다는 국가지상주의적 정신태도의 양성을 중요한 윤리적 덕목으로 부각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이 국가지상주의 정신태도는 어느 순간에도 친일멘털리티와 호환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입시 과목의 관점이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에서 진정 요구되는 도덕 규범이 무엇인가를 자문하는 관점에서 현행 중고등학교 도덕 및 윤리 교과의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것을 권한다. 그 안에는 시험에서 컨닝하면 안 된다든지, 내신 성적 조작은 경쟁의 룰을 훼손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근간을 위협한다든지 하는 등의 최소한의 교육윤리를 자각시키는 내용도 들어있지 않다.

    나는 한승조 노인의 망언이 단지 일제 식민지 지배 때 받았던 청소년기의 교육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식민지 소년>에서 유래한다는 진단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아무리 청소년기 교육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 교육에 친화적인 요인이 그의 생애 과정에 걸쳐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면 소년기 교육의 영향은 살아가면서 약화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한승조 노인은 일제 시대에 본격적인 친일파가 되었다기보다 일제 시대를 조금 걸치면서 독립 대한민국 체제 안에서 친일에의 성향을 온존, 반전시킨 <친일후속세대>에 속한다.

    그런데 한승조 노인의 글을 보면 그의 친일 의식은 약화되기는커녕 세계화 시대를 맞아 바야흐로 친일이야말로 애국애족의 올바른 길로 입증될 것이라는 친일확신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생애 과정에 친일에의 확신을 배양시키는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 왔음을 방증한다.

    당연히 <친일소년 한승조>의 일본 존경 의식을 강화시킨 첫 번째 요인은 제국체제를 해체 당한 후에도 제국정신과 제국에의 향수를 그대로 간직한 채 다시 강국으로 발돋움한 현대 일본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박정희에서 전두환, 그리고 약하게는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친일 인맥 속에서 우리 국가와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했던 권력체계 안에서 <장년 한승조>가 국민윤리의 틀 안에서 국민정신을 직접 계도하는 위치를 오래 고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친일 지향적 멘탈리티에 정당성을 확신시켜 주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윤리 교과 안에서 가르치는 도덕적, 윤리적 덕목이라는 것들에 대해서는 사실 친일적이라는 지칭사만 빠졌지 그 개념적 내용들은 실질적으로 친일멘탈리티의 콘텐츠와 호화가능한 것들이었다.

    국민정신교육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국민에게 국가로 표상된 최고 권력에의 숭배, 즉 파시즘적 멘탈리티를 기준으로 그 앞에서 살아남는 태도를 배양시키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도덕, 윤리 교육은 파시즘 교육이었고 소년 한승조는 대한민국 국민교육이 장치해준 이 메커니즘 안에서 자발적으로 친일에의 열망을 보존하고 심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즉 바로 이런 교육자적이고 계도적인 위치설정(topos) 자체가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과대망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한승조 노인이 내다보는 세계화 시대의 친일은 바로 이런 국민윤리의 교육 메커니즘 안에서 정신적인 인큐베이터를 찾는다. 그러나 그 인큐베이터는 위험하다. 그 안에서 의사소통적 자폐아가 보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친일멘털리티 청산을 위한 제언

    한승조 사태를 보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 내 자신에게 다짐했던 준칙 하나가 시험대 위에 올라선 느낌을 받았다. 즉 나는 아무리 수구보수나 극우, 나아가 소아병적인 극좌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이 사회의 기본적인 민주적 합의를 심각하게 손상하지 않는 한 서로 더불어 사는 동반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한승조 노인의 아주 체계화된 무지, 선택적 유식함을 보면서 내가 그나마 쌓아 왔던 시민적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도전을 개인적인 심정으로 환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불건전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친일과 결부된 그런 가치관들이 교육되고 보육되는 원천을 탐색하여 척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사 진상 규명을 통해 우리의 발목을 죄고 있는 과거의 족쇄를 정확하게 투시해야 한다.

    우리가 1세대 친일파들을 인적으로 숙청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친일과 결부된, 친일친화적인 요인들을 투시하고 친일후속세대가 배양될 사회적, 교육적 토양을 척결하는 것은 가능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직접적 친일파가 아니라 세계화 시대의 친일을 내세우는 친일 후속 세대라는 점에서 더욱 절실하게 제기되는 요구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필자는 친일 현상의 항구적인 종식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에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한다.

    첫째,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정쟁의 한가운데 있는 과거사법(진실규명과화해를위한기본법안)을 조속히 처리하되 그 조사시기의 범위를 개항까지 넓혀 조선과 대한제국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하도록 함.(대표적 조사 사건으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음)

    둘째, 친일파재산환수법을 조속히 처리하여 친일파 재발에 대한 단호한 결의를 보일 것

    셋째, 친일진상규명법을 조속히 실행함으로써 국내외에 친일파에 대한 국가의 단호한 의지를 천명할 것.

    용해온 현행 중고등학교 도덕?윤리 교과를 전면 폐지함과 아울러 민주화와 선진화의 요구에 부응하는 도덕교육의 새로운 틀을 만들기 위한 시민사회 및 정치사회의 논의를 개시할 것.  

    2005/03/14 오후 6:02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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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뮈와 나 1

    까뮈와 나


    사실 아직도 사춘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나의 사춘기의 종결을 긋는 시점은 까뮈를 알았을 때라고 말하고 싶다.
    권태와 무력함으로 일관했던 지진한 시간에 끝없이 함몰했던, 그리고 나에 대한 어떤 정의의 시도에도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 했던 답답함의 연속에서 까뮈는 내게 다가와 '너는 이방인이야'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랬던 것 같다. 「이방인」을 읽을 때, 뫼르소는 나였으며 「페스트」를 읽을 때, 타루는 '나'로 이입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까뮈를 통해 내가 누구고, 나는 어떤 세상에 던져져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친절하게 알아갔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까뮈가 말했듯이 "(뫼르소는)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그리스도"... 당시 까뮈는 일개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 이상으로, 내게 하나의 종교적 의미였다.


    까뮈와 실존주의

    까뮈를 말 할 때 실존주의를 말해야 하고, 더불어 사르트르를 말해야 하는 건 하나의 공식처럼 느껴진다. 약간 식상하기까지한 이 공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뮈를 설명하는 좋은 양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까뮈를 이해하는 좋은 주제이기 때문에 나또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두 개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심리적, 이성적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두 개의 혁명으로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의지했던 유럽은 세계대전을 통해 이성의 무기가 얼마나 더 잔혹하며 이념의 싸움이 얼마나 더 괴로웠던가를 절감했다. 믿었던 유일신의 배신?

    당시 지식인이 찾은 새로운 신은 실존주의였다. 실존..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은 우연히, 이유없이 세상이란 곤간에 던져진 thing이었던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위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란 시간과 공간의 역학에 그저 흘러갈 뿐이고 (퇴락), 어떤 사람은 마치 로빈슨 쿠르소처럼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세상을 재정의해 나간다. (실존)

    사르트르는 실존에 대해 명확한 명제를 제시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가령, 사물에 경우 의자란 존재는 목수의 머리(이데아)에 이미 그 본질이 구상되고 목수란 도구를 통해 실존으로 실현된다. 반면 인간의 경우 실존한 인간 이외에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어떠한 본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까뮈에게 있어서의 실존은 무엇일까?
    일단 까뮈는 스스로 실존주의자를 부정하고 있지만 실존주의 담론에서 항상 그가 등장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은 지극히 실존적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 시대 패러다임의 영향일까? 따라서 까뮈의 철학적 문제를 '실존'이란 코드에 의해 해석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까뮈의 실존은 '부조리'에서 시작한다. 세상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하지만 인간은 합리적이고 정의를 갈망한다. (그리고 우습게도 인간이 세상을 만든다.) 이 두 개의 모순된 상황에서 인간은 이성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본다. 부조리는 바로 이성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thing 이다. 가령 전쟁, 페스트, 죽음.. 같은 생로병사 모든 것이 이성으로서 납득할 수 없으며 이런 관점에서 세상은 부조리 투성이다.
    모든 인간은 부조리를 인식한다. 하지만 어떤 인간은 부조리를 인정하기도 하고, 어떤 인간은 부조리를 회피한다. 반면 어떤 인간은 부조리에 대해서 저항하는데 이 '저항'이란 부조리한 세계(환경)와 부조리하지 않은 자신(의 이성) 사이에서 자신을 찾고 확인하는 행위를 말한다. 까뮈의 실존을 논할 때 실존은 곧, 저항이라는 이음 동의어로 설명된다.


    이런 명제들 사이에서, 무엇 보다도 당시 이념의 카오스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까뮈와 사르트르와의 논쟁은 주목된다. 사실 둘은 절친한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념 차이로 서로를 등져야 했던 현실이 안타깝다.

    이 담론은 깊히있게 생각해볼 부분인데 일단 지금의 주제는 까뮈므로.. 이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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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는 그 자리에 없었다...

    가끔 심각하게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아무리 정교한 방법론을 도입하든, OOA/D 기법을 따르든, 좋은 COTS를 사용하든... 엔지니어로서 내 생활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이 업계 시스템의 구조를 뜯어고쳐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IT산업은 장인보다 '어떤 스펙을 만족하는 기술자'만을 원하고 있고 창의적이거나 슬기로움은 그 스펙에 들어가지 않는 듯 보입니다.

    여하튼.. 이 기사를 보고 아침부터 입맛이 쓰네요... - 빌어먹을 자본(지상)주의
    주로 경제/경영 얘기라서 주 문단만 먼저 뜯었습니다.

    "투명사회 협약이 발표된 얼마 후에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인 안철수씨가 마흔 초반의 이른 나이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과거에 “빌 게이츠가 와도 한국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란 말을 했다. 그가 떠나면서 다시 뼈아픈 한마디를 남겼다.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기술자 수와 그 학력·경력까지 요구하고, 심지어는 납품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면 감사까지 하는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수출실적을 올려도 중소기업들은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도, 종업원에게 충분한 혜택을 나누어 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게 모두 “사회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했다. 투명사회 협약은 노무현 대통령을 가운데로 하여 오른쪽에는 정치인들이, 왼쪽에는 재벌총수들이 손에 손을 잡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 안철수 사장은 대통령 왼쪽에 있지 않았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불법 정치자금의 면죄부를 받았거나, 소액주주의 재산을 훔쳤거나 또는 안철수연구소와 같은 중소기업들의 피를 말린 재벌총수들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


    ============================= 전문 =============================

    출처 : 인터넷 한겨레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3/001000000200503221833075.html)


    안철수는 그 자리에 없었다

    △ 장하성 / 고려대 교수·경영학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새롭게 시장이나 기업을 규제하는 정책이 없었다. 경제개혁을 했다고 내세울 만한 정책도 없었고, 소득분배나 복지증대를 배려하는 특별한 정책도 없었다. 특정 기업에 정치적 특혜를 주거나 반대로 특정 기업을 정치적으로 압박한 사례도 없다. 노동정책에서는 노·사·정이 아직 자리를 함께하지도 못할 만큼 무력했다. 정부 출범 당시에는 대통령 선거 때 약속했던 경제개혁을 버리고 현상유지를 택했다. 그리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하자 조급해진 정부는 다시 안정에서 성장으로 경제정책의 기조를 크게 바꾸었다.

    그랬는데도 노무현 정부는 기득권 보수세력으로부터 반시장적 또는 반기업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마침내 정부는 기업도시나 경제특구와 같은 극단적으로 친재벌·친시장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서슬 퍼렇게 시작되었던 대선 정치자금 수사에서도 재벌총수들에게는 모두 면죄부를 주었다. 공정거래법의 개정이나 증권 집단소송제 후퇴에서는 재벌들의 공개적인 압력에 굴복하는 수모까지도 감수했다. 누명을 벗으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정부의 애틋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세력들의 반기업·반시장 뭇매 때리기는 계속되고, ‘기업 지상주의’라고 불러야 할 만한 극단적인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기업의 목적은 이익추구다. 따라서 기업한테 이익추구 행위에 방해가 되는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거나 윤리적 규범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시장경제에 반하는 것이며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기업 지상주의다. 심지어는 아무리 좋은 외국 투자자라 할지라도 나쁜 재벌보다는 못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재벌 지상주의까지 판을 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돈 잘 벌고 일자리 많이 만드는 재벌들은 애국자이니 나쁜 짓을 해도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이나 기업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에 수반되는 책임은 일반시민이나 기업이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개인보다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기업은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더구나 ‘정권은 유한해도 재벌은 영원하다’고 할 정도로 재벌들의 경제권력은 정부나 정당의 정치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닌다. 따라서 재벌들이 개인이나 중소기업보다 훨씬 광범위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기업 지상주의자들뿐 아니라 법원까지도 재벌이나 대기업에 적용하는 책임의 잣대는 개인이나 중소기업 것보다 크게 작다.

    최근 정치인과 기업인, 그리고 시민단체 인사가 모여서 반부패 투명사회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부패와 불투명의 가장 큰 원천인 기업부분에서는 선언적인 내용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협약서명이 끝나자마자 협약 당사자가 “기업들이 과거에 어쩔 수 없이 행했던 잘못들은 국민적 합의를 거쳐 용서할 수 있다”며 ‘재벌 지상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서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명사회 협약이 발표된 얼마 후에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인 안철수씨가 마흔 초반의 이른 나이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과거에 “빌 게이츠가 와도 한국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란 말을 했다. 그가 떠나면서 다시 뼈아픈 한마디를 남겼다.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기술자 수와 그 학력·경력까지 요구하고, 심지어는 납품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면 감사까지 하는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수출실적을 올려도 중소기업들은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도, 종업원에게 충분한 혜택을 나누어 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게 모두 “사회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했다. 투명사회 협약은 노무현 대통령을 가운데로 하여 오른쪽에는 정치인들이, 왼쪽에는 재벌총수들이 손에 손을 잡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 안철수 사장은 대통령 왼쪽에 있지 않았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불법 정치자금의 면죄부를 받았거나, 소액주주의 재산을 훔쳤거나 또는 안철수연구소와 같은 중소기업들의 피를 말린 재벌총수들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장하성/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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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수 선생님 글 두편

    출처 : oisoo's board

    http://user.chollian.net/cgi-bin/ics/ics.cgi?id=oisoo&db=owner&action=read&num=531&vnum=510&&page=1&ftype=0&fval=&backdepth=1

    http://user.chollian.net/cgi-bin/ics/ics.cgi?id=oisoo&db=owner&action=read&num=532&vnum=511&&page=1&ftype=0&fval=&backdepth=1

     

    이분이 정치에 관련한 글을 쓴걸 간만에 봅니다. 고양된 맘을 약간 진정하시고.. ^^;

     

    탐나는 건 다 니들 거냐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중국은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긴다. 마치 대한민국의 주권이 통째로 없어져 버린 느낌이다. 어째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을까.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반성하자. 우리는 병들었다. 고름이 흐르는 자리에는 파리떼가 꼬이기 마련이고 파리떼가 꼬이면 구더기가 득시글거리기 마련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어디가 곪아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을까. 한 마디로 정신계 전체가 곪아서 고름이 질질 흐르고 있다. 외모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내면의 부실이 외모지상주의로 나타나고 정신의 허함이 물질만능주의로 나타난다. 화농을 치료하고 파리떼를 박멸해야 할 젊은이들이 스스로 화농을 덧내고 구더기를 배양하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무분별하게 외국문화를 동경하고 수용하는 어리석음을 자행해 왔다. 반성하자. 거리 전체가 국적불명이고 생활 자체가 외래일색이다. 반성하자. 마침내 우리는 주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정체성을 상실했다. 언젠가는 미국이 동두천을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고 러시아가 부산을 자기네 행정도시라고 우기는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대한민국 정부가 훈장을 세 개씩이나 수여하고 일류 명문대학에서 교수노릇까지 해먹었다는 작자가 식민지 역사를 은혜라고 표현하는 작태까지 서슴지 않는다.

    군사력과 경제력만 국력이 아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도 국력이다. 후지산이 대한민국의 영토고 베이징이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이라고 우기거나, 만주를 회수하고 대마도를 집어삼키지는 못할 망정, 독도를 왜놈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다. 정부와 국민의 강경한 대응을 촉구한다.

     

     

    꽃이 아니라도 좋으니 곧게 살고 싶구나.. ^^

     

     

    할미꽃

     

    나도 허리굽은 그 나이까지 꽃이 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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