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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1 - 자유로부터의 도피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실존성을 함의한다. 그런 생각의 기반은 에리피 프롬의 '자유'에서 근거를 찾았다.


원인 및 배경

근대 서구 유럽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주체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귀족에서 남성, 노동자, 여성 그리고 이외 소외된 계층 순으로 하나씩 참정권이 회복되었고 종교적으로도 천주교의 권위와 형식에서 종교개혁을 통해 보다 종교인으로서 자유권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므로써 이제 개인은 주체적인 결정의 단위, 모든 권위와 권력으로 부터 자연인의 권리를 하나씩 획득하게 됐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내성과 관성을 더 함에 따라 권력으로 부터 독립된 상황에 놓이게 됐죠...
하지만, 자연인 회복의 결과는 오히려 이들을 불안하게 됐습니다. 많은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다 보니 그 책임은 가중되고 어려운 의사결정들을 스스로 담당했어야 했습니다. 즉, 주체적인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이 보장됐지만 이와 비례해서 불안과 근심, 책임이 쌓이게 됐죠..
이런 전차로 다시 강력한 권력의 요구가 내제적으로 등장하면서 잠재적으로 그 권력에게로 다시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반납하게 됐습니다.
이들이 갖게된 '불안'을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 '고독과 무력함'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그렇게 투쟁했던 자유의 결과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기에) 고독과 무력함으로 되돌아왔던거죠..

고독과 무력함 도피법

고독과 무력함은 다시 안정감을 요구하게 됐으며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일반적인 무력함 찾기 방법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 째, 소유로의 도피
최초, 인간은 생존권을 보장 받기 위해 소유하죠. 다음으로는 소유를 위해 소유하게 됩니다.
인간은 소유하므로써 삶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현재 천민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아주 잘 공감하는 부분일 겁니다.- '먹이(자본) 축적=생존'이라는 원시적인 유전자가 있는 인간들은 '소유'를 통해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유라는 것이 바닷물과 같아서, 상대성을 띄게 되고 이 '소유양식'속에서의 소유는 끝없는 퇴화적인 무한퇴행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소개할 때 더 정리하기로 하겠습니다.

둘 째, 권력, 명예로의 도피
어느정도 '소유'가 확보된 사람들은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오목을 수료한 사람이 바둑을 배우는 것과도 같은데요.. 즉, '소유'가 같고 있는 구조적인 오류를 그대로 갖게 되는거죠..
단지 소유로의 도피 방법은 자본적인 안정감을 찾는데 반해 권력, 명예로의 도피는 사회적인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은 자유를 찾기 위해 몇 백년에 걸쳐 투쟁했다가 다시 자유를 양도하려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나찌 시대를 살았고 유태계였기 때문에 나찌를 피해 망명해야했던 에리히 프롬에겐 파시즘이라는게 하나의 화두가 됐다고 합니다.
사실 유럽인들이 도피하려 했던 대피소가 이 파시즘이었거든요...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소극적 자유 : Free from , ~로 부터의 자유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인들은 '고독과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독과 무력함'을 회피시켜줄 대상을 찾습니다. 파시즘이죠..
예기엔 묵시적 계약관계가 성립합니다. 카리스마 있고 강한 힘을 갖은 대상은 어느정도 틀을 제공함으로써 '고독과 무력함'에 대한 마취제를 주게 되고 약하고 소심한 개인들은 강력한 권력에 복종하므로써 그 틀에 들어갈 수 있는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 관계를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초인적인 근면과 성실, 강한 군인을 강요하고 유태인을 박해했죠. 독일인들은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태인을 괴롭히면서 배설합니다. (이 피학과 가학 성향의 연결적 상관관계..)
여기서 독일인들은 1등 민족인 자존심을 갖게 되고 이런 강력한 나라에 살기 위해서 초인적인 국민으로의 요구에 충실해집니다. 또한 이런 울타리 속에서 1등 국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다른 사례로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로 눈에 띄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노예라거나 신앙만 강조하는 종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태운다거나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고난 받으면 천국간다'란 논리들.. 기실 그 이데올로기의 깊은 의미라던가 속내도 모른 채 '계급을 없애고 모든 토지를 공유한다'는 말만 믿고 죽창을 들었던 (또는 그 반대편에 서서 똑같은 형태의 이유로 이들과 대결했던) 우리 아버님 할아버님들...
이들에겐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충실할 수록 자신의 안정감을 보장받고 싶었던 심리가 있습니다. - 교활한 선동가들은 이 최면술의 대가..

도피의 성격

이런 '~로 부터의 자유'는 결국 도피적 자유이기 때문에 태생적인 자유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첫 째, 권위주의적 성격, 상술한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를 말합니다. 좀 물리적이죠..
둘 째, 기계적 성격
마치 사회라는 시스템에 잘 적응한 부속품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나'라는 부품이 잘 돌아가기 때문에 존재감을 느끼게 되고 이 존재감 때문에 (용도 폐기 당하지 않기 위해) 더 사회성을 갈구하죠..
이들은 유행이나 시대적 트렌드 이를테면 TV 연속극, 메이저 음악 장르, 패션 ... 같은 것들을 잘 수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extreme sports나 싸이월드, 블로그 같은 것들이 대중화 된 원인이 그런류를 즐기거나 어떤 개인적 목적도 있겠지만 심리적으로 다들 하기 때문에 안 하면 왠지 소외감을 갖게 되어 하는 경우가 많죠..

사실 개인적으로 사회적이지 못 한 탓에 이런 사회성, 기계성이 폭력처럼 느껴진적이 많았습니다.
술자리에서 동료나 학교 친구들과 화제를 공유하기 위해서 (정말 억지로) TV 프로그램의 정보나 제일 선호하는 연예인들의 정보를 수집한 적도 있었죠.. 이런 한심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너무도 환멸스러워서 왕따를 작정했지만요... ㅠ.ㅠ

더욱이 현재 서울의 중심가를 거닐다 보면 이런 '~부터의 자유'들을 봅니다. 다들 개성을 갖고 자신의 개성, 자유를 어필하고 있지만 그들의 문화, 패션들은 몇가지 운신의 폭을 갖을 뿐 천편일률적이기 이를데 없게 보이거든요..


적극적 자유 : Free to , ~에의 자유

'~로 부터의 자유'는 이렇게 물리적, 형태적 자유를 띄는 반면 '~에의 자유'는 본질적, 실존적 의미를 갖습니다.
자신이 실존적 존재로서 의미를 찾기 때문에 '고독과 무력함'이나 소외가 무섭지 않죠...
제가 갖고 싶고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자유의 의미에 실존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학습을 통해 편하게 자신의 운신의 폭을 제안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이고 실존적으로 나의 취사선택을 내가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유럽인들이 도피했다시피 인간은 적당히 약하기 때문에 이 본질적 자유를 극복하기 위해 상당히 용감해야 하며, 적당히 슬기로와야 하며, 어느정도 착하기도 해야합니다. 어렵죠...

아직도 봉건적 권위와 질서에서 독자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다시 전체주의적 예속의 개인이 아직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전 Free to 하겠습니다. 못 하더라도 의지를 갖고 노력할겁니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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