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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2 - 소유냐? 존재냐? (1)


'소유'라는 욕망의 기차

그래..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길지 않는 인생 가능하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재화가 한정되어있는 이상 가능하면 많이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가 많은 가치를 대변해준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윤리적이고 합법적인 선에서 화폐를 많이 확보하고 정당하게 누려야 한다. 그렇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야 한다....
강산에 형님의 [문제]라는 가사를 들어보자..
" ........... 이왕이면 넓은 정원 풀장있는 큰집 사는돈 / 요즘 세상 예쁜 여자 사로잡는 돈 돈이 필요해"

유사 이래로 제일 오래된 종교를 믿으세요~ 우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사실 기독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가슴속에 각각의 절대자와 함께 우리의 신을 모시고 있지요~ 그것은 물신.... 여러분... 부~자 되세요~

여기까지만 하자....

하지만 이외수 선생님 이런 돈 많이 벌어 부자되자는 프로파간다의 홍수 속에 사자후로 일갈하신다.

"낭만이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낭만이 밥먹여 주냐, 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할 말이 없다. 밥을 먹기 위해 태어나서 밥을 먹고살다가 결국은 밥을 그만 먹는 것으로 인생을 끝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같은 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다만 비참할 뿐이다.
밥 정도는 돼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낭만을 아는 돼지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라. 그러나 낭만도 사랑하라. 애당초 사랑이라는 것은 낭만이라는 강변에 피어난 꽃이다. 낭만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다. 마른 모래사막에서는 한 포기의 풀잎도 자랄 수 없듯이.
돈이나 명예, 권력으로 결코 사랑의 싹을 틔울 수 없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는 고작 사랑을 가장한 플라스틱 가화들이나 사들일 수 있을 뿐이다."
- [말더듬이의 겨울 수첩] 중

초근목피나 보릿고개란 단어를 모르고 자란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것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시스템이었다. '이쯤 되면 인간다운 삶을 모색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현재의 담론, '성장만 있었지 분배가 의심스러운 우리나라에서 또 성장만을 위해서 새마을의 역군이 되야하는건가?' ....


에리히 프롬은 이 배금주의의 문제를 '소유'란 개념으로 해석하고 '존재'란 개념을 대안으로 놓고 있다.
장황하게 현대의 집단무의식적 착란현상을 배금주의로 설명했지만 프롬의 개념으로 정리하자면 '나는 소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데카르트가 오히려 낭만스러워 보일 정도다.

국가의 국민 길들이기 그리고, 국민의 맹점

80년 후반, 우리나라도 드디어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이제 연애질도 자동차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추석에 기차타고 가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언젠가 부터 사교육비를 위해 가사노동만 해도 됐던 주부가 일을 하기 시작됐다. 말도 안되는 자녀들의 학원비를 위해...

남들 다 갖고 있는 자동차 나도 갖기 위해, 다들 보낸다는 학원 내 아이도 보내기 위해 우리는 이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트렌드에 이의를 제기할 시간도 없다. 개처럼 벌어서 빨리 '남들처럼' 살기위해 비장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내려보고 있는 기득권은 이런 생각을 한다. '역시 쟤네들은 말 잘 들어..'

시스템의 모순? 교육문제? 부조리한 먹이그물? 짜고 치는 판? 이런거 관심이 없다. 단지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안 오면(내 '소유'에 치명적이지만 않으면) 되고, 오히려 이런 무간지옥에서 한계급 더 밟고 올라가기만 할 뿐이다. 또 위에 있는 분들은 생각하신다. '이미 자리가 다 내정됐는데... 70년대 이후에 신재벌이 나온적 있었나?'

여기엔 두가지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시민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소유'로서 표현한다.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에 걸맞는 집에 살아야 하고 '나'에 걸맞는 차와 옷을 입과 '나'에 걸맞는 품위생활을 해야 한다.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의 소유를 통해서 투영되는 '나'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인격이라거나 양식, 감성 같은 것들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또 나의 그것들을 대변하는 소유물을 갖기만 하면 된다.
프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주체)는 무엇(객체)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은 객체를 소유하고 있음을 빌려서 자아를 정의하고 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주체이다."
만약 우리가 나이키 신발을 샀다고 치자. 한동안은 혹시 때가 묻거나 기스나 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걷고 더러운 바닥은 밟지도 않는다. 이때 내가 나이키를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나이키가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치자는 잘 짜여진 이런 소유의 악순환의 판만 짜 놓고 열심히 용역과 세금, 재산을 빼내기만 하면 된다. 서로가 치사하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치사하다면 치사한 것에 해당하는 '소유'를 가져야 한다... 꽥~ (이 쌍방과실 범죄.. ㅋ)

우리에게 '소유'란 어떤 의미가 있는건가??

미국에서 실제 설문됐던 조사 결과인데 직장인들에게 모두가 연봉 2000만원 받을 때 3000만원 받을래? 모두가 연봉 5000만원 받을 때 4000만원 받을래? 물어봤더랜다. 직장인들의 대부분은 전자를 택했더랜다.

풀어 말하자면 내가 얼마를 갖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남들보다 많이 받아야 한다는 거다. 내가 정말로 소렌또 타고 싶어하는데 모두가 그랜저 타고 다니면 난 에쿠스는 타야겠다는 심리다. 여기서 질문 : 정말로 소렌또 타고 싶댔자나요???????
우리에게 있어서 이 '소유'의 문제는 자기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이것은 중상위 계급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해소될 수 없는 '소유'다. 가령 중상위 계급이라 하더라도 이제 상위의 '소유'를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절대로 해갈되지 않는 바닷물을 마시는 듯한 무한 퇴행적 '소유'다.


소유냐? 존재냐?

" "가지다(have, haven)"라는 말은 착각하기 쉬운 단순한 말이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 "존재하다"라는 말은 ... 있는 사람(who is, der ist)과 있는 사물(what is, was ist)의 실존과 실재를 표현하며, 그것(사람)의 실체성과 진실성을 입증해준다. 누가 또는 무엇이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그 또는 그것의 겉모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유 양식은 소유 자체만으로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존재양식이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식이다. 존재양식은 실존적 가치부여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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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서두가 너무 길었고 제가 책을 아직 다 읽지 못 한 관계로 여기서 일단락 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길게 쓰면 잘 안 읽자나요... ^^;;) 한참 예고편만 보여주고 본방송을 연기해서 죄송합니다... ^^;
[소유냐? 존재냐?]를 다 읽고 나머지 본론에 대해서 얘기 하겠습니다... 끝으로 Dynamic Duo의 [Pride]란 노래가사(개코가 부르는)로 이 논의를 일단락 하겠습니다.. 공감이 많이 가는 가사래서 외우고 있다는.. ^^


"......................... 욕심 많은 자의 이빨에선 비린내가 나
그들의 성공 역시 썩은 구린내가 나 차라리 욕심 따위 쉽게 버린 내가 낳아
난 still 맨발 배고파도 떳떳하게 선 두발 그 두발로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세상을 훔쳐봐 사람들의 눈속에서 나는 남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
오직 지켜보는 주님의 눈길만이 날 가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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