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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축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괴물이 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침대에 사람을 맞추어 봐서 침대보다 사람이 크면 다리를 잘라 침대에 맞추고, 사람이 적으면 사람을 늘여 침대에 맞추는 엽기적인 짓을 하는 녀석입니다.

그에게 침대는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자신이 만들어놓은 진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기준으로 사람을 (세상마저) 재단하는 것이지요..

그 침대와 키가 딱 맞았던 사람이 헤라클래스였다고 합니다. 헤라클래스는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를 죽여버립니다. (역시 객체지향은 강한 것 같습니다.. 클래스.. ㅋ )

여하튼... 우리는 유연하게 생각한다고 자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선택한 가치, 진리가 절대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그냥 프로그래밍 스타일일 수도 있는데... 베스트 프랙티스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하는 것들도 그렇구요..
적어도 이런 태도를 가진 이상 성장하기 힘 든 습관이 몸에 베는 것 같습니다.

간만에 이외수 선생 홈피에 갔다가 좋은 글을 발견하여 퍼옴과 동시에 몇 자 적어봤습니다.

"당신이 가진 생각이 딱 하나밖에 없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 에밀 사르티에 종교론 중..




일축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출처 : oisoo's board   (http://user.chollian.net/cgi-bin/ics/ics.cgi?id=oisoo&db=owner&action=read&num=642&vnum=613&&page=1&ftype=0&fval=&backdepth=1)

일축- 국어사전에는 한대 걷어찬다는 뜻으로 플이하고 있습니다

아상에 갇혀 있는 자들은 막무가내로 자신이 옳다고만 주장합니다
왜곡된 자신에게 가리워져 자신의 본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들은 남에게 한 수 배우는 척 하면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 가증스러움도 서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작 남을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만을 배려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위대하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무지가 곧 무기가 됩니다

얼마나 측은한지요

그러나 동정만이 자비가 아닙니다
때로는 냉정도 자비가 될 수 있습니다

무릇 도는 불립문자라 하여 말이나 글로는 전달할 수 없다고 성현들은 가르칩니다
따라서 저는
법문에 가까운 속담 한마디로 아상에 갇혀 있는 자들을 한대 걷어차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식한 귀신은 부적도 몰라본다'

아상에 갇혀 있는 자들이여
부디 이 속담의 진의를 숙고해 주시기바랍니다

이쯤에서 자신이 한대 걷어 차였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곧 아상에 갇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이래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 공간에서 횡설수설 좌충우돌을 거듭한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풀잎 하나를 뽑아 들겠습니다

이 홈페이지의 정겨운 게시판은
다른 커뮤니티에 견주어 전원주택과 다름없는 휴식공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자만과 아집에 가득차 있는 인터넷 양아치들이 중구난방으로
오물이나 갈겨 대는 방치공간이 아닙니다

비록 무림의 절세고수라 하더라도
저는 자기밖에 모르는 놈들은 딱 질색이니까 풀잎 하나를 뽑아서
가차없이 그 아상검객의 목을 뎅겅 잘라 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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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전태일 평전

사이트를 떠돌다 전태일 열사님에 대한 짧은 만화 평전이 있어.. 퍼왔습니다.
일독 강춥니다.. ^^;

출처는 http://reltih.cafe24.com/data/korea_history/juntaeil/com/com_mf01.htm 이구요...
http://reltih.cafe24.com/reading/ 사이트 내에 올려진 자룝니다.


노동이나 사회주의, 경제학에 대한 너무도 방대한 서적을 올려논 사이튼데요..

정말 알찬 자료가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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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말씀...

흔히 사람들은 옳고 지당한 말을 "공자님 말씀"이라고 한다.
혹은, 이 '옳고 지당한 말'을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의미로 받아들일 때도 같은 표현을 한다.

당연한 얘기로 생각했던 이 공자님 말씀을.. 어쩌다 읽게된 논어를 본 후에 '의미심장'하게 되새김 하고 있다.

진리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공감대나 얼마나 의미있게 받아들이냐... 하는 태도나 자세가 가름할 것이다.

고딩 시절 도덕경을 읽었을 때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년 후 다시 도덕경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 도덕경이 깊은 사유와 경험에서 우러나온다면... 그 진위는 심오하기만 하다.

여하튼.. 문제는 내가 얼마나 받아들일 소양이나 자세, knowledge base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일게다..

그러므로 어떠한 말에 대해서도 겸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이 감동적이거나 심오하지 않다면 그것은 발화자의 부족함보다 청자의 부족함을 먼저 탓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감동적이었던 공자님 말씀 몇자 올린다.. ^^;

 


공자가 말하길, “도움이 되는 친구로 세가지 유형이 있으며 해가 되는 친구에 세가지 유형이 있다. 정직한 사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 이런 친구는 좋다. 잔꾀에 밝은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입만 살아있는 사람, 이런 친구는 사귀면 손해다.”
孔子曰,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 (論語, 季氏)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論語, 雍也)

자공이 친구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하길, “친구가 잘못했을 때 진실된 마음으로 충고하거라. 한두 번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이제 그만 하거라. 충고한다고 자꾸 하게 되면 공연히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毋自辱焉.” (論語, 顔淵)

“무릇 된 사람이란 음식이나 거처에 있어 만족스럽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일을 할 때에는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말을 삼가서 한다. 그리고 사람 살아가는 도리를 깨친 사람들과 사귐으로써 자기를 단정히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면 배움을 즐겨한다고 할 수 있다.”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학이편)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택해 본받고, 나쁜 점이 있으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며 고치도록 노력한다.”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술이편)

옛사람들이 별로 말이 없는 것은 실천하지 못할까 걱정되서 그런거다. 
子曰,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論語, 里仁)

“지식인은 말이 행동을 앞서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 子曰, “君子恥其言而過其行.” (헌문편)

공자가 말하길,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말하는 것, 그렇게 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헌문편)
子曰, “其言之不怍, 則爲之也難.” (論語, 憲問)

“돈이 많게 되면 사람이 좀 거만해진다. 돈이 없게 되면 사람이 좀 째째해진다. 거만하느니 차리리 째째한 편이 낫다.”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固.” (술이편)
 

설사 천하에 둘도 없는 재주와 지식을 구비했다 하더라도 사람됨이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밖의 것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論語, 泰伯)

“계로가 귀신 모시는 문제를 물었다. 공자 대꾸하길, ‘산 사람도 못 모시면서 어찌 귀신을 모실 수 있겠느냐?’ 계로가 물었다, ‘죽음에 대해 감히 여쭙습니다.’ 공자 말하길, ‘삶도 아직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 ’‘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선진편)

공자가 말하길, 아랫사람은 경외의 대상이다. 기성세대를 능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이 40, 50이 되어서도 별볼일 없다면 이런 사람은 역시 겁날 것이 없지.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論語, 子罕)

- 노력하지 않는 젊은이는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나이 40 50이 되었는데도 별 볼일이 없는 인간은 (젊을 때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무시 당해도 싸다.

도덕으로 정치를 하면 마치 그것은 북극성과 같아 모든 뭇별이 우러러 본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論語, 爲政)

“법률과 형벌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국민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법망을 피해가며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되고 이렇게 되면 국민들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점점 부끄러움을 못느낀다. (양심이 마모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 하지만 도덕으로 인도하고 예의로써 통제하면 국민들은 양심을 되찾아 스스로 바르게 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편)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은 최고다.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다. 몰라 고생하다가 비로소 배우게 되면 그 다음이다. 몰라 고생하면서도 배우지 않으면 이건 최하로 못말리는 사람이다.
孔子曰 :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 困而學之, 又其次也 ;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論語, 季氏)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헛것이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論語, 爲政)

“배우고 시간날 때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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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즈의 정의론 정리

롤즈의 정의론 정리

롤즈는 그의 저서 <정의론>에서 정의의 원칙에 도달하는데 ‘최대의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첫째 기본적인 자유는 평등하게 그리고 최대한으로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거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정치적인 자유를 포함해서, 사유 재산을 가질 자유, 신체의 자유, 부당하게 체포되지 않을 자유 등이 기본적인 자유 등에 포함된다. 둘째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한 자, 즉 최소 수혜자 계층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한 부의 차등적 분배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차등이 용납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모든 사회적 직책과 직위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치 균등의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롤즈의 두 가지 원칙은 ‘우선 순위의 원칙’에 따른다. 이른바 첫 번째 원칙이 두 번째 원칙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계층에게 혜택이 돌아가더라도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과 같이 정치적 자유를 위축시키는 사회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 하에서의 경제적 성장을 이유로 언론이나 인권이 탄압 받아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일단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가운데 비로소 두 번째 원칙 ‘경제적 분배의 문제’를 고려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 문제를 논의할 경우 불우한 계층의 혜택을 우선 시 고려하여야 하지만 그것도 모든 사람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받은 후에 가능하다고 한다.

롤즈 <정의론>의 사상적 배경:
사회 계약론적 방법 : 근대 철학자들 중에 사회 계약설을 주장했던 홉스,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 등등 이들의 사회 계약설 요지는 합리적 인간들은 자연 상태와 같은 무정부 상태로부터 자유로운 논의와 합의에 의해 어떤 정부나 국가를 선택할 것을 결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논의와 합의, 즉 계약에 의거하여 우리가 살아가게 될 사회나 국가의 헌법을 선택하게 된다.

1. 계약 당사자의 조건 :(무지의 베일)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천부적 재능이 뛰어난 자나 그렇지 못한 자 또는 사회적 지위에 있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가치관 또한 천차만별이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하나의 정의 원칙에 합의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유리한 원칙을 채택하지 못하게끔, 또 여러 계층이 합의할 수 있게끔 정보를 제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롤즈는 “무지의 베일”을 이용한다. ‘무지의 베일’이란 천부적 재능과 사회적 지위 즉 자신의 기득권이 우연 또는 의도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이다. 이것은 사적인 이해 관계를 버리고 공적인 입장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저울)을 생각해보자. 이를 데면 어떤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소송 당사자간의 합의(?)에 따르지 않고 그 당사자들과 이해 관계가 없는 재판부에게 판결을 맏기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저울은 공평함 즉 정의의 기준을 의미하고 칼은 정의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상징한다.

2. 계약 당사자의 조건 : (합리성) 롤즈는 정의의 원칙에 합의하는 당사자들은 주어진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어 최선의 수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또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들은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지나친 동정심과 시기심을 갖지 않은 존재다. 만일 자신의 몫을 챙기기보다는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자비심의 소유자이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타인을 도구로 삼아 희생시킬 극단적 이기주의자의 경우는 정의의 원칙이 문제될 것이 없다. 따라서 정의의 원칙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의의 원칙에 합의하는 데는 사람마다 자신의 정당한 몫을 요구하고, 그것을 누리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이익도 존중하는 건전한 개인주의자에게만 정의의 원칙에 합의할 수 있다.

3. 정의의 원칙에 있어서 선택 규칙 : (최악의 상황을 설정한다) 위에서 말한 합리적인 당사자들이 따를 수 있는 정의에 대한 선택 규칙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대 효용 극대화의 원칙’이다. 이는 가능한 대안들 중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최선의 것을 약속하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롤즈가 말하는 규칙은 ‘최소 극대화의 원칙’이다. 가령 어떤 대안을 선택했을 때 기대되는 최악의 상황이 어떤가를 가상해서 그 중 최선의 결과가 보장되는 결과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는 “불행 중 다행”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의의 원칙에 합의를 한 당사자들의 신분이 확인되었을 경우나 그 사회의 최소 수혜자 (사회적으로 가장 혜택받지 못하는 자 또는 계층)로 확인되었다 할 지라도 가장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대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4. 정의의 두 원칙 : 첫째는 평등주의에서 출발한다. 롤즈는 사회적 기본 가치 (자유, 소득, 부, 기회, 권력 등등)를 꼭 같이 나누는 평등의 원칙이 정의의 원칙을 정하는 기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무지의 베일로 인해 기득권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받는 다는 확신도 없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자신의 몫을 희생할 이유도 없는 까닭에 평등의 원칙에 누구나 합의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롤즈 자신도 이러한 평등의 원칙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만일 절대적 평등을 엄격하게 지킨다면 자유나 개인적 자질에 대한 침해가 명백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건부 차등을 말한다. 조건부 차등이란 미래에 더 큰 것이 보장될 때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는데 동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의의 원칙에 합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차등이 도입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에게 절대적 평등보다 더 큰 자신의 몫이 보장될 때 그러한 차등은 정당화 또는 정의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절대적 평등을 고수한다는 전제에서 조건부 차등이 정의의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도달한 롤즈의 정의는 최소 극대화 원칙과 사회에서의 최소 수혜자에 대한 고려와 관련하여 형식화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롤즈가 말한 일반적 정의의 원칙은 사회의 기본 가치( 자유, 소득, 부, 기회 등등)는 차등적 분배가 최소 수혜자를 위시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최대의 이익이 확실시되는 한 차등적으로 분배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이 원칙에서 자유는 다른 사회 경제적 가치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와 빵간의 등가적 교환은 가능하며 더 많은 빵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포기도 가능하게 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어느 정도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궁핍에서 해방된다면 더 많은 빵을 위해서 자유를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5. 정의의 원칙 적용 : 정의의 제1 원칙이 “최대의 평등한 자유”이라 하고 자유를 제외한 사회 경제적 가치 분배로 “조건부 차등의 원칙”을 제2의 원칙이라 할 때 그 적용에서는 제1의 원칙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원칙의 적용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롤즈가 말한 정의의 원칙에 합의만 된다면 어떤 체제를 선택하던지 각 나라의 사회 경제적 조건, 역사 문화적 특성에 따라 체제 및 이데올로기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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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의미


침묵의 의미

- 법정 -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뱉어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 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뱉어내느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이전에는 사람끼리 마주 보며 말을 나누었는데, 전자매체가 나오면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지껄일 수 있게 되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유언비어나 긴급조치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비위에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그 말의 내용이 아첨이건 거짓이건 혹은 협박이건 욕지거리건 간에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다. 가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풍토이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위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 보면 대부분 하잘 것 없는 소음이다. 사람이 해야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하다.
좋은 친구란 무엇으로 알아낼 수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보는데, 첫째 같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아닐 것이고, 벌써 이렇게 됐어? 할 정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는 정다운 사이다. 왜냐하면 좋은 친구하고는 시간과 공간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기도를 올려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기도가 순일하게 잘될 경우는 시공時空 안에서 살고 있는 일상의 우리지만 분명히 시공 밖에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자꾸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 되면 그건 허울뿐인 기도다.
우리는 또 무엇으로 친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 말이 없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그런 사이는 좋은 친구일 것이다. 입 벌려 소리내지 않더라도 넉넉하고 정결한 뜰을 서로가 넘나들 수 있다. 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았을 뿐, 구슬처럼 영롱한 말이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오고간다. 그런 경지에는 시간과 공간이 미칠 수 없다.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똑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 가지고서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 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 비어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수도자들에게 과묵이나 침묵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고여 있는 말씀을 비로소 듣는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미처 편집되지 않은 성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활자화되어 있지 않은 그 말씀까지도 능히 알아듣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불경에 있는 말이다. 일상의 우리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써만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체는 저 침묵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데에 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 마음에서도 큰 광명이 발해진다는 말이다.
참선을 하는 선원에서는 선실 안팎에 '묵언默言'이라고 쓴 표지가 있다. 말을 말자는 것. 말을 하게 되면 서로가 정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집단 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시와 비를 가리는 일이 있다. 시비를 따지다 보면 집중을 할 수 없다. 선은 순수한 집중인 동시에 철저한 자기 응시이다. 모든 시비와 분별망상을 떠나서만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 수 있다.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기능도 하고 있다. 구시화문口是禍文,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선승들은 3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묵언을 지키고 있다. 그가 묵언 중일 때는 대중에서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수도자들이 이와 같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만을 하기 위해서다. 침묵의 조명을 통해서 당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다. 벙어리와 묵언자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말은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는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하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히는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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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담] 분발하라, 닷컴이여

딴지 총수 김어준과 논객 김규항의 대담입니다.
이문열 씹으면서 극우 씹는 부분을 재단하려고 했는데 저작자의 권리를 존중해주고 싶어서 부득불 넣었습니다....
닷컴과 극우를 억지로 결부시킨 것 같다는.. ^^

IT에 대해 이해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IT를 분석하고 있는데, 예리한 부분도 있고 '좀 모르니까 저런 소릴 하는구나..'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버뜨, 김규항의 천민 자본주의가 IT에 적용된 폐단에 대한 분석은 십분 공감이 갑니다..

제가 여기에 이 글을 퍼온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민하지 않는 부분을 이들은 이렇게 즉흥적? 이나마 고민해준다는데 대한 약간의 수치감이 있어서 올립니다. ^^;;;

물론 우리도 고민하는 것은 인정하지만요.. (생업에 관한 문젠데..)
단지 이렇게 입체적, 해학적?으로 보지 못 하는 눈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마도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던 이공계 출신의 태생적인 리미트가 있다는걸 인정하면서도 이 리미트가 '지배당하는 이공계', '위기의 이공계'를 조장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극복해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

출처 : 한겨레 http://h21.hani.co.kr/section-021023000/2000/021023000200008020320064.html

[쾌도난담] 분발하라, 닷컴이여 극우여…

안티조선 운동은 왜 음대협의 파시즘적 활동방식과 다른가

“너무 점잖더라.”

김규항을 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쾌도난담의 이미지와는 딴판이더라.” 또는 이런 말도 있었다. “해병대를 욕하시더니 본인이 해병대 스타일이더라.” 지난 7월27일 ‘문화방송 100분 토론-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에 대한 관람평이다. 김규항이 패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형, 안 떨었어?” “후배들이 청심환을 사왔어.” (웃음)

김규항은 ‘예상했던 대로 돌이킬 수 없는 쪽팔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토론의 룰을 홀로 사수했다는 것이 유일한 보람”이라는 뼈있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김어준의 짓궂은 질문이 이어지자, 말머리를 돌리는 김규항. <한겨레21> 지난호에 실렸던 ‘이문열 인터뷰’가 화제로 올랐다.

그는 정말 바보인가



김어준 네티즌들이 난리가 났어. 되게 재미있다며.

김규항 이문열씨가 안티조선운동이야말로 권력놀음이라고. 극우도 하나의 의견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김어준 이문열씨 주장은 다 독자가 선택했다는 거야. 독자가 선택해서 <조선일보>가 권력을 갖게 됐다는 거지. 독자가 선택한 이상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 참으로 ‘별스런 일’이고, 독자의 선택인데 왜 제몫을 찾아준다느니 하냐는 건데, 이거 우째 생각하십니까? (웃음)

김규항 극우도 하나의 의견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건 바보 같은 소리지. ‘우’자 앞에 ‘극’자를 붙이는 건 극단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사회의 공적이라는 의미가 되거든. 극우라고 인정을 하지 말든지.

김어준 난 어릴 적 이문열씨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인터뷰 기사를 보고 참 실망했어…. <조선일보>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거야 그럴 수 있지. 그 논리의 빈약함 때문에. 고등학생 때였던가, <사람의 아들>을 처음 읽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지금 보니… 바보네…. (웃음)

김규항 좀더 구체적으로….

김어준 이문열씨는 군사정권이 독자들에게 신문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독자들이 선택한 이상 조선일보 권력의 정당성은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이거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린지 아니면 알고도 이렇게 말하는 건지… 둘 다 실망스럽긴 마찬가지긴 하지만… <조선일보>가 1등이 된 이유가 그 신문의 논조가 탁월해서인가. 독자들이 그 신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당시의 정치환경을 빼놓고는 조선일보를 이야기할 수 없지.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주류로 통용되도록 군사정권이 조장한 극우적, 수구적, 냉전적 정치환경 덕분이고, 당시 그러한 군사정권과 유착해 고급정보에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면들… 왜 그런 걸 생각 못할까?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없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냐고.

김규항 사회의식이 다른 거지.

김어준 카-.(트림) (웃음)

김규항 안티조선을 권력놀음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를테면 음란물대책협의회(음대협)에서 영화 <거짓말>을 음란영화로 보고, 그걸 시민들한테 보여주면 따라할 것 같아 걱정하는 건 그 사람들의 권리라고 봐. 그 사람들은 조리퐁 보면 여자 성기를 떠올리고 테트리스를 보면 삽입성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극장 앞에서 관람거부 캠페인을 하는 건 허용돼야 한다고. 하지만 그걸 공권력의 힘을 빌려 상영금지를 받아내려는 것은, 의견을 선택할 권리를 없애버린다는 차원에서 파시즘인 거야. 안티조선은 음대협과 같은 운동방식을 택하고 있지 않거든. <조선일보>를 검찰에 고소하는 것도 아니고, 공권력을 통해 <조선일보> 구독금지 운동을 편 것도 아니고, 사주 방우영씨나 김대중 주필을 구속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고엽제전우회처럼 조선일보 5층에 기어올라간 것도 아니고….

김어준 코리아나호텔에는 들어갔는데. (웃음)

김규항 커피숍에 모인 거지. 철저히 민간차원의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캠페인인데 그걸 권력놀음이라고 하면 말이 되나?

김어준 게다가, 평양주석궁에 탱크가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극우적인 <조선일보> 의견도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시민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거대한 언론권력을 향해 운동을 펼치는 안티조선은 말이 안 된다고 하니 도대체 이게 논리에 닿냐고. 거대 언론사는 극우적이고 수구적인 의견이라도 사람들이 선택했다면 인정해야 한다면서, 거대 언론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권력밖에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운동은 마뜩찮고 별스럽고 권력놀음이라니. <조선일보>를 변호하기 위해 “모든 의견은 존중해야 한다”는 걸로 방어논리를 삼다가 자가당착에 빠진 거 아냐. 바보…. (웃음)

김종필과 이만섭

김규항 재밌는 건, 이문열씨가 언제부터 그렇게 근대적인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됐냐는 거야. (웃음) 왜 갑자기 이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걸까.

김어준 반박논리가 그것밖에 없으니까. (웃음)

김규항 봉건하고 반공 빼면 없는 사람이 말이야.

김어준 “도둑놈을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거하고 “도둑놈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주장은 ‘극’단적인 거고, 정치적으로 그런 정도의 극단성을 띤 게 극우잖아. “다른 의견은 죽여야 돼, 없애버려야 돼, 말살해야 돼, 인정하지 말아야 돼”… 거대언론사가 그런 극우적 편향을 띠어도 괜찮다는 건데. 혹시 극우가 뭔지도 모르는 거야. (웃음)

김규항 극우가 뭐냐?

김어준 오른쪽으로 많이 간 거. (웃음)

김규항 우리가 극우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교양이 없는 걸 느낄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 그외의 자기 작품세계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정보량이나 지식에 비한다면 말이야.

김어준 이건 그냥 대학생과 토론해도 깨질 수준이야.

김규항 극우 진영에선 조갑제 선생이 열심히 이론을 개발하고 있는데… 딴 놈들은 극우의 이념과 사상을 정교화하려는 노력보다는 그저 극우의 역할을 할 뿐이야. 극우는 극우인데 장사꾼 극우지. 난 이런 상황이 한국 극우를 단련시키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웃음) 하여간 황석영 선생이 동인문학상 거부입장을 표명한 것은 우리나라 중견문학인들 중에선 아주 특별한 태도라서… 아주 고무적인 일 같아.

김어준 이문열은 맛이 간 것 같아. 순수문학만 하든지.

김규항 사람이 맛이 간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먹히는 사회가 맛이 간 거야. 세상이 변하긴 변한 거지.

김어준 그건 그렇고 날치기는 어떻게 된 겁니까.

김규항 정말 김종필은 대단한 인간이야. 이회창하고 골프장에서 웃으면서 “국내 정치현안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다”고 눙치고 그랬거든. 민주당을 아주 안달나게 했지. 50년 동안 해왔던 줄타기 실력을 유감없이 보인 거지. 결국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민주당이 무리수를 썼지.

김어준 딱, 한국정치의 수준인 것 같아. 그런 인물을 끼고 가지 않으면 도대체가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김규항 이에 비해 국회의장 이만섭 같은 사람은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줬지. 날치기 진행을 거부했잖아. 난 그 사람 나름의 정치가로서의 이념에 동의하는 편은 아니거든. 이력을 봐도 하다 못해 민주인사 출신도 아니고…. 그렇지만 아주 존중받아 마땅할 일을 했어. 사실 김종필과 이만섭이란 두 사람 다 이념은 비슷하잖아. 그런데 정치인으로서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거야.

김어준 음… 이런 생각도 들어. 이회창은 DJ와 JP의 정치놀음에 완전히 들러리 역할하고 있는 거…. 이번에 이회창은 자민련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데 충실하게 조연 역할을 한 거 아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를 공격할 빌미를 잡고 자민련을 포섭하겠다는 전략이었나 본데, JP가 그렇게 쉽게 잡히나. JP만 딩가딩가하게 해준 셈이지.

김어준의 ‘닷컴을 위한 변명’

김규항 정치는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이해관계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지. 어떤 신념이나 소신도 그런 구조 속에선 아주 연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만섭이라는 사람은 이번에 그러고도 치명상을 입지 않은 걸 보면 참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야. 정치권 이야기는 지겹다. 딴 이야기 하자. 요즘 수익모델 문제 때문에 벤처시장이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잖아.

김어준 벤처투자회사에서 공공연하게 닷컴기업에는 당분간 투자를 안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지.

김규항 지난해 말이나 올 초 같은 경우엔 ‘인터넷 벤처’라는 이름만 붙으면, 수익을 올리고 안 올리고를 떠나서 조회 수나 회원 수를 기준으로 엄청난 투자가 이뤄졌는데 말이야. 이런 문제에 대해 닷컴기업 사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니? 니 입장을 이야기하지 말고 공명하게 이야기해봐. (웃음)

김어준 공명정대하게 이야기하면 양쪽 다 책임이 있지. 닷컴기업들 같은 경우엔 지나치게 꿈에 사로잡혔다든가, 자기가 끌어들인 자금에 비해서 수익모델을 제대로 창출해내지 못했다든가….

김규항 남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웃음)

김어준 우린 다르지. (웃음) 또는 남의 돈을 끌어들여 장사를 하면서 지나치게 사업 이외에 부문에 투명하지 않게 돈을 썼다거나… 기타 등등.

김규항 반성을 계속하렴. (웃음)

김어준 닷컴기업이 떠맡아야 할 책임이 분명히 있죠. 그런데 투명하지 못했다든가 하는 부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수익을 1년 내에 제대로 못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참 많은 부분이지. 기존 경제구조와는 전혀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단시간에 승부가 나겠어. 그리고 그런 게 벤처 아니냐고.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을 모조리 닷컴기업에 떠넘기는데, 물론 비판받을 부분은 분명히 있지만, 그걸 차분히 검증해낼 임무의 대부분은 투자하는 쪽에 있거든. 자신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그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면서 말이야.

김규항 하소연으로 흐르는군. (웃음)

김어준 닷컴에서 나오는 반성부분만큼 캐피털쪽에서도 반성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상황 전반에 대한 책임은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수익모델을 못 냈으니까 그렇다”는 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캐피털도 애초 그 붐에 적극 동조했단 말이에요. 안 끼면 손해볼 것 같으니까 떼거리로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수익이 안 나니까 또 떼거리로 등을 돌리는 거지. 이런 상황들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닷컴기업에만 돌리는 건 적어도 도덕적이지는 못한 거죠.

천민자본주의를 실감하다

김규항 도덕? 처음에 돈을 투자받으려고 하는 쪽에서는 가능하면 돈 받을 가능성을 확대 포장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인지상정 아냐? 거기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 그 검증은 돈을 투자하는 쪽에서 냉혹하게 해야 하는 것이고… 냉혹함은 그때 발휘되어야 했지.

김어준 양쪽에서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같이 고민해야 할 상황에서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 두는 건, 한편으로는 시장의 자율과 조정에 맡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 옥석을 가려 살 수 있는 경우까지 죽음 혹은 그 직전까지 몰고 가 헐값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음모도 있는 거지.

김규항 근데 닷컴기업쪽에서 너처럼 “상황의 책임이 둘 다 있으니까 왜 너희 투자쪽은 자기책임을 갖지 않으냐”고 하는 것도 순진한 소리야. 그쪽은 그런 거 반성하는 사람들이 아냐. 돈 놓고 돈 먹기 장사하는 건데.

김어준 문제해결 방식이 맘에 안 든다는 거지. 순진한 소리이기는 한데 모든 책임을 닷컴기업에만 몰려는 건 정말 비열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김규항 비열하다고 해봐야 꿈쩍 안 할 거고. (웃음) 어쨌든 이 현상은 이미 1년 전 누구나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던 거야.

김어준 예상 못했죠.

김규항 왜 못해?

김어준 쉽게 될 줄 알았으니까. 양쪽 모두.

김규항 그러니까 상식이 무서운 거야. 내가 출판계통에서 10년 정도 적을 두다보니 친구나 후배들로부터 사람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이 간간이 있거든. 기자나 편집부원 또는 디자이너… 이따금씩 해주지. 근데 지난해 말부터 그런 걸 못하는 거야. 없어. 노는 놈이 하나도 없어. (웃음) 뭐 제대로 글 좀 쓴다거나 디자인 좀 한다는 놈들은 전부 어디 들어가 있는데… 그게 전부 웹쪽이더라고. 심지어는 아날로그쪽에 있던 인력들도 대거 그쪽으로 빠져나갔다고. 내가 그때 했던 말이 “걔들 1년 만에 회사 다 망해서 돌아올 거다”였는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요란하긴 한데 돈될 게 없어보이더란 말이지. 이런 게 다 어차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선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

김어준 캐피털 쪽도 어려움이 많겠죠. 사실 투자자로선 투자된 게 회수돼야 재투자를 하는데, 회수가 안 되니까 사이클이 막혀버린 거거든요. 결국은 그게 비열하든 무책임하든 어쨌거나 닷컴기업 자신이 살아갈 길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죠. 스스로.

김규항 원래 벤처캐피털의 취지는 말 그대로 ‘모험적인 투자’인 것이거든. 위험하지만 전망있는 기업에 과감히 투자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볼 때 최선의 사고방식이지. 사채시장의 장사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거라고. 지금까지 너무 무절제하게 투자했기 때문에 데미지를 입었다는 걸 반성하면서,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검증한다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닷컴기업은 투자중단”이라는 게 참…. 하여간 닷컴기업이 수익모델을 만들면 자동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긴 해.

김어준 도덕성을 논하는 건 자본쪽에서 보자면 씨도 안 먹히는 얘기죠. 도덕이고 나발이고 내 돈이 들어가서 안 나오는데 누가 하겠어.

김규항 이 모든 현상들은 한국에서 돈이 얼마나 저열하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이를테면 대기업이 영상산업에 진출하면서 영화쪽으로 들어갔다가 다 나왔잖아. 지금은 투자금융쪽에 다 들어와 있거든.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고. 한국이 천민자본주의라는 게 여기서 방증이 돼.

김어준 난 캐피털쪽을 도덕적 이외의 이유로 비난할 순 없을 것 같아. 그게 자본주의의 생리이자 회사의 생리고, 돈의 생리이니까. 하지만 도덕성 부분에 이르면 캐피털쪽이 천하다…라는 비난은 감수해야 마땅하다고 봐. 사실이니까.

벤처 뻥튀기를 경계함



김규항 상도덕으로는 비난할 수 있겠지. 소용없는 일이지만.

김어준 한 가지 분명한 건 닷컴기업이 수익을 못 내면서 사회적 손실을 불러일으킨 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공도 있다는 거야. 전혀 새로운 방식의 부의 재분배를 일정 정도 한 거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재벌의 지배력을 뒤엎는 것은 그전까지는 어떤 방식으로도 불가능했잖아요. 하지만 그 가능성의 일단을 봤거든. 새롬이니 다음이니…. 그 꿈이 하도 커져서 망가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런 거대한 경제구조의 변화는 전시상황 같이 판을 아예 뒤엎는 엄청난 구조적 충격이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했던 이야기라고. 그 계기를 전쟁없이 닷(dot)이 만들어준 거죠.

김규항 재벌의 불건전한 성장을 비판하면서 벤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니가 적시한 두세개 기업이 얼마나 성실과 노력에 의해서 성장했는지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거든. 그 역시 뻥튀기란 말이야.

김어준 그렇죠. 기적이죠.

김규항 사실 열기에 의한 증자였지. 생산에 의한 자산 증가가 아냐. 거기서 실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것도 아니고.

김어준 물론 알맹이가 튼실하지 않다는 비판은 지금 받고 있고, 앞으로도 수년간 계속 받겠지만… 우리네 경제구조를 뒤집을 계기를 마련했다는 건 엄청난 거야.

김규항 뒤집은 상태는 아니야.

김어준 사람들 머릿속에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줬잖아.

김규항 다르게 볼 수도 있어. 젊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아이디어, 그러니까 대동강에서 물장사로 떼돈을 번 김선달식으로 자꾸 그런 식의 성공신화를 추종하게 하는… 환상을 좇게 하는 열기를 불러일으킨 면도 있지. 저놈이 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하는.

김어준 근데 워낙에 벤처라는 게 그런 열기가 없다면, 꿈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고, 실제 그렇게 꿈꾸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갈 가능성조차 없었던 사회에서 그나마 꿈꿔 볼 수 있는 사회로의 이행은 아무리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손치더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김규항 지금 가장 뻥튀기된 벤처들의 특징은 첨단기술 제조업체에 기반하지 않고 있는 거 같아. 이를테면 미국의 유명한 벤처기업들을 보면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보다는 기술력에 의한 벤처기업이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거든.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 아닌가 하는 거지.

김어준 꼭 그런 건 아니지. 야후나 아마존이 기술력이 최고여서 그렇게 됐나?

김규항 근데 메일 보내는 걸 상대방으로부터 확인받는 기능이 핫메일(hotmail)에서도 안 되던데…. 다음(daum)의 한메일(hanmail)에서 되대. 그거 괜찮은 기술이지.

김어준 기술로 따지면 대단한 기술은 아니죠.

김규항 핫메일이 어디 거지?

김어준 마이크로소프트로 넘어갔죠.

김규항 마이크로소프트로는 안 되거든. 우리나라 통신메일은 그게 된다고. 그것도 기술은 기술이지. 다이얼패드 같은 것도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김어준 먼저 한 거죠. 야후는 무슨 기술이 있나.

김규항 야후야, 초기에 인터넷을 실제 일반인들의 몫으로 만든 검색사이트로서 막대한 공이 있지.

김어준 제 말은 기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건데, 어쨌거나 닷컴들이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살포한 공로는 인정해주자고.

김규항 젊은이들한테 꿈을 준 건 사실이지.

김어준 물론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 부분도 있긴 있지.

극우는 단련된다

김규항 25살 카이스트 출신 벤처 희망자라면 무조건 1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이야기가 실제로 많이 돌았다는 거야. 20대에 카이스트를 나와서 벤처를 한다면, 실제 뭘 하든 간에 그 모양 자체로서 투자가 충분히 가능하고 뻥튀기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 몇달 전에 그렇게까지 갔었대.

김어준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닷컴기업의 열풍과 거품에 휩싸인 이유 중 하나도… 역으로 말하면 닷컴 열풍 이전까지는 도저히 이런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재벌이 아니면 산업구조 속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잖아. 재벌로 가는 것만이 사회적 성공의 보증이고, 그 속에서 튀어나오고 싶어했지만 그럴 공간 자체가 없어 답답하면서도 대안이 없던 환경….

김규항 후발주자들만 불행하게 됐지. 남들보다 오래 착실하게 준비해서 출발한 벤처기업들은 피를 보고 있는 거야. 어쨌든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의 벤처가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 결국은 적자생존이야. 오늘 결론은 뭐니.

김어준 바보….

김규항 그런 식으로 단정적인 말은 하지 말자고. 혹시 아닐지도 모르잖아. (웃음)

김어준 바보이지 않을까? (웃음) 결론을 유보한 채. (웃음)

김규항 극우 이문열 의외로 약한 모습 보이다. (웃음)

‘강철은 단련된다’는 말 있지. ‘극우는 단련된다’ 어때. (썰렁)

김어준 하나도 안 웃긴다. 역시 바보는 형이야. (웃음)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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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Pac 기사 두 개...

힙합, 랩, 그리고 투팩

from : http://openc.or.kr/openbook/04/openbook_view2.asp?idx=117

[음악이야기] 힙합, 랩, 그리고 투팩
유요비 | 문화평론가, 시인

요즘 랩그룹 DJ DOC의 멤버 이하늘이 ‘베이비 복스’를 ‘미아리 복스’라고 비하한 말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요절한 랩가수 투팩(2PAC)의 노래를 돈을 주고 한 곡 사와서, 이리저리 뜯어 고치고 하여 마치 자신들의 창작품인 양 노래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얄팍한 상혼으로 이미 사망한 투팩의 정신(저항성)까지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이비 복스는 돈을 위해 사랑을 파는 미아리의 창녀와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 같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계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인기 연예인들이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이것마저 상업적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기 연예인들이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래서 자본의 논리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또 자신의 인기에 걸맞은 자기 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랩음악은 할렘의 길거리문화인 힙합의 음악적 형식으로 원래는 말장난인 랩(Rapp)에서 시작되었다. ‘힙합’은 1970년대 후반 흑인 할렘가 청소년들의 놀이였던 스크래취, 브레이크 댄스, 랩 등이 어느 정도 예술적 형식을 갖추게 되면서 문화화된 것이다. 할렘가는 빈곤, 흑인차별, 낮은 교육수준 등으로 미국사회 최하층의 삶이 만연한 지역이다. 일자리 없는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할렘가를 배회하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마약에 빠져든다. 랩음악은 바로 이런 할렘가의 무위도식(?)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시간 때우기 위한 말장난과 농담들이 점점 부자들의 인색함이나 부당한 인종차별과 경제적 횡포를 비난하는 말들로 바뀌어 갔고, 더 나아가 정치적 주장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장 기본적인 리듬이 결합되어 ‘하고 싶은 말들을 지껄이듯 말하는’ 랩음악이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랩은 미국사회에서 아직도 이방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미국 흑인(Afro-American)들의 한과 분노, 저항정신이 담긴 넋두리이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프리덤라이드운동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흑인들은 아직도 미국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흑백간의 인종차별을 랩이란 음악으로 고발하고 있다.
랩이 대중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레이건의 보수주의에 대항하여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979년이었다. 당시 슈거힐 갱Sugarhill Gang이 발표한 이 히트함으로써 하층의 흑인문화에 숨었던 랩의 존재를 알게 됐고, 랩뿐만 아니라 브레이크 댄스 등의 힙합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각종 음악과 영화로 힙합은 상업화되고 문화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흑인들 스스로의 각성과 평화를 촉구하는 등 긍정적 메시지로 일관하던 랩은 레이건의 당선과 함께 미국 내에 백인 중심의 보수주의가 뿌리를 내림에 따라 체제를 부정하고 폭동을 주장하는 등 점점 과격한 메시지로 변모한다. 공화당 정부가 흑인들을 위한 복지예산을 삭감하자 할렘가는 더욱 황폐하게 되었고 흑백간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됐다. 범죄와 마약만이 난무하는 거리에는 소박한 꿈을 빼앗긴 흑인들의 저주와 욕설과 폭력이,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를 담은 랩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갱스터 랩이고 그 대표적 주자가 바로 투팩이다.
투팩(2PAC)은 1990년대 미국의 흑인 대중문화인 힙합(HiP-HOP)을 대표하는 랩가수이자 영화배우다. 마지막 잉카제국의 황제인 이름인 투팩 아마루 셰이커Tupac Amaru shakur가 본명이며, 1971년 뉴욕의 뒷골목에서 흑인해방운동 단체인 블랙 팬더Black Panther의 여성 조직원인 아페니 세이커Afeni Shakur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 때 그룹 디지털 언더그라운드Digital Underground의 댄서로 대중음악계와 인연을 맺었으나 곧 탈퇴하고 1991년 랩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95년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할 때까지 《2Pac alypse now》(1991), 《Strictly 4 my n.i.g.g.a.z...》(1993), 《Me against the world》(1995), 《All eyez on me》(1996) 등 4장의 앨범을 내놓았다.
투팩의 랩은 무자비한 욕설과 공권력에 대한 반항과 폭력이 주 가사인 ‘갱스터랩’으로 분류된다. 1991년 텍사스에서 한 소년이 경찰관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투팩의 노래를 듣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하자, 부통령인 댄 퀘일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갓 데뷔한 투팩을 비난하였고, 그 때문에 투팩은 대중적으로는 거물이 되었지만 동시에 개인의 힘으로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갱스터 래퍼’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투팩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표면적인 것이다. 오히려 투팩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미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편견을 지적하고, 회개를 통한 범죄의 근절과 흑인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이러한 투팩의 생각을 대변한 앨범이 1995년 발매된 《Me against the world》다. 앨범에 실린 노래가사들은 제목 ‘Me against the world’(이 세상 전체와 싸우는 나)가 암시하는 것처럼 미국사회에 대한 그의 분노와 개인의 외로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력과 마약이 난무하는 흑인 빈민가의 현실과, 사회의 모순에 대한 직설적 비판, 흑인으로서의 고통, 암울한 운명 등을 거칠게 고발하고 있지만, 종국에 가서는 이러한 모든 불합리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마음가짐, 폭력과 분노로 가득 찬 자신의 죄악에 대한 회개 등을 노래하고 있다.
이 앨범의 수록곡 중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 아페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눈물겨운 가사로 표현한 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며 회개와 함께 하느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는 투팩 음악의 정수이다.
투팩은 강한 개성과 외모 때문에 4년 동안 무려 6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흑인빈민가 청년들의 애환을 다룬 , 재닛 잭슨과 공연한 , 농구영화, 또한 팀 로스Tim Roth와 함께 경찰관 역을 맡았던 , , 등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처럼 성공적인 음악이나 영화 활동과 달리 투팩의 사생활은 불안정했다. 오클랜드의 가출 청소년을 위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열성적으로 사회활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사망하기 전까지 폭력과 성추행 등의 혐의로 감옥을 들락거렸다. 투팩은 자신의 노래처럼 위험한 인생을 살았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투팩은 미국사회에서 소외된 젊은층의 절망과 분노를 대변했고, 미국 사회가 지닌 모순을 거침없이 고발한 음악인이었다.

============================================================================ TuPac의 생애

from : http://lion.chonan-c.ac.kr/~pro12/2pac.htm

1971년의 어느 날, 뉴욕의 빈민가인 Bronx에서 Tupac Amaru Shakur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할렘 출신의 여느 다른 흑인들처럼 힘든 삶을 살았으며, 1996년 9월7일 라스베가스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정확히 6일 후인 9월 13일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언뜻 보면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 흑인 청년의 이야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랩 음악을 통하여 흑인 사회에,나아가서는 미국 사회 전체에까지 미친 영향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그의 사망 후에조차도 그의 음악과 인생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적어도 전세계 수백만의 팬들의 마음 속에서, 2Pac은 아직도 진정한 승리자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서는,국내에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2Pac에 관한 여러 사실들을 통하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그의 음악은 어떤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2Pac Shakur는 흑인 과격 세력의 모임이었던 Black Panther의 멤버였던 Afeni Shaku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볼티모어에서 예술 고등학교를 다니며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졸업후 그는 서부 캘리포니아의 Marin City로 와서 당시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랩 그룹 Digital Underground에 정식 멤버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Digital Underground의 앨범 'Sons of the P' 앨범으로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때 2Pac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솔로 앨범인 '2Pacalypse Now'를 발매하여 'Trapped', 'Brenda's got a baby'등을 히트시켰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첫 앨범의 수록곡들이 텍사스에서 있었던 경찰관 살해범에게 살인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고, 92년당시 부통령이었던 댄 퀘일은 2Pac을 문화의 이단아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는 93년 2집 'Strictly 4 My N.I.G.G.A.Z.'를 발표, 'I get around', 'Keep ya head up'과 같은 명곡들로 그해에 American Music Award의 최우수 힙합 신인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Juice','Above the Rim'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활동도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감독 앨런 휴즈와의 싸움은 L.A.의 구치소에서의 15일간 구류라는 결과를 낳는다. 같은해 11월에는 아틀란타에서 경찰관 살해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다. 결국 혐의는 풀렸지만, 그의 평판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또한 11월 말경, 2Pac은 무기 소지와 성추행 사건으로 기소되는데, 행운의 여신이 그를 외면했기 때문일까, 법원의 마지막 판결이 있던 바로 전날 맨하탄의 녹음실로 향하던 2Pac이 3명의 갱단에게 총격을 당하고 금품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그는 기브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징역18개월의 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그는 인생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이것은 출옥후에 가졌던 인터뷰에도 잘 드러나며, 무엇보다도 1995년 옥중에서 발표한 'Me Against The World' 앨범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앨범은 초유의 인기를 모으며 싱글 'Dear Mama'를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 놓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감옥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고 다시 사회에 돌아온 그에게는 모든 곳이 곧 천국이었다. 1995년 말경에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Keisha Morris양과 뉴욕에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다. 2Pac에게 있어서는 MC로서의 경력과, 그의 인생 자체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짧은 인생을 놓고 보았을때, 그에게는 L.A.의 Death Row 레코드사에 속해 있었던 기간이 최고의 전성기였다. Dr.Dre와 함께 Death Row를 설립한 Suge Knight는 2Pac이 출감되자마자 그를 찾아가 계약을 맺고, 96년 드디어 대망의 더블 앨범 'All Eyez On Me'를 발표한다. 이후 Dr.Dre의 독립과 Snoop Doggy Dog의 이적 등으로 재정난에 시달렸던 Death Row 레코드사에 있어서 모든 것의 중심은 바로 2Pac이었으며,그는 이미 신화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2Pac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90년대 랩 음악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는 연기자로서도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 그의 사후에 공개된 영화 'Gang Related'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했었다. 그러나 1996년 9월 7일,그는 또다시 총탄을 맞아야 했고 결국 9월 13일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2Pac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 사람들의 계속적인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 지금 이순간에도 인터넷의 랩 뉴스그룹에서는 2Pac의 음악과 그의 사상 에 대한 열띤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2Pac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홈페이지도 올려져 있다. 그리고 미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90년대의 흑인 문화 현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2Pac을 강의의 소재로도 삼고 있다.

2Pac은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마틴 루터 킹 박사와 말콤 엑스의 특성들을 나눠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집과 4집을 통하여 미국 흑인들에게 자성의 목소리를 높일 것을 종용하였다. 1집과 2집에서 보여주던 Thug Style과 외설스러움은 수그러지고 대신 그의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게 하는 눈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4집의 수록곡인 'Life goes on'에서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중 한 구절을 보자;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더 희생되어야 하는가? 모두에게 평온함이 깃들기만을 바라지만 나와 같은 범죄자에게도 천국이 있는가?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가. 2Pac은 그가 자라난 뒷골목의 잔인함과 비참함을 통하여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한 자기 통찰의 과정을 통하여 그는 예전에 세상에 대하여 품었던 증오를 풀었고,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인간적 면모를 발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간혹 언론들은 앨범 사진에 보이는 그의 기이한 문신들을 놓고 그것이 마치 범죄성이 2Pac의 전모를 나타내는 것으로 부각시킬 때가 많았다. 물론 그는 한때 혼란과 광폭함이 넘치는 야생마와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과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분명히 '갱스터 랩'으로 분류되지만 그것이 전하려 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윤리적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인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중 하나를 들자면 '여권의 존중'이다. 2Pac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의해 홀로 자라난 만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었는데, 그는 복역 기간중에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경험했었다. 2Pac의 어머니는 계속 지방법원을 찾아다니면서 까지 아들의 결백을 주장했던 것이다. 2Pac은 'Dear Mama'라는 노래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청소년들 이다. 흑인 구역의 청소년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는 한 대개가 학업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에서는 쾌락과 범죄의 유혹이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다. 청소년들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2Pac은 특히 청소년들에게 강한 힘과 의지를 가지라고 격려한다. 그의 곡들 중 'Keep ya head up'이라는 곡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그의 격려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변화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일은 반드시 밝은 태양이 우리를 비춰줄 것이다"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위에서 잠시 20세기 흑인 인권 운동의 두 대표자인 킹 박사와 말콤 엑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흑인의 인권 확보라는 같은 주제를 상반된 방식으로 해석했다. 킹 박사는 늘 평화와 비폭력,그리고 사랑을 강조한 반면 말콤 엑스는 무조건적인 쟁취와 투쟁을 전면에 내세웠다. 2Pac이 인터뷰나 그의 노래에서 전하는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 두 가지 입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2Pac은 흑인 사회 구성원들 자체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흑인들 스스로가 올바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같은 흑인들이라 해도 좋게 봐줄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례에는 역시 총격으로 사망한 래퍼 The Notorious B.I.G.와 그의 소속사인 Bad Boy Entertainment와의 갈등을 들 수 있다. Notorious B.I.G.는 뉴욕의 빈민가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2Pac의 도움으로 랩 음악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Notorious BIG는 2Pac 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2Pac은 이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Notorious B.I.G. 는 내가 아끼는 형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잘 해 주었고 성공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돈의 어둠에 가려 사물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라고 말이다. 그는 3집의 'Temptations'라는 곡에서 그러한 메시지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2Pac의 사후에 랩 음악계를 비롯한 흑인 사회 전반에는 조용한 반성의 기운이 감돌았다. 랩 음악계 관련인들 간의 간담회가 여러 차례 열렸고, 2Pac의 생애를 기리는 출판물도 상당수 간행되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있는 듯 하다. '더 이상의 폭력은 용납하거나 미화할 수 없다'라는 결론에 많은 이들이 동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요즈음 발매되는 랩 음반들을 보면 여전히 갱스터적인 소재들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 몹시 안타까운 점이다. '힙합의 의식적인 면을 되찾자'는 운동이 생각만큼 실효성을 거두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Pac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연민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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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gmatic Programmer와 Pragmatism에 대한 단상

대학교 3학년때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전산과 철학이라는 두 관심 영역을 식탐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꽤 거창했는데.. 전산은 제 업을 위해, 철학은 사는 방법을 구하기 위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전산이라는 분야에 철학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을까?' 가끔 고민하곤 했는데 현대 사상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 Pragmatism에 대한 사조를 배우게 되면서 이 질문의 답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Pragmatism은 그리스어인 'Pragma'에서 어원적인 개념을 도입하고 있으며 Pragma란 '행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사상은 개척시대 미국에서 발달됐는데.. 기존에 관념(Idea)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사조를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행위(실용, 유용)적인 측면에서 철학적 사고를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즉, 관념이나 이론은 행위로 증명, 연관됐을 때 유의미하며, "관념의 대상이 행위와 관련이 있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 그 관념이 어떤 성과를 나타내고, 유용한 것으로 현상화 됐을 때"에 따라 의미여부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 "관념의 의미는 그 대상을 초래하는 결과에 있다." - 제임스

이를테면... 기존의 세계관에 비추어볼 때,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세계에서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자'는 실세계에 전혀 의미가 없으며 실제 만지고 사용할 수 있는 (질료와 형상화된) 의자만이 의미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pragmatism의 대표적인 예는... 신이라고 하는 관념은 신을 믿음으로써 용기, 동기가 생기는 결과가 초래한다면 신이란 관념의 의미가 부여됍니다.

즉, "결과(혹은 유용성)가 관념을 규정한다."


이 사상은 미국에서 프론티어 정신과 함께 미국 개척을 이끄는 사상으로 적용되었으며.. 제가 이 사상을 프로그래머로서 가져야할 태도로 설정한 이유는 패턴이건 방법론이건 어떤 기술이건 그 이론(관념)이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선 이상적인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태도가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만약 제일 이상적인 S/W를 만들었다면 내가 적용한 방법이 제일 유용하다.!! .........ㅋ

사실.. 제 기억의 편린으로 pragmatism이 잊혀질 즈음... objectworld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우연히 (경원형으로 부터) 이 책의 이름에서 "pragmatic"이란 단어가 귀에 꼿혔을 때 이 책을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었고 곧바로 e-book을 구해서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경원님이 꼭 스터디를 함께하면 좋겠다는.. ^^)

사실.. Pragmatic Programmer가 Pragmatism을 적용한다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Pragmatic하지만 Pragmatism은 아닌 것 같은.. ^^)... Pragmatic Programmer는 다른 책과 다르게 몇 가지 기억이 묻어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



보태기 하나..!!

요즘.. 논어를 틈틈히 보고 있는데요... 교과서적인 얘기 같지만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배우고 시간날 때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가 말하는 '실천'이란 덕목도 Pragmatic과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순수학문을 하지않는 우리에게 있어 배움이라던가 지식은 실천이 없으면 지적 허영이나 의미 없음에 지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천이 전제한) 다음 지식을 위한 선수과정으로서는 유의미하겠지만 말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이건 학습법에 관한 얘기일 것 같은데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헛것이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論語, 爲政)

어떤 학습을 할 때 수동적인 주입보단 타당성이라던가 정합성, 적용방안, 체계확립 등등의 '생각'들을 함께할 때 그 '배움'은 실제 자신의 내공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도덕책 같은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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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한 종을 찾아서..

나는 가끔 문명인으로 살고 있는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흔히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볼 때 그러하다.

아래 글을 읽으면 진정으로 진화한 부류는 원주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바람과 얘기할 수 있는가? 또는 도살을 위해 엄청난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 쉬운가? 기도로 식량이 될 짐승을 부르는 게 쉬운가? (호주 원주민 중 일부는 식사시간이 되면 기도를 하는데.. 그때마다 짐승이 나타나서 스스로 그때의 식사를 해결하도록 했다고 한다.)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연설문


배경-1885년 미국의 14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는 지금의 워싱턴주에 살던 북미 인디언 수와 미족의 추장 시애틀 씨에게 그의 땅을 정부에 팔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시애틀 추장이 피어스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신하였고 미국정부는 독립2백주년을 기념하여 그 내용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내용이다.

신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워싱턴에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그 위대한 지도자는 또한 우정과 친선의 말들을 우리에게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답례로서 우리의 우정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 까닭은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백인들이 총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 수가 있습니까. 그러한 생각은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선한 공기가 반짝이는 물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우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구석구석은 우리 백성들에게 신성합니다. 저 빛나는 솔잎들이며 해변의 모래톱이며 어두 침침한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은 우리 백성들의 추억과 경험속에서 성스러운 것들입니다.
백인들이 우리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백인들에게는 어떤 한 부분의 땅은 나머지 부분의 땅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중에 그 땅에 와서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들의 형제가 아니라 적입니다. 그들이 어떤 땅을 정복하면 그들은 곧 그곳으로 옮겨옵니다. 그들의 왕성한 식욕은 대지를 마구 먹어치운 다음에는 그것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당신네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인디언들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우리가 야만인이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겠지요
내가 만일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나는 하나의 조건을 내 놓겠습니다. 즉 백인들은 이 땅에 사는 짐승들을 그들의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입니까만일 모든 짐승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커다란 영혼의 고독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로 인간들에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백인들이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한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당신네 신과 우리의 신은 같은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우리의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신도 상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신입니다.
그리고 신의 연민은 인디언이나 백인들에게 동등합니다. 이 대지는 신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지를 해치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백인들도 역시 소멸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종족들보다 더 먼저 소멸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오염시켜 나간다면 당신은 어느 날 밤 당신 자신의 오물속에서 질식하게 될 것입니다. 들소들이 모두 살육 당하고 야생마들이 모두 길들여지며 성스러운 숲속이 인간의 냄새로 꽉 찰 때 그리고 산열매가 무르익는 언덕이 수다스러운 부인네들에 의해서 더럽혀질 때 잡목 숲과 독수리는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삶의 종말이요, 죽음의 시작입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라곤 없습니다. 아무데서도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며 벌레들이 날아 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내가 야만인이어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음은 내귀를 상하게 합니다. 만일 사람이 쑥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북미의 인디언들은 한낮의 비로 씻겨지고 소나무의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더 좋아합니다. 공기는 인디언들에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짐승과 나무의 인간들의 똑같이 숨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은 자기들이 들어마시는 공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오래 동안 죽을 병에 걸려 신음하는 사람들처럼 냄새를 알지 못합니다.우리가 백인들이 꾸고 있는 꿈과 그들이 긴긴 겨울밤에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려주는 희망과 그들이 마음속에 불태우고 있는 미래의 비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해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만인들입니다.
백인들의 꿈은 우리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동의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약속한 인디언 보류지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인디언들이 사라지고 오직 광야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만이 남더라도 이 해변들과 숲들은 여전히 우리 백성들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갓난 아기가 엄마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고동소리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땅을 당신에게 팔려고 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그 땅을 사랑하듯 사랑하고, 우리가 보살피듯 보살피며, 그 땅에 대한 기억을 지금의 모습대로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모든 힘과 모든 능력과 모든 정성을 기울여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 땅을 보존하고 또 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그 땅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신도 우리의 신과 같은 신이라는 한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에게 있어서 대지는 소중한 것입니다.
백인들일지라도 공동의 운명으로부터 제외 될 수는 없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들이 남긴 말

인디언들은 표현을 중시했다. 그들의 언어는 곳곳에 배어 있는 자연의 힘에서 비롯되고, 단어는 바람에 의해 다듬어지고, 문장은 숲의 향기에서 우러났다. 백인들과의 만남에서 추장들은 잊을 수 없는 명언들을 남겼다. 그들의 말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위대한 민족성을 읽을 수 있다.

헤하카 사파(검은 사슴). 크레이지 호스의 혈족으로, 수족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테톤족의 분파이자 오글랄라족에 속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대사제들로부터 부족의 신성한 전통을 전수받았다.

[인디언은 모든 것을 원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것은 우주의 기운이 원을 그리며 돌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우리 민족이 강하고 행복했을 때 모든 부족의 힘은 나라의 성스러운 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겁니다.

동쪽에서는 평화와 광명을, 남쪽에서는 따뜻한 기운을, 서쪽에서는 비, 북쪽에서는 거센 찬바람이 힘과 끈기를 줍니다. 이러한 지식도 우리의 종교와 함께 초월적인 세계에서 얻은 것입니다. 우주의 힘을 만드는 건 모두 원의 형상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하늘도 둥글고 지구도 둥글다고 들었고 별도 또한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람도 그 맹렬한 흐름이 극에 달하면 소용돌이가 됩니다. 새들도 둥지를 둥글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나 봅니다. 해가 떠오르고 지는 것도 원의 형상으로 이루어집니다. 달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둥근 형상을 하고 있어요.

계절도 커다란 원형을 그리면서 변화되다가 어김없이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삶도 어린 시절에서 출발하여 마치 원을 그리듯 마지막에 가서는 어린이같이 되어 마침내 생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처도 새둥지처럼 그 형태를 둥글게 하고 배치도 원형으로 합니다. 위대한 정령께서 우리 후손을 보호하사 여러 둥지를 모으셨고, 그렇게 모은 둥지가 부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케타아히(독수리 날개)는 다음과 같이 인디언이 후세에 물려준 과업을 찬양한다.

[형제들이여, 인디언은 이 땅에 영원한 추억을 남겼도다. 아름다운 것들에 우리의 언어로 이름을 남긴 것이다. 미네하하는 우리를 생각하면서 웃음을 지을 것이고, 세네카는 우리의 모습에 눈을 반짝일 것이며, 미시시피는 나지막한 소리로 우리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할 것이다. 광활한 아이오와, 가파른 지형의 다코타, 비옥한 미시건도 태양을 향하여 우리의 이름을 속삭이게 될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포효하고, 일리노이는 탄식하며, 델라웨어는 우리의 타와에(장송곡)를 끊임없이 노래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이 영원한 장송곡을 태연히 듣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백인들이 탐내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밖에 우리는 아무 죄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가 지는 편으로 떠났다. 우리가 살던 곳을 백인들에게 남겨주고말이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전설은 추장이 잔존 세력을 이끌고 어떻게 큰 강을 건너왔는지 들려준다. 추장은 거처할 곳을 만들려고 기둥을 땅에 박으며 "앨라배마!"라고 한탄조로 말했다. 그 말은 "이곳이 우리가 쉴 땅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백인들이 그곳까지 들이닥쳐 거기서도 살수가 없게 되었다. 쫓겨난 사람들은 어두운 늪의 수렁으로 밀려나 학살되었다. 추장이 한숨지으며 탄식했던 그 말이 바로 백인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 별마저 반겨주지 않던 그곳에서도 인디언은 탄식조로 "앨라배마"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나마 와칸만이 우리에게 겨우 한 귀퉁이 쉴 곳을 마련해줄 수 있었을 뿐이다.]

크로푸트는 블랙푸트 연합의 대변자로 1877년 협정에 따라 5만 평방 마일의 초원지역을 캐나다 정부에 양도했다. 그 결과 들소가 사라졌고, 블랙푸트족은 굶주리게 되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밤하늘의 반딧불, 한겨울의 들소의 콧바람, 풀섶에 짧게 드리워졌다 해가 지면 사라지는 작은 그림자인 것을.]

위네바고(인디언 속담)

[우리의 신성한 어머니인 대지와 나무,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증명해 준다.]

인디언 추장이 1876년에 펜실베니아 주지사에게 한 말.

[우리는 고요함을 좋아합니다. 쥐들까지도 평화롭게 놀도록 놓아둘 정도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도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크레이지 호스. 수족의 오글랄라 인디언 추장이었던 그는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1877년 봄에 커스터 휘하의 결사대에게 추격당하다가 빅 혼 산맥에서 마일스 장군에게 생포된다. 바로 그해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한다.

[아무도 당신들 보고 이곳에 오라고 하지 않았소.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가 살도록 이 땅을 주신 것이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땅이 있소. 당신네들을 괴롭힐 마음은 추호도 없소. 위대한 정령께서 우리들이 살 수 있도록 광활한 대지와 들소, 사슴, 영양 등 사냥감들을 마련해 주셨으니 말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의 땅을 강탈한 것이오. 당신들은 우리 사냥감을 죽이고 있소. 그래서 우리는 살기 어려워졌소. 지금 당신들은 우리더러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소. 하지만 위대한 정령께서는 우리를 노동이나 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하라고 만드신 것이오.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네 백인들이나 노동을 하면 되지 않소. 왜 우리에게 문명을 멀리하냐고 묻는 거요? 우리는 당신네들의 문명을 원치 않소! 우리의 아버지처럼, 그 이전의 아버지들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살아갈 것이오.]

[아메리카 인디언의 땅] 필리프 자캥 지음. 송숙자 옮김. (주)시공사. 1998. 14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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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역사, 기형적 국가, 기형적 통치자 - 박정희에 대한 소고

제가 생각하는 박정희의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기형적인 국가를 만든 원흉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에게 있어 박정희는 그의 공에 대한 메리트는 전혀 느낄 수 없음에 반해 그의 과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하는데 있습니다.


박정희를 논함에 있어 그의 옹호자들은 그 시기에 이뤄졌던 압축적 산업화를 이야기 합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띈 민족이 새마을 정신으로 뭉쳐, 보릿고개를 넘어 GNP 1500달러의 신화를 이뤘다는 거죠.. 게다가 개도국으로서 당당하게 중화학 공업의 육성/성공 체계를 갖췄을 뿐만 아니라 경쟁국인 북한을 압도하는 성장이 이 시기에 이뤄졌습니다. 이 양적 성장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있어 박정희는 일종의 메시야로 보여졌을 겁니다.


근대화가 국제적, 시대적 필연인건 확실하지만 '근대화 = 산업화'는 될 수 없윱求? 즉, (서구 모델이었던 ) 근대화는 민주, 인권, 자유, 합리, 혁명.. 등의 질적인 부분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근대화 전략은 초살적인 노동환경과 초살적인 노동시간, 그리고 초살적인 최소 급여가 있었으며 재야인사를 비롯한 국민에 대한 테러적 독재행위, 집시법, 국보법 강화, 안기부 출현과 같은 근대화에 역행하는 전 근대적 통치 방식들이 탄생한 시기도 이 18년 동안입니다. 현재 근대화의 정신은 부재한 채 근대화의 형태만 갖고 있는 우리나라 모습의 원흉이 이미 그때 전제되었던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질을 희생해서 양을 획득한 시기가 이 시기이며 현재 우리 사회의 모든 '기형적' 현상, 원칙들이 이 시기에 다져졌으며 이런 부작용에 대한 상징적 사건이 IMF였죠..

산업화에 따른 경제 정책들은 선성장, 후분배론을 따랐고 노동자를 비롯한 중소 기업들이 대기업의 성장에 뿌리가 되어줬습니다. 하지만 성장만 있었지 분배는 미미한(즉 잉여자본의 집중 분배화한) 그때의 논리는 현재 사회 양극화 현상의 원인으로 분석하는 것은 지나친 분석일까요?


결국 박정희의 신화 이면에는 조삼모사적인 미래의 대가를 전제한 것이며 현재 우리나라의 여러 측면에서 보이는 진통의 원인은 이때 뿌려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혐오하는 박정희의 논리가 성장 우선주의, 경제제일주의인데요.. 이 주의들이 우리나라에 뿌리박힌 하나의 가치관인 경제 지상주의, 천민 자본주의로 업그레이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공세와 맞물려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양심적인 논리가 아주 당연스럽게 작용하고 있는 현상을 매일 목도할 때 박정희 무덤에 침을 뱉으러 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박정희의 경제발전 주역론적 서술을 했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진중권사마의 책을 보고 그것도 아니다라는 의혹을 심하게 갖고 있구요.. 그래서 '그 시기에 이뤄졌던.. '으로 표현했습니다. 제가 경제쪽엔 문외한이라 비평하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끝으로, 박정희가 제일 성공한 치적?은 세뇌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아직도 그가 일부에게 "영웅적인 통치력으로써 근대화의 한을 푼"(조갑제) 인물로 칭송받고 있고, 국가주의, 가족주의, 유사가족주의 등등의 국가를 위한 희생은 영광스런 행위임을 무의식적으로 고백할 때, 과거 성장의 정당성이 자꾸 들릴 때.. 무엇보다 그가 죽은 25년 후인 지금도 그가 이렇게 언급될 때...  그의 그늘이 깊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 대북관계와 한미관계, 지역갈등,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하려고 했는데 깜빡 했는데요.. 적어도 대북관계에 대해선 김일성이나 박정희나 자신의 통치기반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서로를 이용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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