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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7/18
    안티는 안 티나게..
    free-vahn
  2. 2004/07/18
    에밀졸라를 생각하며..
    free-vahn
  3. 2004/07/18
    메카시즘..
    free-vahn
  4. 2004/07/18
    모기
    free-vahn
  5. 2004/07/18
    봄의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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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7/18
    왜 기독교는 헤비메틀을 싫어하는가?
    free-vahn
  7. 2004/07/18
    자유로 부터의 도피
    free-vahn
  8. 2004/07/18
    태지 유감
    free-vahn
  9. 2004/07/18
    Rock과 Hip Hop은 다르지 않다
    free-vahn

안티는 안 티나게..

언제부턴가 인터넷을 통해 안티문화가 활발해졌습니다.
사회 곳곳의 모순과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여러 측면에서의 접근법은 참신했고 다양한 정보 제공에 촉매가 됐습니다.
또한 각 게시판과 토론마당의 논객들이 이 안티문화에 주체가 됨으로 슈퍼스타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좀 철지난 얘기 같지만 안티에 안티를 걸어야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안티문화에 편향적이었던 제 자신도 반성하게 됩니다.)
특히 탄핵정국에 들어 일부 논객들의 지나친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안티문화에 대한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세대라고 평가되는 386세대들이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전문성을 갖고 인터넷이란 광장에 다시 모이게 됐습니다. 더불어 인터넷이라는 폭발력 높은 광장이 이 현상을 더욱 편승시켰습니다. 단순히 수동적이고 단방향적인 정보의 주입에서 - 그래서 신문을 읽어도 한번 더 분석해야 했던 - 능동적이고, 양방향적인 - 그래서 피드백이 빠르고, 풍부해진 - 이 광장은 정보의 성격 자체를 바꿔놨고, 안티문화가 싹틀 수 있는 장이 되었습니다.

문두에 썼던 것과 같이 어느 수준, 어느 내용에서는 안티문화는 상당한 순작용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래 몇 가지의 반작용적인 현상을 보게됩니다.

첫째, 대안 없는 반론.
어떤 글들은 그 내용의 풍부함과 예리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비난, 독설, 씹기위한 광시곡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논쟁의 기본원칙이라고 생각되는데, 대안 없는 반론은 허무합니다.
대안 없는 안티의 텍스트는 "토론"이 아닌 "주장"으로 성격이 바껴집니다. 때로는 텍스트의 내용에 따라서 "주장"도 안되는 필자의 "신념", "신앙"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문제는 이 주장이나, 신념, 신앙들이 논리체계를 갖춘 논지로 포장된다는데 있습니다.

둘째, 자기성찰없는 비판.
사견이지만 사회는 고루 썪고 있으며, 우리의 제도와 도덕, 양식에도 추악한 면과 모순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이 되는 대상은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정치인, 연애인과 같은 특정 계급들입니다. 이 계급들의 특징은 사회적 수혜 계층이기 때문에 그 오염도가 더 심하고 또 오염도와 수혜도 때문에 처절한 비난을 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는? 서울 위성도시들의 러브호텔과 교육 기형 현상, 소비에만 집착하는 성향, 질서 보단 이익이 우선시 되는 미덕... 어찌보면 비난받는 그들은 이 추악한 모순되고 부조리한, 부패한 지옥도에서 패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현상으론 양시론, 양비론을 통해 자기만 쏙 빠진 타인들, 현상에 대한 질책들입니다. 제가 촘스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기준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는건 비열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무결하고 하자 없는 사람만이 비판할 권리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항상 그들의 시점은 3인칭 관찰자 혹은 전지적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꼭 죄없는 자만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남의 위선에 대한 비판에는 겸허한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자기성찰이 없는 비판은 또다른 위선에 불과합니다.


진짜로 안티를 제대로 하려면 "안티"가 안티나게 하는게 세련되지 않나? 바른 안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몇 자 적어봤습니다.

끝으로 이 지적은 저에게도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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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졸라를 생각하며..

독특한 이름 덕분일까? 에밀 졸라라는 이름은 기억에 오래남습니다.
복학해서인가... 우연히 읽게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글은 다시 내 기억의 상자에서 그의 이름을 끄집어내게 합니다.

군인 장교들과 극우 세력들에 의해 억울하게 스파이로 몰린 드레퓌스는 5년만에 다시 군사재심재판을 받게 됩니다.
정의와 질서를 국가의 이익보다 우선으로 생각했던 애밀 졸라를 포함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투쟁한 결괍니다.
하지만 재판 결과 무기형에서 10년형으로 정상참작, 감형한 결과를 접한 에밀 졸라는 다음과 같이 분노하며 외쳤다고 합니다.

"이 렌느재판에 관하여 상세히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인간이 지금껏 보여준 수치스러운 행위들 중에서 더 가증스러운 기념비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더 간악한 것은 인간 역사에 없었다. 이 재판 과정에서 펼쳐진 무지, 어리석음, 광기, 무자비, 허위, 죄악에 다음 세대들은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칠 것이다."

다시 에밀 졸라가 생각나는건 드레퓌스 사건과 다를바 없는 부조리가 현재 재연됐기 때문입니다.


촛불 시위에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아마 같은 이유이겠지만 "다음 세대들이 부끄러움에 몸서리"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의도를 읽게됩니다.
한편으론 아이들이 자정작용하고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운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어른들은 용감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탄핵반대 동기중 일각이겠지만요...

이제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투표 잘 하자, 꼭 하잔 말 들으셨겠지만..
한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3.20일 행사 때 정태춘씨가 낭독한 자작시

<2004년 3월 혁명>


봄바람은 불고
더러 진눈개비는 날리고
황사와 짙은 스모그가 잠시 사라진 시가지로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두터운 구름들 사이 잠시잠시
꽃잎같은 봄 햇살을 맞으며
군중들이 모이고 있다
모여들고 있다


탄핵 무효, 민주 수호
부패정치 청산
군중들 가슴으로 분노의 강이 흐르고
혁명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이게 바로 지난 90년대가 준비한 혁명이다
80년대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지워버려야할 줄로만 알았던 저 90년대
환멸의 90년대가 자본과 수구의 회오리속에서
폭발 직전까지 웅크리고 엎드려
절망하고 절망하며 준비한
2004년 3월의 혁명이 아니던가




<메인스트림의 교체>
너희를 보낸다
이제 그만 물러가라고
개발과 성장, 권위주의와 특권의 시대가 청산되는 중이다
그걸 통해서 지난 수십년간 권력을 누려왔던 구 기득권자들이 퇴출되는 중이시다.
이걸 혁명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혁명이겠는가
타락한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로 간다
<국가사회>에서 <시민사회>로 간다
깃발은 더이상 너희들이 것이 아니고,
노래는 더이상 너희들의 것이 아니고,
국가는 더이상 너희들의 것이 아니다.
시민의 것이다


뜨겁고 냉철한 마음으로
우리는 간다
무엇으로 이 희망의 발걸음을 막을 것인가?
아직도 바람은 불고
그 겨울바람 끝자락이 시민들 목덜미를 차갑게 휘감는데
지난 겨울 초입
절망의 땅을 떠나는 마지막 버스를 놓쳤던 사람들이
이제 신새벽
첫차를 기다리는구나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희망의 언덕길로 가자고
모두 정류장으로 나가고 있구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고 있구나
무엇으로 이 발길을 붙잡을 건가
무엇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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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시즘..

한국경찰, 미국경찰, 러시아경찰, 중국경찰의 비교...

세계 각국의 경찰들이 모였다.....

그리고, 각국 경찰들에게 공통 과제가 하달되었다. 그것은 산으로
달아난 "토끼"를 잡아 오는 것이었다.

먼저 러시아 경찰.....
그들은 산속에 사는 곰, 사자,여우, 늑대 등 다른 동물들을 먹이로 매수하여 토끼의 행방을 쫒기 시작했다.
3일후.....그들은 마침내 토끼를 체포해서 산에서 내려 왔다.
"와우~~ 러시아 경찰....머리가 좋군......."

다음은 중국경찰(공안) 차례...
수사에 들어간 중국공안은 300명의 병력을 풀어 산을 이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2일후.....그들은 토끼를 체포했다.
"와우~~중국경찰의 인해전술.....대단해요~~~"

이번엔 미국경찰 이다......~~~
그들은 다른 경찰들과 달리 인공위성을 띄우고, 열추적장치, 냄새추적장치 등등 온갖 첨단전자장비를 동원하더니.....
24시간만에 간단히 토끼를 붙잡았다.
"우와~~~ 역시 미국의 첨단수사장비의 힘은 대단해요~~~"

끝으로 나선 우리의 포돌이 한국경찰!
그런데, 형사 한명만이 달랑 산속으로 들어가더니
2시간이 채 안되어 덩치 큰 곰 한마리를 수갑채워 데려왔다.
"이게 무슨 토끼요?.....이건 토끼가 아니라 곰이잖소?...."

바로 그 때!!!!!!!
울 나라 형사가 인상을 팍 쓰면시롱 팔꿈치로 곰의 옆구리를
툭!! 쳤다......그러자....

곰 : (으윽) 나는 토끼다... 나는 토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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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뇌 2

초딩때 봤던 "똘이 장군", 거기에는 공산당이 늑대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때 난 이 "묘사"가 아니라 진짜 그들이 늑대인줄 알았다. 그때 교육이 그랬고 분위기도 그랬다. ( 잊지말자 육이오! 때려잡자 공산당! ... )
지금도 신기한 것은 이 짐승에서 인간으로의 변신이 언제,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갔을까?


RED ... RED ... RED ...

히틀러는 독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유태인들이 두려워 유태인 학살을 실시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도 자신의 입지기반이 취약할때 폭력을 쓰곤 했다. 중세의 카톨릭은 자신들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마녀사냥을 만들었다.
당시 우리의 극우 기득권은 똑같은 이유로 국보법을 만들었고, 당연히 사람인 그들을 얼굴이 빨간 빨갱이, 혹은 늑대로 변신 시켰다.
이 두려움 + 반사적 이익 (국가안보 우선주의)에 의한 반공주의는 아직도 내 중추신경에 배양되어 몇 가지 사건에 대해 조건 반사를 일으킨다.

아직도 이 레드 콤플렉스는 남아있다. 이번 총선 때도 당당히 말하지 않는가? 반미, 친북 좌익 세력..
그들은 자신이 위험할때 무조건 반사적으로 철지난 이 이데올로기를 갖다댄다. - 이럴 때마다 조건 반사적으로 생각나는 사람 -> 똘이 장군 -
이 철딱서니없는 레드헌트...

이제 반미, 친북 좌익 세력을 사상검증해서 감옥에 가둬야할 만큼 시민의 의식이 무식하지도 않거니와 이미 끝난 냉전 이데올로기가 사는데 중요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 (관련해서 송두율교수가 빨리 나왔으면...)
나이 70세가 되신 분들이 사상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심신의 자유를 구속당하는 이 나라..
다시 과거를 생각해볼때 저 "철딱서니 없는 레드헌트"는 홀로코스트 수준이었다. 선술집에서도 국가와 정책 비판을 눈치보며 해야했고, 반대 세력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호러영화 수준이었다.


시뮬라크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이상과 본질의 영역인 이데아와 그 모방의 실체인 현상, 이 현상을 모방한 가상(시뮬라크르)의 3단계 의식전이를 말하고 있다.
아직도 알기 힘든 북괴(?)의 본질을 아직 난 모른다. (적어도 얼굴이 빨간 사람은 아니겠지..) 하지만 "친미, 반북 극우" 세력이 만들어논 외곡된 모방 그 모방을 또 한번 외곡한 시뮬라크르가 레드 콤플렉스의 본질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월드컵을 기점으로 붉은 악마로 인해 레드 콤플렉스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직 남아있는 내 중추신경 속에 빨간색이 남아있는 한...
과제는 이제 북한을 바로 알아야할 것이며 "친미, 반북 극우" 세력의 팬과 마이크를 빼앗는 일이 우선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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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저의 집은 우이동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 방은 반 지하실 방인데요.. 올해들면서 부터 지하세계로 쫓겨났습니다.

제가 방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주변에 산이 있다보니 환영치 않는 동숙자들과 같이 생활하게 됐는데요...
서울에 있는 집 답지 않게 유난히 제 방엔 곤충들이 많습니다. 돈벌레, 귀뚜라미, 거미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몇 종.... 이렇게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

사실 이들 보다 제가 방에 있는 시간이 적으니 어떻게 보면 이들이 주인이고 제가 손님인 격이 되는데요...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이유없이 곤충을 죽이는게 싫어서 여태껏 살생없이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큰 거미의 경우는 잡아서 추방시키지만...

근데 여름들어 다른 종족이 들어왔는데요...
모깁니다.. 사실은 윤회가 있다면 내생엔 모기로 태어나고 싶었습니다.
포식의 순간이 젤 위험에 노출된 순간인 이들의 스릴있는 생태가 권태로움에 실달렸던 제게 동경이었다면 억지일까요..??

암튼 요새 모기때문에 생태계의 균형을 깨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기전 분무식 살충제를 남발하고 집에 돌아와 죽어있는 곤충들을 보면 묘한 죄책감마저 듭니다.. (그렇다고 수십마리의 곤충과 동숙하는건 아닙니다... ^^)
한편으론 번식을 위해 남의 피를 빨아야 하는 모기의 생리가 불쌍하기까지 하구요...

더러 살다보면 아니 살기위해 악역을 맡아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는 미필적 고의로 가해자가 될 경우도 있구요... 또 묵시적인 악한이 될 때도 있습니다....

모기를 죽이며.. 좀 더 세련된 악한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정치가를 욕하는 이유는 좀 더 완벽한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라는 까뮈가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아니면 악한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악해져야 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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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한 모기 박멸법 없을까요 - 이외수

오늘 춘천은 올들어 가장 기온이 높은 날씨였다.
벌써부터 모기가 방안에 침투해서 손등이며 등판에 빨대를 꽂기 시작한다.
살충제를 뿌리거나 모기향을 피우자니 목감기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마냥 앉아서 피를 빨리고 있자니 갈수록 짜증이 고조된다. 모기들은 왜 다른 동물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종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진화 시켰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나는 다른 곤충들을 죽이게 되면 죄책감을 느끼지만 모기를 죽일 때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설마 인간들에게 남의 피를 빨면서 사는 놈들은 맞아 죽어도 싸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그런 식으로 자신들을 진화시키지는 않았겠지. 모기가 눈에 띄는 대로 세차게 손뼉을 마주쳐 보지만 한놈도 걸려들지 않는다. 한쪽 눈이 기능을 상실하고부터 헛손질을 일삼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만 수타식 모기사냥을 포기해 버린다. 그래, 빨아 먹고 싶은 대로 빨아 먹어라. 니들도 배 부르면 자빠져 자겠지. 짜증을 가라앉히고 비디오 삼매경에나 빠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긁적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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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바람에..

예비군 훈련 기간입니다. 날씨의 변화에 상당히 민감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꽤 날씨란 녀석에게 노출되지 않고 살았네요...

오늘 낮, 도로변에 앉아있었습니다. 자동차의 엔진소리 같은게 들려 고개를 돌렸는데 차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소리의 주인은 지난 겨울 집요하게 나뭇가지에 매달리다 이제 봄의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이었습니다..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있구나...'
'근데 그 겨우내 잘 게기다가 왜 이제 떨어지지..??'

낙엽이 떨어졌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봄에 다시 자라날 다음 세대의 나뭇잎 때문이겠죠...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뭇잎 조차 자신이 있을 때와 떠날 때를 아는데 ... 사람이란...'

고호라던가 커트 코베인, 짐 모리슨이 동경하던 '자유'라는 것에 다시 생각해봅니다.
궁극의 '자유'란 '자연'스러운게 아닐까..?? 하는 생각..
거대한 섭리에 거스리지 않는 것이란 생각...
'왜 인간만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전락해 버렸을까..??'

"잡배에게 칼을 주면 난장질을 하고 무사에게 칼을 주면 칼집에 넣는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 '시점'을 알기 위해 얼마나 더 공부를 해야할까..?? - 비록 공부를 안하고 있지만... ^^




봄의 바람에 ( 아물지 않은 뼈들의 배치 )
- 이외수 -

강으로 가는 물 강으로 가는 모래
정액냄새 화사한 밤꽃 그늘에서
문득 이름을 잊어버린 애인 하나야
나는 허물어져 강으로 간다

미친 바람이 불고 등불이 죽고
헤어진 사람들은 헤어진 땅에서
문풍지를 바르던 겨울이여

죽은 비듬을 털어내는 회양목 둑길에 서면
둑길에는 겨우내 바람뿐이지
아무도 오지 않고
회양목은 회양목끼리 귀를 열어
불려 가는 내 음성을 들었으리

꽃다지 피어 흔들리는 밭머리에 서면
낯 익은 것은 겨우내 모두 죽고
못 잊을 것도 겨우내 모두 죽고
아아 혼자 남아서 허공을 떠다니다가
붙잡은 것 없는 빈손으로 떠다니다가
애인 하나야
끝끝내 나는 허물어져 강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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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는 헤비메틀을 싫어하는가?

비교적 보수 기독 교단에 있었던 나는 폐쇄적인 기독 문화에 불만이 많았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일요일날 가스펠송(복음송가)부르는 것 조차 터부시하던 분위기였다.
더더욱 Rock음악에 빠졌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기독교는 Rock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일까?

그때 나는 너무나 이것이 불만이어서 여러 반뉴에이지 서적과 사탄 음악에 대한 서적들을 공부했었다.
대게 그때 이런 류의 서적들이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논리적 근거란 찾아보기 힘들고 무조건 나쁘다란 내용들이었다.
오로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류의 내용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랩이라던가 헤비메틀을 가스펠송으로 만드는 것은 악이 아니라 주류에 있던 어른들이 생경해하거나 듣기 편하지 않던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 충돌론을 개입시키지 않고도 주류가 익숙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음악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음악의 장르에 따라 종교 음악이 터부시 된다는 것은 담배갑에 쓰여진 금연 광고 만큼 넌센스다.
정가로 선정된 찬송가만 보더라도 동유럽 민요나 가곡, 애국가를 딴 것이 많다.
만약 춘향가에 기독교적 내용을 담은 찬송가를 만든다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기독교 관련한 종교음악은 그 종교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히브리 기독교들, 더 나아가 유대교들은 히브리안 음악에 따라 종교음악을 만들었다. - 참고로 이 음악은 대부분 3도를 벗어나지 못 한다고 한다.
(사실 역사를 따지자면 기독교 음악은 히브리안 음악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문화적 자긍심이 강한데 이유는 중세로 부터 시작한 유럽 역사의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럽풍의 고전 클래식 음악들을 선호하고 이 '자긍심'때문에 기독교 보다 종교 음악에 대한 보수성이 강하다고 한다.

한편 기독교는 어떤가? 약간의 맹목을 배제하더라도 어른들, 소위 주류의 집단에 의해서 모든 것이 평가되어진다. 음악의 장르나 형식은 상대적인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기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관심있는건 형식이 아니라 태도나 마음, 의도라는거다.
지금의 어른들이 20년 후에는 랩이나 헤비메틀 가스펠송을 수용할 것이다. 상대적인 자대로 정죄의 자대를 삼을 수 없다. 이런 것을 간과한 이상 기독교는 문명충돌 시대를 수용할 수 없는 보수 수구 세력으로 자리메김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위험할 수 있다. 지금 부쉬와 같은 기독 원리 집단이 한국의 주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양상은 이미 몇 차례 나타났었다. 화이트 엔젤 사건이나 단군상 훼손 사건과 같은...



종교의 교의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종교는 영원한 가치나 불변의 의미를 전제로 하니까...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사적 성향이 개입된 종교라면 종교 자체를 위해서도 위험할 수 있다.


언젠가 미래에 랩이나 헤비메틀이 자연스런 가스펠 문화가 정착된다면 역으로 그들이 정죄의 대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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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부터의 도피

자유로 부터의 도피


도피할 수 있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의심해보게 된다.
모두가 자유를 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 아니 이기적인 자유를 원한다. 이것은 '자유'란 얼마나 많은 책임들을 감내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자유에 따른 소위 책임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성을 갖고있는 들개는 맑은 배고픔과 지독한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 만약 이런 들개가 안전한 울타리와 제때 나오는 따뜻한 밥을 동경한다면 이미 들개로서 자격을 잃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유로 부터 도피하길 원한다.

하지만 기득권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부리기 좋고 불평을 최소화한 마지노선의 그것만을 개인에게 할당하여 자유로의 도피를 유도한다. (마치 노예에게 마약을 허용하여 삶의 의미를 갉아먹게 했던 것 처럼)
이 시스템은 제법 정교하다 할만하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 정도면 많이 풍요로와 졌자나..' 내심 긍정하고 있으니까...
이런 안전장치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적당한 야성을 갖은 집개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 계약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파기한다면 괴씸죄와 더불어 엄청난 패널티를 물게 된다.
서울역과 시청을 지나며 볼 수 있는 수 많은 홈리스족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내심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 서울의 중심이라 할 만한 곳에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실패한 인생'들은 제법 효과적인 협밥의 한 장치가 된다.

이런 정교한 시스템에 더해서 '자유'를 획득하려는 사람은 '초인'적인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원래 텍스트인 '자유로 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환경이 날 자유롭게 해주는 것, 다시 말하자면 '~로의 자유:free from'은 나의 노력이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자유권 양도'에 지나지 않는다. 들개는 우리에 갖혀도 들개다.
(여담이지만 유독 미국에 히피가 그렇게도 자유로왔던 이유는 아마도 복지체계를 갖출 정도의 미국이 되어졌기 때문 아닐까...?)
이에 대해 프롬은 '자유'에 대해 다시 정의하고 있다. (사실은 둘로 나누고 있지만..)
적어도 '자유'라고 한다면 '~를 향한 자유:free to'여야 한다. 이 '자유'란 것은 보다 많은 적극성을 요구한다. 진짜 '자유'하기 위해선 고독과 싸워야 하며 사회가 제시하는 나의 가치를 쌩까고 나의 가치를 수립할 수 있어야 하며, 존재의 의미를 자신이 찾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본다. 길들여진 자유는 '자유'가 아니기 때문에...

한편, 프롬이 지적한 마조히즘과 사디즘과 더불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더욱 비참한 상황을 연출한다. 엄석대가 만든 시스템은 애초에 자유 자체를 거세하고 있다. 이전에 '자유'에 첨가했던 욕구/실존의 문제가 폭력(더 나아가서 생존 - 마치 우리나라의 홈리스족이나 일부 신용불량자가 그렇듯이 )으로 인해 논외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모티브가 유신정권이었는데 반해 현재 상황을 보자면 형태만 달랐지 (신 자유주의란 조미료로 무장했지) 그 농도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야비하고 정교한 시스템 마저도 부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한편으론 '자유'라는 것이 이렇게 치열하지만도 않은 것 같다. 강산에란 록커를 통해 느낀건데..
자유란 '자연스러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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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지 유감

또 서태지가 왔다..
사실 서태지가 과거 음반무림을 점령했을 때에도 그의 몇 곡을 제외하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보여준 '아이들'에게 더 주목했다.

제작년 들어 가끔 서태지 생각이 났었다. 민초들로 부터의 뜨거운 민주화 운동들과 촛불 시위, 반전/반미 시위들 속에 서태지가 일종의 전도사로 등장하길 기대했었다.
몇 년동안 음반을 통해 청소년 문제, 평화, 통일 같은 메시지로 장사해먹었던 그 아닌가?
내심 그의 전략이 값싼 상술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도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냉정하게 예술도 상품인 시대에 대중예술의 컨텐츠가 상술이라고 실망 한다면 내가 너무 착한 척 하는건가?

지난 앨범 발표 후 메체와의 관록 붙은 그의 인터뷰들을 보고 그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들을 아주 교묘하게 무력화 했던 모습들...
서태지는 확실히 방송과 사람들을 잘 요리하는 재주 하난 비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난의 근거들을 더 들고 싶지만 남 비난하는 못된 취미 나올까봐 여기까지 하겠다.. ^^;


하지만... 확실한건 곡과 가사 하난 잘 쓴다.
가끔 서태지를 통해 서정주 선생이 오버랩 되곤 한다.
물론 서태지는 서정주 선생 처럼 모독을 받아 마땅할 만한 행동을 한건 아니지만... 다 차치하고 시 하나는 예술이었던 서정주 선생 처럼 못 마땅한 점이 많지만 태지도 음악 하난 잘 만든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 한 해서)

끝으로 불평 하나 더 하자면... 그를 천재라고 호칭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이외수 선생은 천재를 다음 처럼 정의했다.
[수재를 능가하는 인재다. 뛰어난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사랑하고 예술을 창조한다. 그러나 천재는 요절한다. 천재는 사회를 수용할 수 있으나 사회가 천재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천재의 죽음은 자살보다 타살에 가깝다.]
천재란 시대와 사회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진짜 천재는 장승업이나 이상 처럼 자신의 삶을 난도질 한 채 예술로 도락하는 사람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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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과 Hip Hop은 다르지 않다

Rock은 백인의 음악이다. 물론 Rock의 역사를 더듬으면 블루스 및 기타 흑인 리듬음악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Rock은 백인 음악이다.
반면 Hip Hop은 흑인의 음악이다. 우리나라 천민에게 교육을 금지한 것 처럼 흑인 노예에게 교육을 금지 시켰기 때문에
교육을 목적으로 만든 음악이라는 설이 있지만 우리나라 가락 처럼 흑인 노예의 울분과 한을 담은 음악이라는게 공론이다.

아무튼 이렇게 뿌리가 다른 두 장르의 교집합을 찾으려는 이유는 나의 음악 편력 때문이다.
우리 또래가 그렇듯 지난 10년 동안 주로 Rock을 들었다. 하지만 Radio Head 이후 매력적인 팀을 찾지 못 하고 음악에도
관심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지지부진한 생활을 할 때 알게된 음악이 HipHop이다.

사실 HipHop은 댄스 음악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힙합팀이 듀스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진짜 MC(랩퍼라고 생각하면 될겁니다.)들은 춤을 잘 못 춘다. 손짓 정도가 고작이니까...

Rock의 정신은 자유와 저항이다. Rock씬이 가장 강렬할 때가 베트남 반미 시위 때였으니까 그때 영향이 크리라 생각한다.
자유를 얻기 위해선 저항해야 한다. "저항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자유의 나라에 들어가는 권세를 주셨으니.. " ^^
요즘은 좀 변질됐지만 Rock의 성숙기라 할 수 있는 8~90년대의 정신적 지주적인 로커들은 끊임없이, 집요하게 자유와 저항을 탐했다.
짐 모리슨이 그랬고, 커트 코베인이 그랬고, 지미 핸드릭스가 그랬고 빅토르 최가 그랬고 ...

HipHop은 이 문제를 다르게 풀어간다. 규정하자면 HipHop의 정신도 자유이다. 하지만 HipHop은 이런 개념을 '사는 방법'
으로 구현하려 한다. HipHop을 단지 음악의 장르가 아니라 문화로 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Rock이 저항으로 자유를 풀어간다면 HipHop은 삶으로 자유를 풀어간다.
여기서 이 둘 간의, 백인과 흑인간의 다른 접근법을 볼 수 있다. 백인은 어떻게서든 획득하려는 'Do'의 성향을 갖은 반면에
흑인은 저절로 이뤄가는 'Be'의 성향을 갖는다. 아마도 발언권이 있는 자와 - 백인 - 없는 자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Rock의 논조는 직설인 반면 HipHop의 논조는 역설이다.

그래서 요새 HipHop을 들으면서 Rock을 들었을 때와 같은 투지가 생긴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하지만 자유가 뭔지 모른다. 그래서 제도나 문화, 관습이 내놓은 (정답아닌)모범답안에 따라 살려고 한다.
그래서 불평한다. 이게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의 정의를 찾는 것, 그것을 HIP HOP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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