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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트림 교육의 패권주의

일단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건 존 롤스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다.
우선 교육 기회 균등의 권리를 보장하라. 이후 차등을 줘라..

물론 나도 안다. 세상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는 것.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교육 만큼 계급 상승의 기회도 없거니와 모순되게도 현실상 교육 만큼 계급의 재생산의 장치도 없다. 있는 집에서 자식들을 죽어라 공부시키고 유학보내고 하는 것들이 현실적 반증이다.

이미 슈퍼엔진을 단 차와 일반 티코랑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자는건 지나친 기만이다.
도대체 우생학적으로 강남에 살면 우성 인자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라도 밝혀졌는가?

그렇다. 교육은 대부분 후천적 환경에 영향을 받고 후천적 환경의 중요요소는 경제수준이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수준에 의해 인간의 지능평가가 달라지고 결국 차세대 카스트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또 생각해볼 거리는 교육의 문제다.
교육과 평가는 동전의 양면이다. 교육이 허접하기 때문에 평가도 조악해진다. 사실 수능으로 인간의 지적 수준을 평가할 수 있을까? 반대로 현재 교육구조가 양질의 인간 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평가는 이 시험을 잘 보는 학생을 구분짓는 깔대기다. 하지만 그 깔대기라는게 너무 단순하고 편협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 논의에선 노력도 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슬기만 평가해달라고 요구하는 부류는 제외 시킨다.

더구나 그렇게 고생해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 대학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인재육성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가? (아니오 -.-; )

웃지 못 할 일이다...

물론 이 계급의 모순이 여전히 유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롤스의 이론을 끌여들여 .... 적어도 신분간의 모순적 상속의 갭이 줄여들도록 안정망관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고교 등급제를 하던지 말던지 나랑 상관없다.
교육정책 좀 제대로 관리 해라. 노력하는 성의라도 좀 보여라. (기회 균등권 보장) 그런 상황에서 정교한 차별이 (차등의 원칙)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계급간 피라미드의 높이를 최대한 낮혀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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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트림 교육의 패권주의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1050000/2004/10/001050000200410171938099.html



"(고교)등급제를 하지 않는다니.. 걱정이군요. 아이 학교를 다른 데로 옮겨야 하는지, 어떤지."
"부동산도 기운다는데…행정수도까지 가면 강남이 어떻게 되는 거죠?"

요즘 강남 학부모들이 나누는 얘기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고교등급제 폐지와 부동산 신화 붕괴, 이 두가지 정도면 강남은 ‘갈’ 수도 있다. 판검사 변호사 정부 관료 정치인 의사 교수 사장 등등으로 구성된 엘리트공화국 강남은 흔들릴 것이다.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대한민국을 강남공화국과 그 변방으로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몇가지 사안으로 그 구분은 명확해졌다. 재산세 파동-고교등급제 소동-수도이전 논란 등에서 비슷한 특정 태도를 보인 이른 바 메인스트림적 부류와 그 바깥에 있는 부류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강남은 메인스트림이다. 교육분야로 말하자면, 고교 학력차 인정하라, 내신 무시하라, 등급제 안할 수 있나, 사교육 하면 어떠냐, 정답 맞추기가 수월성이다, 수월성이 국가경쟁력이다, 평준화는 안된다 등등이 그들의 목소리다.

우리 사회를 고질적으로 갈라왔던 영호남 같은 것이 아니라, 강남과 비강남으로 상징되는 좀더 본질적 결절을 환기한 것이 이번 고교등급제 소동이 준 긍정적 측면이라면 긍정적 측면일 것이다. 고교등급제는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 기회를 줄여 그나마 남은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작은 미덕까지 훼손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기본 원리와 관련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학들이 그걸 몰래 해왔다는 사실에는 좀 어처구니가 없다. 이번 소동은 보편교육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차별적 특권-수월성-국가경쟁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교육으로 갈 것인지를 가름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고교등급제는 고교간 학력격차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적용된 것이 아니다. 내신 부풀리기나 변별력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내신 부풀리기가 정말 문제였다면 각 대학은 벌써부터 내신 변별력을 확보할 수단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건 크게 어렵지 않다. 강남 일부처럼 돼버린 대학들의 삐뚤어진 패권주의에서 비롯한 차별이고 속임수일 뿐이다. 서울대 총장까지 이런 행위에 가담하지 않아 피해의식을 느낄 정도라면 대학들의 패권주의 의식이 얼마나 깊은지 갸늠할 길이 없다.

나는 몇몇 대학들이 공언했고 이미 흘리기 시작한 성적부풀리기의 실태나, 고교간 학력격차 따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고 본다. 대학들은 그 실태를 있는 그대로 발표하기 바란다. 교육부는 성적 부풀리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고교 내신 시스템을 정비하고, 학력격차가 존재한다면 대학들이 고교등급제를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학력격차를 일소하는 강력한 조처를 시급히 취해야 한다. 고교등급제를 인정하지 않는 그 자체가 조처의 첫걸음이다. 등급제가 없다면 강남 특권은 해소된다. 그게 국가의 역할이다.

대학은 자신이 맡아야 할 수월성 교육의 많은 부분을 입시 메커니즘에 내맡기고 게으르면서도 차별적인 고교등급제를 채택함으로써 강남 이데올로기를 부추겼다. 강남은 등급제를 하지 않는 것이 역차별이라고 아우성을 칠 것이다. 등급제로 다른 지역이 받는 차별이 정상적인 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정부가 등급제를 금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강남불패 신화는 늘 강고했기 때문에 그 과정이 제대로 진행될지 확신하기 어렵다. 판검사 변호사 정부관료 정치인 의사 사장족 학부모들이 내신을 중시하겠다는 2008년 입시정책을 놔둘지도 모르겠다. 본고사가 되던 어떻든 막강한 사교육의 후광을 업은 강남은 자기복제를 위한 또다른 편법을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도대체 교육이 무엇인가? 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 교육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가 되었다. 대한민국이 보편교육을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흥동 편집부국장 hdlee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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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 종교적 피터팬 신드롬

난 가끔 의하하다. 개혁신학을 외치는 교단에서 전혀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는 모습을 보고...

또 신기하다. 자신의 과거의 모순을 부정하려는 모습 보단 억지로 두둔하려는 태도들의 벽이 교회에서 나의 신앙생활을 질식하게 한다.

내 신앙적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 줄 알지만 내가 배우고 성경을 통해 얻게된 신앙의 기준엔 많은 교인들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건 피장파장의 오류가 아니다. 난 당신들이 진심으로 걱정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으로 자유를 주겠노라 하셨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준 나의 자유를 다시 회수해간다. 그래서 난 두 개의 적과 싸우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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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피터팬 신드롬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1005000/2004/09/001005000200409301917065.html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보수주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란 과거 전통이 물려준 것들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기능에 더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종교인들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데 요청되는 ‘비판의식’보다는 이전 것을 그대로 전승하는 무비판적 ‘수용의식’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종교가 부여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던 사람들은 단순한 비판이 아닌 ‘종교화한 심판’을 받는다.

‘마녀’ ‘악’ 또는 ‘사탄’이라는 표현은 특정한 종교적 코드에 저항하고,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종교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붙여주는 이름표다. 그리고 이 종교화한 심판의 이름표가 붙여지면 정당한 재판의 과정도 생략된 채 무참하게 희생되어 생물학적 죽임이나 사회적 죽임을 당하게 된다. 수백만명의 여성들이 500여년에 걸쳐서 마녀로 몰려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중세 유럽에서의 마녀화형 사건은 한 종교가 자행하여 온 ‘죄악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뒤 발표한 글에서,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악’의 개념을 구성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비판적 사유’가 부재할 때, 착하고 평범하고 신실한 종교인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동료 인간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엄청난 악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이라크 공격을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신성한’ 일로 여기는 무수한 종교인들, 한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잣대가 되어 온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것을 마치 거룩한 종교적 사명인 양 착각하는 종교인들을 볼 수 있다. 종교적 색채로 가려진 이 비판적 사유의 철저한 부재야말로 ‘죽임의 문화’를 재생산하는 현대판 ‘악의 축’이 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놀라운 양적 성장 이면에는 ‘비판적 사유’를 억누른 ‘단세포적 복음 이해’와 ‘교회성장지향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비판적 사유란 ‘비판적 물음표 붙이기’ 작업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물음표’를 박탈함으로서 비판적 사유가 작동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무조건적인 ‘아멘’과 ‘예’만을 신앙적이라고 가르쳐 왔다. 결과적으로 그 가르침과 실천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차원을 철저히 상실함으로서 더 이상 성숙하기를 거부하는 ‘종교적 피터팬 신드롬’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기독교 안에 ‘인식의 사각지대’의 골이 깊어지고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인식의 사각지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원은 성차별에 대한 인식의 부재다. 한국 기독교 인구의 70%를 이루는 절대 다수인 여성들이, 절대 소수인 남성들에 의하여 모든 결정 과정과 결정권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문제 제기하는 비판적 소리가 이토록 부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성들은 남성 지도자들에 의하여 ‘교회의 꽃’으로 치켜세움을 받으면서, ‘물음표 붙이기’를 박탈당한 ‘영원한 유아’가 된다. 특히 목회자 중심적인 한국 기독교는 설교와 성서해석을 통하여 ‘순종과 희생과 봉사’라는 기독교적 덕목을 가부장제적으로 포장하여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들의 ‘제2의 성’으로서의 존재를 강화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이제 양성평등에 대한 사회정치적 인식이 다양한 차원에서 광범하게 확산되는 이 시대에 한국 기독교가 그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기독교 인구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여성들을 끊임없이 ‘부차적 존재’로만 규정하는 그 남성중심성의 상자로부터 과감히 탈출해야 할 것이다.

강남순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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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는 나의 것!!

부족한 영어로.... 여당과 여당을 각각 ruling party, opposition party 라고 합니다.

아래 시민님 말씀대로 '반대당'이죠...

과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 어필하는 이유가 '반대' 밖에 없을까요?
대안 없는 반론은 보기 민망합니다. (진흙탕 싸움...) 유치하게.. 보다 좋은 정책 제시를 못 한다면 침묵해야죠...
이건 시장 경제 원리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스포츠에도 챔피온의 밸트를 훔치기 위해선 약간의 핸디를 극복해야 하죠...
정리하자면 반대할 수 있는 자격은 차별화되고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대안을 전제해야 한다.!! 자신의 무지(대안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 어필만으로 반대만 일삼는다면 되려 국가를 위해 반작용하고 있는 짓이다... 능력이 없다면 간판 내려라..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강한 자가 생존하는 건 자연의 법칙입니다.

물론 정치 사안들이 숙고를 통해서 결정된 브레인들의 전쟁이기 때문에 '그 나물에 그 밥'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차별화 시키기 상당히 힘든 것도 인정합니다...

모.. 이런 것 까지 갈쳐줘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라카토스(Lakatos)에 의하면 패러다임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작업으로 ‘연구 프로그램 (Research Program)’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1. 새로운 패러다임이 더 많은 경험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
2.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 패러다임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3.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 패러다임에 비해 더 많은 경험적 내용의 일부가 확증되어야 한다.

이런 류의 대안이 있지 않는 한 오로지 반대만 하는 태도는 공리에도 맞지 않다..!!

지금 100분 토론 보면서 글쓰고 있는 중인데 유시민 의원이 이런 말씀을 하시네요...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에게)  "특단의 조치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대한민국 이래로 계속 제기되는 문제들만 말씀하지 마시고.... 좋은 방안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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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정치기상도] 반대는 야당 존재 이유 (1999.10.04)




"들추고 파헤치고 물어뜯는다."

정기국회에 임하는 야당의 태도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본회의 동티모르 파병안 표결에서는 집단 퇴장했다.

상임위원회 별로 진행하는 국정감사에서도 불법 통신감청 문제, 김옥두 국민회의 총재 비서실장 부인의 "보험 스캔들",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사법처리 문제 등 크고 작은 모든 쟁점에 대해서 야당 의원들은 정부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아 온 야당"에 혀를 끌끌 차면서 한나라당에 "건설적 야당"이 되라고 주문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건 비현실적인 요구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건설적 야당"이란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 본고장인 서유럽 주요 언어에서도 야당을 가리키는 말을 직역하면 "반대당"이 된다.

야당의 임무는 무슨 일이든 일단 반대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민주주의 역사가 이제 겨우 10년 남짓한 우리 나라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더러는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성격"을 거론하고 "초보여당의 난폭운전" 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총재를 맡고 국민회의와 한나라당 의원들이 소속 정당을 바꾼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질 리는 없다.

야당이 쟁점마다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정부여당 역시 매우 합리적이어서 야당의 대안 즉각 정책에 반영한다고 하자. 그래서 경제가 살고 사회가 안정되고 정의가 이루어진다면, 그 공로는 결국 야당이 아니라 집권당과 정부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토론을 중계방송하는 것도 아니고, 여야가 시끄럽게 충돌하고 독설과 폭로가 터지지 않는 상임위원회에는 기자들도 잘 들어오지 않는데, 그런 좋은 정책을 제시한 것이 야당 의원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이 어떻게 알 것인가.

집권당의 중대한 실책을 폭로하고 물어뜯는 것 말고는 야당이 자기의 존재를 알릴 방법이 없다.

국민들이 보기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야당이라면 정권을 되찾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만약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를 거두어 또 한 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면, 지금 여당인 국민회의는 즉각 "전투적 반대당"으로 돌아갈 것이다.

국민들이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얻을수록 국민과 정치는 가까워지고 야당은 정책대안 제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국방위원회와 보건복지위원회 등 몇몇 상임위 의원들이 국정감사장에 들어 온 시민단체의 의정활동 모니터 요원들을 내쫓아 버린 것은 일종의 "자해" 행위라고 해야 한다.

특히 이를 주동한 여당의원들은 "반대만 일삼는 야당"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초등학교 성적표에도 석차가 없어졌다"며 그 "자해"를 합리화하는 어느 의원들의 말씀은 듣기조차 민망하다.

평가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게으름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가와 경쟁이 없어서 모두가 행복하게 지내는 조직이나 사회가 발전하는 일은 없다.

없는 돈과 인력을 힘들게 끌어 모아 조직한 시민단체의 의정감시를 봉쇄하는 국회에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공개적 평가를 싫어하는 국회의원들은 모쪼록 이번 임기가 끝나면 "음지에서 일하는 조직"으로 직장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 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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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2 , 그리고 국보법



공포

공포는 심층적 내면의 공포가 있고 조작된, 교육된 공포가 있다. 이 둘을 판별하는 기준은 어떤 사례를 얘기했을 때 "맞어, 맞어.." 긍정하는게 (공감) 전자인 반면 약간 껄끄름한 뭔가가 있는게(학습) 후자다. 예를들면 흉찍하고 기괴한 정상적 형상에서 변형된 형상을 보는 것에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프레디 같은... 하지만 우리는 하얀 소복을 입고 열라 얼굴이 창백한 여자에겐 [전설의 고향]등을 통해 쇠뇌된 공포를 느끼게 된다. 무조건 반사와 조건 반사의 차이 정도일게다...

우리가 쇠뇌된 공포심은 아주 다양한데.. 이를테면 북한은 악의 축이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계가 무너질 것이다.. 등이 있다.

난 이들에게 진심으로 제안한다.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제발 우기지 말고 객관적으로 옥석을 가려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자고...

혹은 똑같은 논리로 이렇게 말하고도 싶다. 과거 민주인사들을 잡아다 고문했던 국보법을 그대로 적용해서 다들 잡아 쳐 넣어버릴까??? - 또 하나의 공포

 


공포 2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우리는 실제를 외곡되서 본다. 그래서 오해도 생기고 '이 산이 아닌가벼??' 이러기도 한다. ^^;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은 동굴 밖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동굴 특유의 울림현상으로 무섭게 듣는다.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은 동굴 밖의 사람들의 커다랗고 (평면화 되지 않는 벽 때문에) 외곡된 그림자를 보고 도깨비를 연상한다.
그래서 그들은 동굴 밖을 나올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동굴밖의 사람들은 (그들과 동등류가 아닌) 무서운 존재다.... 공포

현재 국보법에 반응하는 우리가 이와 같다. 특히 수호를 외치는 이들의 심리가 이런 듯 하다.
다시 말하자면 국보법의 실제는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외곡, 비약된 결과만을 걱정한다.
적어도 국가 안보에 있어서 북한이 잊을만 하면 한번씩 위협이 되는 소식을 들려주고, 무엇보다도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구체화된 '북한, 제2의 이라크 만들기' 파일의 존재...
우리는 또 불안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불안과 실제의 관계는 그림자와 사람의 관계 정도다. 가끔 나는 반공이라는 매트릭스에 사는 것 같다.

사실 이 공포 방정식은 생경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이 공포 바이러스에 아주 잘 내성을 갖고 산 듯 하다.
복지와 분배를 얘기할때 18번 처럼 등장하는게 우리나라 경제 위기다. 호주제 폐지를 얘기할 때 가계붕괴를 얘기한다.

언제부터 우리들이 이렇게 소심해졌을까?
맞장 뜨자!!
동굴 밖으로 나가서 우리가 보는 그림자가 기실 사람이 아니라 진짜 도깨비라면 싸워 이겨야지 숨어서 벌벌떨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보는 국보법


사실 난 국보법 조항을 조목조목 읽어보지도 못 했을뿐아니라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의 부족을 고백한다.
그래서 국보법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고 했었다.
하지만, 확실히 나에게 남아있는 국보법의 이미지는 국보법이 아니라 '정권보좌법'이었다.

실제로 국보법 기소자들 가운데 북한과 연계하여 남한 민족해방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사회주의 이념으로 똘똘 뭉쳐 적화통일 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주체사상 주의자가 몇이나 되는가? 또 이런 사람들을 싸잡아서 합산한다 한들 몇이나 되는가?

국보법의 해석의 차이로 우리나라 재야인사, 민주인사들을 더 잡아들이는 어망이 국보법 아니었나? 이런 측면에서 위의 양식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국보법 폐지 + 대체 입법에 긍정한다.

어떤 측면으로는 국보법 스스로가 파쇼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마치 마법의 반지가 반지의 제왕을 만들듯이...
민주인사 사냥에 동원된 것과 관련해서 이런 오류를 낳는 이유가 국보법의 해석의 차이가 있다. 물론 많은 법들은 해석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단지 해석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어떤 초딩반에 '수업 분위기를 망치는 학생은 한달동안 화장실 청소'란 클래스 룰을 만들었다고 치자. 이 룰을 시행하는 사람은 반장이라 치자. 이때부터 반장은 막강한 권위를 갖게 된다. 맘에 안드는 학생은 언제든 이 룰을 적용시킬 수 있다. 이제 반장은 제왕적 권위를 갖게 된다.

바로 국보법이 (짐이 나라인) 자신에게 도전하는 도전자를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보법은 '법'으로써도 문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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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전문분석 (출처 :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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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관련 형법 조항 들  

출처 :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http://www.antikukbo.net/board/read.cgi?board=data&x_number=1094869457&r_search=조항&nnew=1

          <형법>


제87조 (내란)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는 다음의 구별에 의하여 처단한다.

     1.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

     2.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하거나 기타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연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살상, 파괴 또는 약탈의 행위를 실행한 자도 같다.

     3. 부화수행하거나 단순히 폭동에만 관여한 자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제88조 (내란목적의 살인)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

제90조 (예비, 음모, 선동, 선전)

  ①제87조 또는 제88조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3년이상의 유기징역이나 유기금고에 처한다. 단, 그 목적한 죄의 실행에 이르기 전에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제92조 (외환유치)

  외국과 통모하여 대한민국에 대하여 전단을 열게 하거나 외국인과 통모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제99조 (일반이적)

  전7조에 기재한 이외에 대한민국의 군사상이익을 해하거나 적국에 군사상의 이익을 공여한 자는 무기 또는 3년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101조 (예비, 음모, 선동, 선전)

  ①제92조내지 제99조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2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단, 그 목적한 죄의 실행에 이르기 전에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제114조 (범죄단체의 조직)

  ①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그 목적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단한다. 단, 형을 감경할 수 있다.

  ②병역 또는 납세의 의무를 거부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1천500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95·12·29>

  ③전2항의 죄를 범하여 유기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벌금에 처한 자에 대하여는 10년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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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40925084437&s_menu=정치


실신한 국보법  
  [기고] '김용갑 의원 졸도' 사태를 보고         2004-09-25 오전 9:00:39    

  필자 : 진중권/정치평론가

  
  김용갑 의원이 국회 단상에서 제 분을 못 이기고 쓰러졌다. 대한민국을 한 몸으로 떠받치던 인간 국보법이 제 풀에 지쳐 졸도했다. 상징적이다. 50년 동안 선무당처럼 펄펄 뛰던 그 악법도 이제 기운이 다 쇠한 모양이다. 물론 아직도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칼로 제 배를 갈라 그 놈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이 미련한 신체 예술로 그들이 보여준 것은 ‘국산 칼, 더럽게 안 든다’는 사실뿐이다.
  
  언뜻 보면 국보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흐름이 대세같다. 착시현상이다. 촛불도 꺼지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낼름거리는 법. 우익 시위의 격렬함은 ‘마지막 발악’이다. 그 살벌한 제스처로 저들은 국가의 안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공포는 북한의 안보위협에서 오는 게 아니다. 국보법이 폐지되면 도대체 이 사회에 자신들이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 저들은 그게 무서운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그 또한 착시현상이다. 여론은 추이를 따라 동태적으로 읽어야 한다. 국보법에 관한 여론의 추이는 목하 ‘개정불가’에서 ‘개정가능’을 거쳐 ‘폐지가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게다가 반대론자들의 상당수가 사안 자체에 대한 판단보다는 “경제가 급한데 웬 국보법 논란이냐”는 상황논리에 잠시 설득된 상태.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폐지’에 목숨 거는 것을 이해 못하는 이들은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수호’에 목숨 거는 것도 이해 못한다.
  
  50년 넘게 존속했던 법을 없애자니 시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정치권에서 자꾸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완 운운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최근 형사법 전문가들은 국보법의 공백은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뭘 더 대체하고, 뭘 더 보완한단 말인가?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안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국가의 ‘안전’(安全)을 위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유권자의 ‘안정’(安靜)을 위한 심리요법일 뿐이다.
  
  대체나 보완은 필요 없다. 형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을 처벌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유린이다. 고작 “불안감” 따위를 해소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은 따로 있다. 국보법을 확실하게 폐지하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이미 사문화되어가는 법, 폐지해도 별 일 없다는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하게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이 또 있을까?
  
  여당 내의 기회주의 분파는 제 이름대로 개혁을 “안개”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어영부영 타협하거나 질질 끄는 것은 전술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빈틈을 주면 안 된다. 선명하고 명확한 입장을 정해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보수층이 국보법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 상징성 때문이다. 국보법의 폐지가 기정사실이 되면, 깃발을 잃은 저들의 반항은 순식간에 무력화할 것이다. 국보법은 죽었다. 남은 것은 진단서를 떼고 송장을 치우는 일뿐이다.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표면에 이는 보수의 거센 파도에 불구하고 바다 속의 조류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지금 개혁정권은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차기정부의 성격을 묻는 설문에 시민의 56.9%가 “진보개혁 성향의 정부”라 응답했고, 오직 35.7%만이 “보수안정 성향의 정부”라고 대답했다. 현 정권의 보수화에 실망해 떨어져나간 지지층이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진보개혁”을 원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뭘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은가?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 따위에서 국보법의 대안을 찾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누군가 국보법 폐지의 ‘대안’을 요구하거든, 가령 취약한 정보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 등,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 제시할 일이다.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을 못 받아들이겠는가. 야당 역시 제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겠다는 부정적 발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뭔가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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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고딩 때 공부를 안했다지만..

언어해석 능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요즘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단어들이 너무나도 많다...

우선 '친일'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용공'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상생'이 무슨 뜻인지.. '민생'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옛날엔 상식적인 수준에서 남들보다 잘 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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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생각할수록 개떡 같은 현실이지만 ...

홍세화 선생이 우리나라 대학생을 지적한 얘기 중에 "'적성' 따라 학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따라, 그리고 제비 따라 강남 가듯 시류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 그대는 지금까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고전을 앞으로도 읽을 의사가 별로 없다." 라고 했습니다. (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 http://board.jinbonuri.com/view.php?id=col_hongsa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고전&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 )

이외수 선생은 개떡 같은 현실이지만 실력과 정신을 갈고 닦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가끔 성공과 출세로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비전과 자신의 슬기를 차압해버린 사람들을 만날 때... 입맛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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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 oisoo's board  (http://user.chollian.net/cgi-bin/ics/ics.cgi?id=oisoo&db=owner&action=read&num=451&vnum=431&&page=1&ftype=0&fval=&backdepth=1)


생각할수록 개떡 같은 현실이지만

젊은이들이여
정신을 차리자

나라를 통째로 잃어 버리기 전에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하자

우리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외면하고
무분별하게 외래문물을 받아들여
국적불명의 허수아비로 비틀거리던 시간들을
반성하자

아무리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도
그 나라 젊은이들이
그 나라 문화를 모르고 그 나라 예술을 모르면
비천한 족속들로 경멸을 당하기 마련이다

일본은
독도를 먹어치울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이도다완까지
자신들의 조상이 물려 준 문화유산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가치를 모르고 천시했지만
자신들은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해서 보물로 극진히 모시고 있으니
당연히 자신들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어떤가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개소문이 중국 사람으로 둔갑을 하고
한수 이북이 모조리 중국 영토로 둔갑을 할 판국이다
그동안 정치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으며
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강대국들이 헛기침만 한 번 내뱉아도
경기를 일으키는 주제에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지
세계화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세계화란 말이냐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자존심도 없는가
내 나라가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판국에
아직도 그대들이
외모 지상주의나 물질만능주의에 정신을 팔고 있다면
그야말로 이 나라는 끝장이다

생각할수록 개떡 같은 현실이지만
이제 이 나라는 그대들을 지켜 줄 의지와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대들이 이를 악물고
이 나라를 지켜 줄 의지와 능력을 배양하자
우리의 빛나는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정신과 영혼의 성장에 총력을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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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2 - 소유냐? 존재냐? (1)


'소유'라는 욕망의 기차

그래..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길지 않는 인생 가능하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재화가 한정되어있는 이상 가능하면 많이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가 많은 가치를 대변해준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윤리적이고 합법적인 선에서 화폐를 많이 확보하고 정당하게 누려야 한다. 그렇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야 한다....
강산에 형님의 [문제]라는 가사를 들어보자..
" ........... 이왕이면 넓은 정원 풀장있는 큰집 사는돈 / 요즘 세상 예쁜 여자 사로잡는 돈 돈이 필요해"

유사 이래로 제일 오래된 종교를 믿으세요~ 우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사실 기독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가슴속에 각각의 절대자와 함께 우리의 신을 모시고 있지요~ 그것은 물신.... 여러분... 부~자 되세요~

여기까지만 하자....

하지만 이외수 선생님 이런 돈 많이 벌어 부자되자는 프로파간다의 홍수 속에 사자후로 일갈하신다.

"낭만이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낭만이 밥먹여 주냐, 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할 말이 없다. 밥을 먹기 위해 태어나서 밥을 먹고살다가 결국은 밥을 그만 먹는 것으로 인생을 끝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같은 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다만 비참할 뿐이다.
밥 정도는 돼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낭만을 아는 돼지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라. 그러나 낭만도 사랑하라. 애당초 사랑이라는 것은 낭만이라는 강변에 피어난 꽃이다. 낭만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다. 마른 모래사막에서는 한 포기의 풀잎도 자랄 수 없듯이.
돈이나 명예, 권력으로 결코 사랑의 싹을 틔울 수 없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는 고작 사랑을 가장한 플라스틱 가화들이나 사들일 수 있을 뿐이다."
- [말더듬이의 겨울 수첩] 중

초근목피나 보릿고개란 단어를 모르고 자란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것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시스템이었다. '이쯤 되면 인간다운 삶을 모색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현재의 담론, '성장만 있었지 분배가 의심스러운 우리나라에서 또 성장만을 위해서 새마을의 역군이 되야하는건가?' ....


에리히 프롬은 이 배금주의의 문제를 '소유'란 개념으로 해석하고 '존재'란 개념을 대안으로 놓고 있다.
장황하게 현대의 집단무의식적 착란현상을 배금주의로 설명했지만 프롬의 개념으로 정리하자면 '나는 소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데카르트가 오히려 낭만스러워 보일 정도다.

국가의 국민 길들이기 그리고, 국민의 맹점

80년 후반, 우리나라도 드디어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이제 연애질도 자동차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추석에 기차타고 가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언젠가 부터 사교육비를 위해 가사노동만 해도 됐던 주부가 일을 하기 시작됐다. 말도 안되는 자녀들의 학원비를 위해...

남들 다 갖고 있는 자동차 나도 갖기 위해, 다들 보낸다는 학원 내 아이도 보내기 위해 우리는 이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트렌드에 이의를 제기할 시간도 없다. 개처럼 벌어서 빨리 '남들처럼' 살기위해 비장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내려보고 있는 기득권은 이런 생각을 한다. '역시 쟤네들은 말 잘 들어..'

시스템의 모순? 교육문제? 부조리한 먹이그물? 짜고 치는 판? 이런거 관심이 없다. 단지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안 오면(내 '소유'에 치명적이지만 않으면) 되고, 오히려 이런 무간지옥에서 한계급 더 밟고 올라가기만 할 뿐이다. 또 위에 있는 분들은 생각하신다. '이미 자리가 다 내정됐는데... 70년대 이후에 신재벌이 나온적 있었나?'

여기엔 두가지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시민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소유'로서 표현한다.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에 걸맞는 집에 살아야 하고 '나'에 걸맞는 차와 옷을 입과 '나'에 걸맞는 품위생활을 해야 한다.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의 소유를 통해서 투영되는 '나'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인격이라거나 양식, 감성 같은 것들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또 나의 그것들을 대변하는 소유물을 갖기만 하면 된다.
프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주체)는 무엇(객체)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은 객체를 소유하고 있음을 빌려서 자아를 정의하고 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주체이다."
만약 우리가 나이키 신발을 샀다고 치자. 한동안은 혹시 때가 묻거나 기스나 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걷고 더러운 바닥은 밟지도 않는다. 이때 내가 나이키를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나이키가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치자는 잘 짜여진 이런 소유의 악순환의 판만 짜 놓고 열심히 용역과 세금, 재산을 빼내기만 하면 된다. 서로가 치사하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치사하다면 치사한 것에 해당하는 '소유'를 가져야 한다... 꽥~ (이 쌍방과실 범죄.. ㅋ)

우리에게 '소유'란 어떤 의미가 있는건가??

미국에서 실제 설문됐던 조사 결과인데 직장인들에게 모두가 연봉 2000만원 받을 때 3000만원 받을래? 모두가 연봉 5000만원 받을 때 4000만원 받을래? 물어봤더랜다. 직장인들의 대부분은 전자를 택했더랜다.

풀어 말하자면 내가 얼마를 갖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남들보다 많이 받아야 한다는 거다. 내가 정말로 소렌또 타고 싶어하는데 모두가 그랜저 타고 다니면 난 에쿠스는 타야겠다는 심리다. 여기서 질문 : 정말로 소렌또 타고 싶댔자나요???????
우리에게 있어서 이 '소유'의 문제는 자기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이것은 중상위 계급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해소될 수 없는 '소유'다. 가령 중상위 계급이라 하더라도 이제 상위의 '소유'를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절대로 해갈되지 않는 바닷물을 마시는 듯한 무한 퇴행적 '소유'다.


소유냐? 존재냐?

" "가지다(have, haven)"라는 말은 착각하기 쉬운 단순한 말이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 "존재하다"라는 말은 ... 있는 사람(who is, der ist)과 있는 사물(what is, was ist)의 실존과 실재를 표현하며, 그것(사람)의 실체성과 진실성을 입증해준다. 누가 또는 무엇이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그 또는 그것의 겉모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유 양식은 소유 자체만으로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존재양식이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식이다. 존재양식은 실존적 가치부여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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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서두가 너무 길었고 제가 책을 아직 다 읽지 못 한 관계로 여기서 일단락 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길게 쓰면 잘 안 읽자나요... ^^;;) 한참 예고편만 보여주고 본방송을 연기해서 죄송합니다... ^^;
[소유냐? 존재냐?]를 다 읽고 나머지 본론에 대해서 얘기 하겠습니다... 끝으로 Dynamic Duo의 [Pride]란 노래가사(개코가 부르는)로 이 논의를 일단락 하겠습니다.. 공감이 많이 가는 가사래서 외우고 있다는.. ^^


"......................... 욕심 많은 자의 이빨에선 비린내가 나
그들의 성공 역시 썩은 구린내가 나 차라리 욕심 따위 쉽게 버린 내가 낳아
난 still 맨발 배고파도 떳떳하게 선 두발 그 두발로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세상을 훔쳐봐 사람들의 눈속에서 나는 남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
오직 지켜보는 주님의 눈길만이 날 가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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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1 - 자유로부터의 도피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실존성을 함의한다. 그런 생각의 기반은 에리피 프롬의 '자유'에서 근거를 찾았다.


원인 및 배경

근대 서구 유럽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주체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귀족에서 남성, 노동자, 여성 그리고 이외 소외된 계층 순으로 하나씩 참정권이 회복되었고 종교적으로도 천주교의 권위와 형식에서 종교개혁을 통해 보다 종교인으로서 자유권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므로써 이제 개인은 주체적인 결정의 단위, 모든 권위와 권력으로 부터 자연인의 권리를 하나씩 획득하게 됐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내성과 관성을 더 함에 따라 권력으로 부터 독립된 상황에 놓이게 됐죠...
하지만, 자연인 회복의 결과는 오히려 이들을 불안하게 됐습니다. 많은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다 보니 그 책임은 가중되고 어려운 의사결정들을 스스로 담당했어야 했습니다. 즉, 주체적인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이 보장됐지만 이와 비례해서 불안과 근심, 책임이 쌓이게 됐죠..
이런 전차로 다시 강력한 권력의 요구가 내제적으로 등장하면서 잠재적으로 그 권력에게로 다시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반납하게 됐습니다.
이들이 갖게된 '불안'을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 '고독과 무력함'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그렇게 투쟁했던 자유의 결과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기에) 고독과 무력함으로 되돌아왔던거죠..

고독과 무력함 도피법

고독과 무력함은 다시 안정감을 요구하게 됐으며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일반적인 무력함 찾기 방법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 째, 소유로의 도피
최초, 인간은 생존권을 보장 받기 위해 소유하죠. 다음으로는 소유를 위해 소유하게 됩니다.
인간은 소유하므로써 삶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현재 천민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아주 잘 공감하는 부분일 겁니다.- '먹이(자본) 축적=생존'이라는 원시적인 유전자가 있는 인간들은 '소유'를 통해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유라는 것이 바닷물과 같아서, 상대성을 띄게 되고 이 '소유양식'속에서의 소유는 끝없는 퇴화적인 무한퇴행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소개할 때 더 정리하기로 하겠습니다.

둘 째, 권력, 명예로의 도피
어느정도 '소유'가 확보된 사람들은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오목을 수료한 사람이 바둑을 배우는 것과도 같은데요.. 즉, '소유'가 같고 있는 구조적인 오류를 그대로 갖게 되는거죠..
단지 소유로의 도피 방법은 자본적인 안정감을 찾는데 반해 권력, 명예로의 도피는 사회적인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은 자유를 찾기 위해 몇 백년에 걸쳐 투쟁했다가 다시 자유를 양도하려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나찌 시대를 살았고 유태계였기 때문에 나찌를 피해 망명해야했던 에리히 프롬에겐 파시즘이라는게 하나의 화두가 됐다고 합니다.
사실 유럽인들이 도피하려 했던 대피소가 이 파시즘이었거든요...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소극적 자유 : Free from , ~로 부터의 자유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인들은 '고독과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독과 무력함'을 회피시켜줄 대상을 찾습니다. 파시즘이죠..
예기엔 묵시적 계약관계가 성립합니다. 카리스마 있고 강한 힘을 갖은 대상은 어느정도 틀을 제공함으로써 '고독과 무력함'에 대한 마취제를 주게 되고 약하고 소심한 개인들은 강력한 권력에 복종하므로써 그 틀에 들어갈 수 있는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 관계를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초인적인 근면과 성실, 강한 군인을 강요하고 유태인을 박해했죠. 독일인들은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태인을 괴롭히면서 배설합니다. (이 피학과 가학 성향의 연결적 상관관계..)
여기서 독일인들은 1등 민족인 자존심을 갖게 되고 이런 강력한 나라에 살기 위해서 초인적인 국민으로의 요구에 충실해집니다. 또한 이런 울타리 속에서 1등 국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다른 사례로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로 눈에 띄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노예라거나 신앙만 강조하는 종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태운다거나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고난 받으면 천국간다'란 논리들.. 기실 그 이데올로기의 깊은 의미라던가 속내도 모른 채 '계급을 없애고 모든 토지를 공유한다'는 말만 믿고 죽창을 들었던 (또는 그 반대편에 서서 똑같은 형태의 이유로 이들과 대결했던) 우리 아버님 할아버님들...
이들에겐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충실할 수록 자신의 안정감을 보장받고 싶었던 심리가 있습니다. - 교활한 선동가들은 이 최면술의 대가..

도피의 성격

이런 '~로 부터의 자유'는 결국 도피적 자유이기 때문에 태생적인 자유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첫 째, 권위주의적 성격, 상술한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를 말합니다. 좀 물리적이죠..
둘 째, 기계적 성격
마치 사회라는 시스템에 잘 적응한 부속품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나'라는 부품이 잘 돌아가기 때문에 존재감을 느끼게 되고 이 존재감 때문에 (용도 폐기 당하지 않기 위해) 더 사회성을 갈구하죠..
이들은 유행이나 시대적 트렌드 이를테면 TV 연속극, 메이저 음악 장르, 패션 ... 같은 것들을 잘 수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extreme sports나 싸이월드, 블로그 같은 것들이 대중화 된 원인이 그런류를 즐기거나 어떤 개인적 목적도 있겠지만 심리적으로 다들 하기 때문에 안 하면 왠지 소외감을 갖게 되어 하는 경우가 많죠..

사실 개인적으로 사회적이지 못 한 탓에 이런 사회성, 기계성이 폭력처럼 느껴진적이 많았습니다.
술자리에서 동료나 학교 친구들과 화제를 공유하기 위해서 (정말 억지로) TV 프로그램의 정보나 제일 선호하는 연예인들의 정보를 수집한 적도 있었죠.. 이런 한심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너무도 환멸스러워서 왕따를 작정했지만요... ㅠ.ㅠ

더욱이 현재 서울의 중심가를 거닐다 보면 이런 '~부터의 자유'들을 봅니다. 다들 개성을 갖고 자신의 개성, 자유를 어필하고 있지만 그들의 문화, 패션들은 몇가지 운신의 폭을 갖을 뿐 천편일률적이기 이를데 없게 보이거든요..


적극적 자유 : Free to , ~에의 자유

'~로 부터의 자유'는 이렇게 물리적, 형태적 자유를 띄는 반면 '~에의 자유'는 본질적, 실존적 의미를 갖습니다.
자신이 실존적 존재로서 의미를 찾기 때문에 '고독과 무력함'이나 소외가 무섭지 않죠...
제가 갖고 싶고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자유의 의미에 실존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학습을 통해 편하게 자신의 운신의 폭을 제안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이고 실존적으로 나의 취사선택을 내가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유럽인들이 도피했다시피 인간은 적당히 약하기 때문에 이 본질적 자유를 극복하기 위해 상당히 용감해야 하며, 적당히 슬기로와야 하며, 어느정도 착하기도 해야합니다. 어렵죠...

아직도 봉건적 권위와 질서에서 독자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다시 전체주의적 예속의 개인이 아직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전 Free to 하겠습니다. 못 하더라도 의지를 갖고 노력할겁니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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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기독교가 변해야 사회도 바뀐다&quot;-리영희 교수

절반은 남북 문제에 대한 얘기고... 1/3은 기독교에 대한 얘기인데..
"남한이 북한보다 더 나은 정치와 경제제도 하에서 더 큰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릴 의지가 있는가"
이부분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의 의지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세뇌적인 자유입니다. 자유로의 의지는 있지요.. 바로 이런 자유로의 의지지요..
하지만 이런 수식어, 이런 제약들을 제거한 자유로의 의지가 있는가? ( 이 부분은 에리히 프롬을 소개하면서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문제...
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예수를 모르니까, 우리가 너희보다 훨씬 우월하다' ... 자꾸 이래서 유대인들은 자신의 고향, 주변국가들에게 왕따 당했죠..

제가 제시하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유일신인거 알겠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믿음이고 다른 종교를 배타적으로 보는.. 폄훼하는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는거죠.. 입증하시라는거죠..
이런 선행과정 없이 무조건 우리가 옳다는 비장함은 연극(허구)에 지나지 않을까요?

"교회가 행위적 차원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자기 입증을 할 수 있을 때 민족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내면적인 신인관계, 좋습니다. 형제, 자매간의 화목한 교우관계, 좋습니다. 그런 좋은 것들... 빛과 소금 되려면 세상과도 조화해야하지 않나요??
오히려 거룩(구별됨)을 앞세워 세상과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자나요?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점점 타락하고 있는거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1/3은 기독교인입니다.

근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거... 우기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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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변해야 사회도 바뀐다" - 리영희 교수 강연

http://holybbs.net/forum/Forum1/HTML/003515.html

리영희 교수, 배타적 우월적 태도 버리고 높은 종교적 가치 제시해야

우리사회의 대표적 진보지식인 리영희 명예교수(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74)는 "한국사회가 바뀌려면 한국기독교가 바뀌어야 한다"며 평소 그가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풀어 놓았다. 리영희 교수는 장공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6회 장공기념강연회에서 '한국기독교가 민족사회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11월 25일 경동교회(박종화 목사)에서 강연했다.

리영희 교수는 강연을 통해 남북관계, 기독교의 역할, 기독교인의 실천 등 세 가지 주제를 놓고 변증법적 틀에 따라 설명했다. 즉 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한 뿐 아니라 남한도 변화돼야 하는데, 특히 사회 변화를 위한 기독교의 역할이 중요하며, 기독교의 역할은 개인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통해 올바로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남한도 바뀌어야 한다

리 교수는 가장 먼저 남과 북의 관계와 통일의 방향에 대해 다뤘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남한은 변화될 게 없고 북한만 변화돼야 한다는 사고논리가 굳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기에 앞서 남한의 변화를 외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을 이분법에 따라 차별하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남한은 무조건 선하고, 우월하고, 완벽한데 반해 북한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사고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리 교수는 남북통일이 독일의 통일철학인 '접근에 의한 변화'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동·서독이 내전을 겪지 않고 순조롭게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서독과 동독은 변화와 통합의 노력에 앞서, 서로를 민족과 국가가 다른 두 개의 국제단위라고 받아들였다. 각자의 개별적인 정체성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접근하는 가운데 질적인 변화의 힘이 작용해 결국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독일통일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리 교수는 우리 남과 북이 독일의 통일 노력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민족은 하나인데 국가만 두 개'라는 사고틀 속에 있다는 것이다. 계속 북한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한 민족, 한 국가, 한 사회라고 고집하며 희망만 갖고 있으면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기독교는 한국사회 변화시키는 원동력

그렇다면 리영희 교수가 얘기하는 '남한사회에서 바뀌어야 할 부분'이란 어떤 것일까. 리 교수는 "남한이 북한보다 더 나은 정치와 경제제도 하에서 더 큰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릴 의지가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그는 남한사람들에게 나눔과 인정이 없으며, 폐쇄적으로 오로지 자기만의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 리영희 교수는 한국인 76%가 '삶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제시하며,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사회문제를 '인간 소외'라고 보았다. 한국인들이 납치, 살인, 강간 등 온갖 범죄와 타락과 이기주의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적 고귀함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리 교수는 "남한사람들이 정치적 자유를 얻었지만, 총체적으로 소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모든 인간이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종교가 올바른 가치를 전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 교수는 남한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종교 이상으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는 단위는 없다. 교회가 행위적 차원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자기 입증을 할 수 있을 때 민족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종교 외에도 정치, 경제 등 여러 단위가 있는데 리 교수가 특히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 교수는 경제 발전을 통한 변화는 근원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그는 "국민소득 1만 불 시대에서 2만 불 시대가 된다고 해서 개인이 실존적으로 느끼는 행복이 두 배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후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다. 진정한 변화의 가치는 물질주의적 측면보다 정신사상의 본질적 변화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실천 뒤따라야

그러나 리 교수는 한국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오만함에 대해 지적했다. 그는 북한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너희는 예수를 모르니까, 우리가 너희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말하는 남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을 꼬집었다. 그리고 리 교수는 부시와 같이 다른 종교에 대해 파괴적인 태도로 치닫는 근본주의 신앙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가치를 존중하며, 다른 종교와 공존하는 것에 너그러워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리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파병문제, 한미관계 등의 사안에 대해 수구적인 종교세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았다. 리 교수는 요새 기독교 십계명에 하나가 더 추가된 '십일계명'이란 게 있다고 말했다. 즉 '미국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라'는 것이다.

리 교수는 밤만 되면 한국 땅의 절반이 십자가로 뒤덮일 정도로 교회가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깊은 유감을 드러냈다. 그는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 세계 5개 교회 중 3개가 남한에 있다는 통계자료를 들며, 자랑스럽지만 한편으로 섭섭하고 슬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는 기독교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근본진리를 올바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의 저서 「스핑크스의 코」에서도 나오듯이, 리 교수는 자신은 기독교와 불교가 아닌, 예수교와 부처교를 따른다고 밝혔다. 예수와 부처의 삶과 가르침은 존경하지만 제도화한 종교와 종교형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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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로르의 노래] 소개

"독자는 앞으로 읽게 될 내용처럼 대담하고 또 일시적으로 사나워져서, 음산하고 독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의 황폐한 늪 가운데서, 방향을 잃지 말고 가파르고 황량한 자신의 길을 찾아내기 바란다." 로 친절하게 시의 목적을 설명해주면서 이 시는 시작합니다.
류시화와 이외수를 만난 뒤로 제법 시와 친해졌다고 생각했고, 시를 많이 읽었다고 할 순 없지만 시를 통해 시인과의 공감대를 즐겼던 20살때 내겐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 참고로 그때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쑥스러움~~)

도무지 시의 첫 귀절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시작... [말도로르의 노래]는 서사시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 시 하나가 시집 한권입니다. 운과 율이 있지도 않으므로 산문으로도 볼 수 있는 시이지만, 시의 최고의 특징인 '모든 형식의 초월'을 무기로 시로 분류되고 있는 듯 합니다.
불어를 알지 못 해서 여음 형식을 띄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그리고 곧바로 뒤통수를 쳐버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뒤따라올 다음 페이지들을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몇몇 사람만이 이 씁쓸한 열매를 위험없이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심한 자여, 너는 이런 미답의 황야에 더 멀리 들어가기 전에 너의 발길을 앞으로가 아니고 뒤로 돌려라.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잘 들어라. 너의 발길을 앞으로가 아니고 뒤로 돌려라."
아무나 읽는 시가 아니라는 의밉니다. 분명 로뜨 레아몽은 호기심을 자극하려는게 아니고 진심으로 위험한 장난에 동참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부터 말하고 싶은 부분이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은데 얼마전 부터 타인들의 세계에 편입할 요량으로 타인들의 습성과 습속을 따라하려 노력하다 도무지 맞지 않아 포기하던 시기에 이 시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좁은 어깨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수 많은 어리석은 짓을 행하고, 그들의 동류를 바보로 만들고, 모든 수단을 써서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을 나는 일생 동안 보았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영예라고 부른다. 그런 광경을 보고 나는 타인들처럼 웃고자 했다. 그러나 괴상한 모방인 그 짓은 불가능 했다. 나는 예리한 칼날이 달린 주머니칼을 들어 두 입술이 합해지는 지점의 살을 쨌다. 한순간 나는 나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믿었다. 나는 거울 속에서 나 자신의 의지로 상처입은 그 입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오산이었다! 두 상처에서 철철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진정으로 그것이 타인들의 웃음과 같은 것인지를 구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동안 비교해 본 다음, 나의 웃음은 사람들의 웃음과 닮지 않다는 것, 즉 나는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모방하고 싶어서 자신의 양 입 끝을 찢었지만(마치 [베트맨]에서의 조커처럼..) 그래도 타인의 그것들과 다른 자신의 얼굴.. 그때 제 심정이 바로 이래서였습니다.
남들 다 좋아한다는 효리, 전지현, 파리의 연인.. 대중음악... TV프로그램.. 화제 ... 등을 좋아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남들과 다른, 악수하지 못 하는 나를 체념해해 할때였었습니다.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 하는 나, 부평초 처럼 남들과 화제를 공유하지 못 하고 이상을 공유하지 못 하고 삶의 태도를 공유하지 못 하고...

여하튼 [말도로르의 노래]는 꽤 과격하고 잔인하고 난폭합니다. 제가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게 된 계기도 보들레르와 함께 악마주의, 난폭한 시인이라는 문구를 봤기 때문입니다.

시의 내용 중 몇 가지 사례를 표현하려고 했지만 곧 지워버렸습니다. 너무 난폭해서..
공포영화광이라면 devil doll의 음악을 틀어놓고 습한 지하방에서 읽으시면 이 시의 효과는 극대화 됩니다.. ^^;;

또 하나의 연상작용은 요즘 말이 많던 증오범죄(hate crime)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듯 합니다.
참고로 전 [seven]이란 영화를 보고 악역을 맡은 연쇄 살인자의 논리에 '약간'은 동의했었습니다. 신곡의 일곱가지 범죄를 행하는 사람들을 처형한다면 사회정의는 실현될 수 있겠다던... (물론 동참하고 싶진 않습니다.. ^^;; )

여하튼.. 지금 다시 [말도로르의 노래]를 보고 있습니다. 가끔 로뜨 레아몽의 고독을 느끼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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